연성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2


기차 안은 또 다른 세계 같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간과 공간이 흐트러진 세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거리. 지구 둘레의 4분의 1. 일곱 번 바뀌는 시차, 그리고 일곱 시간의 시차. 모스크바로 향하는 우리는 과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2024년 12월 31일. 새해를 기차 안에서 맞이하는 사람들. 고독하지만 고독하지 않은 소란.

​​잠든 쇼타로를 놔두고 성찬은 밖으로 나갔다. 그가 깨지 않게, 이번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문을 열고, 닫는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굴었다. 첫 기차 탐방. 좁은 복도와 함께 곧 식당 칸이 나온다.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시간이 아무 소용없는 이 기차 속에서 여유롭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성찬도 의자에 앉아서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오늘은 눈이 오지 않는다. 쌓인 눈과 뜨거운 태양.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곧 나오는 맥주를 쭉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탄산, 모든 시간이 보상 같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자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식 이벤트보다는 그냥 여행객끼리 하는 것 같았다. 열 시 소등인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차장도 오늘 같은 날은 이해해 주려나. 간간이 들리는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러시아어. 성찬은 미간을 좁혀 최대한 아는 단어를 듣기 위해 애를 썼다.

"한국인이세요?"

"아, 네."

남자는 성찬과 마주 보고 앉는다. 저는 미국에서 왔어요. 이찬영이라고 해요. 수줍게 웃는 찬영의 모습에 성찬은 따라 웃었다. 덩치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하긴, 덩치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텐데. 영어 이름은 앤톤이라고 해요. 목소리가 조곤조곤, 속삭이는 것 같다. 영어 이름은 앤톤, 한국 이름은 이찬영. 성찬은 따라서 속삭인다. 저는 정성찬이라고 해요.

이찬영은 정성찬보다 세 살 어렸다. 스물여섯,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싶어서 세계를 여행 중이란다. 성찬은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수줍게 하는 찬영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끝내곤, 별거 없죠.... 말을 흐리는 찬영의 말투가 황당했다.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걸 실천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다음 잔은 제가 살게요. 성찬의 말에 찬영은 머쓱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한다. 상대가 먼저 패를 까면 자신의 패도 까야 공평했다. 정성찬은 자신의 이야기를 순순히 쏟아낸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이십 대 그리고 찾아오는 번아웃, 공허함. 사실 도망 같은 거죠. 그래, 이게 별거 없는 거지. 성찬은 하하 웃었다.

"여기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한대요."

"아, 저도 들었어요."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찬영의 말에 성찬은 으응,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마지막 날, 새해, 카운트다운. 성찬은 새해 카운트다운 방송을 본 후, 다음 날 타임스퀘어에서 하는 카운트다운 방송 생중계까지 챙겨보곤 했다. 언젠간 타임스퀘어에서 새해도 즐겨봐야지, 막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종종 나오는 미드 시트콤에서도 유구히 나오는 장면 아니겠는가. 궁금한 거 있어. 성찬이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이자 찬영은 응? 맥주를 가볍게 한 잔 비우곤 귀를 기울인다. 시트콤에선 새해를 맞이할 때 키스를 하던데, 무슨 뜻이이야?

푸핫, 그게 무슨 뜻이냐면... 찬영의 입술이 열린다.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2

덜컥, 문이 열리자, 그 소리에 쇼타로는 겨우 눈을 떴다. 미안해요, 깼어요? 그리고 들리는 익숙하지만 아직은 낯선 목소리. 쇼타로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성찬은 테이블을 접곤, 곧장 쇼타로의 손을 덥석 잡는다. 좀 더 잘래요? 차가운 손. 온기가 뺏기는 느낌에 쇼타로는 차가워, 투정을 부리다가도 잡힌 손을 빼진 않는다. 아니, 차갑다는 투정에 성찬이 손을 빼려고 하자, 오히려 깍지를 꼈다고 서술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성찬은 조금 더 쇼타로에게 다정하게 굴고 싶어졌다.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지만 우선적으로 그는 다정한 인간이었으니까. 손을 잡아주고, 악몽을 꾸지 않았냐며 걱정도 해주는 흔하지 않은 인간. 악몽 안 꿨어요? 성찬은 자신이 들었던 질문을 그에게 똑같이 던졌고, 쇼타로는 작게 하품을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성찬은 쇼타로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부스스한 금발이 꽤 웃겼지만 멋에 신경 쓰는 타입인 것 같아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타로, 오늘 카운트다운 한다고 하던데."

"새해?"

"응, 같이 갈래요?"

식당 칸에서 한대요.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창문을 힐끔 바라본다. 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 눈이 한번 올 땐 질리도록 오더니.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은 언제나 이상했다. 나이를 먹는다의 문제가 아닌, 새로운 시작이니까. 올 해의 일어났던 무수한 일들을 이 지점에 묻고, 또 훌쩍, 앞만 보고 달려야하니까. 싱숭생숭한 마음을 겨우 감추고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성찬은 새로 만난 이찬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꽤 신나 보였다. 아, 그리고 일본인도 좀 있었어요. 종알종알, 산책 다녀온 대형견 말투. 무사히 다녀왔으니 칭찬해 달라는 말투 같기도 해서 쇼타로는 마주 잡은 손 대신, 다른 손으로 성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아, 타로. 내가 애도 아니고.... 꽤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꽤 웃기다. 굳이 따지면 애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밤엔 무섭다고 하고, 지금은 신나서 이야기를 쭉 나열하고 있고. 쇼타로는 고개를 잠시 기울인다.

"애 아니면 강아지."

애 아니면 강아지? 참 나, 성찬은 기가 막혔다. 자신보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애는 무슨. 심지어 방금 잠에서 깬 터라 조금 부어 있기까지 한 쇼타로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는 어려 보였다. 동글동글, 말랑말랑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외형. 애는 무슨, 나보다 어리면서. 나이를 확정 지은 듯한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두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인다.

"성찬, 몇 살?"

"저 스물아홉이요."

"나 앞자리 3인데."

아, 말도 안 돼! 성찬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손을 잡고 있던 쇼타로까지 몸이 딸려 올라간다. 잠시만, 으앗, 성찬. 성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쇼타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코도 동글동글하고, 웃을 때 광대가 뿅, 예쁘게 올라가는 것도 완전 앳된 모습인데. 믿기 힘든 얼굴로 성찬이 뭐라고요? 다시 한번 묻는다. 무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평생 믿지 않을 것 같은 표정에, 쇼타로는 캐리어에서 붉은색 여권을 꺼내 생년월일을 확인시켜 줬다.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제일 확실했으니까.

아니, 이게 어떻게 서른의 얼굴인지. 타로, 아니 타로 형. 순식간에 호칭이 바뀌자 쇼타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우리가 과거를 향해 달리는 기차에 있다고 해도, 벤자민 버튼도 아니고, 쇼타로는 너무 앳된 얼굴이었다. 성찬은 잡은 손을 놓고 쇼타로의 뺨을 감싸 쥔다. 잠에서 깬 직후라 뺨이 따끈하다. 타로 형 같은 삼십 대는 처음 봐요. 꽤 직설적인 고백에 쇼타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칭찬일까? 욕일까? 세팅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곧 쇼타로의 눈을 가리자, 성찬은 쇼타로의 앞머리를 정돈해 준다. 형이라고 부를게요, 말 편하게 하세요. 붙잡힌 뺨에서 곧 온기가 멀어진다. 하여튼 정말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성찬은 분명 떠나고 싶다고 했다. 떠난다는 말은 불행을 가진 자만 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성찬은 방랑보다는 정착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이 기차 안에서 정성찬은 꽤 행복해 보였다. 일면식 없는 타인과의 만남, 소소한 대화, 이 모든 것을 낭만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쇼타로는 묻고 싶었다. 왜 떠나고 싶었냐고. 단순한 만남 하나에 행복을 느끼는 네가, 왜 도망을 생각하게 된 거냐고. 하지만 묻지 않는 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자신도 대답을 해야 하는 조건이 따라붙기 때문이었다.

"성찬은 웃는 모습이 참 예쁘구나."

그래서 겨우 돌려 말했다. 그 말에 성찬은 얼굴이 붉어지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간다. 예쁘다는 말은 제가 아니라....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응? 쇼타로가 몸을 기울이자 성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미묘한 표정을 짓던 성찬은 헛기침을 크게 하곤 급하게 읽고 있던 책을 편다. 귀가 약간 붉어진 것 같았다. 혼자 있고 싶은 걸까, 싶어서 쇼타로는 몸을 일으킨다. 나 산책 좀 다녀올게.

곧 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따라갈까, 말까. 성찬은 아주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로 왜 고민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정말 따라 나가면 쇼타로의 눈에 애나 강아지로 보일 것 같아서 한 번은 참기로 한다. 사람 하나 나갔다고 침묵이 무겁게 짓누른다. 쇼타로가 지나간 자리엔 묵직하고도 포근한 향이 났다. 성찬은 남몰래 그 향을 맡는다. 좋은 향. 금발의 다정한 이방인에게서 나는 향.

쇼타로는 한 시간 정도 뒤에 들어왔다. 묵직함이 느껴지는 포근한 향에서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다. 여기서 담배 피워도 돼요? 순수한 질문에 쇼타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차장한테 잘 보이면 눈감아 주거든.

어떻게 하면 잘 보이는 걸까. 외국어에 능숙하니 친화력이 좋은 걸까? 무수한 질문이 쌓인다. 분명 저 웃음 하나면 무시무시한 차장도 눈감아 줄 것 같기도 했다. 쇼타로가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린다.

"키스 한 번 해 주면 돼요."

"...네?"

순간 성찬의 사고회로가 멈춘다. 쇼타로는 그 얼빠진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을 못 알아듣는 모습이 웃겨서. 농담, 진짜 농담. 몰래 피웠어요. 쇼타로의 해명에 성찬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보통 남자가 남자한테 키스한다고 하면 믿나? 성찬이 유독 순진한 걸 수도, 아님 자신이 헤프게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내가 막 키스할 것 같고 그래요? 날카롭게 꽂히는 질문에 성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헤프게 보이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키스하는 쇼타로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상상된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면서 쇼타로는 눈을 뜨고,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제 앞의 사람을 두고 그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성찬은 멋쩍게 웃는다. 아뇨, 그렇게 안 보여요. 그냥... 놀랐어요.

남자와 남자가 키스를 한다. 정성찬 인생, 이십구 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상상이었다. 심지어 나랑 하는 키스가 아닌, 타인과 타인의 키스라니. 그것도 그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금발의 남자일 때. 변태적인 상상을 아무렇게 하지 않는 자신에게 다시 한번 더 경악을 하며 성찬은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장을 넘긴다.

< 햇빛이 그 커튼을 뚫고 들어와 그녀의 고운 금발과 깨끗한 목덜미, 둥그스름한 어깨와 부드럽고 안온한 가슴에 잔잔한 광선을 비추어 주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녀는 내게 더없이 소중하고 더없이 친근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

왜 하필 오늘 눈이 오지 않는 걸까. 왜 하필 오늘 해가 뜬 걸까. 왜 하필 오오사키 쇼타로라는 이방인은 금발인 걸까. 하필, 하필, 하필....

성찬은 다시 한번 쇼타로의 손을 잡고 싶었다. 분명 손을 잡고 싶다고 하면 쇼타로는 기꺼이 손을 내어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도, 다정함도 아닌 감정이 솟아나서 입을 뗄 수 없었다. 불순함. 원인 모를 불순함이 혹여나 흘러나올까 봐. 이상한 상상을 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성찬은 혀로 입술을 핥을 뿐이다.


성찬이 책을 읽는 동안 쇼타로는 필름 카메라로 풍경을 찍곤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혹시 성찬 찍어도 돼요? 물어오자 성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쇼타로의 말엔 어떠한 힘이 깃들어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힘. 어떠한 말을 해도 긍정을 표현하고 싶은 힘. 고마워요. 그의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간다. 쇼타로의 캐리어엔 폴라로이드 카메라 하나와 필름 카메라 세 개가 있었다. 성찬, 치즈. 그리고 찰칵 셔터 소리. 쇼타로는 인화지에 '2024.12.31.ロシア(러시아)' 라고 적곤 성찬에게 건네며 속삭인다.

プレゼント。(선물.)

확실히 일본어를 하니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는구나. 성찬은 폴라로이드 인화지를 한참 바라봤다. 책을 읽고 있는, 열차 안에서의 스물아홉의 자신. 저도 한번 찍어봐도 돼요?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은 그렇게 쇼타로를 찍었다. 그러더니 쇼타로에게 자신이 찍힌 사진을 건네주고는 '2024.12.31. 러시아' 똑같이 쓰인, 쇼타로가 찍힌 사진은 자신의 지갑 안에 넣는다. 쇼타로의 당황한 표정을 뒤로하고 꽤 뻔뻔하게 대꾸하며. 서로의 사진을 가져야 선물이고 추억이죠.

"사실 추억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왜요?"

"...그냥."

그냥은 무슨. 필히 그냥은 아닐 것이다. 성찬은 조금 더 집요하게 굴고 싶었다.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쇼타로는 황급히 성찬이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주머니에 넣곤 고개를 창가로 돌린다. 

허허벌판에 집이 한 채 덩그러니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갈까. 쇼타로는 생각에 빠진다. 어쩌면 저렇게 홀로 살아가는 게 옳은 일인 사람도 있겠지.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할까? 허허벌판에 살지 않아도 인간은 고독함을 느끼는 존재였으니 그 가치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착을 하게 된다면... 저런 곳에서 정착하고 싶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사라지고 있는 시간 동안 만난 흑발의 낯선 이방인. 겁이 많고, 이상하게 다정한 이방인.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방인. 쇼타로는 성찬의 이름을 외우고 싶지 않았다. 이름도 결국엔 모두 추억의 일부이니.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새카만 눈동자는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떠나고 싶어 하는 스물아홉의 정성찬. 하루 뒤엔 서른이 되는 정성찬.

오후 열 시, 기차가 소등된다. 그러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조용하지 않았다. 식당 칸엔 불빛이 들어왔고, 사람들의 들뜬 숨소리로 가득했다. 열한 시 반, 성찬과 쇼타로는 식당 칸에 들어와서 그 열기를 같이 만끽했다. 여러 가지 언어가 귀에 꽂힌다. 나 담배 피우고 올게요. 쇼타로가 자리를 비우려고 하자, 성찬은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는다. 지금 사람 많아서 걸릴 수도 있어요, 벌금 1,500루블(*한화 19,560원)이래. 어디서 또 들었는지 벌금까지 말하는 성찬의 모습에 쇼타로는 헛웃음이 나온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1,500루블 내고 담배를 피우러 갔겠지만, 쇼타로는 날이 날인만큼 그냥 수긍하기로 한다. 다음 정차역에 내려서 피우면 되는 거니까.

"안녕하세요."

"아, 타로 형. 아까 말한 이찬영 씨라고...."

오오사키 쇼타로라고 해요. 아,타로라고 부르세요! 한결같이 다정한 목소리. 성찬은 여기서 아주 미세하게, 뒤틀린 감정을 느꼈다. 이 기차 안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를 타로라고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코끝이 붉은 찬영은 보드카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방금 샀는데, 셋이서 마실래요?

호기롭게 보드카 한 병을 산 것치곤, 찬영은 한 잔을 원샷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쿵, 드러누웠다. 술도 약한데 보드카를 마시다니. 카운트다운은 하고 자야지.... 성찬은 찬영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찬영은 몸을 웅크리며 졸리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쇼타로는 보드카를 한 잔을 가볍게 비우곤, 찬영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타로 형, 뭐 해요. 성찬의 당황한 숨소리에도 쇼타로는 찬영의 코트 주머니를 뒤지더니, 열차 티켓을 꺼낸다. 일단 자리에 눕혀야 할 거 같아서. 007 열차, 일등석, 9호차, 10번. 찬영의 좌석 번호였다.

찬영을 눕히고 나서야 성찬은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성찬도 좀 취한 것 같은데, 방으로 갈까? 쇼타로의 권유에 성찬은 고개를 끄덕인다. 8호차로 향하는 복도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식당 칸에선 어렴풋이 해피 뉴 이어, 라는 소리와 박수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고 있었다. 아, 카운트다운 못 했다. 성찬은 시계를 확인한다. 2025년 1월 1일. 새해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찬과 달리 쇼타로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래도 이 침묵을 먼저 깨는 건, 의외로 쇼타로 쪽이었다.

"해피 뉴 이어, 성찬."

쇼타로의 입에서 새해 인사가 나오자 취기가 확 오르는 느낌이 든다. 분명 얼굴도 볼썽사납게 취해서 활활 타고 있겠지. 조금 더 멀쩡한 얼굴로 새해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하여튼 술이 문제다. 원망은 아주 잠시 보드카병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던 찬영에게 쏠린다. 손 잡을래요. 새해 인사에 대한 대답이 초라하다. 그러나 쇼타로는 이번에도 별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두 손. 이 상황에서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묻는 게 옳은 일인가? 성찬은 취한 머리를 계속 굴렸다.

삼십 대의 시작을 나랑 보내서 어떡해, 재미없겠다. 쇼타로의 말을 끝으로 성찬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걸 용케 깨닫는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당신과 같이 보내는 이 시간이 좋은데.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쏟아내고 싶지만, 이상한 술 주정이 될 것 같아서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왜 사라지고 싶은 거야? 이렇게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고 싶은 모든 말은, 취기에 모두 녹아버린다. 성찬은 쏟아내고 싶은 말을 겨우 한 문장을 축약한다. ​미친 짓 하나만 해도 돼요? 

목소리가 참 볼품 없었다. 쇼타로는 고개를 기울였고, 성찬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쇼타로의 입술에선 독한 알코올 맛이 났다. 자신의 입술에서도 같은 맛이 날 것이다. 가볍게 닿은 입술이 떨어지고, 성찬은 속삭였다.

"해피 뉴 이어, 타로."

시트콤에선 새해를 맞이할 때 키스를 하던데, 무슨 뜻이야? 식당칸에서 성찬은 찬영에게 물었다. 그는 웃으며 두 가지 대답을 했으나, 애석하게도 첫 번째 대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중요하지 않은 포인트라서 한 귀로 흘린 게 분명하다. 아님, 두 번째 답에 정신이 팔려서 잊어버린 걸 수도 있었고.  ......and kiss the person you hope to keep kissing.

그러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왜 금발의 이방인과 계속 키스를 하고 싶은 걸까. 단지 술에 취해서? 보드카의 도수가 높아서? 아님 이 분위기에 홀린 걸까? 오늘따라 금발이 너무 눈 부셔서? 그 웃음이 좋아서? ​당장 여기서 무슨 짓이냐고 뺨을 맞아도 성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추운 허허벌판에 쫓겨난다고 해도. 그러나 쇼타로의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온다. 아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덜 울고......."

"......응?"

"덜 울고, 자주 웃어."

그런 한 해를 보내. 취기에 한 파렴치한 행동에 주먹질을 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행복이 아닌, 현실적인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 성찬은 이유를 찾지 못해도, 한 번 더 쇼타로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쇼타로는 곧 끙, 앓는 소리를 낸다. 성찬은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간다. 쇼타로는 피하지 않는다. 입술이 한 번 더 닿아도, 피하지 않을까?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타로 형."

"응."

"잊지 못할 추억을 쌓는...."

"...."

"가장 소중한, 그런 한 해를 보내요."

< 나는 꽤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았고, 그녀를 알기 이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에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

성찬은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을 가져온 것을 후회했다. 모든 문장이 오오사키 쇼타로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쇼타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웃음을 참는 것 같으면서도, 울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 그래, 추억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찬은 불순한 마음을 가진다. 잊지 못할 추억이란, 이 기차에서의 일주일이면 좋겠다고. 자신과 손을 마주 잡고, 입을 맞추는 이 순간도 그 추억 속에 있으면 좋겠다고.

소설의 주인공은 16페이지 만에 사랑에 빠지지만, 정성찬은 겨우 이틀 만에 알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알 수 없는 감정, 사랑일 수도 있었다. 아니,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입술에 맺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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