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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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본과 다시 만나면, 그의 무사를 확인한 뒤로는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는 양지의 인물이었고, 나는 그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이었다. 그가 온전히 그 세계로 되돌아가는데 있어서, 오점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무엇이었다. 나는 그림자 속으로 침전하는 게 알맞았다. 수년 전, 아카이 슈이치의 도움으로 내 죽음은 유예되었고, 나는 그래서 살아있을 뿐이었다.
버본이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진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는 그녀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그녀가 진이 제게 붙인 감시자임을 알았다. 감시자를 붙일 법도 했다. 조직은 실력주의였지만, 그는 빨라도 너무 빨리 코드 네임을 부여받았으므로 수상쩍게 여길 법도 했다. 외려, 모든 간부가, 특히 진이 그를 단번에 신뢰했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
아카이 슈이치에게는 빚을 졌다. 그건 빚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라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기도 했다. 조직의 일원은, 결코 내릴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라이가 아니라, 아카이 슈이치에게 빌어, 살아남았다. 증인이 될 생각이 없다고, 협조할 생각 따위는 없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내게 FBI의 증인보호프로그램을 권했다. 만약 그의 권유에 응했다면, 나는 양
흰 천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페놀 냄새가 났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버본이 총을 쐈고, 옆구리에 직격했다. 스치는 수준이 아니라, 정확히 박혔다. 지혈제 하나를 고스란히 주사했고. 아주, 아주 조금 더 살고 싶다고 여겼다. 이곳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만, 더 버본이 내게 남긴 그 달콤한 인간의 향기를 맡보
아카이 슈이치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스카치에게 말했던 것처럼, 당당히 빼내주겠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아주 작은 사각쯤은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정확히는,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주겠다고.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빠져나갈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재량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하거나, 신뢰를 사려는 시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뇌간에 정확히 총구
어둑한 밤이었다. 그마저도, 컨테이너 사이는 한참은 더 어두워서, 밤눈이 밝지 못한 사람은 마치 눈이 멀어버렸다고 착각해버린들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본은 밤눈이 어두운 인간은 아니었다. 특별히 눈이 좋다든지, 아니면 시야가 넓다든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쁘다고 할 것도 아니었다. 아니, ‘보통’의 사람들에 비하면 그 역시도 충
RYE. 라이 위스키. 라이. 모로보시 다이의 코드네임이었다. 그의 본명은 아카이 슈이치. 그의 입에서 직접 전해들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가 그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남자와 같이 조직에서 몸을 빼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뒤, 간부 사이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를 추적하기 위해서, 말살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아카이 슈이치이며, FBI의 잠입 조사관이었음
왜 이 바닥에 들어오게 되었느냐, 하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단히 특별하고, 유의미한 계기가 존재해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구태여 무언가 이유를 만들자면, 그저 태어나기를 이곳에 있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정도는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음지의 세계에 있었다는 소리다. 이곳에 몸담고 있는 이들 중에, 극히 소수, 그러
에코다 고등학교는 에코다 역 근처에 있는 평범한 공립학교였다. 사립학교의 위세에 눌려 공립학교에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좀 질이 낮다 싶은 곳에는 생양아치 녀석들이 모이기 마련이었지만 에코다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집단강간이니 패싸움이니 하는 흉흉한 이야기와 엮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어디서 폭력사건을 일으킬만한 녀석들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