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뱀파이어
다섯 번째 알람 01
에코다 고등학교는 에코다 역 근처에 있는 평범한 공립학교였다. 사립학교의 위세에 눌려 공립학교에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좀 질이 낮다 싶은 곳에는 생양아치 녀석들이 모이기 마련이었지만 에코다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집단강간이니 패싸움이니 하는 흉흉한 이야기와 엮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어디서 폭력사건을 일으킬만한 녀석들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 입시 성적은 언제나 간신히 중간을 유지해서 인기는 그리 없는 곳이었다. 여유 교육이니 뭐니 하며 정부는 입시 열기를 꺼트리려 하였지만 그런 이야기와 무관한 채 여전히 명문대의 이름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가정에서는 옆 동네에 있는 테이탄 고교를 선호하기야 했다. 그래도 난 내가 다니는 에코다에 퍽 만족하는 편이었다. 테이탄 고교에 붙었었는데도 에코다에 진학했으니 내가 학교에 만족하고 있는 게 괜한 자위 심리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야 없을 것이다. 하기야, 에코다에 진학한 건 학교와 전혀 상관없는 이유에서였지만.
내가 에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건 고교의 입시니 진학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슨 정신머리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순전히 좋아하던 남학생이 진학했다는 이유로 한참이나 낮춰 원서를 넣었다. 그것도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는 남학생을 따라서 넣은 것이었다. 더 웃긴 게 뭐냐면, 그 여학생도 에코다 고등학교 지원이었다. 나는 그 모든 걸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그리고 그 둘이 부끄러워 겉으론 드러내질 못해도 서로 좋아하고 있으며,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리라 생각했음에도. 나는 그 웃기고 멍청한 짓을 했다. 고교 원서를 넣을 때만 하더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슬슬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설령 그 아이가 중대한 분기점에 선 소년이었다고 할지언정, 그렇게 다른 이상 결국은 불가해와 몰이해로 언젠가 그 소년의 흔적들은 모조리 증발해버리고야 말 것이라고. 그러니 그 아이의 흔적을 더듬는 미련한 행위는 고작해야 원서를 넣어보기까지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선생님과 이가라시 씨의 반응을 신경 써서 넣은 여러 명문 고교들에 합격하고, 마지막으로 테이탄에서 합격통지서가 날아왔을 때도 나는 에코다 고등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었다.
한참이나 낮춰서 쓴 만큼 에코다 고교에 나는 수석으로 입학했고, 그 뒤로도 부동의 1등이었다. 좋아하는 남학생을 따라 입학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있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행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입학 당시의 반배정도 그랬다. 남학생과는 서로 다른 반이었고, 남학생과 그 여학생은 같은 반이었다. 나는 누구도 그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래, 좀 더 자화자찬을 섞어 말하자면, 줄곧 사고를 일으키는 남학생이나, 아니면 남학생의 놀림에 역정을 내곤 하는 여학생과는 차마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훌륭한 학생이었고. 남학생과 내가 교제할 것을 기대하며, 혹은 나를 좋아해 주기를 기대하며 진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1학년 때는 정말 스치는 인연조차 없이 지나가버려 섭섭할 정도였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어 그들과 같은 2학년 B반에 배정될 때서야, 내가 여기 진학한 게 집이 가까워서가 아니라 남학생을 남몰래 짝사랑해서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반이 된 요즘, 나는 종종 어째서 테이탄이라든지, 다른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는가 하는 상념에 빠지고는 했다. 다녀본 결과 에코다 그리 나쁜 학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테이탄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과 그 남학생이 좋아하는 여학생 간의 알콩달콩한 사랑싸움을 지켜볼 필요는 없지 않았겠어? 하기야 애초에 녀석과 연애를 하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던 데다, 이제 와서 녀석을 연애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내가 녀석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던가, 그도 아니라면 더는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녀석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가슴이 한가득 벅차올랐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사실 내가 좀 더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면 녀석이 너무 좋아서 같은 교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 했을걸. 나는 아직도 그렇게 녀석을 좋아하고 있었다. 녀석을 그렇게 좋아한다, 하고 생각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란스러운 녀석 쪽을 흘끔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푸른 빛 도는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녀석의 장난스러웠던 표정이 슬금슬금 뚱하니 바뀔 때가 되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뭘 그렇게 봐, 이가라시? 아하, 쿠로바? 하기야 저 녀석 소란스럽지?”
그러려니 하라구.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하고 시시덕거리는 녀석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녀석과 마주한 채로 실없는 웃음을 샐샐 흘렸다.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거든? 하고 입천장을 간질거리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내가 직접 쿠로바에게 고백한다면 모를까, 괜히 이상한 식으로 돌고 돌아서 그 녀석이 알게 되는 건 싫으니까, 애초에 오해의 소지가 될 법한 건 꺼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기운차네. 뭐, 아주 좋을 때지? 애인과 사랑싸움이라니.”
씩 웃으면서 말한다고 해서 진짜로 즐겁지는 않다. 그렇지만 왁자지껄하고 깔깔거리며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에서 즐거운 척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진짜로 재미없네. 쿠로바에게 애인이 있다고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맘에 안 들지만, 그것보다도 더 짜증나는 건 이런 식으로 녀석과 녀석의 애인인 아오코를 우스갯소리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야, 이런 일은 누구한테도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고, 녀석들 사이의 감정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내가 녀석을 짝사랑한다고 해서 녀석과 녀석 애인의 관계를 하잘 것 없는 걸로 만들어도 될 리가 없잖아. 그야 아무런 악의도 없이, 녀석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없이 했던 이야기지만, 악의 없이 행했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퍽 태연하게 실실 웃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녀석도, 그리고 터질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녀석의 여자 친구에게도 미안한 일이고.
해가 어찌나 쨍쨍한지 눈이 부셨다. 좀 재수 없게 들릴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난 썩 괜찮게 생긴 편이지만, 피부가 벌겋게 익는 건 내가 어떻게 생긴가와 무관하게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벌겋게 익는 게 아니라 건강미 넘치게 그을리는 것도 내키지 않거늘. 그도 그럴 것이 썩 괜찮게 생긴 편이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은 내가 봐도 영 아니니까. 문어처럼 시뻘겋게 익은 모습을 상상하면, 퍽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 꼴을 그 녀석이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햇볕 아래 있는 걸 좋아할 리 없잖아. 내가 무슨 오키노 요코 같은 연예인처럼 예쁘게 생겼으면 피부 좀 타도 괜찮을지 모르지. 예쁘기로는 오키노 요코보다 코이즈미 아카코가 더 예쁘게 생겼지만, 코이즈미 아카코는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미녀니까. 뚱하게 햇볕이 짜르르 내리는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어, 선생님, 저 몸이 몹시 좋지 않아서 양호실에 가고 싶은데요.”
체육 선생님이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굉장히 건강한 편에, 정확히 말하자면 아플 수도 없는 축에 끼는 종이었지만 원래 선생님들은 나 같은 모범생이 아프다고 하면 어련히 고개를 끄덕여주기 마련이다. 엄청나게 건강한 남학생이라면 모를까, 난 외관상으로는 151cm에 창백한 피부를 지닌 여학생에 불과하니까. 주위 학생들이며 선생님이며 이리저리 뜯어보는 시선에 맘 한구석이 꺼림칙했지만 이제 와서 몸이 다 나았다며 수업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게 더 우습다. 선생의 고갯짓에 고개를 꾸벅 수그렸다. 햇빛에 살굿빛을 부스러트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턱 언저리를 간질거렸다.
수그렸던 고개를 똑바로 세우자 눈앞은 시커멓게 물들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어질어질한 머리에 균형 감각이 말을 제대로 듣질 않았다. 이건 내가 아픈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난 혈압이 낮은 편이고, 의자에서 앉았다가 일어날 때도 눈앞이 시커멓게 물들고 귀가 먹먹하게 변하고는 하니까. 진짜, 나도 참 웃긴다니까. 옛날에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을 때야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이 꼬락서니가 되었는데도 저혈압은 무슨 저혈압이고, 빈혈은 무슨 빈혈이래. 시커멓게 물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대신 비틀거리는 감각을 무시하며 몇 번이고 발을 뻗었다. 쉽게 원상복구 되는 시야도 아니고, 엄청 대단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닌데 괜히 어물거리다가 시선 모으는 것보다 안 보이는 채로 움직이는 게 낫다. 시간이 좀 지나면 원래대로 시야가 돌아올 테니까.
카이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곧 몸을 돌리는 계집애를 눈으로 좇았다. 햇빛 아래에서는 살굿빛, 그림자에 물든 부분은 연갈색인 단발 머리카락이 총총 흔들렸다. 몸이 몹시 안 좋다고? 웃기고 있네. 몸이 몹시 안 좋다는 계집애가 저나 아오코를 두고 주변 녀석들과 시시덕거리며 어울렸을 리 없다. 몸이 안 좋다느니 하는 건 전부 다 거짓말이고, 사실은 그냥 체육수업에 참여하는 게 싫은 거겠지, 뭐. 이런 뙤약볕 아래에서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여자애가 어디에 있겠어. 거짓말쟁이, 하고 속으로 되뇌곤 팽하니 코웃음을 흘리는 찰나, 계집애 걸어가는 모양새가 이리저리 흔들흔들 기우뚱거리더니 곧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졸지에 고꾸라지는 순간을 지켜보게 된 카이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튕기듯 일어섰다. 어지간히 요란했는지 여기저기 제 할 일에 몰두하던 사람들의 고개가 전부 계집애에게 향한다. 비척비척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계집애가 멋쩍다는 듯 웃어 보이자 하나 둘 다시 제 일로 관심을 돌렸다. 카이토는 계집애가 퍽 익숙한 손길로 제 옷가지를 툭툭 터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온갖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넘어진 것 치곤 멀쩡하기 그지없다. 넘어지는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지?
“쿠로바, 이가라시 좀 양호실에 데려다 주고 오거라.”
“엑? 제가 왜요?”
“그야, 너 혼자 서 있잖아?”
정말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다.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이 바닥에 자빠진 나를 배려해서 녀석을 붙여주는 호의를 보인 것은 굉장히 고맙지만, 고마움과 별개로 달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놈이 있어서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성가셔 하는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녀석에게 귀찮고 성가신 녀석으로 여겨질 바에야 데면데면하니 모르는 녀석으로 지내는 게 훨씬 맘 편하고 좋은 일이다. 만약, 아주 만약의 상황이지만 이 정반대의 상황이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녀석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성가시기는커녕 엄청 행복한 일일 텐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쿠로바 카이토는 내 도움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다. 나는 여러모로 대단히 잘난 종이지만, 그래봐야 녀석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 같은 경우는 녀석을 성가시게 하고 있고, 아까 전에는 괜히 밉보이기만 했지. 멍청해도 정도가 있다.
녀석과 나. 단 둘만 있는 복도를 나란히 걷는 것은 퍽 설레는 일이었지만, 설레는 맘이 녀석에게 폐를 끼쳤단 맘을 가릴 만큼 커다란 것은 아니었다. 개수대와 정수기가 설치된 모퉁이가 나오기 전에 우뚝 멈춰 섰다. 물웅덩이가 이리저리 괴고 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을 녀석이 지나가야 할 필요는 없다. 사실 보통 여자애였다면 아까 그렇게 넘어진 상황에서 어디 한 군데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을 터이니 녀석이 데려다 주는 것이 합당했을 테지만, 그런 보통 여자애가 아닌 마당에 녀석에게 민폐를 계속 끼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기실 녀석이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다면 민폐를 끼치든 말든 전혀 관심 없었을 테지만.
“쿠로바, 먼저 가 봐.”
“뭐? 왜?”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리고 솔직히, 네가 날 데려다 줘야 할 것도 없잖아. 가 봐. 지금쯤 남자애들 축구하고 있을 걸?”
머리카락을 쓱쓱 헤집으며 날 내려다보던 카이토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휙 돌렸다. 녀석이 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한숨을 퍽 몰아쉬었다. 괜히 맘 한 구석이 싱숭생숭했다. 양호실까지 녀석이 따라온다면 무척 곤란했을 테고, 내가 녀석을 돌려보낸 거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걸 내 입으로 입증하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
난 2학년 B반의 반장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어떤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학생회 활동이라던가, 아니면 학교의 자치에 관련된 활동. 그런 건 정말 취향에 맞질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난 단체 생활 자체가 썩 잘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은 반 내에서의 활동이 전부였고, 그건 순전히 그 녀석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쿠로바 카이토가 학교에 잘 나오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녀석이었다면, 녀석의 뒤를 쫓아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생각해도 우습고 어이없는 상상에 히죽 웃고는 생각을 훌훌 털어버렸다.
여하간 단체생활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인간인 나는 동아리 하나 하지 않는 귀가부였고, 일찍 끝나는 대신 학원을 다녔다. 에코다 고교는 동아리 활동이 강세인 학교는 아니었지만, 대학 입시에서 무어라도 하나 활동을 해놓는 게 이득임은 뻔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행할 수 있으면 그게 인간이겠냐. 아, 물론 난 굳이 따지면 인간의 분류에 넣을 수 없겠지만, 여기서 인간이라는 건, 생물학적인 분류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애초에 이득이 되는 걸 따진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없는 놈이었다. 대체적으로 득이 되는 쪽으로 행하지만, 그거야 행위에 대해 어떠한 관념도 지니지 않을 때의 일이고. 내가 상황과 무관하게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논리적이며 실리적인 놈이었다면, 에코다 고교에 진학했을 리도 없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난 단체 생활과 영 맞지 않는 녀석이고, 내키지 않는 걸 이득을 위해 하느니 이득을 버리는 게 맘 편하고 좋다. 입시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길 바란다면, 차라리 압도적으로 시험을 잘 보는 게 낫기도 하고.
와, 내가 생각해도 방금 나 진짜 재수 없는 생각했어. 깔깔거리고 싶은 걸 꾹 참고선 손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내가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학원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시라토리 외숙의 권유와 지원으로 다니게 된 곳이지만 비싼 돈 주고 듣는 수업을 허투루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딱히 학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곳에서 배우는 게 새로운 것도 아니었지만, 성실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가끔은 주의하지 않았던 부분을 짚고 넘어가 주기도 하니까. 분필이 칠판에 탁탁 부딪치는 소리와 단조로운 선생의 말소리가 뒤섞이고, 그보다 조금 작게 샤프펜슬이 노트 위를 긁는 소리가 표류했다.
너무 오랫동안 남아있었나? 학원 수업이 끝난 뒤로 잠시 남아 문제집을 푼다는 게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해버린 모양이었다. 전철이 끊길까 걱정해야 할 시간은 아니지만 돌아다니는 게 달가운 시간도 아니다. 입시 학원이 즐비한 다카다노바바 같은 학원가나, 긴자, 신주쿠, 시부야 같은 유흥가가 아닌 이상 인적이 뜸할 시간이니. 야심한 시각에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달갑지 않은데 재수 없게 비까지 주룩주룩 내렸다. 학원 수업이 끝마쳤을 때만 하더라도 날이 좀 흐리긴 했지만 비가 내릴 것 같진 않았었다. 문제야, 지금에 와서 비가 내린다는 거지. 멍청하게 바깥을 내다보다가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노트 필기한 게 젖으면 대박.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책이라도 젖으면 영 성가시고 짜증날 게 분명했다. 책 같은 건 젖었다가 말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어 가방 위를 덮었다. 와, 옆으로 매는 가방이라 다행이네. 이게 만약 백 팩이었다면 재킷으로 비를 가리려 해도 쉽지 않았을 걸. 물론, 이런다고 해서 내용물이 안 젖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보면 비가 줄줄 내리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주인공들을 가끔 접할 수 있는데 통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우산이 있다면 가랑비 정도야 즐겨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왜.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실실거리는 그런 인간들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다. 이해할 생각도 없지만.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을 얻어맞는 감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 게 있다면, 에코다 고등학교의 여자 교복이 테이탄처럼 블레이저가 아닌 것일까? 세라복의 교복은 평소에 내심 촌스럽다고 생각해왔던 것이지만. 만약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게 짙은 빛의 세라복이 아니라 테이탄 같은 하얀 블라우스였다면 장대비에 속이 훤히 드러났을 테니. 축축하게 흠뻑 젖어서 움직임 하나하나에 휘감겨 올라가는 치맛자락을 쑥 잡아 내리곤 한숨과 함께 마저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찰나. 으슥한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야심한 시각, 인적이 뜸한 골목길,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 스릴러나 공포영화를 떠올리는 장면이지만 태연을 가장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이 튀어나온 곳을 지나야 집에 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만약 내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걸. 그리고 애초에 저 사람이 범죄자일 리도 없잖아. 하고 자위하며 타박타박 걸음을 내딛자 물웅덩이에 괸 물이 찰방찰방 다리를 적시며 튀었다. 남자 역시 터벅터벅 나를 향해서, 혹은 내 뒤의 어떤 무언가를 목적지로 한 채 걸음을 옮긴다. 남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불쾌한 감각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비 냄새를 뚫고 밀려들어오는 냄새가 몹시도 역겨웠다. 남자와 스치고 지나갈 쯤에는, 그 역겨운 냄새는 절정을 이뤘다. 기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이 기묘한 냄새는 그 정체를 못 알아차리래야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차게 식어가던 몸에 열기가 퍼지는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일 따위는 없다. 종종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상실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건 엄연히 별개의 일이다. 고통은 감각의 범주에 속해서, 죽음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생명체인 이상 고통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죽음에서 벗어나서도 고통을 느끼는 입장에서 생각하건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죽어야만 할 것이다. 감각의 상실은 생의 상실과 동일하게 찾아오지 않을까.
장대비 아래로 나가기만 해도 빗방울이 두들기는 피부가 아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길바닥에 드러누워 쏟아지는 빗방울을 두들겨 맞는 일은 정말로 불쾌했다. 너덜너덜한 옷가지는 다시 못 걸칠 지경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가방에 시선을 던지고,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키는 대략 170cm 전후, 마른 체구. 빗줄기 사이로 얼핏 보였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써보지만 기억나는 것은 사방으로 낭자하고, 빗줄기에 섞여 바닥으로 추락하던 뜨겁고 끈적거리던 액체의 잔상뿐이었다. 어느새 골목길 저 끝에 달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진한 빛깔의 판초 우의는 어둠 속으로 스멀스멀 녹아들었고, 끈적거리던 액체는 빗물에 씻겨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 바닥을 뒹구는 가방을 추슬렀다. 가방의 가죽이 뜯겨져서 빗물이 줄줄 새들고, 내용물이 하나 둘 쏟아진 모양이라 한숨을 퍽퍽 내쉬었다.
어제,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가방을 탈탈 털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통 찾아낼 수 없었던 걸 보면 분명 어딘가에 흘린 것이다. 학원에 놓고 왔을까? 핸드폰을 잃어버린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지만, 크게 당황스럽지도 않다. 연락이 올 곳도 딱히 없고, 애초에 약정기간도 끝난 고물 핸드폰이었다. 이 기회에 새로 하나 마련하면 그만이고. 꽤 값이 나가는 교복이나 가방이 못쓸 지경이 된 마당에 핸드폰까지 새로 바꾸려면 한동안 곤궁하게 지내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나 구해야 하겠지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디에서 잃어버렸건 간에 내 손에 돌아오면 좋은 일이고, 못 돌아와도 크게 우울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돌아올 리가 없으니 오늘 휴대전화를 정지하러 통신사에 찾아가봐야 하겠지만.
“이가라시 씨, 오늘 가방 다른 거네? 예전에 쓰던 가방이야? 가죽가방 아니었어? 그, 뭐였더라. 무슨 오리 같은 이름이었는데.”
“만다리나덕. 아, 어젯밤에 비를 잔뜩 맞는 바람에 엉망이 돼서, 중학생 때 쓰던 거 가져왔어.”
“원래 쓰던 건 작년에 입학선물로 받은 거였지 않아? 그래도 뭐, 어떻게 잘 되겠지.”
“그럴까. 그러면 좋겠지만.”
어떻게 잘 될 리가 없다. 실없이 웃으며 수긍하기야 했지만, 난도질 된 가방이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수선을 맡기면 어떻게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그 사람한테 이 누더기처럼 찢어진 가방을 왜 수선하려하느냐 하는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나? 차라리 하나 사고야 말지. 당장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옛날에 쓰던 가방을 가져왔지만 이 가방도 꽤 험하게 썼던 터라 여기저기 너덜너덜해서 책을 잔뜩 넣으면 뜯어져 버릴까 맘이 조마조마했다. 정말 어제 괜히 오랫동안 학원에 남아 있어서는 봉변만 잔뜩 당했다. 비를 잔뜩 맞은 것도 그렇고, 이상한 남자랑 마주쳐서 교복이며 물건이 상해버린 것도 그렇고. 턱을 괸 채로 멍청하게 한숨을 퍽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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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도대체 어디에서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어제, 오늘 휴대전화 없이 지내면서 여기저기 뒤져보았지만 도대체 휴대전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카다노바바의 학원을 직접 뒤지기도 했고 아까 동급생의 전화를 빌려 학원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혹시 근래 휴대전화가 분실물로 습득된 것이 있느냐고도 물어보았으나, 그런 것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렇담 어디에 놓고 온 거지? 전철? 아냐. 아닌가? 학원을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본 적도 없다고 해도 원체 칠칠맞은 성격이니 꺼내보질 않아도 주머니에서 뚝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좋아, 좋게 생각하자. 이번 기회에 휴대전화 좋은 걸로 바꿔야지. 아님, 이 기회에 녀석하고 똑같은 기종으로 맞출까. 뭐, 커플처럼 말이야. 문득 든 생각에 녀석을 흘끔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날 바라본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본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씩 당겨지는 입아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NTT 도코모의 좋은 점은 통화품질이 정말 좋다는 거지만, 나쁜 점은 비양심적인 가격이다. 소프트뱅크는 같은 소프트뱅크 이용고객들 간에는 0시부터 3시 사이를 제외하곤 무료 통화 및 문자 서비스를 제공해주는데 여긴 뭐, 그런 것도 없고. 물론 타 통신사와의 통화는 요금이 부과되니까 크게 이득이 되는 조건은 아니지만. 휴대전화 요금을 내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소프트뱅크로 했다가 나중에 안 터지는 휴대전화 붙잡고 욕하기보다야 차라리 비싸고 잘 되는 거 쓰는 게 맘 편하니 어쩔 수 없다. 매장도 가깝고 가격도 중간에 통화품질도 중간인 AU로 바꿀까 했지만 NTT매장에 들러 기존 휴대전화를 정지시켜야 하기도 해서 난 이번에도 NTT도코모의 호구 같은 고객님이다. 어중간한 건 별로기도 하고 딱히 얼리어답터인 건 아니지만.
내 작은 손에 비해 새로 산 휴대전화는 너무 커서 퍽 어울리질 않았다. 6.4인치의 휴대전화는 휴대전화라기보다는 태블릿에 가까울 정도로 널찍한 화면이고, 내 손에 올리면 완전히 덮고도 남는 크기였다. 너무 커다란 걸 사버렸나 싶기도 했지만, 쿠로바가 엑스페리아 시리즈 중 하나니까. 구태여 신기종도 아닌 쿠로바와 똑같은 기종으로 바꾸면 너무 노골적이고, 그렇다고 해서 녀석과의 아무도 모르는 커플 전화에 대한 열망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컸다. 하기야, 가장 최신기종의 휴대전화와 구기종을 보고 시리즈가 같다고 커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개통시킨 휴대전화로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리다가 사회면 1면에 뜬 연쇄살인에 대한 기사를 클릭했다. 이번에도 그, 뭐더라. 모리 코고로인가? 하는 사람이랑 연관된 거 아냐? 예전에는 쿠도 신이치라고 하는 놈이 사회면을 점령하더니 요즘에는 모리 코고로라는 사람과, 종종 괴도 키드의 소식으로 사회면이 도배된다. 내 생각인데 모리 코고로는 죽음의 사신이고 괴도 키드는 미친놈이다. 기사를 뒤적거리며 걸어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이 기사의 내용, 어딘가 낯이 익었다.
기사의 내용을 곱씹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기사에 따르면 이 연쇄살인범은 범행 현장에 알람시계를 맞춰놓는다고 했다. 범행의 순서에 따라서 한 시, 두 시, 세 시, 따위로 알람시각이 바뀌고. 그리고 이번 범행 현장에 남겨진 알람 시각은 여섯 시. 그러나 지난 번 범행 현장에 남겨져 있던 알람은 네 시였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며칠 전, 비가 주룩주룩 내린 다음 날 아침에 에코다 역사 근처의 골목길에서 범행 현장에 남아있던 것과 동일한 알람시계가 다섯 시에 맞춰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단순히 악질적인 장난으로 취급했고 어느 누구도 그에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기사에서야 범인이 수법을 바꾸는 것인가, 시체의 행방은 대체 어디인가, 등등의 추측이 나열되어 있었으나, 매우 안타깝게도 전부 빗나간 추리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집 근처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다섯 번째 알람이 맞춰져 있던 곳이었으며,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밤, 내가 남자와 마주친 곳이기도 했다.
그 남자가 범인이다. 장담컨대 그 때 그 남자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재수가 없어서 그 놈과 마주했던 건지, 그나마 재수가 좋아서 그런 놈과 마주했던 건지 통 모르겠는 일이다. 그야, 물론 그런 놈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굉장히 재수 없는 경우지만. 놈은 그냥 주방에서 흔히 쓰는 커다란 식칼로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그러나 고작 그 뿐이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재수 없는 일이고, 기실 난도질 되었으면 죽을 수밖에 없을 테니 더 이상의 경우란 없을 테지만. 나는 그 보통 여자가 아니었으니 차라리 놈을 만난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멍청하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안했고, 내 소지품을 탈탈 털어가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연쇄살인이라는 게 강간을 비롯한 성폭행 및 강도행위를 수반하는 데에 비해 놈은 그저 흉기를 마구잡이로 휘두른 것에 그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이 뭐 양질이니 뭐니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재수가 없진 않았다는 소리다.
평소에도 뜸하기는 했지만,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는 거리를 찬찬히 살피며 걸었다. 그 날 밤, 내가 떨어트린 물품을 전부 챙겼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그 날 새벽에 내가 무슨 물건을 흘렸을까? 그렇담 곤란하다. 내가 범인으로 몰리는 것도 곤란하지만, 피해자인 게 들키는 것도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그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피해자치고는 너무 멀쩡하다. 정상적인 피해자라면 이미 한 구의 송장이 되었던가, 아니면 반신불수가 되어 병원에서 골골거리고 있어야 정상일 테니. 애석하게도 나는 정상궤도에서 이탈해 있었고, 그러므로 이 일에 연루되는 일은 몹시 곤란한 일이었다. 휴대전화 말고 내가 혹시 이곳에 떨어트린 게 있었나? 곰곰이 생각하며 거리를 살피지만 통 모르겠다. 뭐어. 그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은 족히 지났고, 당시에 비가 한바탕 쏟아졌으니 내가 뭘 떨어트렸어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이미 하수구에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바닥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우드득하고 굳은 근육이 요란하게도 움직였다. 시퍼런 하늘 한 번 올려보고 다시 고개를 땅에 처박으려는 찰나, 누군가 치맛자락을 슬슬 잡아 당겼다. 뭐야? 하고 내려다보니 허리께에 와 닿는 키의 안경잡이 꼬마가 있었다.
“누나, 뭐 찾아요?”
“아, 지난주에 여기서 휴대전화를 떨어트린 것 같아서.”
“헤, 지난주요? 코난이 도와줄까요?”
“아냐, 뭐. 휴대전화 어차피 새로 샀고. 이전에 쓰던 건 오늘 해지했어.”
어딘가 말하는 모양새가 영 거북한 꼬마지만 도와주려고 했다니 기특하다. 요즘 초등학생들 보면 장난 아니던데, 애가 아주 가정교육을 알차게 받고 자랐나보네. 뭔가 줄 게 없을까 해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새로 산 가방이지만, 얼마 전에 학원에 가기 전에 사탕을 좀 사서 넣어놨었는데. 꽤 깊숙한 곳에 있는 사탕을 꺼내려다 학생증이 가방 밖으로 떨어졌다. 사탕을 꺼내고 주워야지 했는데 꼬마가 먼저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들었다. 바로 건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오래 학생증을 살피던 꼬마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누나, 여기, 학생증! 에코다 고등학교 2학년이야? 교복이랑 가방이 깨끗해서 1학년인 줄 알았어.”
“아, 며칠 전에 옷이랑 가방이 다 망가져 버려서. 자, 여기. 사탕이야. 누나 도와주려고 했으니까.”
“에엣, 괜찮아요, 누나!”
“아냐, 아냐. 아, 그리고 코난 군, 슬슬 늦었으니까 집으로 얼른 들어가 보렴. 요즘 꽤 위험하니까.”
에도가와 코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쿠도 신이치는 저를 지나쳐 가는 이가라시 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에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든 단발이 걸음걸이에 맞춰 잘랑잘랑 흔들렸다. 1학년 1학기 초반도 아니고, 지나치게 깨끗한 교복에 가방. 2학년생이 갖고 있기에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 물품이다. 어디 그 뿐인가.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는 근래에 출시된 기종이고, 여자 말로는 지난주에 휴대전화를 이 부근에서 잃어버려서 새로 샀다고 했다. 신이치는 제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전화를 매만졌다. 지금 제가 서있는 골목 끝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하수구에 걸쳐있던 것이었다. 지난주, 비가 내리는 날은 이곳에서 살인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벌어진 날이었고, 이가라시 리오는 그 날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옷이나 가방이 망가진 것도 지난주. 이가라시 리오는 용의자일까? 피해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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