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ㅇㄹ님 커미션 / 레 미제라블 드림주 크로스오버 / 공백 포함 7869자.
“술 한 잔 할래요?”
작가가 말한다.
“그럽시다.”
장미가 답한다.
파리는 거대한 극장이다. 등장인물은 셀 수 없이 많다. 상연 시기는 왼종일, 인류의 역사가 무너질 때까지. 어떤 배우들은 빠르게 퇴장을 하며, 어떤 배우들은 지나치게 긴 시간 동안 무대 위에 머물러 마침내 지쳐 버리고 만다.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 모두를 알기가 어렵다. 이곳은 거대한 원형극장과도 같아서. 관객과 배우가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의 삶을 관람하듯 굴 수 있는 태도가 감히 허락되는 곳. 그것이 바로 파리의 다른 이름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배경은 어떠한가? 눈이 오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해야 옳을 것이다. 희떠운 열들이 지나가고 버석이는 얼음결들이 지붕을 덮는 날. 한 계절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옷깃을 흔드는 날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모두 웅크린 채 서로의 얼굴을 보기보다는 제 갈 길을 가려 애쓰는 날. 건물들은 각기 똑같은 흰 옷을 입고 바닥에 웅크린다. 거리는 질척이는 눈발로 뒤덮여 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꼴을 하고. 지난여름 뒤엎어졌던 포석의 이 빠진 구석들과 피비린내를 씻어내는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의 배경은 곧 망각이다.
적절한 시기에 생 미셸의 한 골목에서 죄인이 등장한다. 시지프스 보엠. 이 한량의 영혼을 가진 작가. 보풀 일어난 코트 위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눈을 맞으며 걷는 양은 꼭 지쳐 버린 이의 걸음과도 같다. 습관적인 비틀거림과 함께. 죄인은 한 팔에는 종이뭉치를, 한 손에는 잉크병이 든 봉투를 들고 걷는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앞을 보지 않는다. 어째서냐 묻는다면, 그가 눈발을 피하려 웅크려 드는 자신의 행동마저 죄스럽게 느낄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구둣발이 눈을 짓이기며 걸어간다. 코끝과 눈가는 벌겋게 추위의 손길 아래 긁혀나가는데, 죄인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가 멈추어 선다.
“당신인가요?”
예기치 못한 때에 장미가 등장한다. 이름 붙어지기를 장미라 하였으나, 차라리 가시라 하는 일이 좋으리. 저 멀리 몽데투르 가 쪽에서 걸어오며, 손마디가 부르트도록 감싸 쥔 두어 권의 책을 필사적으로 품 안으로 넣고 있다. 허나 그 또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보랏빛 머릿결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은 곧장 녹아 사라지고, 그 선명한 빛은 도시마저 삼킨 신의 하얀 담요 아래서도 명확하니. 그 누가 그를 알아보지 않을 수 있으랴. 붉은 눈이 저 멀리, 걸어오는 상복처럼 검은 머리를 향해 따라 붙었다가. 멈추어 선다. 로잘린느, 작가가 먼저 입을 연다. 이름과 함께 장례 미사 때의 향로처럼 하얀 김을 내뱉으며.
“보엠.”
“......”
두 이방인이 마주한다. 모두가 흰 담요를 덮고 그 안으로 웅크려 드려 하는 겨울의 때에. 고개 숙이지 않고 칼날 같은 바람을 안아내며 제 갈 길을 가던 이들이 교차하여 드는 순간.
“안녕.”
“우리가 인사 나눌 정도의 사이는 되어서 다행이에요, 달링.”
흐린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미끄러질 길을 찾지 못한다. 그저 익숙한 그 얼굴을 보며, 입 밖으로는 능숙한 체 본디 성질대로 해대던 말을 꺼내 드는 것이다. 로잘린느는 그 말에 능숙한 체 하며 비웃음 같은 공감의 웃음소리를 낸다. 그 미묘함.
“......”
다시, 침묵. 말은 목구멍에 교수형당해 매달린다. 사형 집행자는 그들이 알던 이들이다. 가까이 두고 지내던 이들. 죄인과 장미는 말을 잃었다. 지난 6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서로 마주하여 단 한 마디도 쉽게 꺼낼 수 없다는 일은 또 어떤 저주인가. 시지프스가 먼저 시선을 내린다. 로잘린느의 붉은 눈동자는 무시무시하던 바리케이드 위의 깃발을 떠올리게 했다. 몸에 배인 도망의 버릇이 그를 짓누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그는 그것과 싸우는 중이리라. 작가가 다시 눈을 든다. 어깨를 으쓱이고. 로잘린느의 차분하되 윤기 없는 눈동자에 대고 묻는다.
“술 한 잔 할래요?”
장미이게 유월이란 어떤 의미였는가. 로잘린느는 잠시 눈을 감는다. 붉은 눈동자는 가리어졌다가 뜨여진다. 늘 그리 했던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이 없어도 알 법한 의사인 것을. 이 말로서 표현하기를 즐겨 하는 사람은 또 못 박는 것이다.
“그럽시다.”
작가가 웃는다. 장미 또한 웃는다. 여행자들은 머물 곳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네들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시지프스는 길을 안내하고, 로잘린느는 그 뒤를 따른다. 루이 르그랑 근처로. 대학생들이 자주 찾던 곳으로. 조용한 선술집의 삐걱대는 마룻바닥이 눈 맞은 구둣바닥들을 감싸고, 난로의 훈기가 얼굴로 끼쳐 오는 곳으로. 그들은 자리를 옮겼다. 손을 들어 와인과 압생트를 주문한다. 짭짤한 치즈와 소시지가 놓여지고. 죄인과 장미는 일순 다시 침묵에 휩싸인다. 붉은 포도주, 초록빛 압생트. 설탕이 타들어가 매캐하되 달콤한 취기의 향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웠다. 먼저 손을 뻗어 잔을 드는 자는 선언하는 이다. 로잘린느.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그 도발적인 건배사. 회한 담긴 말에 응하지 않을 작가가 있으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서 지나간 세월을 단숨에 뽑아낸다. 찰랑이는 술잔에 담긴 것은 다만 술이 아니라 지난 계절의 감정들일 것을. 보엠은 본디 하던 성정대로, 그것을 단숨에 들이킨다. 로잘린느는 입술을 대어 목을 축이는 듯 마시려다가 작가가 하는 양을 보고서 그를 따라 잔을 왈칵 기울인다. 목구멍에 훈김 도는 겨울날의 작은 술판. 조용하고, 너무나 작디작은. 오로지 두 사람뿐인 그 자리.
“작가가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안담.”
고개 들어 술집을 둘러보던 붉은 눈동자가 멈춘다. 저 멀리, 천장 한 구석에 시 구절이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보엠은 다시 짐짓 능숙한 체 하며 등을 의자에 기댄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장沙場당한 사막의 언어가 건조하다. 목 안이 깔깔하여 감히 소리 내지도 못하겠으니, 작가는 술을 한 잔 더 따르려 병을 들었다. 로잘린느가 그 손을 막는다. 단호한 손길에 보엠이 검게 그늘진 눈동자를 들어 그제야, 술집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자. 로잘린느는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의 손으로 보엠의 잔에 술을 따라 준다. 그 손길을 보던 작가는 마침내 입을 연다.
“……그랑테르가 알려 줬지요.”
“아, 그 주정뱅이도 참.”
넘치도록 따라진 와인과 함께, 목소리에서 애정 또한 함뿍 묻어난다. 기실 그 둘 모두 뮈쟁의 주정뱅이를 깊이 아낀다 표내지 않던 자들이었으나. 삶에 반드시 얼룩이 묻어나는 것처럼, 세상 어딘가에는 얼룩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보기 흉하되 어디서 묻어나온 것인지 짐작 가는 그 얼룩마저 사랑할 줄 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보엠과 로잘린느의 얼굴에 드디어 진정으로 웃음이 스친다.
“그 주정뱅이 말이, 달고 쌉싸름한 포도주에는 짭짤한 치즈가 제격이라 했었거든요.”
“이 술집의 술은 자꾸 넘기다가 큰일 날 수도 있겠는걸요.”
“옆에서 빵을 안주로 뜯어 먹던 제게 끝까지 먹어 보라 권하던 게.”
“그래서 치즈와 소시지를 시켰고.”
언어가, 말이, 문장이. 그 끝을 모르고 그저 절벽 위의 사람처럼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면 뚝, 뚝, 떨어진다. 추락하는 말의 끝자락을 그 누구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소리 낼 뿐.
“당신과 그랑테르가 술 마시는 데에는 죽이 잘 맞았었는데.”
“뮈쟁에서 서로 헛소리 하며 물어뜯다가도, 마실 때에는 그저 그만한 동지도 없었습니다.”
“콩브페르가 당신을 업고 들어온 날 기억해요?”
“어떻게 잊겠어요. 힘깨나 쓰던 걸 처음 안 날이라.”
“그런 당신을 보고 우리는 혀를 차면서.”
로잘린느가 말을 멈춘다. ‘우리’ 그 안에 들은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한다. 잠시간, 그 술자리의 두 사람 모두 어른대는 금발을 본 것만 같았다. 다시 침묵이 자리한다. 보엠은 마른 입술을 축이려 자꾸만 잔으로 손을 뻗고, 강요해대는 것이 아닌 예의로서 로잘린느의 잔을 채운다. 마다하지 않으며, 로잘린느는 그 잔을 들이켜 댄다. 취기의 몽롱함을 잠시 빌려 아프기 짝이 없는 기억을 마취시키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차마 그리 하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굳은 몸이 이완되어 테이블과 의자 위로 늘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건배사처럼, 로잘린느가 입을 연다.
“당신이 여기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요. 보엠.”
작가가 고개를 든다. 로잘린느의 붉은 눈동자에, 전에 보았던 것처럼 윤기가 돈다는 생각을 하며 보엠은 웃어 보였다. 헛웃음. 자기 부정에서 나온 소리임을 로잘린느는 알고 있었다.
“나도 내가 여기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요. 달링.”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
“우리 같은 이들은.”
보엠이 손을 들어 로잘린느의 말을 막았다. 그녀가 술병을 빼앗아 들었을 때만큼 단호히. 발언권을 얻는 사람의 모습으로 장미의 얼굴을 바라본다.
“로잘린느.”
“말해도 괜찮아요. 어디 가서 떠들 데도 없거든요.”
“나는 말입니다. 너무 자주 도망쳤던 사람이라서.”
“.......”
“죽음이라는 것이 나를 쫓아올 때마다 도망쳤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증오하는, 그리고 깊이 내 삶에 두고 싶었던 이들이 죽음이라는 끝을 만나는 일을 얼마나 보았던가요. 우리?”
보엠이 다시 술을 들이킨다. 홧홧한 열기가 술집과, 두 여행자의 사이를 가득 채운다. 술을 들이키는 새에 장미가 입을 연다. 아니, 가시가 입을 연다. 가시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통과 함께한다. 그 고통으로 세상을 깨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아픔을 겪지 않은 자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까. 로잘린느가 답한다.
“셀 수 없이 많이.”
“그래요, 셀 수 없이 많이.”
작가는 눈가에 내려앉은 그림자를 지워대듯, 손가락으로 문질러댄다. 로잘린느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다. 취기가 내려앉아 무거운 몸. 날아갈 듯 가벼운 정신. 달리 이야기 할 곳 없는 처지의 사람 앞에 앉은, 달리 이야기 할 곳 없는 처지의 사람. 문득 로잘린느는 옛날의 보엠을 기억해내었다. 실없는 말.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명확하지 않은,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 그녀는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의 삶과 마주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작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 존재하는 세상은 서사 속 세상이라고는 하나, 실재로 여기 있잖아요.”
“실존적이네요.”
“지극히 유물론적인 말이기도 하고요.”
아주 여상한 투로 그 말을 꺼내는 로잘린느의 얼굴을 보았을 때, 보엠은 카페 뮈쟁에서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손과 손에 종잇장을 들고 열변을 토하던 새벽들에 대한 번득이는 기억들. 로잘린느는 다만 그 기억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감히 재현해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리에 앉아 한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늘 하던 대로 일종의 사상적 이론을 말하듯, 독백을 시작했다. 한 때 그러했던 만큼 무겁지 않게. 흉내를 시작하는 것이다. 카페 뮈쟁에서의 나날들을 기억하는 자로서.
“세계가 역사를 향해 가고 있다면 그 물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뒤쳐질 거예요. 더 앞으로, 다른 미래로 이끌어갈 수 없다면 채찍이라도 들어야지 않겠어요. 그것도 호되게 아픈 걸로. 세계를 사랑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 속에 뛰어 들어온 이방인들이에요, 달링.”
대뜸, 그 재현 속에 눈치 빠른 작가이자 주정뱅이가 끼어든다. 카페 뮈쟁의 한켠. 헛소리로 길고 긴 소극笑劇을 뽑아내던 부류의 방해. 그마저도 향수를 품은 것 같아 로잘린느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한편으로 아프나, 분명히. 즐거웠다.
“동지, 취했나본데요.”
“내 정신은 멀쩡합니다. 세상이 도는 걸 보니 아마 내가 아니라 세상이 취한 모양이에요, 로사 달링.”
“능청스러움은 집어 치워요. 당신의 입장을 선언하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할 셈이에요?”
“오, 로잘린느.”
보엠은 그 말을 들었다. 로잘린느의 붉은 눈동자가 보엠의 검은 눈동자와 올곧게 마주한다. 작가는 주정뱅이 흉내를 계속할 수 없었다. 늘 도발적인 질문 앞에 쩔쩔 매던 이들이 생각나는 바람에, 보엠 또한 웃음을 입에 머금었으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언하라는 그 요구에 헛소리로 대응하기는 쉬웠으리라. 허나 지금은, 이 작디작은 술자리에서는. 둘 뿐인. 카페 뮈쟁이 아닌 어느 대학 근처 골목의 작은 선술집에서. 보엠은 그리 할 수 없었다.
“작가의 선언은 참 비루하고 보잘것없는데.”
“그래도 해 주겠어요?”
그 말에, 이때까지 얼굴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던 웃음의 밧줄이 뚝, 끊긴다. 로잘린느가 취기 도는 얼굴로 보엠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을 때. 보엠은 이제 웃을 수조차 없었다. 그 말 한 마디가 찌르고 들어오는 아픔은 또 얼마나 깊은가. 상처를 씻어내듯 보엠은 압생트 병을 끌어다 제 앞에 놓는다. 독하고 맑은 초록빛의 액체가 따라진다. 로잘린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린다. 그녀로서는 드물게.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어요.”
“......”
그 말을 하며, 작가는. 저주받은 주문이라도 꺼내는 것처럼. 속으로 떨어 대고만 있다. 로잘린느는 그런 보엠을 보고 있다. 그녀는 기어이 그 모든 것을 들을 셈이었다.
“기어이 내 글을 써 내어 보려고. 내 삶에 주어진 이 거대한 바위를 굴려내어 보려고. 그래서 여기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보엠.”
“부끄러운 말인 것 알아요.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야기도 써 주겠어요?”
작가의 얼굴이 취기에서 깨어난다. 휘장이 찢어지듯 흐릿한 세상은 명확해지고. 눈이 뜨여진다. 변명과 거절의 말을 할 새도 없이. 로잘린느는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말을 다시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못 박는다.
“내 이야기를 써 줘요. 나와 뮈지케타 이야기 말이에요.”
“내가요, 나 자신이.”
“앙졸라스와 아베쎄의 벗들 이야기를 써야죠.”
“.......”
“우리가 뮈쟁에서 만나고, 보았던, 생각했던 모든 것을 무섭도록 기억해야죠. 보엠.”
말이 휘몰아친다. 분명 차분한 말투이건만. 화자인 로잘린느도, 청자인 보엠도. 그 얼얼함에 얻어맞아 아주 잠깐 멍해진다. 정말, 선언처럼 내뱉어진 그 말. 로잘린느는 다시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얹는다. 그것은 참회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갈무리하는 자의 움직임이다. 보엠은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안경을 고쳐 쓰고. 흐리게 웃는 얼굴이 아니라 명확히 바라보는 얼굴로. 로잘린느가 말을 이어 나간다.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
“마음과 정신에 남아 자꾸만 밟히는, 그런 것들. ... 그런 것들은 종이 위에 두어야만 하니까.”
“그게 텍스트가 할 일이지요.”
보엠이 말하자, 로잘린느는 고개 끄덕임으로 말을 대신한다. 안경 너머의 검은 눈이 두어 번 깜빡여진다.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로잘린느는 말을 삼켰다. 언젠가는 내뱉을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종이 위에 남겨 두고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렇게. 파리에 머무르기로 한 자신의 시간 안에 꼭 말하리라 다짐했다. 보엠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느는 그 손을 잡았다. 이제 여행자가 아닌 작가와 기억하는 자가 악수를 한다.
“작업실로 찾아와 줄래요, 달링?”
“가끔 와인 정도는 들고 가도 괜찮다면.”
보엠이 웃는다.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은 건 확실하지만, 정신은 행복하겠어요. 로잘린느 또한 웃는다. 가끔, 가끔이라고 했어요. 나는. 손이 풀려 나가고, 양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기꺼워 두 사람 모두 깊은 숨을 내쉰다. 뱉어내고 난 후의 이완감. 보엠이 다시, 로잘린느의 잔을 채운다. 로잘린느 또한 다시 보엠의 잔을 채운다. 작가의 차례다.
“장미와 죄인을 위하여.”
“장미와 죄인을 위하여.”
서로를 위하여. 여기 남은 두 생존자를 위하여. 기억할 자들을 위하여……. 수많은 말을 담고서. 그저 잔이 들린다. 가벼이 부딪혀지고. 온기와 함께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 파리라는 거대한 원형 극장은 암전의 상태에 들어가 검은 어둠에 덮였을지는 모르겠으나. 극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밤새도록 타오르던 어느 카페의 불꽃처럼 작디작으나 강렬한 것들이 남아 상영을 계속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봄이 오고, 또 다시 여름이 온다 하더라도. 인류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도시가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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