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이오카스테의 시지프스 살해 시도에 관한 세 가지 기록.

ㄷ님 커미션 / 공백 포함 14714자.



1.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¹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 죽음을 꿈꿀 때에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시지프스임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는 다소 오만한 장담을 하여 보는 일은, 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이것의 정正은 곧바로 생의 뿌리를 직격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을 것이다.’라는 것. 이 무의미하고 또한 날카로운 정의 하나가 찔러 들 때에, 사람은 치명상을 입는다. 결코 숭고하지 않을 상처다. 이는 삶이 더럽고, 지긋지긋할 때에. 몰아치는 생의 파도에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짠물이 숨길 따라 들어오는 때에 반드시 떠오르는 언어다. 적어도 이렌 하르트너에게는 그러했다. 


그 때에 그는 열 여섯의 시지프스였다. 


김나지움을 그만두게 만든 부모님이 그의 부모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겨웠다. 가벼이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싫었다. 감시자의 역할을 반드시 수행하도록 길러진 것이 그 자신이었다. 그는 삶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무거이 말하자면 자기 자신마저 증오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이렌 하르트너는 괴로웠으나, 조직의 일원이 되어 새롭디 새로운 세상의 구토물들을 빤히 들여다 보게 된 순간. 그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짠물을 들이키는 기분이었다. 매 순간, 그가 실존하는 이 모든 생의 지점들이. 그 무엇도 이렌 하르트너에게 친절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그를 위로할 수 없던 때에. 그는 시지프스였다. 하여 그는 고민한다. 자살에 대해서. 그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묻는 테제들은 지나치게 낡았다. 이렌 하르트너 그 자신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고리타분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으므로. 그는 불행한 부두에 고정된 하나의 나무 말뚝과 같았다. 소금물은 달과 지구를 따라 끝없이 흐르며 고정불변한 이렌의 위치에 밀려들어온다. 그는 그것을 온 몸으로 흡수할 수 밖에 없는 태생이며,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 갈 처지였으므로. 저항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끝장 낼 날을, 그때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렌 하르트너는 오랜 시간 남들이 자신을 가두었던 관짝인 하나의 방 속에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포기였다. 마치 지옥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정차하는 기차역의 손님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다음 열차, 또 다음 열차…… 하여, 기어이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 줄 기차의 도착 시간을 기다렸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반드시 죽을 참이었다. 이제 그 치명적 정正에 반反을 내어놓은 셈이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도 있다.’는 것. 그 방 안에 갇혀. 도구와 기계처럼 충실하며. 첫 번째로 철학적 죽음을 맞아들인 채, 이제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차는 제때에 도착해주지를 않았다.


그 해 겨울의 볕이 어떠했던가. 보이질 않았다. 다만 하늘만이 기억에 남는 겨울이다. 지나치게 짙어 사람을 죽일 것만 같은 푸르름. 이렌 하르트너는 그것마저 보지 않으려 방의 모든 빛을 가려 두었다. 빛이 자신을 서치라이트처럼 비출 때에, 그는 너무도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하늘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너는 아주 잘못 살고 있노라고. 그렇기에 그는 많은 시간 빛 대신 검은 어둠 속 잠을 택했으며, 무기력한 몸에 그 어떠한 제약도 걸지 않은 채 방 안의 의자에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그 콘크리트 상자 속에서, 수없이 많은 모니터와 한정 없이 날선 모든 서류들과 함께. 그 날도 그러했다고 말하리라. 다를 것 없는 하루. 플랫폼에 앉아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리는 한 목적지 분명한 손님의 하루.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려든다. 관짝 같은 방 안에서, 회색빛의 죽음들을 스스로 불러내어 우울한 파티를 열던 그곳에. 다른 푸른빛이 침범하여 들었다. 

 

그 푸른빛이 자신을 이끌었다. 손길로 그를 붙잡고, 이렌이 기다리던 기차가 아닌 아주 다른 기차를 타도록 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그 무엇도 없이. 이렌 하르트너가 짙은 하늘의 서치라이트 아래 몸을 움츠릴 때에 그 곁에서 또 다른 푸른빛으로 그를 가렸다. 하여, 코 끝이 싸하게 붉어지는 그 겨울에. 기차 안에서 그들은 바다로 향했다. 지옥 가는 기차역에 정차해 있던 이가 생의 바다로 가는 길로 나아간다. 이는 결코 숨통 트이는 자유에의 체험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안정일 뿐. 잔잔하고, 차갑디 차가우며, 그 안에 잠긴 이에게 아주 친절하기 짝이 없는. 숨막히는 평화. 이렌 하르트너는 차라리 그 평화에 질식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 때에 다짐했을 것이다. 기젤라. 


그 때에 이렌 하르트너는 시지프스였으며, 기젤라 이젠부르크는 그저 기젤라였다. 열 여섯의 시간. 관짝 안에 잠들어 삶의 파도가 만들어낸 거품이 그를 가리기 전에.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죽음에 대한 것을. 이렌은 한동안 자신이 삼키었던 모든 것에 대한 말을 했다. 공허를, 우울을,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을 것이다.’라는, 자신을 찔러 든 그 치명적인 정正에 대한 고백을. 스무 살이 되면 죽을 참이라는 생에의 결론을. 기젤라는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문득 이렌이 고개 들어 밀고 당기며 태동하나 또한 잔잔한 그 겨울 바다에 생生의 감상을 내어뱉었을 때 대답했다. 

예쁘지, 예쁘니까…… 우리 조금만 더 살자.


아주 짧은 순간에. 그것은 변증법이 되었다. 정正에 반反하여 결론 내린 것에 대고 기젤라가 답했다. 삶에 대한 합合을. 이렌 하르트너는 자신이 잘못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못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작에 정리되었다. 그는 태생부터 잘못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못된 죽음을 택했음을 알았다. 그 날 그는 살해되었다. 그 겨울 바다에서. 자신을 관짝에서 끌어내어 기차를 태웠던 그이에게. 살아가자고 말한 기젤라의 손에 이렌 하르트너의 정신은 또 다른 철학적 죽음을 맞았다. 무의미와 허무에 내맡겼던 정신을 빼내어, 그는 그것을 기젤라에게 주기로 마음먹었기에. 만일 네가 내게 살자고 말한다면, 나는 살아갈 셈이야. 그는 여전히 시지프스였다. 열 여섯의 시지프스는 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 없어 차라리 자살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살해되었다. 자신을 죽음에서 이끌어내려 바다를 보여 준 어느 우울한 다정함에게. 기젤라 이젠부르크에게. 하여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렌 하르트너는 다짐하였다. 철학적 죽음을 내게 주었으니, 육체적 죽음 또한 기젤라, 네 것이라고. 비극을 스스로 저지를 때에 인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곧장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 절벽으로 떨어져버리기를 택하기도 한다. 이렌 하르트너는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기젤라로 인하여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이를 끌어 안은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모든 것은 변치 않았으나. 그 발자국의 움직임 아래서. 시지프스는 지옥 가는 기차역으로 갈 생각을 그만두었다. 기젤라가 그에게 열차를 타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은,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를 터였다. 




2.

  “살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저질러진 것으로 드러났다.”²


아무도 이오카스테가 어떻게 살인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시시껄렁한 잡담 수준에서 메데이아의 살인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마녀’였기 때문이지, 이아손의 아내여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여자라는 이름 아래에 아내와 마녀라는 두 존재를 묶어 놓고서 잰 체 하며 마녀가 여성이 아닌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곤 하는데, 이 함정이 불러온 비참한 논쟁거리 중 하나가 바로 메데이아의 살인일 것이다. 이러한 영양가라고는 없는 어느 대화의 맥락 안에서 이오카스테는 그저 어쩌다 두 남편을 둔 불행한 아내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살인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조금 더 잔학히 굴자면, 우리는 가끔 이오카스테를 불행의 표상처럼, 어찌할 바 모르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 조각상을 보듯이 감상한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가 억압 이후  제 온 몸으로 받아내었던 폭력을 어떻게 세상에게 되돌려 주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이토록 극단적인 ‘여자’여! 그것만이 살해당한 자의 어느 말라붙은 핏자국 위에 쓰여진 단말마의 유언일지니. 피그말리온이 진정한 사랑을 한 이유는 그가 물物에게 생生을 바랐기 때문이며, 이 시선들은 그 애처로운 예술가의 것과도 다르다. 차라리 페티쉬에 가까웁다. 말하자면 이오카스테가 그대로 물物화 된 채 있기를 원한다. 하여 이것은 예술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못하며 변태적일 뿐이리. 그 시선 아래 놓이게 된 것이 오늘날의 이오카스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에게 발언권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오카스테의 살인에 대해 논하자. 그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했는지를. 아름다우면서 추하고 슬프면서 웃기고 성스러우면서 천박한 이 비극은 고전적이게도 남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기젤라 데메지에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더 이상 그저 기젤라가 아니게 되었던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오카스테가 되었을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결혼으로 비극을 맞게 된 훨씬 더 불행한 한 ‘여자’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엄격하고 기독교적인 규칙에 따라 명백히 정신적 외도를 저지른 이에 대해, 또한 그 파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오이디푸스가 되지 못한 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화 속 이들이 흔히 그러듯 반쯤은 테베의 피가 흘렀다. 하여 누이를 배신하고, 나라를 배신한 안티고네의 어떤 오라비처럼. 그는 한때 형식적으로나마 형제였던 이들을 살해하는 데 일조했다. 이렌 하르트너. 그러나 그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저 시지프스였다. 그 때에 그가 굴려 올리던 바위는 붙박힌 자리에서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이 하듯 너트를 조여대는 일, 말하자면 조직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고 체계를 파악하여 행동 뒤에 자리하는 그 기계적인 일 뿐이었으나. 그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 그 모든 것의 결말을 지었다. 이렌은 기젤라가 발 디단 땅이 무너지는 데에 일조하였다. 차라리 그가 오이디푸스였다면 나았을 터이다. 차라리 그가 그 행위로 인하여 기젤라와 결혼하였다면, 그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면. 그랬다면 기젤라의 정신적 외도는 자살이라는 한편으로 숭고하며 추한 생의 결론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인데,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 즈음부터 기젤라 데메지에르는 항상 이렌 하르트너와 정신적 외도를 저질러 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면에서 볼 때에 명확하며, 결혼이 하나의 ‘사회적 계약’이라는 면에서 볼 때에 흠집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녀가 결혼하였고 그가 결혼하지 않았으나 결코 넘볼 수 없는 감정이 그들 사이에 벽처럼 쌓여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때에. 그 때에 기젤라가 참으로 온전히 소유한 것은 오로지 이렌 하르트너 하나였다. 이 얌전한 기계 장치의 신 ―다루는 이가 누구이느냐에 따라 달리 움직이기만 하는― 은 기젤라의 손에서만 따뜻하던 갈라테이아였다. 기젤라는 그의 피그말리온이자 아프로디테였으며, 이오카스테였다. 이렌은 잔혹하게도 기젤라의 가족들을 몰살시키는 데에 일조하였으나 전쟁에 승리하고도 전리품처럼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또한 기젤라와 정신적 외도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렌과 기젤라는 그 때에 가해와 피해의 대척점에 서 있었으나 또한 은밀한 공범들이었으며, 함께 절벽 위에 서 있는 신부와 그 연인이었다.   


햇볕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때가 있다. 볕이 아주 따가운 때에. 눈이 부셔 찡그려진 미간 위를 소금기 가득한 땀으로 적시고, 마침내 따가움에 눈을 감게 되면 방아쇠가 당겨진다. 살인은 그렇게 저질러지기도 한다. 


그 곳은 여름의 바다였다. 기젤라는 맨발로 걸었다. 검은 머릿결이 죽음처럼 내려앉았으나 잔혹한 생生이 그것을 빛나게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참으로 아름답다 경탄하였을 테지만, 그 때에 그녀는 추하였다. 비참하여 어떠한 힘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기이하도록 힘차게 걷는다. 가족 잃은 여자 치고는 지나치게 기운차도록. 비극 이후 기젤라는 죽음을 생각했다. 가족 잃은 이오카스테는 자신 살해를 생각했다. 살해야말로 우습다. 죽음은 아무 것도 돌려 주지를 못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젤라는 생각했다.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할 저열하고 무차별적인 해결방안을 고민한다. 그것이 어떤, ‘여자’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폭력을 되돌려 주는 한 형태가 아닌가. 하여, 그가 왜 여름 알제리 바닷가에 버금가던 햇볕 아래를 걷고 있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뒤에 따르는 이가 이렌 하르트너이므로.


저 활발한 햇볕은 널뛰는 광기의 왈츠를 추며 기젤라를 비춘다. 허덕이며 걷는 걸음이 이어진다. 쓰러지기 전 악다구니처럼. 꼭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 버릴 것처럼, 기젤라는 걸었다. 앞으로, 앞으로, 한정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은 열기와 숨통 조이는 소금기에 정신을 내맡긴 채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렌 하르트너는 그 뒤에 따르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파도 바로 앞, 이렌이 기젤라를 붙잡는다. 덜컥, 스텝을 잊은 왈츠 무희와 같이, 기젤라는 흔들리며 멈추어졌다. 


다쳤잖아.


이렌이 무릎을 꿇는다. 소금물에 먼저 젖어드는 것은 기젤라의 하얀 발이 아닌 이렌 하르트너의 검디검은 옷이며, 긁혀나간 발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은 모랫바닥 아닌 이렌의 손바닥 위에 떨구어진다. 접촉은 항상 그렇게 이루어졌다. 기젤라는 멍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고, 이렌이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감싸는 것을 본다. 바다에 오는 내내 그들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이렌은 기젤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감히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기젤라 또한 알았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따갑지도 않을 긁힌 상처 하나. 고작 그것 하나가 파도에 닿는 일을 멈추게 하려고. 내가 가진 것이 오로지 너 하나야. 기젤라는 중얼거렸다. 그 때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되지 않은 자를 증오했다. 혈연처럼 아껴 고작하여 자신과 정신적인 외도만을 저지르고 있는 이. 성스럽게 자신을 대하면서 추하게 만드는 이. 차라리 네가 나를 취하였다면, 그랬다면 나는 너를 마음껏 원망했으리라. 그러나 이렌 하르트너는 기젤라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만을 원망한다. 아내 되어버린 여자는 그렇게 되었다. 그리하여 살해를 생각했다. 그 넘쳐 흐르는 분노를 이렌에게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젤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삼켜낸 눈물이 꽝꽝 얼은 한기 되어 몸을 떨리게 한다. 흑단 같은 머릿결이 눈물 대신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린다. 감긴 두 눈이 태양을 향하고.     


이오카스테가 고백하였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노라고, 이 비극이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간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갈 수 없노라고. 한동안 자신이 삼키었던 모든 것을 내어뱉었다. 유리 구두도 없이, 키스도 없이. 그저 다친 발을 감싸 쥔 그의 기사이자 충견은 말이 없었다. 문득 기젤라가 고개 들어 밀고 당기며 태동하나 또한 광기스러운 열기 가득찬 그 여름 바다에 사死의 찬미를 내어뱉는다. 눈이 부셔서, 저 볕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으며 또한 너무도 눈이 부셔서. 


이럴거면 우리 같이 죽자. 



왈칵, 쏟아진다. 이오카스테가 시지프스의 위로 쏟아져 내린다. 여윈 몸이 파도처럼 그를 덮칠 때에, 고정불변한 말뚝처럼 해변가에 자리했던 이렌 하르트너는 그것을 그저 받아내었다. 이제 해변에 나뒹군 그들을 소금물이 적신다. 울지 못한 자들은 눈물 대신 파도에 젖어 불행할진저. 기젤라가 입을 맞춘다. 다소간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그 입맞춤 또한 그는 그저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들이 이어 온 정신적 외도에 대한 파경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입술이 떨어져 나간 후에 기젤라의 양 손이 이렌의 목 위에 놓인다. 그는 그것마저 받아내었다. 한 순간 그는 얄팍한 속죄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렌 하르트너는 아주 온순한 태도로, 그 숭고한 손이 제 목을 조르도록 내버려 둔 채. 자신을 살해중인 자의 뺨 위에 굴러떨어진 눈물 방울을 닦아 내는 것 따위의 행동을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릴 적 기젤라가 자신의 얼굴에 물방울을 튕겼을 때처럼. 아주 여상하기 짝이 없게. 수건을 들어 그녀의 손을 먼저 닦아내었던 때와 같이.


그렇게 그는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 채 가만히 찾아올 육체적 죽음을 생각하려 했다. 희뜬 눈이 아닌 차분한 겨울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가 저기 있다. 이렌은 그곳이 자신이 잠겨들 자리임을 알았다. 이오카스테가 살해를 시도한다. 기젤라의 결혼 반지가 목 위를 짓누를 때, 이렌은 눈을 떴다. 모든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속죄란 죽음으로도 치루어 질 수 있으나, 그것은 적절한 때와 적절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시지프스는 이미 그 손에 살해된 지 오래일진대. 그가 굴려내야 할 바위는 이제 오로지 하나이지 않은가. 기젤라, 그리하여 그는 드물게 어느 작은 저항이라는 것을 보였다. 손을 뻗어 기젤라의 손목을 감싸고서, 숨이 모자라 붉어진 얼굴로 기침소리처럼 내뱉는다.


그만해. 울고 있으면서……


기젤라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비명 끝에 악다구니처럼 울음이 따라 붙었다. 고개를 떨군 채로 그는 소리처럼 울음을 내질러댔다. 그 한 마디가 기어이 분노의 칼 끝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것을 멈추어 세우려 내뱉은 걱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러나. 그 뿌리에 자리한 어느 거대한 연민과 애정의 크기가 지나치게 거대하여 기젤라에게는 차라리 그것이 협박처럼 느껴질 지경이 아닌가. 그 말 끝에 들러붙은 어떤 확신. 자신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만 쓰이는 그 확신. 기젤라 자신 또한 알고 있었다. 바다에 데려다 줄 이는 저 햇볕 아래 파도처럼 차고 넘치지만, 자신의 바다를 더럽힐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 뿐인 것을. 아니, ‘함께 바다에 온 것’을 치명적 기억으로 삼을 수 있는 이가 단 한 사람 뿐인 것을 그녀도 알았다. 그들이 공유한 가장 거대한 어느 핵심적 감정에 대한 꿰뚫음. 그 창 끝에 기젤라 홀로 서 있었다면 모를 일이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내던졌을 터이니. 그러니 보라, 저 감정 없이 옅은 눈동자에 찰랑대는 어느 파도들을. 기젤라는 홀로 울고 있지 않았다. 이렌 하르트너가 그 창 끝 앞에서마저 기젤라와 함께이기를 택했기에. 롱기누스의 창 앞에서 순교자와 도둑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서로가 꿰뚫린 채 끌어안았다. 그대로 영원히. 


그래서 살해는 그곳에서 멈춘다. 가냘픈 손마디에 풀려 나간 힘은 이렌이 대신하였다. 떨리는 어깨를 그가 안아든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마침내 기젤라는 아주 지쳐 버린 이가 그러하듯이, 악다구니 같던 몸짓을 멈춘 채 축 늘어지고, 얼어붙었던 눈물이 녹아 한정 없이 쏟아져 나오며. 붙들었던 숨통에서 풀려든 손을 이렌이 다시 감싸 쥐었을 때. 기젤라는 어긋난 기계가 다시 돌아갈 때에 쇳소리를 내듯 흐느꼈다. 



차라리 살고 싶다고 말해.

……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해.



이렌 하르트너는 침묵한다. 그는 기젤라 앞에서 진실이 아닌 것은 내어놓지 못하기에. 그저 그 몸을 안아들 뿐이다. 목 주위 벌겋게 찍혀든 살해 시도에 대한 낙인을 지닌 채. 시지프스는 해변을 걸어간다. 이오카스테를 안아 들고서. 기젤라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 온순함 안에서, 기젤라는 문득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꼈다. 이렌의 몸이 볕을 가린다. 이제 더 이상 눈 따갑도록 자신을 찔러 대던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젤라는 탈력과 희열에 젖어 그렇게 말했다.   



이렌, 우리 너무 멀리 왔어. 그렇지? … 이 무너짐을 막을 수가 없어……


다시, 이렌 하르트너가 침묵한다. 기젤라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중얼대었다. 멀리 와 보았자 결국 바다로구나. 이렌은 묵묵히 걸어 나갔다. 옷에 들러붙었던 소금기가 말라 버석댄다. 그런 품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는 오직 이렌 하르트너, 그 하나 뿐이다. 아무 것도 상관이 없다. 기젤라는 자신이 그 품 안에서 그저 기젤라 이젠부르크임을 알았다. 그가 형제의 아내든, 보스의 아내든, 혹은 과부든 간에. 이렌은 자신을 오로지 열 여섯 그날의 겨울 바다에 데려가 주었던 이로 보아 줄 터라고, 그렇게 확신했다. 너 나를 아주 사랑하는구나. 기젤라가 말했을 때, 이렌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답했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를 사랑하겠어. 기젤라는 작게 젖은 웃음소리를 낸다. 바보 같아. 그리고 웅크려 그 품에 온전히 기댄 채로 몸을 내맡겼다. 이제 이오카스테는 생존을 생각한다. 자신 살해가 실패한 이후에, 기어이 목적이라는 머리를 달고 뱀처럼 기어 어느 오만함의 발뒤꿈치를 깨물 생각을 한다. 이미 손에 쥐어 보았던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으로 끝내려 했던 그 숨통에서 넘쳐 흘러나온 한 다정이자 잔인함을 생각하며. 이오카스테는 남편 살해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곁에 이렌 하르트너가 있어 발화된 일이며, 이렌 하르트너가 있어 마무리될 한 비극이 될 터였다.  




3.

“난 오늘 행복해요…… 날 위해 우는…… 당신을 보았기 때문이에요.”³



모든 비극의 끝에는 죽음이 자리한다. 그것이 자살이던, 살해이던 간에. 누군가의 말마따나 행복은 비스무리한 이유로 찾아오지만 불행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채 찾아오므로. 비극의 끝이 일부 판에 박힌 죽음이라는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비悲라는 이름이 붙여진 어느 이야기의 결말들이 실은 ‘비스무리한 이유로 찾아온’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논지의 말을 꺼내게 만든다. 서사 속 인물들이 맞아 드는 것이 자살이건, 살해이건, 혹은 그 모든 것을 동반한 실존이건 간에. 그들이 비슷한 결말 속에서 차라리 행복하리란 생각을 하여 본 적 있는가? 여기서의 비悲는 그렇다면 그들의 몫이 아니게 될 것이다. 다만 관객의 몫일 뿐. 


그러니 반드시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의 결말을 묶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지프스는 자살했다. 이오카스테는 살해했다. 두 인물은 비극 끝에 실존을 삼킨다. 이들의 정신적 외도가 파경을 맞았을 때에 죽은 정신의 그가 사랑을 고백하였고, 자기 살해를 결심하였던 그이는 칼날을 돌렸다. 누군가가 그래서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야 하리라.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도 없는 법이다.’라고. 붕괴 이후의 바다는 침몰한 잔해를 감싸 안은 채 그대로 평화롭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끔 그들은 물결치는 시트와 쿠션이 있는 침대 위에 누워 허물 벗어던진 채 끌어안고서 함께 항해했다. 서로가 서로의 파도가 되어 덮쳐 들었다가도 물러난다. 세이렌처럼 이름을 부르다가도 카리브디스처럼 삼켜내고, 스킬라처럼 갈기갈기 찢어낸다. 뒤엉킨 시련과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그것만이 그들의 바다가 사납기 짝이 없는 순간이며, 살갗이 부딪혀대며 깨어진 모든 것들에 대한 파열음의 노래를 소리내는 순간이었으리라. 마침내 배 한 척이 항구에 정박하여 뭍과 물이 합일되었을 때에서야 그들은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며. 기어이 늑골 안 깊숙히 들러붙은 핏덩어리 토해내듯 서로를 부른다. 종항終航. 그 끝에는 오로지 평화만이 있다. 



…다시 보니 별로인 것 같아.

뭐가? 

네 외투. 



어느 날엔가, 항해를 마치고 함께 누워 있던 때에, 기젤라가 검은 머리칼 사이로 손 뻗어 이렌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손끝에 닿는 살결을 아이 대하듯 보들보들 어르며. 이렌은 여전히 물기 고인 눈을 돌려 그를 본다. 아무런 의문도, 의심도 없이 답해지는 말. 



갈아 입을게. 

됐어. 

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 

네 옷장 속에 있는 것들로 갈아 입는 건 안 돼. 



작금의 순간에, 그토록 사납던 옅은 물빛의 파도 같은 눈이 온순해진다. 항해가 끝나면 늘 그렇듯 그는 다시 기젤라의 충실한 갈라테이아로 돌아왔으므로. 그 흰 손에 뺨을 기대며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다. 기젤라는 그것이 기꺼워 웃는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네 옷을 한 벌 맞춰야겠어. 

…다시? 

날 파티에 데려가야지.




기젤라가 몸을 일으킨다. 흰 살결 줄기 따라 해로海路처럼 남은 붉은 자국들이 어둠 사이로 흐릿하다. 이렌 하르트너는 굴러떨어지는 진주 같은 땀방울이 식어들기 전에 그에게 가운을 걸쳐 주려 일어났다. 이오카스테의 뒤에는 늘 시지프스가 따른다. 기젤라는 이렌이 걸쳐 주는 옷을 입은 채 가만히 서 있고, 이렌은 무릎 꿇은 채 허리끈을 둘러 매듭을 짓는다. 그 때에, 심연과 파도는 다시 만난다. 그 속에 어느 정당한 복수심에 의해 거세된 모든 태초의 증오들을 가라앉혀 거품Άφρος을 일으키고, 거품을 통해 미가, 성애가, 욕망이 태어난다. 그들의 화학 작용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작게 연 창문 틈 사이로 서풍이 불어온다. 이렌이 그 창문을 닫으려 들었을 때, 기젤라는 그를 말렸다. 



내버려 둬. 

혹시 몰라. 

이렌, 

… … 

네가 내 옆에 있잖아. 



제피로스의 축복. 어쩌면 그곳에서 비롯된 자신감, 꾸역꾸역 배어드는 햇살을 자신의 몸으로 가려 드는 어느 회색빛 어둠. 충실한 기계 장치의 신이자 기젤라의 가장 끔찍한 흉터. 만일 틈새를 파고 들어 어느 눈 먼 총알이 날아 온다 해도 이렌은 기꺼이 기젤라의 앞을 막아 설 터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버려 두었다. 이렌이 기어이 창문을 닫는다. 그 고집 또한 내버려 둘 만큼 자비로우며 잔혹한 이렌의 가장 끔찍한 흉터, 기젤라. 그가 뻐근한 몸을 굴곡시켜 기지개를 켠다. 고양이처럼 둥글게 말린 등 위에 남은 일시적인 상처는 곧 나을 터였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를 주기적으로 상처내기를 택하는 일은 간혹 비정기적으로 서로에게 파고드는 환상통을 잠시나마 잊어 보기 위함과 같았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 … 아파. 



기젤라가 쿡쿡 웃었다. 이렌이 끌어안았던 몸, 허리, 그가 파고들어 남김 없이 탐해 보려 했던 어느 내밀하고 연한 속 살갗까지. 그 말에 제 뒤에 선 시지프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디가 아파, … 내가 한 것 때문에? 

전부,



그리고 그 검은 머리칼의 슬픔은 양 팔로 제 몸을 한껏 감싸 든다. 고통에의 충족, 그는 이렌이 자기에게 쩔쩔 매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어찌 보면 그 때에 기젤라가 느끼기에는, 마치 이렌이 아주 온전히 자신만의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항상 그러했다. 시지프스의 열 여섯 이후로 언제나 그래 왔다. 어떤 사건 이후로 고개 드는 의심들은 그렇게 채워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기젤라는 장난처럼 내뱉고, 이렌은 심각하기 짝이 없게 반응한다. 전부, 그 말에 사내는 드러나지 않을 만큼만 허둥대고 있으며 여인은 그 반응을 잡아채어 제 품 안에 넣는다. 이렌이 기젤라에게 다가갔을 때, 기젤라는 몸을 돌렸다. 자연스레 팔을 벌리고, 흉터가 흉터를 안아 든다. 그가 되돌이킨다. 이제 곧 그들은 파티에 가야 하고, 기젤라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만들어 낸 고통이 있노라고. 그래서 이렌은 철학적 자살에의 말을 내뱉었다.



너는 파티에 가야 하는데. 

네 잘못이야. 

… … 내 잘못이야. 

착하네. 



기젤라는 살해에 다시 한 번 성공했으며, 손을 뻗어 이렌의 양 볼을 잡았다. 아이 어르듯. 이내 그 흰 손가락이 굳게 다물어진 두 입술을 벌리고, 입 안을 헤집는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속 살갗을 거침없이 휘저어낸다. 선단 끝에 걸려 드는 속살이 상처나는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마저 어쩌면, 방금 전 이렌이 자신에게 행한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렌은 입을 벌린 채 기젤라의 행동에 자신을 내맡겼고, 마침내 단단한 송곳니 끝에 손톱이 부딪혔을 때 기젤라가 그 끝을 가벼이 건드린다.



날카로워, 이걸로 날 물었어. 

……미안해. 

난 아주 아팠는데, 

…내 잘못이야. 

그럼 됐어. … 널 용서할게.



기젤라가 웃었다. 이렌은 송곳니 끝에 닿은 그 손가락에도 상처가 날까 두려워 그만 그 손을 감싸 쥐어 내렸다. 대신 입술이 닿는다. 타고나길 날카로운 그 골편 대신에 자신이 지닌 부드러운 살결을 내어 주기를 택한다. 그가 손끝에 입을 맞추면 기젤라는 다시 몸을 늘어뜨린다. 품 안에서 내려서게 되면, 그 발걸음을 따라 그녀는 기젤라 이젠부르크에서 돈나 데메지에르가 되었다. 



피곤하지 않아? 

네가 있잖아. 

……

네 옷을 맞춰야지. 

지금?

지금. 



기젤라가 돌아선다. 푸른 눈과, 의안이 이렌을 본다. 이렌의 두 눈은 온전하다. 그러나 기젤라의 두 눈을 그렇지 않다. 폐부 깊숙히 다른 색의 것들이 찔러 들 때에 사내는 더더욱 거절할 수 없음에. 고개를 끄덕일 뿐. 두 사람 사이 정해진 어느 도식은 오늘도 어김없이 행해진다. 기젤라는 이렌에게 자신을 내맡긴 것처럼 행동하고, 이렌은 기젤라를 지탱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훌륭한 연극 뒤에 따라오는 카타르시스는 그들만의 것이다. 그것마저도 관객에게 내어 줄 수 없는 온전한 서로만의 것이기에. 그들은 고통에의 충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자, 이제 다시 막이 오른다. 그들이 항해했던 시트와 쿠션의 바다를 뒤로 한 채, 닫혀든 제피로스의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람 받아 어느 배가 출항한다. 그러므로, 그 순간에는 돈나 데메지에르와 그의 충실한 심복이 방을 나서는 셈인 것이다. 이렌은 기젤라가 내민 손을 받아 든 채 그녀를 따른다. 기젤라는 이렌의 손을 잡은 채 나아간다. 그들이 항해를 시작하는 방식은 그러했다. 자살과 살해의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산적한 흉터를 가끔씩만 끌어안으며.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어느 비극의 끝이 자살이건, 살해이건, 혹은 그 모든 것을 동반한 실존이건 간에. 그들은 어쩌면 행복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비悲는 관객의 몫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저 둘만의 것이다. 이렌과 기젤라, 시지프스와 이오카스테, 서로의 가장 끔찍한 흉터들이 일으킨 거품 속에 태어난 어느 미美. 그것은 성숙하게 비참하기를 택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아무 상관도 없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정말이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법이다. 


그들은 사라지며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다. 상대의 숨에 자신의 숨을 맞추고. 이제 바다로 간다. 물로 들어간다. 이제 서로는 해파리가 되어, 눈도 코도 없이. 생각도 없이. 


자신들만의 바다로 잠겨든다. 비가역적으로, 그리고 유한하게. 그렇게 서로 살해되었다. 


¹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민음사.

²프란츠 카프카, <형제 살해>, 을유문화사.

³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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