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카일] 만우절
당신의 커피에 독을 넣었어요
어벤츄린 씨, 제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세요.
늘려 말하는 이름. 상대를 질책한다기보다 투정에 가까웠다. 그만큼 확실한 감정이 담겨있는데도 목소리의 톤은 큰 변화가 없다. 이질적인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그 내용에 의문이 들었다. 머릿속이 채 정리도 되기 전에 어벤츄린은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오늘 누군가와 약속을 한 적이 없을텐데.”
거기까지 말하고 어벤츄린은 시야가 어둡다는 걸 깨달았다. 왜 어둡지? 그야, 눈을 감고 있으니까. 답지 않은 바보 같은 자문자답에 스스로 놀라면서 멍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눈을 떴다. 살짝 어두운 방은 드림풀의 물과 비눗방울로 은은하게 빛난다. 제일 먼저 들어온 광경은 한쪽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흐물흐한 자세로 목소리로 예상한 표정 그대로 목소리의 주인은 어벤츄린을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았다? 어벤츄린은 드림풀 안에 몸을 누여있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찰랑, 어벤츄린이 몸을 일으키면 확실하게 액체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생생했다. 촉감, 시각, 청각, 살짝 깨문 입안 여린 살의 통각도 문제없다. 아니,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에 어벤츄린은 다소 거친 숨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자신은 꿈속에 있었나?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두통이 머리를 잠식하지만, 그는 적어도 눈앞의 상대에게 있어서는 여유롭게 보일 몸짓으로 드림풀에서 벗어났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어벤츄린이 준비한 장면에 얼굴을 희게 질렸다.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었고 그가 가야 할 곳으로 보냈었다. 지금의 그는 그때보다 훨씬 풀어진 상태로 당연한 존재인 것처럼 어벤츄린의 방에 편히 앉아있었다. 이젠 어벤츄린은 내려보고 상대는 고개를 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한다. 빛나는 금안은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모른다는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확실히 연락처를 교환하였지만, 사적인 약속을 잡은 기억은 없었다. 그럴 상황도 아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대는 어벤츄린과 눈을 마주하자 이렇게 상대를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발뺌하냐며 크게 볼을 부풀렸다. 아, 정말로 어린애 그 자체다. 몸은 커다란데 이렇게 솔직한 반응이 어벤츄린은 매번 새로웠다.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건, 그가 무명객이기 때문일까? 모든 무명객이 이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벤츄린은 스스로가 답을 내릴 수 없는 범위를 개척자이기 때문에, 라는 답으로 뭉뚱그려버렸다. 오히려 이런 편이 편하지 않은가. 감정을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분노도 자신의 손으로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승률이 조금 더 오를 텐데.
침묵을 고수하는 어벤츄린이 어찌 됐든 상대는 어벤츄린이 나타났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듯 풀어진 표정으로 반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금세 감정이 바뀌는 역시 흥미로운 일이다.
호텔 방의 방문은 닫혀있고 시력 좋은 어벤츄린은 제대로 잠겨있는 것도 확인했다. 방 한쪽에 놓인 필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짐은 자신이 마지막에 둔 기억과 같았다. 일어나기 전과 다름없는 자신의 방을 확인한 어벤츄린은 불청객은 상대임을 다시금 인지하면서도 얌전히 그의 초대에 응했다.
“그래서 친구,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었지?”
어벤츄린이 계속해서 장난이라도 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자신의 기억력을 얕보지 말라며 그는 테이블에 놓인 잔을 가리켰다. 커피 만들어 주기로 했잖아요.
“내가 너에게? 아니면 네가 나에게?”
전 커피 안 좋아하는데요. 당연히 제가 당신에게, 죠.
당연히, 라는 말이 붙을 만큼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여전히 어벤츄린에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는 상황이 흘러가는 걸 관조하기로 했다. 그가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어벤츄린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어벤츄린이 질문을 더 하기도 전에 그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히메코 씨는 커피 내리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에 그 기술을 받아서요. 커피는 쓰기만 하고 무슨 맛으로 먹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카페인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의존이 강하다 하잖아요. 남들에게 필요한 걸 배워두는 걸 언젠가 쓸 일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즉, 남을 도와주자는 개척자의 정신으로 도전해 두기로 했죠. 그래서 이제 이걸 누군가에게 대접할 일만 남았는데 히메코 씨에게 배웠다 하니 다들 마셔주지 않더라고요. 길가에 무료 커피 부스라도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때마침 어벤츄린 씨가 마셔보고 싶다 하니 이렇게 몸소 당신이 말한 시간에 찾아왔는데 어떻게 매정하게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어벤츄린은 태클 걸 여러 부분을 무시하며 그런 상황으로 이해하겠다는 의미로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커피 메이커도 없는 테이블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새까만 액체가 담긴 잔만이 두 개 놓여있었다.
“그건 참 미안하네, 오래 기다렸어?”
70,560분 정도 기다렸죠.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하겠지만,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깐 제 역작을 마셔주는 걸로 용서해 줄게요.
상당한 숫자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어벤츄린이 장난스럽게 그러나 우아하게 손을 가슴에 대며 가볍게 감사의 뜻을 했다.
“어쩌면 나는 낼 수도 있을 텐데?”
얘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돈은 아껴 쓰세요. 그리고 앞으로 60,480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까지 전부 내시려고요? 그땐 커피가 아니라 칵테일을 준비할게요.
“네 시간 개념이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전에 칵테일도 만들 줄 아는 거야? 놀라운데.”
좀 더 여러 가지 말할 줄 알았던 어벤츄린의 예상과 다르게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벤츄린은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방엔 어떻게 들어왔어?” 당연히 문 열고 들어왔죠.
컴퍼니의 사절로 온 이상 객실의 문을 잠그든 안 잠그든 감시의 눈은 그런 얄팍한 벽에 연연하지 않고 따라붙었다. 그렇다 해서 문을 잠그지도 않고 드림풀에 들어갈 정도로 신경이 두껍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개척자에게 문단속을 잘하라고 일러둔 것도 자신이지 않은가.
하지만, 눈앞의 개척자는 잠이 덜 깼냐는 눈빛으로 정신 차리라는 시늉을 보였다. 그가 안 본 잠깐 사이 능숙한 연기를 배워냈거나, 혹은 본인이 아니거나. 그러나 어벤츄린은 양쪽의 가정을 지워버렸다.
남들에겐 운과 감이 뛰어나 보이는 어벤츄린이지만, 실제 그의 일을 뜯어보면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 어벤츄린이 오직 감각적인 계산으로 일을 판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벤츄린은 세상에는 계산만으로 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가령, 사람의 감정.
“그나저나 커피라고 주장하는 이 검은 액체를 보면 그 누구도 마시고 싶지 않겠어. 무명객들은 먹는 음식조차 평범하지 않은 거야?”
새까만 액체는 도리어 구정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향은 신기하게도 매혹적일 정도로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지만, 선뜻 손이 나가기 쉽지 않은 색이었다.
저희도 평범한 식감을 가지고 있거든요! 히메코 씨 커피는 많이, 음, 조금 특이한 맛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제가 만들어도 그 맛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오리지널로 추가 재료를 넣어봤어요. 그랬더니 색이 변했어요. 기술은 전수 해도 맛은 다를 수 있는 법이죠.
“그래서 무엇을 넣으면 대체 이런 색이 나오는 건데?”
“독이요.”
습관처럼 테이블을 톡톡 치던 어벤츄린의 손가락이 일순 멈추다 다시 규칙적인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개척자는 줄곧 태연했다.
후후, 놀랐죠?
“단순한 거짓말이었어?”
물론 아니죠!
“하지만 안타깝네. 이런 상황은 도박사인 나에겐 꽤 흔한 일이라 큰 여흥은 주지 못해.”
실제로 어벤츄린의 일생에서 이것보다 더한 상황 속에서 목숨을 건 도박은 수도 없이 일어났다. 목숨을 거는데 이렇게 마음 편한 도박 자리는 있을 수 없었다. 어벤츄린은 항상 끝에 몰리도록 상황을 만드는데 제격이었고 그러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행운은 어벤츄린에게 돌아왔다.
그건 대체 무슨 인생이냐는 듯 개척자의 안쓰럽다는 동정심의 눈빛을 본 어벤츄린은, 아니, 눈을 한 번 깜박이면 그런 장면은 없었다는 듯 개척자는 어린애처럼 자신이 상상한 것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불퉁한 표정은 어벤츄린이 가장 많이 본 그의 감정 중 하나였다.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 거야, 친구?”
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확연한 진심이었다. 올곧은 눈을 마주하는 것이 꺼려져 자연스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독이 들어있다며?”
하지만 저는 죽이지 않아요. 그리고 어벤츄린 씨는 도박을 좋아하니깐 단순히 커피만 드리면 재미없잖아요? 저는 어벤츄린 씨가 고르고 남은 한 잔을 마실 거예요.
“도박이라면 이게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어벤츄린은 이런 시답잖은, 도박도 되지 못한 내기로 목숨 (정말 죽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을 날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쓰일 곳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그리고 개척자 역시 그 무대의 주역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도 그는 안전하게 그의 동료인 열차 일행과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제가 만든 커피를 드실 수 있는 특권을 드리는 건데요?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맹랑함을 넘어 오만한 대답이었다. 어떤 일류의 바리스타가 끓인 커피라 할지라도 목숨과 비교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친구, 평생 커피를 끓여주려고? 설령 그렇다 해도 이건 계산할 필요도 없는 차이라는 건 누가 봐도 잘 알지 않을까?”
물론, 당신은 알고 있죠. 커피값이 그렇게 값싸지 않다는걸.
‘그것’은 개척자의 얼굴로 빙그레 웃는다. 어벤츄린이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 미소에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었다. 그라면 이런 내용의 내기를 꺼내오지 않을 것이다. 그라면 애당초 이런 일로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어벤츄린은 자신이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 눈치챘다.
“꿈속에서 솔글래드를 너무 마셨나? 아니면 드디어 내가 정신이 나간 건.”
정말로? 그것은 마치 어벤츄린이 칩을 굴릴 때와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벤츄린 씨는 드실 거예요. 왜냐면 개척자만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니깐요.”
“하, 무언가 개척이라도 해주려고? 확실히 미지의 커피를 마신다는 점에선 나도 개척의 정신을 도전받고 있는 거 같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벤츄린은 이 액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은 꿈속에서 가설을 실험해 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스스로에게 시도했다. 가장 먼저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방법부터 시도했다. 공중에서 몸을 던지면 부유감도 잠시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현실에 깨어났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꿈속에서도 무기는 원한다면 얻을 수 있었다. 살상력은 높지 않아 어벤츄린에겐 장난감과 다름없는 것들이지만, 조금만 손보면 사람 한 명의 목숨을 끊는 건 쉬운 일이었다.
철컥, 익숙하게 장전한 총을 손에 쥐었다. 가장 많이 노린 위치는 당연히 심장 쪽이었다. 상대에게 선택권을 쥐여주듯 총을 건네며 자신의 가슴팍으로 총구를 갖다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장과 흥분으로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어벤츄린은 상대가 다른 곳을 못 보게 눈을 마주하고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었다.
어벤츄린은 기억 속 상황처럼 총구를 심장 이어 관자놀이 순서대로 한 번씩 대보았다. 마찬가지로 떨리는 손끝은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 발밖에 장전되어 있지 않은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대로 현실에서 눈을 뜨면 어벤츄린은 가설의 입증을 마무리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벤츄린은 여전히 꿈속에 남아있었다. 이곳이 시계의 어떤 초침도 가리키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꿈속이라는 걸 알았다. 이곳은 어벤츄린의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었다.
그러니 어벤츄린이 상상한 개척자가 내미는 커피잔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기에 당신은 결국 고를 수밖에 없어요. 마음 같아선 대신 골라주고 싶지만, 저는 그럴 수 없잖아요. 이건 당신의 몫이죠.
혼자 남겨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동안 염원한 끝이 드디어 올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벤츄린이 아는 불만스러운 개척자의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말고 다른 건 없어?”
당신이 결정해 봐요.
“상상력 부족이라고 지적받을 줄 몰랐는데.”
그런 말 한 적 없거든요.
눈을 떴을 때부터 마주한 변함없는 표정은 꿈속이라도 살아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웠다. 현실의 그는 좀 더 다채로운 감정을 내뿜고 있었다. 살아있음을 누구보다 피력하며 주변 동료를 아끼고 쉽게 믿음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겐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설령 알고 있더라도 그는 달려든다.
스텔라론이 담긴 그릇은 확실히 탐날만한 그릇이었다. 엮어놓은 각본에서 어벤츄린이 관여한 부분을 다소 고치고 싶을 정도로.
그와 이루는 대화는 미룬 일을 처리하는 일과 같았다. 일은 제때 해치우는 어벤츄린이 지금까지도 손을 대지 않은 건, 이건 지금까지의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 봐온 것들, 느낀 것들. 모든 것은 어벤츄린이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삶을 좇는 사람으로 인해 재구성된다.
어벤츄린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행운은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는 걸 알았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해당했다. 타인이 스러지는 걸 보지 못해 혼자 일을 처리하면서도 유년기의 기억을 버리지는 못해 보존의 길을 택했다. 고독한 길이었다.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은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 난 거 같았다.
“어느 쪽을 골라도 결과는 똑같잖아.”
한 잔의 컵을 가져와 그대로 꿀꺽, 한 모금 넘겼다. 일반 커피와 달리 아주 진득한 액체는 쉽게 식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입안에 머금었다. 구정물 같은 색은 딱 그러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커피라니 재밌는 소리다. 토기가 올라오지만, 어벤츄린은 마치 고급스러운 와인을 마시는 것 마냥 한두 번 액체라고 주장하는 것을 입안에 굴렸다. 이것보다 더한 것도 먹어본 적 있지 않은가. 혀는 통각을 잡아내고 코는 악취를 맡았다. 그러나 곧 그런 감각들은 사그라들더니 잔재조차 남지 않고 맛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히메코 씨의 취향이라고 하기보다 어린애 같은 그에게 더 잘 어울리는 달달한 맛. 어벤츄린은 그대로 액체를 넘겼다.
어벤츄린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것은 어벤츄린과 같은 인간에겐 독이다.
“그래서 맛은 어때요?”
“대답이 필요한 부분이야? 한 잔으로 충분한 거 같아. 자, 이제 네 차례야. 친구.”
남은 잔을 가져간 개척자의 잔은 어벤츄린 것과 다르게 평범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어벤츄린과 달리 망설임 없이 삼켰다. 어벤츄린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맛이 어때.
“물처럼 아무 맛도 안 날 줄 알았는데 조금은 쓰네요. 커피라서 그런가? 쓴 건 싫은데…….”
“뭐랄까, 조금 아쉽네.”
맛에 영향을 준 건 누구의 영향인 걸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의 그것으로부턴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뭐가 아쉬워요. 우리 둘 다 같은데.”
개척자에겐 무엇보다 쉬운 것이 어벤츄린에겐 무엇보다 어려운 것. 개척자의 얼굴을 빌리며 공간을 만들어내며 꿈속으로 불러들인 건 다름없는 어벤츄린 자신. 스스로 답을 내지 못하면서 상상으로 엮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어벤츄린은 결국엔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 꿈을 만들어낸 시점부터 결과는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마실 만했죠?”
그 질문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어벤츄린은 전부 마셨으니까. 잔 바닥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개척자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용건은 끝났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노곤함이 덮쳐왔다. 사람은 왜 잠을 자는 걸까, 그건 죽음을 예행하는 연습이기 때문이지. 어벤츄린은 죽음을 앞두고 또 한 번 죽는다.
꿈에서 깼다.
눈을 뜨면 똑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방안은 살짝 어두웠고 문은 제대로 잠겨있고 짐은 한곳에 놓여 있으며 어벤츄린은 드림풀에 누워 있었다. 다만 다른 건 방안을 채우는 커피 향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벤츄린 혼자 방 안에 있을 뿐이었다.
일어서려던 어벤츄린은 현기증이 나는 두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도로 주저앉았다. 총알이 머리를 뚫고 지나간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환상통이었다. 고통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어벤츄린은 실소를 흘렸다.
‘부작용 같은 건 없다면서.’
어벤츄린은 확실히 독을 먹었다. 해독제는 분명 그의 손에 달려 있지만, 어벤츄린은 중독 상태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드림풀의 물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단지 액체의 흘러가는 느낌만이 살결에 닿을 뿐. 그러나 액체를 담고 있는 욕조는 확실하게 차가웠다. 어벤츄린은 페나코니에서 이어지는 싸늘함을 느꼈다. 서늘함이라기보다 이 감정은,
“아, 역시 따듯한 커피가 훨씬 좋아.”
어벤츄린은 다시 등을 기대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에게 주어진 잠깐의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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