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남(_1)
유예남. 토벌 초입~.
글쎄. 정확히 언제 눈치를 챈 건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이걸 눈치라고 해도 되는 걸지도 의문이다. 다만 확실한건 하나, 이 상황이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둘, 자신은 언젠가부터, 아마 이 섬으로 오기 전부터 받아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아차린 정보는 이성과 감정 어느쪽에 더 기울어진걸까. 의문이 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그들의 답변을 생각해봤다. 섬에 온 후로 생긴 습관이었다.
누나는 나랑 비슷하니 그런건 됐다며 검을 잡는 폼을 지적했을 터고
형은 결국 모든건 감각이라며 날 칭찬해 주었을 거다.
막내누나는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날 타박했겠지.
그리고 후시는.
"으앗!"
찰나의 생각속 스쳐간건 말이 아니다.
엉엉 우는 모습따위 본 적 없는데. 왜 너만 생각하면 우는 모습인건지.
"발 조심해! 선두에서 넘어지면 너만 위험한거 아니니까!"
"괜찮으니까 계속가요! 안 넘어졌어요!"
아직 소년티를 못 벗은 청년이 제 주변의 장정들에게 소리쳤다. 주변이 온통 붉은 건 그가 든 검의 탓인지 가을 낙엽탓인지 알 길이 없다. 냄새로 구별이 가면 좋으련만 씨앗에서 터져나온 지독한 향이 모든걸 뒤덮은 땅이다. 앳된 사내는 헉헉거리며 저 멀리 날아간 검을 끌어당기며 발을 딛었다. 차라리 넘어졌으면 덜 했으련만 애매하게 체중이 실린 오른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찰나의 순간의 무게가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던, 생사를 가르는 순간이던. 그 둘에 눌려 죽을 바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누르는 것이 쉬웠다.
각오가 무색하게 휴식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이번에도 닷새정도는 철야로 달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나절이 조금 지난 자정, 작전중지명령이 떨어졌다.
자정의 하늘엔 밝은 보름달이 떴고 그 하늘을 입어 어두운 덩어리처럼 흔들리는 나무가 쏴쏴 소리를 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소년은 하늘에 제 손을 뻗었다. 예민한 감각은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바람을 느낀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멍울지는 바람덩어리가 방금 전 까지 제 손으로 짓이긴 살덩어리를 씻어주길 빌었다가, 이내 관뒀다. 씻어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거야말로 저들과 내가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게 아닌가.
소년은 고갤 들어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친목과 안정성을 위해 가문별로 베이스캠프를 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박을 했으면 조금이나마 나았을까 지나간 기회를 되짚지만, 그게 후회가 되진 않았다. 제 주변에 누가 있던 이 곳에 제 편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 속에서 눈치를 보는 것 보다 잠을 줄이더라도 혼자인게 편했다. 그게 아니라면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줘야했지만.
"그럼 내가 온 의미가 없지."
그정돈 알았다.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다만 시계바늘이 돌아가듯 모든게 맞춰지는 순간이 있었고 그저 그걸 따른 것 뿐이다. 어쩌면 후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만. 붙잡은 기회가 후회가 되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고 나아가야한다.
"히야, 넌 아직도 그걸 들고 있냐? 좀 쉬어 임마."
가볍고 껄렁거리는 목소리가 불쑥 침묵을 깨고 들어온다. 숨길 생각이 없는듯 뱀 특유의 웃음소리가 쉬익쉬익 말 끝을 꾸며댄다.
"쉬고있거든."
"추워서 벌벌 떨고있으면서 쉬기는 개뿔. 네가 뱀이냐?"
퉁명스럽게 답하곤 제 팔을 내려다보는 소년이다. 보름달 아래 습관처럼 검을 쥔 창백한 손은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하던 떨림이다. 그제서야 소년은 추위를 느낀다. 생각해보니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적진 한 가운데서 불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이성과 이지를 잃은 생명체를 적으로 두고 있다해도 본디 살아있는 생명은 온기를 찾기 나름이다 그럼애도 불을 피웠다는 건 그만큼 기온이 내려갔다는 뜻이고, 자신은 그걸 느끼지 못할 만큼 싸움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난 바보가 맞을지도…."
"여기서 그거 모르는 거 너밖에 없을 걸?"
"그런 바보한테 찾아오는 뱀새끼도 너 밖에 없을거다."
"은인한테 새끼새끼거리는 놈 챙겨주는 놈도 나 밖에 없을거고!"
한아름, 품에 장작을 들고 온 사내는 현무진영의 말단이었다. 겉으로는 유일한 또래인 것 때문에 말을 걸었다 했으나 소년은 그가 현무 가의 먼 방계임을 알았다. 아마 소년또한 저와같이 집안에서 떨거지취급을 받고 떨어져나간 것이라 짐작하는것이리라. 평소였다면 정정했을지도 모르지만 소년은 그러지 않았다.
"주작 가면 불 피우거나 그런 거 할 수 있지 않냐?"
"그건 막내누나만. 가문에서 한 명밖에 못해."
"그래서…. 에잇. 됐다. 됐지 뭐. 그런거 못해도 괜찮아. 나 불 잘 피우거든."
그런거 아닌데. 소년은 속으로만 말하곤 고갤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나중에 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 우리쪽으로 들어오라고 해주는 걸로 어떻게 되지 않을까.
말은 저렇게해도 나쁜녀석은 아니다.
아니지, 혹시 이게 다 연을 타기위해 날 속인거였다면?
"저녁 안 먹었지? 좀 쌔려왔으니까 형님으로 모셔라 짜식아."
아 역시, 너무많은 정보량에 뇌가 멈춰버렸던. 마음이 멈춰버렸던 둘 중 하나는 멈춘 것이 분명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 찰박거리는 느낌이 불쾌했다.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털고, 장작에 집중했다. 작은 불이 장작을 집어삼킨다. 태양의 붉음을 닮은 빛은 달과 다르다. 불꽃이 주변의 어둠을 걷고 천천히 주변을 집어삼키는 걸 보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먹어보고 생각은 해 볼게."
"이제서야 웃네. 그래 많이 먹어라 이 돼지야."
작은 불꽃은 작은 누나를 닮았다. 작지만 따뜻하고 밝은 불꽃. 누나가 처음 불꽃을 피워냈을 때가 떠올랐다. 돼지야. 그래 한참 큰누나가 저를 돼지라 부르고 작은누나가 그걸 말리던 때였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정도였나. 기억 중간중간을 노랗고 붉은 것이 채운 건 그 탓일터다.
"이거 네가 만든거 아니지."
"무, 아니거든! 왜? 맛있냐?"
"엉. 나쁘지 않네. 맛있다."
지금이야 덜하지만 작은누나는 겁이 많았다더라. 그러나 대여섯살에 본 열살짜리 꼬마는 무척 용감했다. 큰누나에게 쫓겨 엉엉 우는 저를 달래준 것도 모자라 무력 외엔 모든게 느린 저를 못살게 구는 놈들에겐 맞서주기도 했으니. 그날은 그런 누나를 위해 사랑채 뒤뜰 늦게 핀 꽃을 꺾어들고 담장을 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제가 든 꽃보다 붉은 불꽃을 피워내 밝게 웃던 누나와 손 끝에 남은 까슬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기억이다.
첫째 형은 장자고, 큰누나는 중앙소속이고, 작은 누나는 가문의 불을 가졌다.
"…내가 만든 건 아니고. 우리 가문사람들이 만든거야."
불꽃이 타닥이는 소리가 말끝을 잡아 늘린다. 침묵 사이로 타닥, 타닥. 목 끝을 간질이는 건 불쾌함일까.
"알긴 하는데. 나도 알 건 아는데….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소년은 고갤 들어 사내를 본다. 소년을 본다. 녹빛머리 위로 일렁이는 오렌지색의 열은 이질적이다. 허나 표정만큼은 빛과 어울리는 것이라 소년은 두어번 입술을 벙긋거렸다. 나는. 나는, 네 눈에 비치는 나도 그럴까봐. 그게 걱정되는 것 뿐이야.
"싫어하지 않아. 정말로…. 싫지 않아."
싫어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그래, 누가 적인지 까먹으면 안 되겠지. 소년에게서 고갤 돌려 바닥에 놓은 칼을 바라본다. 저에게 칼을 전해준 남자. 하얗게 웃는 사내의 얼굴. 그 위로 이어지는 건 붉은 살덩이. 얇은 뼈를 가르는 날붙이의 감각. 뇌수와 영겨붙은 덜 응고된 혈액의 냄새.
결국 남는 건 붉은 색이다.
"찾아와줘서 고마워."
그래, 끝에 남는 건 붉은 색이 될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러니까,
"더이상 안 와주면 더 고맙고."
바람이 불고 장작 위로 일렁이던 불꽃이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부대끼며 빗소리를 자아낸다. 바닥의 칼을 집어든 소년은 스스럼없이 칼을 빼어든다. 손에 쥐는 건 오랜만이다. 스승님과 훈련할 때는 항상 쥐는 것 부터 배웠는데. 어제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불꽃 위로 흩어진다. 그렇게 따지기엔 이미 쥔 칼조차 그들과 쓰던 검이 아니다. 그래 이건 검이 아닌 칼이다. 빗소리같던 소리가 칼을 날리다니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는 스승님의 목소리처럼 느껴져 소년은 슬쩍 웃었다. 그래 이건 훈련이 아니고. 이건 검이 아니고. 이건 싸움이 아니다. 명예나 정의, 애정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이다.
후시는 내 헤어스타일도 귀엽다고 했는데. 짧은 머리도 좋아해주려나. 잠시 상상했지만 떠오르는 표정이 또다시 우는 것이라 관뒀다. 짧은 칼날이 꽉 묶인 머리카락을 통과한다. 높게 묶인 긴 꼬리가 툭 털어진다.
바람에 붉은 머리가 흩어진다.
"커억-!"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뚫린건 옆구리인데 피는 위로 솟구쳤다. 옆으로 쏟아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이래서 스승님이 잔기술에 의존하지 말라고 한 거구나. 후회해봤자 이미 저와 말 그대로 한 몸이 된 칼을 어찌 할 도리는 없다.
후두둑, 노란 은행잎 위로 쏟아지는 피가 붉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폐 아래 깊숙히 박힌 칼 손잡이엔 인장이 없다. 색으로 미루어보면 백호진영의 것이지만 날에 새겨진 인장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행인지 실수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그저 잠시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함임을 깨닫고 단념했다.
"후, 후우... 으윽, 읍."
만에하나 자신의 실수가 아닌 누군가의 소행이라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편이 좋았다.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반대론 골반을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전까지 활동하던 섬 외곽과는 달리 섬 내부는 온통 은행이 가득했다. 푸른씨앗이 발산하는 향을 거점으로 삼아 그 주변을 토벌하는, 음. '정리'하는 과정은 외곽에서 진행된 작전보다 위험도는 덜 했지만 피로도는 더 높았다. 씨앗과 붉은바다의 잔여세력을 밀어내려 싸운 이들은 주로 외곽에 있었고 힘이없어 도망친 이들이 주로 안쪽에 있던 것이 이유였다. 머릿수는 더 많았으나 두려움에 잠식된 채 향에 취한 이들의 '정리'는 보다 쉬웠다.
"크흐윽...!"
입을 막은 채 걷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푸른 씨앗이 있는 곳 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텐데. 나무에서 나무로 염력을 이용해 몸을 이끌었다. 섬세한 힘조절이 가능했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누구건지도 모를 칼을 제 옆구리로 회수하는 일 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터다. 푸른 씨앗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하고는 있다만 이동속도에 비해 눈 앞이 흐려지는 게 더 빨랐다. 평소였다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게 정말 반가운 일이었겠으나 오늘은 반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다가오는 모든 이를 내치는 게 아니었는데. 많지도 않으면서 하나하나 그들의 얼굴을 헤아리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평생 추위를 모르던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턱-.
염력에 의해 잡아당겨진 몸이 나무에 붙었다 떨어진다. 아, 더이상은 무리야. 옆구리 아래 골반을 지탱하던 손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무너졌다. 꼴사납게 헉헉거리는 숨 사이사이 막았던 혈액이 응어리져 튀어나온다. 머리가 구르는대로 시야가 흔들린다. 꺾이다시피 기울어진 머리 앞으로 빛이 보인건 찰나다. 소년은 고민했다. 지금 여기서 멈춰 설 것인가. 아니면 저 곳으로 저를 밀어낼 것인가.
후시 어떻게 할까. 이번엔 울지 말고 답 좀 해줘. 너 남자친구 죽을 것 같단말야. 눈을 감고 제 연인에게 물었다. 아리송한 얼굴이 떠오른다. 화내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고. 다행인건 우는 얼굴은 아니라는 거다. 혹시 주마등은 아니겠지 이거.
소년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저 멀리로 자신을 밀어냈다. 주마등이라면 슬프지만 마지막 기억이 연인의 웃는 모습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야!'
'…유예남!'
"헉!"
소년은, 유예남이 눈을 떴을 때 하늘엔 여전히 정오의 해가 가득했다. 몇 초 정도를 잠든 것이 아닌 이상 하루, 혹은 며칠의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 도박은 성공이나보다. 예남은 제 머리와 맞닿은 게 나무가 아닌 건물 외벽이란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다. 생각했던 곳이 맞았다.
세주아니 가의 저택. 섬 중앙 호수 옆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하얀 벽돌로 만들어진 작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엔 생명력이 가득하다. 제가 머리를 박는 바람에 둥근 핏자국이 생기긴 했지만 워낙 아름다운 건물이기에 그 조차 어린아이가 붉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해 놓은 듯 보였다.
호수 바닥에 잠긴 다량의 푸른씨앗 덕분에 나무뿐 살아남지 못한 섬의 다른 땅과는 달리 저택 주변엔 푸른 잔디부터 낮은 꽃덤불이 뽐내는 생명력이 찬란하다. 오랜만에 보는 밝은 풍경에 예남은 익숙한 풍경을 떠올린다. 훈련을 무지 좋아하진 않았던 터라 자주 나돌았지만 있는 순간만큼은 육체의 고단함정도는 쉬이 날려주는 익숙하고도, 지금은 까마득한 곳. 전형적인 저택의 풍경임에도 그곳이 아름다운 이유를 둥근 핏자국 뒤로 정오의 햇빛이 밝은 빈 저택 위로 덧입혀본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 처리해야할 일에 골머리를 앓는 가주의 중얼거림. 잔디위에서 낮잠을 자는 어린 고양이의 골골거림.
이곳만큼이나 작지만 따스했을 사람들의 모습들.
"……"
가슴 한 쪽이 찌르르- 울리는 파동이 하나하나 그 모습을 익숙한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섬에 들어오기 전엔 자주 느꼈던 따뜻한 감각이 이젠 어딘가 괴로운 감각으로 느껴지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유예남은 눈을 꼭 감곤, 고갤 턴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동남쪽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으니 한 달 이상 제가 잠들어 있던게 아니라면 북쪽으로 향하면 남들과 합류할 수 있을 터다. 가기 전에 핏자국은 닦고가야겠다. 생각하며 호수로 몸을 돌리는데 허리 아래쪽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 그러고보니 아직 허리와 하나가 되어버린 칼을 뽑지 않았다. 예남은 저 스스로의 둔함에 감탄하는 동시에 푸른씨앗의 회복력에 탄식했다. 조심스럽게 웃옷을 벗어 환부를 살폈다.
완전히, 정말 완전히 닫혀버렸군 그래.
방법은 두가지다. 눈 한 번 딱! 감고 칼을 뽑던지, 그냥 이렇게 다니다가 나중에 붉은 씨앗의 힘에 고통받다가 다시 이곳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뽑던지. 정정하겠다. 방법은 한 가지였다. 지금 바로 칼을 뽑는 것. 예남은, 앳된 얼굴의 사내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다. 이렇게 보니 꼭 할복하는 자세같군. 칼을 쥔 손에 힘을 준다.
"흣…!"
웅크린 덕에 맥없이 떨어지는 고개는 폭, 소릴 내며 푸른 잔디에 안착한다. 촉촉한 흙냄새와 부슬거리는 어린잔디의 감촉이 속눈썹을 간질이는 것 과는 이질적인 붉은 웅덩이를 보며 소년은 눈을 감는다. 일어나면 칼의 인장을 확인해야겠다 생각하면서.
탓탓탓!
북쪽으로 금방 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소년은 남쪽으로 내달렸다. 해안가로 가야해! 해안가로! 마구잡이로 외치는 목소리, 이곳저곳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불길에 휩싸인 나무.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인장이 하얀 칼을 들고 달렸다. 단풍은 모두 태워라! 치솟는 아드레날린에 녹아버린 뇌는 정보를 독으로 받아드린다. 해독되지 않은 정보는 그대로 숨통을 누르고 고장난 테이프처럼 같은 말만 울려댄다.
'녹색거북이 죽었다! 연못의 물고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색거북이 죽었다! 내통의 단초가 될 수도 있으니!'
'녹색거북이 죽었다! 놈을 잡아라!'
긴 백발의 사내가 높은 곳에서 외치는 말에 몸이 굳어버린 채 우뚝 서있기를 수 십초.
저를 찾으라는 남자의 말이 들리고서야 소년은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작정 그를 피해. 그들을 피해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불을 사용해도 좋고,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보다 두려운 건 제 머리속에 떠오르는 녹색거북의 존재였다.
"누나랑, 아저씨. 연못의 물고기. 연못의 물고기…!"
머리속에 쌓인 장면들이 이리저리 모습을 변모해가며 소년을 눌러온다. 검을 잡는 법을 지적하는 큰 누나의 모습. 그 뒤로 선 검은 형체. 키는 큰누나와 비슷하지만 체구는 조금 더 작은 여자가 무어라 말한다. 거북, 그래 거북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거북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의 모습은 여성보다는 조금 더 작지만 어딘가 뾰족하다. 그저 체구가 작은 성인인가. 이 사람이 거북이었던가. 아니다 놈은 어리다. 성년의 몸이 아니기에 그보다 작은 것이다. 저와 비슷한듯 조금 더 어린. 검은 몸이 형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고야 누나 …! 그리고 딘! 그래 딘 모이어!"
"해안부터 바다까지 전부 살펴라!"
"헉!"
소년의 발걸음이 일순 멈춘다. 달빛을 받아 맑게 빛나는 단풍 너머 높게 솓은 검은 기둥이 점점 커지는 이유는 포위망이 좁혀졌기 때문이리라. 어느쪽을 향해야할지를 궁리해야할 뇌는 여전히 복잡하다. 누나, 그리고 딘 모이어. 딘이 들고다니던 수첩. 언젠가 한 번 몰래 보다 후시에게 한 소리 들었던 적도 있었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소년은 다리를 앞으로 나아갈지, 잠시 몸을 숨길지 고민하다 나무를 올랐다. 발목을 감싸던 검은 천을 풀어 손과 칼을 묶어 지지해 올랐다. 염력으로 오르면 쉬웠겠으나 그러기엔 상처의 통증이 걸렸다. 붉은 씨앗의 영향권에 들어온 이상 출혈은 위험했다. 급할 거 없었는데 저택에서 더 쉬다가 올 걸 그랬나. 벌어진 상처를 두고 고민해보지만 그랬다면 영문도 모른 채 잡혀 백발의 사내가 원하는대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나무를 올라도 온통 숲이라 보이는건 많지 않았다. 다만 숨을 가다듬곤 소리에 집중하자 간간히 들리는 외침은 도움이 됐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듯 하다. 그리 생각하니 참아왔던 숨이 한번에 터져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이 풀리는 감각. 토벌이 시작되고부터 눌러왔던 감각의 해방감은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칼에 찔렸을 때도 느껴지지 않던 감각조차 해방되어 소년을, 예남을 덮쳤다. 찌르르 불쾌감을 닮은 느낌이 도화선이 되어 온몸에 불꽃을 터트린다.
"으윽, 흐으, 아파, 아프다구 …"
육지에게는 바다를!
유예남!
몸을 웅크려 나무기둥에 몸을 뉘이기 무섭게 두가지 소리가 들려온다. 눈앞을 스쳐가는 건 분명 연인의 모습이었으나 진실된 쪽은 전자일 터다. 이럴때가 아닌데. 싶으면서도 몸은 움직이질 않는다. 후시, 스승님, 엄마. 입만 벙긋거릴 뿐 차마 말이 되어 나올 순 없다. 그리움의 통각마저 몸을 덮친다면 정말,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녹색… 녹색은, 그 사람."
감각을 누르려 다시금 생각을 헤집는다. 녹색인영이 제 모습을 찾길 기다리며 손에 묶었던 매듭을 푼다. 감각을 쉬게하면 안 된다. 후우, 숨을 내쉬고 눈을 떠 손에 쥔 칼을 바라본다. 물에 불었다 마르길 반복한 듯 물때가 잔뜩 낀 하얀 손잡이와는 대조적으로 깨끗한 칼날. 높은 곳에 올라와서일까 달빛을 받아 빛나는 날 위로 적힌 인장은 소속을 알 수 없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그래, 딘의 노트에서 봤었던-.
"이 서무.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바다에게는 안식을!
둥. 둥. 이제는 꽤나 가까워진 목소리보다 예남의 심장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온 몸의 감각이 둔해지며 예남은,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생각한다. 가문에서 움직일 사람은 자신이라 느꼈을 때와 비슷한 기분. 세상이 일순 조용해지고. 복잡하지만 정교한 톱니바퀴가 찰칵, 맞아 돌아가는 기분.
어느 소속의 인장인지, 이국의 문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림일지도 모른다. 예남은 해석할 줄 모른다. 다만, 그렇게 느꼈다. 이 칼의 주인이 이서무던지, 이서무가 누군가에게 주었던지. 이서무는 이 칼을 제법 사랑했을거다. 어쩌면 이 칼을 받은 그 누군가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고. 다만 그건 처음보는 사람이 물건을 보고 주인을 떠올리게 할 만큼의 감정이었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어디를 향해야할지 가닥이 잡혔다.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모두가 말렸지만 별 다른 방도는 없었듯 모든 것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던 그 순간.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는 낙엽이 물들기 시작했을 때고
"눈…? 아, 잿가루구나."
이제는 한 바퀴를 돌아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릴 때가 다가왔다는 것 정도다.
후시, 네가 있는 곳에도 낙엽이 지고 있을까?
언제까지고 가을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돌아간다면 가을이라 생각했다. 노란 은행잎같은 웃음으로 반겨주는 너는 밤하늘과 같은 머리를 하고 있을 터고, 나는 단풍을 한아름 뒤집어 쓴 몸을 씻어내고 기꺼이 그 어둠에 모든 걸 바쳤을텐데. 그건 아무래도 다음 가을로, 어쩌면 다다음. 정말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남은 바닷가로 향했다. 육지에게는 바다를! 바다에게는 안식을! 산발적으로 들려오던 소리가 이제는 하나의 외침이 되어 숲을 울리기 직전 해안을 마주한 것은 그가 모든 옷가지를 벗어던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통 제 피로 범벅인 옷을 염력으로 마구잡이 날리는 일은 그들을 분산시키기에 가장 쉽고, 동시에 가장 대책없는 방법이었다. 물론 그것이 고민거리가 되진 않았다. 예남은 원래 대책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라면 가을 밤이 예남의 생각보다 더 추웠다는 것과, 저 멀리 서있는 남성 정도였다.
온통 하얀 남성이다. '그'는 아니었다. 그 사람은 긴 백발이었으나 눈 앞의 남성의 머리는 짧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은 저렇게 이상한 색이 아니었다. 붉으며, 동시에 푸른 눈을 한 남성은 예남이 다가가도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쪽 이거 알죠?"
"……."
예남이 그의 손에 검을 쥐어주고 나서야 남성은 짧지만 가쁜 숨을 한 번 내쉬곤, 예남을 응시했다.
"돌려줘서 고마워."
하얗고 긴 속눈썹에 아래 바다를 닮은 푸른 눈이 예쁜 웃음을 짓는다. 물론 후시의 웃음이 더 예쁘지만. 이 남자의 눈도 에쁘구나, 생각하던 중 남자의 눈이 점점 붉어진다. 후시말고 다른 남자의 웃음을 예쁘다 생각한 죄로 눈이 이상해진건가? 눈을 비벼보지만 그러는 와중에 완전히 변해버린 붉은 눈이, 이젠 짜증을 품고 저를 향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로…. 하, 내가 돌려주는건 말 도 안 되는 소리니까 네가 알아서 가지고 있다가 돌려줘."
"…네?"
"얼빠져있지 말고! 아니 옷은 또 어디다가 팔아먹고 온 거야?"
"아니, 어. 던지고 왔, 죠?"
예쁘다는 말 취소. 저런 성질머리가 예쁘다니 내가 추워서 눈이 돌았나보다. 예남은 생각하면서도 홱 몸을 돌려 앞장서는 남성을 따랐다. 남성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썩 좋진 않았지만 혼자 중얼중얼 묻고 답하면서도 중간중간 고갤돌려 제가 따라오는 지 확인하고, 비록 인상을 쓰긴 했어도 입고있던 정장자켓을 제게 던져주는 걸 보면 숲으로 돌아가는 것 보단 나은 선택지 같았다.
적어도 자켓을 벗자 드러난 흰 셔츠에 기이한 형태로 남은 핏자국이 어떻게 생긴건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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