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ng_
호그미스
오후 두시, 시원한 바람이 초여름의 햇빛을 입어 찬란하게 흩어지는 아래 탤벗과 카르셰는 책 앞에 나란히 앉은 채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점심을 먹고 그 틈을 타 만들어낸 짧은 시간은 참 달다. 책을 앞에 둔 탤벗이 드물게 졸고, 카르셰는 그런 탤벗을 가만히 바라보다 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해준다. 입가엔 미소가 걸린 채다.
"저기 탤벗, 우리 곧 다음 수업 들어가야해."
나즈막한 목소리에 탤벗이 눈을 뜬다. 벌써? 하고 묻는 말에 카르셰는 뻗었던 손을 거두어 책상에 올린 채 탤벗에게 몸을 기울인다.
"아니, 실은 삼십분 정도 남았어."
"으음....너 할 말 있구나?"
훅, 가까워진 거리에도 탤벗은 자연스럽게 눈을 꿈벅이며 아까 카르셰가 해 주었듯 제 연인의 머리를 정리해준다. 아직 잠이 덜 깨 느린 손짓 하나하나엔 초여름의 따스함이 가득하다. 탤벗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머리카락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탤벗은 웅크렸던 몸을 카르셰처럼 앞으로 기울이다가, 중간에 폭, 애교부리듯 책상에 고갤 댄다. 초여름의 더위. 목제책상의 시원함이 잠을 떨쳐보내주는 것도 잠시, 따끈히 열이 오른 볼에 금세 책상이 따뜻해진다.
"탤벗,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
"네가 이상한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뭐."
탤벗은 여전히 고개를 기댄 채 눈만 떠 카르셰를 본다. 하얀 머리칼이 창문을 밀고 들어온 바람에 흩어지고 카르셰의 푸른 눈을 가린 채다. 그래도 둘은 마주친다. 붉은 시선이 깊은 파도같은 눈으로 얽혀들어간다. 잠시의 정적이 일고 그 사이를 은은한 물냄새가 채우던 중 카르셰는 탤벗을 보고 웃는다.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리는 게 맞는걸까?"
탤벗은 눈을 감고 잠시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기 전으로는 돌리고 싶지 않다고 답해야겠지?"
"제법 치는 데 탤벗 윙거?"
나즈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탤벗의 이마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또 아주 잠시의 정적. 여전히 그 사이를 초여름의 습기가 채운다.
"근데 그런 거 말고... 조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야해."
"근본적?"
"원론적이라고 해도 좋고."
어쨌든 한 번 생각해보고 답해줘. 꼭. 탤벗만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카르셰의 말이 귓가를 떠나기 전 의자 끄는 소리 뒤로 발걸음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먼저 갈게 탤벗. 사랑해. 연인의 입맞춤엔 잠드는 마법이라도 걸린 듯 탤벗은 유난히 제 눈꺼풀이 무겁다 느낀다. 나도 사랑해. 답하는데 카르셰에게 들렸을 지는 미지수다. 이 날 탤벗은 결국 늦잠을 잤고 수업엔 지각했으며 카르셰는 수업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모든게 엉망이지만 나쁘진 않은 하루다. 창 밖에선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는 연인의 목소리가 햇빛처럼 부서진다.
Love -ing?
"탤벗, 헤이즐 봤어?"
아침은 늘 분주하다. 일찍 일어난 것 같다가도 일제히 움직이는 아이들에 휩쓸리다보면 결국 아침 샌드위치는 반은 먹고 반을 흘리는 꼴이됐다. 간혹 카르셰처럼 그 꼴을 끔찍히 싫어해 남들보다 두 세시간 먼저 일어나는 놈들도 여럿 있었으나 탤벗에겐 잠이 더 소중했다. 연인보다 잠이라기보단, 여유로움보단 수면시간을 챙기고 종종거리겠단 뜻이다.
"아니. 안뜰은 가 봤어?"
"도서관은 가 봤는데... ."
"어제 비 왔으니까 안뜰에 있을걸."
그래도 늦잠을 자는 편도 아니라 적당히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넣었다. 원래 아침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카르셰의 성화에 챙겨먹기 시작한게 습관이 된 탓이다.
"아... 안뜰까지 갈 시간은 없는데. 혹시 그럼 이 편지 네가 좀 전해줄 수 있어?"
"카르셰 꺼야?"
"응. 페니가 전해달래."
아 후드가 노란색이다 싶었는데 후플푸프였던 거구나. 탤벗은 고갤 끄덕이며 제 연인 앞으로 온 편지를 받아들었다. 탤벗의 인간관계는 매우 협소했다. 기억을 차차 더듬으니 페니와 으레 같이있던 후플푸프인 것도 같네. 이정도의 생각으로 받아든 편지봉투는 제법 두꺼웠다. 뭐가 들어있지, 궁금하던 것도 잠시 탤벗은 받아든 봉투를 그대로 책 사이에 끼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다고 말하는 후플푸프레게 고개를 까딱이곤 연회장을 나섰다. 안뜰로 가는 길을 한 번보고 기숙사로 향하는 계단을 한 번 봤다. 조금 빠듯하기는 해도-. 탤벗은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이런식으로 먼저 떠난 날엔 카르셰를 보기 힘들었다. 요 며칠 들어오는 게 늦어지기도 했고. 기숙사에 두고 가는게 가장 잃어버릴 확률도 덜하고 마주칠 확률도 높았다. 페니도 아주 급한 거였으면 직접 전했을 거다. 연인인 저보다 카르셰와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페니였다. 탤벗과 카르셰는 분명 연인이었으나 조금은 달랐다. 백점짜리 연인이 어디 있겠냐만은, 둘은 일반적인 연인에도 미치기 애매했다. 어딘가가 부족해서, 어딘가는 늘 과했다. 둘의 사이는 그랬다.
침대 위에 덩그라니 놓인 편지 끝을 매만졌다. 시간이 지나는데, 어쩐지 움직이기 싫었다. 권태로움일까. 생각하며 카르셰를 떠올린다. 사랑에 무게가 있다면 우리의 것은 납으로 만든 공기같을거라고.
"탤벗? 왜 이 시간에... 수업 안 들어가?"
그게 아니라면 가볍게 다가온 말이 이렇게 무거운 건 설명할 수 없을테니까.
"모르겠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런건 아니고 그냥..."
여전히 손으론 페니가 건내라던 편지를 매만지며 카르셰쪽으로 몸을 돌려 답했다. 탁한 기운이라곤 전혀 없는 맑은 목소리에 비해 탤벗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진 채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게 다가온 카르셰는 탤벗보다 딱 한 뼘정도 작다. 딱 그 만큼 덜 성장한 카르셰는 서슴없이 탤벗의 이마에 제 손을 가져다댄다. 가까이 온 몸에선 물냄새가 난다.
"열은 없는데."
"안 아프다니까."
숙여달라고 하면 될 것을, 손으론 부족한건지 발꿈치까지 들어 제게 이마를 댄다. 시원한 이마가 닿는 감촉에도 탤벗은 눈을 뜬 채고, 카르셰도 눈을 뜬 채라 둘 사이의 공간은 시선으로 빠듯히 채워진다. 속눈썹이 깜박이는 순간의 틈 사이를 먼저 빠져나간 건 카르셰다. 어디보자, 잠시만 거기 앉아 봐 탤벗. 저를 보지도 않고 곧장 제 침대 앞 상자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카르셰 이거."
"아 여기있다. 응?"
동그란 환을 꺼내 제게 건내고 침구를 정리하는 손길은 어설프지만 약하진 않다. 오롯한 의지에 의한 행동. 다시 한 번 권태로움. 탤벗은 입을 벙긋버릴 뿐 말없이 카르셰가 정리한 침구에 몸을 뉘인다. 보면 안 되는 걸 숨기듯 침대 위 편지를 이불 속에 넣는다.
"이거 꼭 먹고 교수님껜 말씀 드리고 갈 테니까 푹 쉬어. 요즘 시험때문에 무리하나보다."
"알았어."
짧은 답에도 카르셰는 빙긋 웃고 탤벗의 이마에 입맞춘다. 근데 너는 수업 안 듣잖아. 라는 말 대신 탤벗은 고마워. 짧게 답한다. 고마우면 어서 낫던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탤벗은 어쩐지 울고싶다 느끼고 이불 밑으로 숨긴 편지봉투를 손끝으로 누른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서도 조심스럽게 봉투를 꺼내 꽉 붙은 밀랍을 살살 띁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느리지만 충동적인 행동의 나열 때문인지 사랑하는 연인의 입맞춤 때문인지 모호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부탁했던건 전부 준비 해뒀어 카르셰. 무슨 일이 있는거라면 얘기해주라. 혼자 안고있으면⋯. 요즘 밤마다 네가 하는⋯. 이야기하는게 어렵다면 편지로라도 좋아. 혼자서 끌어안지 말고. 우리는 친구잖아. 사랑하는 페니가⋯."
우리는 친구잖아. 사랑하는 페니가.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 페니. 사랑하는 친구. 우리. 탤벗은 한참을 편지를 곱씹는다. 침대에 누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아까 카르셰의 이마가 시원하긴 했지만 차겁진 않았는데. 지금 다시 댄다면 카르셰가 화들짝 놀랐을게 분명할 만큼 속에서 불이 일었다. 뭐라고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기분나쁜 불덩이가 이리저리 일렁였다. 딱히 뭘 하고다니냐 물은 것도 아니니 저를 속인 것도 아니었고 놈이 뭘 하고 다니는지 나만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몸이 무거웠다. 잠시 상체를 든 채로 있다가 다시 누웠다. 카르셰 녀석이 나보다 날 먼저 눈치 챌 때가 다 있네. 괘씸해.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열기 띈 숨이 무거운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짧게 생각을 잇는다. 나는 카르셰가, 그리고 내가 괘씸했던거구나. 친구도 알아보는 놈의 상태를 연인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최악이다. 그리고 말하지 않은 너도 최악이야 카르셰. 우리는 쌍으로 최악이네. 마른세수를 하곤 신경질적으로 구겼던 편지를 다시 펴 봉투에 담았다. 마법을 쓰는 대신 새 밀랍으로 다시 밀봉하고 그 위에 짧은 쪽지를 써 남겼다. 이건 직접 돌려줘야겠다. 그리고 대화를 좀 해야겠어. 연인은 같이 걸어가는 거니까.
고갤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해가 지고있었다. 수업에 들어가긴 글렀고 아픈 김에 카르셰가 돌아오기 전 까지 잠이나 자야겠다 싶었다. 뭐라고 서두를 건내지 고민하며 탤벗은 잠에 든다.
해가 모두 진 후에야 깨어났다. 휴게실이 시끄러운 걸로 봐선 일곱시가 조금 넘었을 터다. 점심도 걸렀는데 저녁도 거르게 생겼네. 혼잣말을 뒤로하곤 이부자리를 대충 정리했다. 창 밖으로 들어오는 빛은 희미하다. 달빛도 결국 햇빛이라던 말이 떠오르고, 그 하얀빛에선 또다시 익숙한 존재가 떠올랐다. 카르셰. 헤이즐. 연인이자 친우이자-. 달빛을 닮은 놈이 태양과는 멀다. 태양을 피해 달빛 아래에서 겨우 밭은 숨을 내뱉는 모습을 떠올린다.
역시 저녁은 거르자. 역한 어지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직 감기기운이 안 떨어졌나. 무거운 침대를 떠나 휴게실로 가 늘 앉던 소파에 몸을 뉘인다. 하루종일 침대에 늘어져있던 몸은 쉽게 소파에 제 몸을 맡긴다. 래번클로 휴게실의 책은 죄다 손때가 가득하다. 독서에 있어 오랜시간 매만져 생긴 길이란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 천천히 읽고 싶었는데 이정표를 따라 길을 걷다보면 출구의 빛이 들이치는 건 순식간이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탤벗은 들고있던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 옆의 책을 꺼내들었다.
"탤-벗. 너 오늘 저녁 안 먹었다며?"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자 보이는 모습에 탤벗은 꺼내들었던 책을 돌려두었다. 한참 기다려야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할 이야기가 가득했다.
"너는 매일 안 먹으면서."
"나는 바쁘니까 그렇고. 식사는 꼭 챙겨. 가뜩이나 말라서는 너 비행시간에 넘어졌다면서?"
탤벗이 돌려둔 책을 흰 손이 쭉 뻗어나와 꺼내든다.
"두꺼비의 생활과 노래의 연관성? 너 이런 책도 읽어?"
"그러면 너는 요즘 책은 커녕 수업도 안 하면서."
"왜 이리 날이 선거야? 아직도 열이 있나?"
아니다. 할 말이 많은 줄 알았는데. 책을 보며 웃는 놈의 얼굴을 보니 할 감정이 많았던 것 임을 깨닫는다. 괘씸함 정도가 아니었구나 내가 가진건.
"요즘 너무 늦잖아. 수업도 거의 안 듣고. 표준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
"뭐가 마음에 안 드는건지 똑바로 말 해. 돌리지 말고"
"돌리기는.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지."
"거짓말."
맞다. 거짓말이다. 책 표지를 향하던 카르셰의 시선이 탤벗을 향한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잖아."
"그게 중요해? 아니 애초에 거짓말이면 어쩔건데?"
카르셰의 눈에는 내가 비치는데 카르셰도 그러할지는 모르겠다.
"왜 자꾸 모든 말이 질문인거야."
"물어볼게 많으니까. 네가 얘기해주는 게 없으니까. 내가 묻는 수 밖에 없잖아."
쏟아지던 말이 턱 끊겼다. 오로지 한 단어만이 혀 밑에서 고갤 치켜든다. 페니가 적은 편지에 비하면 추한 말이다. 솔직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말은, 다만 필요하다.
"나도 얘기하고 싶은데."
"그럼하면 되잖아. 아니다. 아니네. 페니한테 하는 게 낫겠다."
"페니가 갑자기 왜 나와?"
입 안을 구르는 말을 내뱉을 수 없는 건 카르셰는 추한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탤벗의 이성은 필요와 두려움을 저울질하는 법을 모른다. 앎과 모름 사이를 채운건 공백. 내내 소파 옆 협탁에 올려둔 편지를 카르셰에서 던지듯 건냈다. 건내는 손도 떨리고 그걸 받는 카르셰도 잘게 떤다.
"너한테 온거야."
괘씸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추하고, 유치하고, 쓸모없는 감정이었다.
너한테 온거야. 탤벗이 건낸 편지를 받자 모든 게 해결됐다. 해결이라고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리를 박차고 떠난 탤벗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이런 추론능력같은 건 필요 없는데. 추론 능력도 아니지. 이건 부족한 메모리를 위해 더미 데이터를 지우는 행위에 불과했다. 편지를 다 읽은 카르셰는 길게 숨을 한 번 뱉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탤벗을 떠올리는 건 아주 잠시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 아래에 가만히 서 나머지가 씻겨나가길 빌지만 발 밑으로 흘러가는 간 정 반대의 것이다. 입학 한 후의 일 학년, 탤벗을 만나고 이 학년. 겨우 육백 일 남짓한 시간은 모든 게 꼬이고 얽히기 시작한 삼학년 이후의 구백 일에 비해 턱없이 가벼운가보다. 온 몸을 적신 물보다 뜨거운 것이 양 눈에서 펑펑 쏟아져나온다. 그 또한 육백일의 것이다.
서툴다는 게 잘못이 아니란건 잘 알지만 이럴 때만큼은 잘못일 수 있겠다. 머리를 턴 수건으로 퉁퉁 부어버린 양 눈을 꾹꾹 누르며 생각한다. 탤벗에게 사과를 하는 건 나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명확한 해답이건만 유쾌하진 않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 더러운 일에 페니가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수건을 그대로 목에 건 채 기숙사로 들어간다. 역시 탤벗은 자리에 없다. 자정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는 조금 어색할텐데, 정도의 생각으로 창 밖을 봐 보지만 하늘은 검정일 뿐 생명의 기운은 없다.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리는 게 맞는걸까?"
언젠가 탤벗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야기라기보단 해답을 요구한다는 점에선 질문에 가깝고 답이 정해져있다는 점에선 퀴즈에 가까운 말이다.
저 멀리 별만 깜박이는 하늘에 묻는다는 점에선 사랑고백에 가까웠다.
부질없는 말일까. 분명 무거운 고백이건만 듣는이가 없다는 점에선 읽지않을 편지보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카르셰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당겼다. 편지를 쓸까, 밤새 탤벗을 기다렸다 사과를 할까. 탤벗의 얼굴이 어른거리다 이내 어색한 얼굴로 변모한다. 역시 부질없다. 눈을 감았다. 불편하고 평온한 밤이었다.
카르셰는 한동안 바빠질 예정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언제는 안 바빴다고 싶지만 그랬다. 형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졌다. 운동은 영 글러먹었는데 다음 금고는 물 속에 있다는 힌트를 얻은 후로는 매일 저녁 호수에서 수영과 잠수를 하다보니 수면다운 수면도 오랜만이었다. 연속해서 다섯시간이면, 거의 일주일 만이네. 카르셰는 동이 트기 전 어렴풋한 햇빛에 의지해 단추를 잠그며 중얼거렸다. 햇빛이 탤벗의 잠을 방해할까 부러 그 앞에 서서 단추를 잠그고, 잠시 서 탤벗을 바라봤다. 그에겐 미안한 일 투성이다. 연인을 사귀게 되면 모든 것의 우선순위는 연인이 된다는데 말이야.
"아직 새벽이야 더 자도 돼."
으응, 인상을 쓰며 뒤척이는 탤벗에게 카르셰는 웃음섞인 목소리로 달랜다. 우리 문제도 이렇게 쉽게 해결되면 좋을텐데. 탤벗이 들으면 따귀를 때릴 말을 아무렇지 않게 곱씹는다. 언제부터였지, 탤벗을 연인 이상으로 생각하게 된게.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명확한 시점이 떠오르진 않았다. 형을 찾는 일이 진정 내 일이 된 것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 유추할 뿐이다.
다시한번 떠올린다. 되돌릴 시간에 대한 답이 곧 우리 관계의 해답이었다. 탤벗, 어서 문제를 풀어봐. 네가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
카르셰는 탤벗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춘다.
사랑의 입맞춤이자 이별의 입맞춤이다.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리는 게 맞는걸까?'
이자식이 시위라도 하는건가? 물론 탤벗은 스스로가 화를 낼 자격이 없단 걸 인지했으나 불쾌함이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기엔 이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와중에 놈의 뚱한 얼굴 위로 겹치는 얼굴은 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웃던 얼굴이라 끝내는 손끝이 떨리는 게 설렘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도 않았다.
놈은 오전 내내 모든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그런 주제에 점심시간에는 토끼처럼 도망쳐버린게 어이없었다. 이야기는 하기 싫은데 네가 말하는 건 다 지키겠다는 게 시위가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제 딴의 사과라면 조금, 아주 조금은 귀여울 것도 같았으나 그럴거였으면 점심시간에 사과 엇비슷한거라도 해야하지 않은가. 호소할 수 없는 말을 호소하며 탤벗은 기껏 쉬어 가라앉았던 감기기운을 연신 뱉어냈다. 어젯밤 홧김에 나섰던 밤산책의 후폭풍이 대단했다.
오후 수업도 어김없이 참여했다. 이젠 가끔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기까지 했다. 당장 따져야겠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다가도 그 웃음을 보면 맥이 풀렸다. 수업이 끝나고선 어김없이 사라졌다. 타다 만 잿가루가 가슴 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결국 탤벗이 할 수 있는 일은 두가지로 줄어든다. 놈이 던진 질문을 곱씹던지 멱살이라도 잡고 싸우던지. 마음같아서는 싸우고 싶었지만 그건 본인답지 않는단 이유로 관두었다. 하루가 길게 늘어진다.
"재밌어?"
자정이 한참 지난 후 휴게실 소파 앞이었다. 악몽에서 도망치듯 달아난 잠에 눈을 비비며 늘 앉던 소파로 가는데 그자리에 없어야 할 놈이 있었다. 손에는 내용은 모르나 제목만큼은 기억나는 책이 있었다. 두꺼비의 생활과 노래의 연관성. 나름 집중해서 읽는 건지 제가 온 지도 모르는 태도에 탤벗은 허, 하고 짧게 숨을 뱉었다. 악몽에서 도망가듯 하루종일 저를 피한 주제에 붙잡은 것도 저라는 게 웃기다 생각했다. 다시한번 맥이 풀린다. 어제는 입에서 쉽사리 나오지 않던 단어가 쉽게 입밖으로 나왔다. 꽉 동여맨 혀끝에 고이는 건 감정인지 단어인지 모호하다.
"재미?"
카르셰가 책을 덮는다. 아무런 표시 없이 덮는다는 건 진지하게 읽고있던건 아니란 뜻이다. 집중은 하되 진지하지는 않은 태도. 카르셰는 모든 걸 그런식으로 대했다. 놈에게 처음으로 흥미를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는 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친구 많네 카르셰."
"헤. 너 정도지."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서도 여전히 웃는 낯이다. 탤벗은 잠시 고민한다. 저 자식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닌데, 내가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저울질한다. 기우뚱거리던 저울은 이내 그냥 내가 해야겠지.-쪽으로 기운다. 아마 제가 순순히 사과한다면 놈도 실은 나도 미안. 형 일때문에 너무 예민했나봐. 답하고 제게 입을 맞추던 같이 자자고 애교를 부리던 제게만 보여주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어딘가 찝찝하긴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우리들이니까 잘못된건 아닐것이다.
"어제 편지 마음대로 읽어서 미안. 어제는 조금, 질투했나봐. 너라면 눈치 챘겠지만. 아, 역시 입으로 말하니까 기분 이상하네. 아무튼, 미안. 나 이런거 잘 못하는 거 알잖아."
제가 져주면 된다. 카르셰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연인사이와는 달랐으니까. 말로 하고나니 더 가볍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고작 편지 하나에(-절대 페니의 마음이 가볍다는 게 아니다.) 화를 내다니. 일곱살짜리가 사탕을 양껏 못먹었다고 투덜거리는 것과 다를 것 없었던거다.
일곱살짜리는 따지고보면 카르셰쪽인데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이런것까지 닮을 줄은 몰랐다. 카르셰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게 해준 것도 자신인데 거기에 질투하고 삐지다니. 뒤늦은 부끄러움에 귀끝이 화끈거렸다.
"그거 말고는 할 말 없어?."
입술을 삐죽 내민 모습이 일곱살배기만큼 귀엽다. 창 밖으론 왜 지금 바람이 부는 건지, 펄럭이는 커튼이 카르셰와 탤벗 사이를 어지럽힌다.
"할 말은 네가 있어야지, 카르셰 헤이즐."
카르셰는 어깨를 으쓱이곤 책장 속 책등을 만지작거린다. 아리송한 얼굴은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다. 그러더니 대뜸 탤벗을 안아왔다. 커튼이 펄럭이듯 얇은 몸이 저보다 단단한 몸을 꽉 끌어안는다.
"미안."
예상했던 것과 엄청나게 다르진 않지만 어딘가 결이 다른 행동에 탤벗은 찝찝함을 느낀다. 그래도 카르셰를 끌어 안는건 응당 해아할 일이기 때문이다. 연인이 안겨오면 안아주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탤벗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상함을 느낀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만큼 어딘가 불쾌한 느낌이다. 훌쩍, 어깨에 폭 파묻힌 얼굴에서 코먹는 소리가 난다. 비릿한 물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무언가 잘못된게 카르셰라는 걸 깨닫는 것에 있어 적당한 자극이었다. 훌쩍거리는 소리 위로 탤벗이 카르셰의 등을 토닥이는 소리가 겹친다. 등 뒤가 축축해지는 게 카르셰의 눈물 때문인지 제 식은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단 한가지 확실한건 온 감각에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사실 뿐이다.
잠은 악몽때문에 달아나고, 정신은 카르셰 때문에 달아난 채 탤벗은 밤을 보냈다. 카르셰도 중간에 달아나버렸으니 결론적으로 탤벗에게 남은 건 제 몸뚱이 뿐이었다. 이러다가 애 탈수오겠다싶어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놈은 사라져버렸다. 창은 여전히 열려있고 바람은 찬데 놈은 없었다. 어디를 얻어 맞은 듯 가만히 서있던 탤벗은 분노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쪽잠을 잤다. 친절한 학우 덕분에 수업을 놓치는 일은 없었지만 수업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으니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루종일 카르셰는 볼 수 없었다. 더이상 아무런 화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낯설었다. 익숙한 존재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듯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불쾌함이 없는 이질감은 또 다른 말로는 서운함. 허탈감과 비슷하다. 파랑의 감정은 결국 우울이다. 우중충한 하늘엔 파랑이 가득하다.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어젯밤 바람이 찬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나보다. 탤벗은 카르셰의 침대를 뒤져 페니의 편지를 찾아냈다. 다시 읽었다. 세 번, 네 번. 계속 읽었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모를 공백이 편지에 가득했다. 일곱살배기는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아까 연회장에서 제게 무슨 일이 있는거냐 묻던 후플푸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별거 아니라 답한 주제에 도망치듯 연회장을 나왔다. 이어지듯 뜨문뜨문 떠오르는 기억은 결국 원론을 향한다. 나는 카르셰를 사랑하는가? 카르셰는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는게 정확히 뭐지?
시간을 되돌려 정착한 질문. 어쩌면 질문의 답일지 모르는 질문 앞에 선다. 아직 볕이 좋던 날의 오후가 떠오른다. 카르셰의 목소리를 입은 질문을 재진술한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리는 게 맞는걸까?
내가 계속 너를 사랑해도 되는걸까?
눈을 감는다. 잠에든다. 눈을 뜬다.
눈 앞에 펼쳐진건 어린날의 기억.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갈대밭은 바다처럼 솨솨 소리를 낸다. 호수를 품어야할 것 같은 들판이건만 어디를 둘러봐도 물은 없다. 멀리 보이는 건 내리지는 석양 뿐이다. 시야를 가득 채운 황금빛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발밑을 보면 그곳은 또한 어린날의 기억. 온실 속 꽃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건 만지면 위험하고.
이건 꺾지만 않으면 괜찮아.
이건 꽃 향은 좋지만 치료보단 저주에 쓰이는게 독특한 점이지.
꽃 하나하나 가진 목소리가 저 멀리 물결소리를 타고 흘러온다. 흔들리는 갈대가 어지럽다. 목소리가 어지럽다. 카르셰는 가만히 소리를 듣는다. 듣고싶지 않으면서도 붙잡고 싶은 소리가 사라질까 겁이 나 함부러 내딛지 못한다. 바람이 분다. 황금이 일렁이고 가까이 다가온 태양은 뜨겁다. 한 발짝 내딛는다. 파란 꽃이 보인다.
하하, 이건 널 닮았네.
하나 알려줄까?
원래 이 꽃은 잘못만지면 정말 아프거든. 그런데 나는-
카르셰는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안다. 높다란 갈대 아래 흩어진 푸른꽃을 따라가던 걸음을 멈춘다. 듣고싶지도, 붙잡고싶지도 않은 말이다.
나는 괜찮아. 형이니까.
카르셰의 목소리가 황금바람을 타고 저 멀리로 흐른다. 어딘가에선 이 목소리가 바람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가도 이내 질낮은 혐오감이 턱끝으로 차오른다. 이건 나에대한 감정인가, 아님 형에 대한 감정인가. 그 경계가 눈물이 되어 흐른다.
제이콥. 형, 보고싶어.
들리면 안되는 말은 삼킨 채 걷는다. 유년의 기억은 전부 밝은 석양이고. 들리는 건 웃음소리다. 따뜻하고 가벼운 기억 속 평화는 불합리의 형태를 띤다. 카르셰는 그 속에서 거닌다. 폭신하고 울렁이는 발걸음이 불합리와 섞여나간다. 한 발짝. 두 발짝.
"탤벗. 혹시 자?"
꿈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오후였다. 요 며칠 어지러움이 늘었다.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으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건 부정할 수 없었다. 카르셰는 초여름의 햇빛을 입은 제 연인을 바라본다. 남들보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그 틈을 타 만들어낸 짧은 시간은 달고 마주한 연인의 체온은 더 달다. 카르셰는 꾸벅꾸벅 조는 탤벗을 가만히 바라보다 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해준다. 입가엔 미소가 걸린 채다.
"저기 탤벗, 우리 곧 다음 수업 들어가야해."
나즈막하게 부르자 놈이 눈을 뜬다. 잠에서 벗어나지 못한 붉은 눈이 꿈벅꿈벅 저를 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벌써? 하고 묻는 말에 카르셰는 뻗었던 손을 거두어 책상에 올린 채 탤벗에게 몸을 기울인다.
"아니, 실은 삼십분 정도 남았어."
"으음....너 할 말 있구나?"
할 말이 있었나. 가만히 연인의 말을 곱씹어본다. 그냥 요 며칠 힘들었고ㆍㆍㆍ. 꿈에서 하지 못한 말을 곱씹어본다. 보고싶어. 살며시 제 옆을 내려다본다. 탤벗은 다시 눈을 감은 채다. 같지만 다른 감정이 신경을 간질인다. 이건 너에게 할 말은 아닌데. 이렇게 왔다갔다 자면 머리아플텐데. 생각하면서도 이번엔 깨우지 않는다. 할 말이 있었나. 이쪽이 혀끝에 멤돌아서. 카르셰는 생각한다. 어렴풋하게 밀밭이 떠오른다. 갈대같기도 하고 밀같기도 하고. 채도낮은 황금빛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아, 나는 꿈을 떠올리고 있구나.
이상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탤벗과의 추억에도 밀색이 있는지 헤아려 볼 뿐이다.
탤벗과 만난 건 겨울이었다. 겨울의 찬 기운이 으슬거리는 코끝을 알싸하게 만든 건 장소의 특이성. 더러운 부엉이장 앞에 선 작고 마른 아이를 본 순간 몸을 감싸던 흥분감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거기 누구 있어?'
눈이오면 카르셰는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하얗게 빛나는 설산에서 길을 잃는 순간 카르셰의 존재조차 잊혀질거라 겁을 주던 제 형제의 장난기어린 목소리가 무슨 족쇄라도 되는 냥 겨울엔 더욱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더 특별했다. 그 날 부엉이장에 간 걸 충동이 아닌 운명이라고 칭하는만큼 특별했다.
'안녕. 나는, 그 너랑 같은 래번클로인데...'
나를 지우던 빛이 너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라면 나는 기꺼이 스스로를 지우겠다는 다짐의 무게는 운명이어야 마땅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느새 또다시 눈을 뜬 탤벗이 꿈벅이며 아까 카르셰가 해 주었듯 제 연인의 머리를 정리해준다. 아직 잠이 덜 깨 느린 손짓 하나하나엔 초여름의 따스함이 가득하다. 탤벗은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앞으로 기울이다가 폭, 하고 애교부리듯 책상에 고갤 댄다. 초여름의 더위. 목제책상의 시원함이 잠을 떨쳐보내주는 것도 잠시다. 따끈히 열이 오른 볼에 금세 책상이 따뜻해진다. 겨울과는 거리가 멀다. 따스하고, 모든건 선명하다. 꿈 속 정원같은 건 잠시 잊어도 괜찮을거란 생각이 들 만큼.
"탤벗,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
"네가 이상한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뭐."
탤벗은 여전히 고개를 기댄 채 눈만 떠 카르셰를 본다. 하얀 머리칼이 창문을 밀고 들어온 바람에 흩어지고 카르셰의 푸른 눈을 가린 채다. 그래도 둘은 마주친다. 붉은 시선이 깊은 파도같은 눈으로 얽혀들어간다. 잠시의 정적이 일고 그 사이를 은은한 물냄새가 채우던 중 카르셰는 탤벗을 보고 웃는다.
카르셰는 탤벗을 보고 웃는다. 물어야할 것이 떠오른다.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리는 게 맞는걸까?"
탤벗은 눈을 감고 잠시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기 전으로는 돌리고 싶지 않다고 답해야겠지?"
"제법 치는 데 탤벗 윙거?"
나즈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탤벗의 이마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또 아주 잠시의 정적. 여전히 그 사이를 초여름의 습기가 채운다.
"그것도 맞지만... 조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야해."
"근본적?"
"원론적이라고 해도 좋고."
나는 너를 비추기위해 사라지더라도 너만큼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니까. 뒷말없는 평서문도 질문이라면 질문일터다. 정해진 순간. 정해진 계절. 따라오는 습도와 온기. 색채와 명암. 겨울에서 시작해 벌써 초여름이다. 카르셰는 눈을 깜박인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눈 앞을 가려 탤벗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게 아쉬웠다.
어쨌든 한 번 생각해보고 답해줘. 꼭. 탤벗만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발걸음 이후로 의자를 끄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도 사랑해. 자그만한 사랑고백은 덤이다. 창 밖에선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는 연인의 목소리가 햇빛처럼 부서진다. 할 일이 많았다. 도서관에서 시험관련 책을 두어 권 빌리고 페니에게 부탁해둔 걸 받아야했다. 아, 핀치씨의 사무실에서 슬쩍 할 물건목록도 다시 정리해야한다. 호수에 가는 건 오늘도 저녁이 될 것 같네. 오늘은 부디 물이 덜 차갑기를.
Love -ing
문제가 풀리면 기뻐한다. 탤벗도 그랬다.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고 풀어가길 좋아했다.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욱 기뻤다.
이번엔 아니었다. 저를 감쪽같이 속인 난제의 해결 앞에 선 탤벗은 분노했고 모멸감을 동반한 수치심을 느끼다 종내엔 슬퍼했다. 한 달에 걸친 풀이의 시간 앞에 있었을 시간이 길어질수록 슬픔또한 늘어날 것임을 깨닫곤.
숨을 쉰다. 밤하늘의 공기는 차겁다.
여름이 가고있단 증거다.
그는 두려웠다. 그가 두려웠다. 난제가 탄생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던걸지 감히 헤아리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탤벗의 몫이라 탤벗은 해답 앞에서 새로운 답을 찾아 헤엄쳤다. 숫자와 데이터가 아닌 직감에 의존하는건 낯설고 불안하다.
내가 너를 계속 사랑해도 될까. 그 질문 뒤로 숨어버린 놈이 그리워진건 그로부터 일주일쯔음. 도서관 창 밖으로 보이는 하얀색에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한 후였다. 숨이 차는 지도 모르고, 책을 손에 든 채 마주한 잔디밭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걸 그랬나. 어이없는 생각에 조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몸은 반대로 움직인다. 등 뒤로 책을 숨기고 들어갔으나 핀스부인에겐 금방 들켰다. 부인이 뭐라 말했지만 머리에 들어오는 건 영 딴판의 생각이었다. 카르셰, 너 진짜 겁쟁이에 찌질하고 답 없는 남자구나. 답이 정해진 문제는 그저 협박이잖아. 너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협박을 해?
질문을 해도 들을 이는 눈앞에 없다. 시간처럼 흐르는건 카르셰고 배경인물처럼 그저 존재할 뿐인 게 시간이다.
"카르셰, 준비물 네 몫까지 챙겨뒀어. 침대 옆 협탁, 들어가면 확인해."
"으응. 고마워."
너도 그럴까. 결국 그리움과 추억이라는 침묵이 보류를 만들었다. 아마 침묵의 탈을 쓴 보류가 길어지면 결국 답이 될 것이다. 다행인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단 사실이다. 하루종일 우는 하늘은 마음 속 감정을 탓하기에 적당했다.
대부분 여전하다. 탤벗은 카르셰를 챙겼고 카르셰는 수많은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다. 탤벗도 카르셰도 주저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단 한번의 행동이 이 난제의 진정한 답을 가르킬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핑계인듯 사실인듯 애매한 시간은 흐른다, 보단 늘어졌다에 가깝다. 감정도 시간도 늦여름 늦더위마냥 늘어진다.
"카르셰 나랑 얘기 좀 해.
"아. 지금?"
그리워진 순간처럼 둘은 도서관에서 마주했다. 더위대신 습기에 가깝다. 탤벗에겐 일어나 샤워를 하는 대신 샌드위치를 포기한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책을 봐서인지 저녁도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여느때보다 빨리 허기짐을 느끼고 있던 중 도서관으로 하얀 것이 쑥 들어왔다. 탤벗은 문으로 향하던 발을 돌려 책장 사이로 향했다. 무언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보다 카르셰가 어떤 책을 볼 지에 대한 추론이 우선이었다.
시기상 표준 마법사 시험에 관한 책일 확률이 가장 높다. 하지만 시험과 금고의 경중을 따지자면 후자가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요즘 호수를 자주 찾는 걸 보면 물에 관한 서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쯤이 적당할테지.
"카르셰.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생각... 보다 더 갑작스럽네 이거."
"내가 여기 있을거란 것 정돈 알고있었을 거면서."
"그렇긴하지."
책장 하나 책 한 권만큼의 공간 너머로 주고받는 이야기. 탤벗은 제가 뽑은 책의 제목을 보곤 그대로 들고 카르셰쪽으로 향했다. 카르셰도 그새 책을 고른건지 두꺼운 책을 끌어안은 채였다.
"이것만 읽고 들을래."
요청이 아니라 요구에 가까운 말에 탤벗은 작게 웃었다. 죄다 어지럽힌 놈이 말하는 것 치곤 건방지지 않아서.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한 웃음이기도 했고 그저 카르셰의 습관에 길들여진 웃음이기도 했다. 늘 눈치를 보면서 말만큼은 항상 당당한 놈. 웃기지도 않지. 탤벗은 꺼내온 책을 들고 카르셰 맞은편에 앉았다. 표준시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책이었지만 다시 가지러가고싶진 않았다.
수생약초학. 두껍다 싶더니 책이라기보단 도감 내지는 사전에 가까웠다. 카르셰에게 줄까 싶어 가져왔던건데 내용이 이래선 줘봤자 별 의미가 없을 뻔 했다. 영리한 놈은 기억력이 매우 좋았고, 특히 약초에 관해선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으니까. 최악의 경우 자신을 놀린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바닥물풀은 이렇게 생긴거구나. 하늘하늘한게 꼭...
그럼에도 책의 구성은 나쁘지 않았다. 부드러운 색연필로 그린듯한 표본그림과 멋스러운 글씨체로 적힌 학명. 간결한 설명과 용도별로 정리된 사용법까지. 나쁘지 않네. 싶지만 재미는 없었기에 금방 책을 덮었다. 두꺼운 책은 턱, 하는 소릴 냈지만 맞은편의 카르셰는 미동조차없다. 탤벗은 무의미하게 책장을 넘기며 이걸 건내는 자신을 떠올렸다. 카르셰는 '내가 여기 나오는 것도 다 모를거라 생각해?' 라며 찌푸리는듯 하다 은근 자랑스러운 듯 '이정도는 너랑 처음 만났을 때도 전부 알고있던거라고.' 하고 답할 것이다. 음, 놀린다고 생각했을거란건 취소해야겠다. 저에게만큼은 이상할만치 긍정적인 신뢰를 표하는 놈이니까.
"나갈까 탤벗?"
언제 다 정리한건지. 차곡차곡 쌓은 책을 껴안은 카르셰가 탤벗에게 빙긋 웃어보인다. 탤벗은 말없이 일어나 카르셰가 쌓아올린 책 중 두어 권을 집어든다. 책 정리도, 밖을 나서는 발걸음도 함께다.
어느순간 손을 맞잡았다. 둘은 복도를 걷다가, 운동장 외곽을 돌았다. 날씨는 좋았다. 높고 맑은 하늘 속을 누비는 새소리가 가끔 들릴 뿐 조용했다. 카르셰는 이 조용함이 지속되길 빌었다가. 금새 멎어버리길 빌었다.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제이콥의 방에서 잠시 눈을 붙인지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이상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아침인지. 다만 제정신으로 걷는 이유는 옆에 선 놈이 탤벗이기 때문이다.
왜 내가 그런 얘길 한 거지. 하는 후회는 이틀정도 이어졌다. 눈 앞의 행복을 그저 한 순간의 걱정으로 날리겠다는 미친짓이 왜 정론으로 느껴진걸까. 이 또한 이틀을 채 못갔다.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 속에 들어가 제이콥의 잔재를 찾고 먼지투성이의 방에서 몸을 뉘일때면 제 현실이 어느쪽으로 기울어진건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평생 사라진 제이콥을 쫓다가 나 또한 사라져버릴거란 생각. 이 또한 모호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탤벗을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감정과 질은 다르지만 방향만큼은 동일했다. 그렇게 생각을 더듬다보면 그날의 질문은 시기상조는 아닐지언정 틀리진 않았구나.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요즘 바쁘지?"
"응. 시험도 있고 과제도 늘어났으니까. 그래도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걸?"
"헤. 그렇게 나오시면 할 말이 없지. 음, 그. 탤벗 오늘도 바빠?"
"바쁘긴한데 너한테 낼 시간은 있어. 우리 할 얘기 있잖아."
"직구로 보내버리네."
"질질 끈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카르셰."
"...그건 맞지."
혼몽한 정신도 제정신으로 돌리는 말에 카르셰는 눈에 힘을 줬다. 감정의 정리와 말의 정리는 다른 것이라 어떻게 말 해야할지 쉽사리 판단이 되지 않았다. 다만 마주 선 손을 붙잡고 기숙사로 향하길 택했다. 고민했던 공간에 가면 어떤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일단 같이 갈래?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탤벗은 그래. 하고싶은대로 해봐. 짧게 답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얼굴은 무료해보이기 쉽상이나 탤벗의 무표정에는 늘 영특함이 반짝였다. 그것이 오늘따라 뾰족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제 잘못일 터라 카르셰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잡아 끌었다.
문의 문제를 같이 풀고 들어갔을 땐 저녁 노을이 질 시간이었다. 조금있으면 기숙사생들이 들어올 터라 카르셰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작 며칠을 밖에서 지냈다고 챙겨야 할 물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탤벗이 치워둔걸까 싶어 물어볼까 했지만 곧 닥칠 상황에 그러고싶진 않았다. 여태껏 자신이 멀쩡하게 굴어왔던건 뻔뻔해서 그런게 아니라 단지 실감하지 못해서 그랬다는게 새삼 다가왔다. 정말 끝이구나. 생각해보면, 곱씹을 수록 당연한 사실인데 그 당연함이 못내 아팠다. 서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수초를 챙기며 잠시 고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차피 오늘 밤을 밖에서 보낼거라면 다 챙기는 게 맞는데. 혹시라도 탤벗이. 혹시 탤벗이 그러지 말자고 한다면? 나를 따라온다면? 근거는 없고 희망만 가득 찬 가정임을 알면서도 이 수초가 마치 운명을 결정짓는 열쇠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한 움큼 쥐었다가. 둘이 쓰기엔 조금 모자라고 혼자 쓰기엔 좀 많은 앙을 쥐었다가.
"카르셰 얼마나 걸려? 애들 곧 오겠어."
탤벗의 말에 전부 내려놓았다. 의미없을 일이었다. 어차피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리 없는데. 제이콥 방에서 엉엉 울던지 아님 물 속에서 울다가 혼자 추하게 뭍으로 기어올라오던지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이제와서 울 것 같은 이유를 가늠하니 더 울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났다.
같이 기숙사를 나올 때 까지 카르셰는 고민했다. 먼저 어디를 가는 게 날까. 제이콥의 방? 아니면 호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두운 하늘 아래 서니 발은 저절로 움직였다. 그저 탤벗덕에 잠시 돌아온 제정신이 극심한 피로와 신경증에 밀려난걸지도 모른다. 어딘가 꼬인듯한 회로 덕에 아까까지 울 것 같던 기분이 흐려진건 고마워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카르셰는 탤벗의 손을 잡고 호수로 향했다. 같이 온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기억이 없었다. 방학 때 집 근처 호수에서 같이 헤엄친 적은 있었지만 이곳은 처음이다. 탤벗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우울하고 답답해야할 때인데 카르셰의 손을 잡고 걷자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놈이 밤마다 향한 곳이 제가 생각했던 곳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이쪽 방향이면 분명 호수로 가는거겠지. 생각하고나니 지난 여름 헤이즐 본가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았지 그때. 따뜻했고, 아기자기한게 전부 카르셰같은 곳이었지. 이렇게 밤에 나간 적은 없었지만.
탤벗은 카르셰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카르셰는 그것이 신호탄인듯 제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
이 모든게 끝이다. 따뜻했던 집은 다시금 아침이 기대되지 않는 집이 될 것이고 탤벗을 위해 기르던 온실 속 꽃은 주인을 잃게 될 것이다. 홍차에 넣기위한 새로 산 각설탕함은 영영 각설탕을 품지 못할 것이고 나 또한 아무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저의 탓이다. 일부분은 제이콥의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새끼의 탓이 클 게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내가 이렇게 몸도 정신도 병약하게 커버린건 그자식 탓이니까. 하지만 탤벗을 사랑하게된건 오로지 내 탓이다. 궁극적으로던 표면적으로던 카르셰가 탤벗을 사랑하게 된 건 오로지 카르셰의 의지다. 이제와서 숨을 내쉬기 힘들었다.
몸에 열이 들끓는 탓은 그 숨이 몸속에서 연소 된 탓인지. 호수를 보니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말을 벗고. 상의를 벗고 바지를 벗었다.
내가 미쳤구나. 싶지만, 그조차 당연한 일로 느껴진다.
차마 탤벗이 말리기도 전이었다. 흥분에 물이 차거운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헤엄쳤다. 탤벗이 멀어지고서야 뒤를 돌아봤다.
"카르셰 미쳤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답할 기운이 없어 탤벗! 하고 이름만 한 번 불렀을 뿐 별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웃음이 났다. 그래 수초가 무슨 상관이람.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아무래도 탤벗은 저와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한밤중에 속옷차림으로 호수에 들어가는 미친놈이랑은 연애는 무슨 친구도 하면 안 되는게 맞는걸테니까.
"너..! 카르셰. 야, 이 미친놈이..!"
아까까지 단조로웠던 건 지금의 이벤트를 위해 참고있던 것 뿐인가. 원래도 돌발행동이 잦은 놈이었으나 이렇게까지 극과 극인 행동은 처음이었다. 배신감 이전에 당황과 혼란에 정신이 아득했다. 몸도 안 좋은 놈이 속옷한장만 걸치고 물에 들어갔다. 물이 일렁인다. 온 몸이 그 일렁임과 반대로 일렁거려 멀미가 났다.
파도가 카르셰를 삼킬까봐? 카르셰가 숨을 쉴 수 없을까봐? 부서질까봐? 탤벗은 슬리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모래 위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숨을 쉰다, 내뱉는 숨은 부서진다. 파도처럼 어쩌면 모래처럼. 숨과 어긋난 박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위태롭지만 카르셰를 잡기엔 적당한 어설픔이다. 어느새 탤벗도 물 속이다. 어느새라고 할 것도 없다. 그도 헤엄치고 있었으니까. 카르셰와 달리 옷을 입은 채라 나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놈이 제가 다가가도 그 자리에 우뚝 서있을 뿐이라 잡기 어렵진 않았다. 혹여나, 추워서 더이상 못 움직이는걸까 덜컵 겁이 나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아당겨 그대로 품에 안았다.
"나 미친놈 맞아."
"카르셰."
"그러니까, 뭐 해야하는지 알잖아. 그게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다고."
저항 한 번없이 제게 안긴 주제에 혀가 길었다. 그와중에 놈이 고갤 파묻은 곳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맨살이 드러난 양 팔을 잡아 조금 떨어트리자 달빛을 입어 더 창백해보이는 몸뚱아리 위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 이라기엔. 아, 운다. 놈의 양 볼에 구슬지는건 분명 습한 것이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눈에 호수가 생긴 모양이다. 추위에 미쳐버린걸지도 모른다. 손에 감싸쥔 뺨은 축축하고 뜨겁다. 그리고 약하다. 놈은 약하다.
카르셰도 알았다. 본인이 얼마나 찌질하고 약한 인간인지. 도망친거다. 갑자기 헤엄을 친건 지금의 본인보다 조금 더 나은, 이성적인 본인으로부터 도망친거다. 그런데도 탤벗은 제게 왔다. 그리곤 묻는다.
"내가 그렇게 말 해도 괜찮아?"
다정하게 묻는다.
"괜찮아."
다정한 답이다. 잔뜩 겁먹은 목소리가 다정을 흉내낸다. 탤벗은 그걸 제 다정과 가만히 비교해본다. 천천히 녹아내린 두 다정이 탤벗의 손 안에서 울음으로 터져버린다. 무게를 가늠하기엔 어렵지만. 하나의 다정이 여러가지가 섞인 모습이란 것만큼은 가늠할 수 있다. 한 손에 담긴 울음이 커진다. 한 손에 담긴 다정이 흘러내린다. 감기지 않을 것만 같던 눈이 감기고 조용히 울음을 흘린다. 가끔 훌쩍이고 가끔 앓는 소리가 물소리와 섞여 규칙을 만들어낸다.
"다른 할 말은?"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있었거든. 아니지, 알고있어. 알고 있는데."
어제까지 협박이라 생각했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탤벗은 다시 생각한다. 카르셰는 약한 남자라고. 놈이 말하고자하는게 뭔지 안다. 놈이 우는 이유는 제가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일테니. 화를 내야하는데 화가나지 않으니 도리가 없다. 이젠 작지도 않은 몸을 구겨가며 우는 놈의 뺨이 뜨거워서 그 몸까지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껴안고 있자 뜨문뜨문 밭은 숨과 함께 말이 이어졌다.
카르셰는 무얼 말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투정이 아니라 너와 헤어지자는 단호한 이야기가 될지. 이미 저주받은 우리 형제의 저주가 너에게도 옮겨가지 않을 수 있을지 말을 고른다.
"내가 물어본 날 있잖아. 지금보다 조금 따뜻했을 때. 잠든 널 보는데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어."
"부엉이장?"
처음부터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카르셰가 웃는다. 차거운 양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따뜻한 이유는 탤벗이 그걸 기억한다는 사실이 기쁘기 때문이다. 하하, 기억하는구나? 엉망진창 가빠진 숨을 후, 내뱉는다. 제 박자를 찾은 숨은 아까보다 뜨겁다.
"나는, 나는 너 처음 봤을 때. 정말... 신기했어. 너도 신기하고 나도 신기하고. 나는 원래 밖을 나가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겨울에는 더욱. 아, 맞아. 나는 겁먹었던거야. 나는 그때 겁을 먹었었어."
느리지만 말이 이어진다. 탤벗은 카르셰의 손을 잡는다.
"계속해. 끝까지 말해."
"나는 겨울이 무서웠어. 우리 형이 무서운걸지도 모르지. 결국 다 이자식 때문인거니까. 나는.... 탤벗, 우리 부모님 뭐 하시는 지 알지?"
"어머니쪽이 온실을 하신다고 했었지."
"응. 그래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정원이랑 온실 얘기만 몇 시간이고 했었잖아."
"기억나. 그래서?"
탤벗도 작게 웃는다. 마주잡은 손 사이로 체온이 뒤섞인다.작은 성냥같은 체온이 식지 않도록 탤벗은 천천히 그를 뭍으로 잡아당긴다. 겁 많은 놈이 내는 용기의 원동력을 가늠해본다.
"그래서 신기했던거야. 나에게 겨울은 무서운 시간인데 너는... 너는 마치 겨울한테 사랑받는 것 같았거든. 나는 겨울을 닮았잖아. 근데 겨울은 나보다 크단말야. 매번 감기에 걸리니까 겨울은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고. 나는 겨울마다 내가 사라질까 두려웠어. 잡아 먹힐 것 같았단말야."
"카르셰."
"미친소리같지? 근데 아직 안 끝났어. 들어. 네가 들려달라며."
"아까까지 울던 놈이라고는 안 믿기는데."
"헤. 미친소리라는 건 부정 안 하네?"
"아무래도?"
카르셰가 목을 가다듬는다. 눈물에 불어 못난 얼굴 달빛 아래 선명하다. 더이상 이건, 사랑고백에 불과함이 분명했으나 늦었다는 것도 안다. 추위에 돌아버린건지 깜박이는 눈 앞으로 온실이 보이고, 금빛 보리밭이 보였다. 그리고 제이콥이, 제이콥이 깜박였다.
"...나 정말 별로인 놈이거든. 나보다 잘나보이면 질투하고 시기해. 어떻게든 이겨먹어야하고. 만일 그게 안 된다면 난 시건방진 합리화나 하겠지. 나는 그런 놈이야. 보이는 거에 매몰되어서는 마음같은 건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런 내가 널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
제이콥이 지나고 눈 앞에 보이는 건 제가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다. 제이콥을 찾게 만든 것도.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것도 전부 눈 앞의 남자 때문이다. 그런데도 원망하는 마음은 초호도 들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네가 사랑하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되고싶다... 고 생각했어."
카르셰의 눈에서 다시금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바람보다 가벼운 물방울이 탤벗쪽으로 흩어진다. 물방울이 눈으로 날려와 잠시 눈을 감은 순간 아까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각의 차단이 제멋대로 눈 앞의 카르셰를 상상했기 때문일까.
"나는 너를 사랑해야만 하는구나.하고. 그렇게 만들어졌구나. 그걸 위해서 나는 겨울을 닮은거구나."
"...그러니까 탤벗."
아니다. 눈 앞의 놈은 웃는게 맞았다. 벅찬듯 뚝뚝 끊어지는 말을. 여전히 우는 낯짝을 하는 주제에 귀를 붉히는 게 가탕키나 한지. 미지근한 체온이 탤벗의 손목을 감싼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웃었다가, 우는 듯 하다가. 결국 멀어진다. 제 손목을 꽉 쥐던 손이 떨어진다.
"너는 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고백으로도 좀 별로인데, 이별로써는 완전 최악이네."
"헤. 그런 셈이지."
결국 멀어지는 놈을 잡아끈건 탤벗이다. 그대로 차거운 얼굴에 입을 맞췄다. 뭍이 추운 탓이다. 온 몸의 피가 들끓으며 심장박동을 가속했다. 쿵쿵 울리는 소리는 두 사람의 몫이다. 탤벗은 그 박동에 모든 생각을 흘려보낸다. 무겁지만 제 몫의 책임을 모조리 앗아간 놈의 말을 가만히 흘려보낸다. 물 냄새 나는 바람이 신경을 간지럽혔지만 거슬리지 않듯 헤어짐에 대한 생각도 거슬리진 않았다. 카르셰가 말한 원론이 무엇일지. 역시 제가 힘들다는 걸 알아주지 않은 저에 대한 원망인지. 형과의 관계회복의 강요가 견디기 힘들어서 무너진건 아닐지. 생각하다보니 제가 이 생각을 깊게 하지 않은 이유가 어렴풋이 윤곽을 가졌다.
나도 무서웠던거구나. 이게 다 내 책임일까봐. 그리 생각하니 저도 카르셰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이런 쓸모없는 걸 닮다니. 그래도 본인이 저놈보다 나은 이유는 탤벗은 카르셰를 눈앞에 두고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있다는 점이다. 헤어짐에 대한 생각이 거슬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원론이, 그 근본이 다른거였다. 나는 카르셰를 사랑하는가. 카르셰도 그러한가? 다른 질문은 필요 없었다. 카르셰 본인도 몰랐겠으나 정말 모든 답이 나와있는 질문이었던거다.
최악의 이별통보. 그 앞에서 카르셰가 말한건 사랑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답은 따라오는 것. 근본은 결국 나의 감정이다. 이성, 숫자와 데이터. 그 모든 것과는 다른 모호하고 불균형한 것이 이끄는 대로 걸어야겠다. 생각했을 땐.
"대신... 날 평생 기억해줘. 날 잊지 말아줘.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좋아. 나보다 더 사랑해도 괜찮아.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나와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들을 그들과 하더라도 난 원망하지 않을거야. 대신 계속 날 생각해줘. 매일일 필요도 없어 그저 가끔. 가끔 온실에 핀 하얀 꽃을 보면 날 떠올려줘. 겨울이 오면 우리의 첫만남을 떠올리고. 밤바다를 보면 오늘을 떠올려줘. 빈도가 줄어들어도 괜찮아. 대신, 대신 죽을 땐 나를 떠올려줘.
"이게 고백으로 들리다니 나도 미쳤지."
카르셰를 처음 만났던 날과 오늘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자신이 미쳤다는 것 외론 설명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작고 하얀 놈이 대뜸 손을 잡으며 제가 좋다고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듯이 오늘또한 영영 잊지 못할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훌쩍, 코먹는 소릴 내는 놈의 얼굴을 붙잡았다.
하얀색은 색이 잘 변한다고 했던가. 하얀 머리에 하얀코트를 입은 작은 눈송이가 이젠 어두운 바다를 닮아 남빛으로 보였다. 표정변화가 적은 놈이 어떤 기분인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만져보는 것이었다. 붙잡은 얼굴이 뜨겁다. 아, 역시 하얀색은 색이 잘 변한다. 저를 비추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색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지금의 카르셰는 저를 비춰 붉게 변한 것이겠지. 카르셰가 내게 사랑을 비추는 이유는 나 또한 놈에게 사랑을 비추고 있기 때문인거다.
"그래 좋아. 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카르셰."
탤벗은 카르셰를 밀었다. 저도 힘이 강한 편은 아닌데 놈은 쉽게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는 탓에 물가로 머리를 박은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 재빠르게 그 위로 올라탔다. 탤벗이 하반신을 누른 탓에 카르셰는 바닥에 팔꿈치를 댄 채 상체를 들어올리는게 고작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썹과는 달리 파란 눈엔 이채가 돈다. 무언가 기대하는 눈. 이기적인 그 눈을 보며 탤벗은 제 표정도 그와 비슷할거라 생각한다.
"나랑 계속 만나. 카르셰 헤이즐."
탤벗의 입술이 카르셰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카르셰의 동공이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며 탤벗의 얼굴을 쫓았다. 탤벗은 그걸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책임을 진다고? 네가? 반문해주고픈 마음을 내뱉는 대신 웃음을 뱉었다. 카르셰는 이기적이고 못난 수준이 아니라 찌질한 놈이란걸 이렇게 배워갈줄은 몰랐는데.
"너 바보야?"
"뭐가, 이 바보야."
이미 이 미친바보에게 휩쓸려 야밤에 수영을 했다는 점에서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나왔던걸지도 모른다. 덤덤한척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실로 헤어짐을 생각해봤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거다. 웃기지도 않지. 래번클로 로브는 둘 다 가져다버려야할지도 모르겠다.
"됐어. 계속 그렇게 바보같이 지내자. 바보 하나보단 둘이 낫지."
탤벗이 다시금 카르셰에게 입맞췄다. 이번엔 입술끼리 맞닿고, 카르셰는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이내 탤벗의 뒷통수를 끌어앉으면 완전히 물가에 누워버렸기에 말은 흐려졌다.
그래, 감정의 존재만 선명하면 됐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의 감정은 존재할 터니.
우리가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게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 일 터니.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