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정략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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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힐데베르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속을 읽을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허둥지둥 내민 손을 잡았다. 무슨 정신으로 식을 치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걷는 와중에도 지금이라도 여기를 뛰쳐나가야하나 생각했다. 이 아이도 끌려온 거라면. 그 탐욕스러운 작자가 볼모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결혼에 귀한 자식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였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 어린 것을.

식이 끝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네가 원해서 이 자리에 온 게 맞니?”

에이택의 회장이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결혼을 무를 생각이었다. 아이의 눈은 파문 한 점 없이 새까맸다. 참 알기 힘들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공사다망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예상치 못한 답에 힐데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야 그렇지. 근데 이게 무슨 뜻이지.

“원해서 나온 것 맞습니다.”

그는 짧게 답했다가 상대가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자 마지못해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일일이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바쁘시잖습니까. 가 보시죠.”

“아.”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는 이쪽의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숨기려고 노력은 하지만.

힐데베르트는 작게 웃었다.

“안심해. 필요한 절차가 끝나고 나면 얼굴 볼 일도 자주 없을 거야.”

“예.”

주눅 들어 있는 건 아니었구나. 마음이 조금 놓였다. 결혼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면 제게 원하는 바 또한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어려울 것 없는 관계였다. 그는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 사과한 뒤 아이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며칠을 별 생각 없이 지냈다. 내가 결혼을 했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 다름 없는 나날이었다.

문제의 어린 남편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미카엘'은 생각보다 온건한 자였다.

잘 된 일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 했으니까.

에이택은 가족이 아니다. 언제 거두어질지 모르는 그들의 알량한 호의에만 기대어 살 수 없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다른 담보를 들어두어야 했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지. 상대가 이쪽에 관심 없어보이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얼굴을 보고는 왜인지 놀란 것 같긴 했다만……. 중요치 않았으므로 신경을 껐다.

하여 최윤은 가벼운 마음으로 미카엘을 다시 만나러 갔다. 혼인 신고를 비롯한 자잘한 절차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도 미카엘은 최윤과 일정 거리 이상 좁히지 않으며 철저하게 비즈니스 적인 태도로 이쪽을 대했다.

그렇게 최윤은 타이탄의 수장이라는 자와 부부가 되었다.

귀찮은 일들을 떠안지 않고도 미카엘의 이름 값에 기댈 수 있는 이름 뿐인 부부. 그들의 집에서,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평생 에이택을 좋아해본 적 없건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다름 아닌 ‘최윤’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윤은 접수처의 직원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미카엘을 흘끗 바라보았다. 신혼여행은 안 가는 거겠지.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런 건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그는 이만 돌아가자는 미카엘을 붙들고 물었다.

“저희 신혼여행은 안 가는 겁니까?”

단순히 확인 차 한 질문이었다. 결코 뭔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헌데 미카엘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껌뻑거리다가, 순식간에 사색이 되더니 꺼질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혼…… 여행?”

딱 봐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새였는데 최윤에게는 해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책임감 하나만큼은 투철해보이는 이 남자가 그 짧은 사이에 굳은 결심을 마치고 “전부 준비해놨으니까 너는 몸만 오면 돼.” 따위의,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입에 담았기 때문에.

웃기지도 않게 비장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저도 가기 싫어서 물은 거니까 거짓말까지는 안 하셔도 됩니다.‘ 라고 대꾸한다면 이 남자의 체면이 상하겠지. 예현에게 배웠다. 그럼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눈치껏, 부드럽게, 돌려서 거절하는 법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예현은 왜 내게 수용하는 법만 가르치고 거절하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는가?

“조만간 연락할게. 정말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하다면 내일이라도.”

그래서 최윤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뭐라고 해야하는데.

진짜 모르겠다고.


제국인들의 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되었다.

주제는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신혼여행.

“뭔 헛짓거리야. 잠이나 자.”

카일이 성질을 냈다. 힐데베르트가 찔끔한 표정으로 카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도와줘.”

“갑자기 왜 간다는 건데? 결혼식만 올리고 그냥 남처럼 지내는 거 아니었냐?”

그럴 예정이었다. 아까까지는.

힐데베르트는 착잡한 얼굴로 최윤이 신혼여행을 기대하는 눈치였음을 설명했다. 자신이 이미 큰소리를 쳐놓고 왔다는 자백과 함께. 옆에서 듣던 레이가 입을 헤 벌리고 감탄했다.

“벌써 잡혀 살아?”

“아니, 잡혀 사는 게 아니라.”

“아무 영향 없을 거라더니?”

“그러려고 했지 물론.”

힐데베르트는 말도 없이 음산한 기운만 내뿜고 있는 카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말 자신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자신은 분명히 있었다고.

“근데…… 너무 어리잖아, 솔직히…….”

힐데베르트가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동의해주었다.

“어리긴 하더라.”

“이 나이 먹고 무슨, 방금 태어난 애랑…….”

“그 정도까진 아니던데.”

레이가 객관적 시선에서 판단해주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힐데베르트는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쌍방 합의에 따른 거래라고 해도 결혼의 탈을 쓴 것이다. 어린 마음에 신혼부부만의 낭만을 누려보고 싶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거기까지는 차마 고려하지 못했다.

힐데베르트는 시선을 들어 요우를 바라보았다.

“신혼여행 계획은 따로 짜둔 거 없었지……?”

요우는 쌍욕을 뱉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예.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힐데베르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궁상맞은 꼬라지에 결국 요우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애초에 그런 거짓말은 왜 하시냐고요! 당신 나이가 한 둘입니까? 책임지지도 못 할 말을 함부로 주워담으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카일이 맞장구 쳤다.

“그리고 최 가의 아이가 어리다 한들 성인이지 않습니까? 스스로 선택한 정략결혼에 신혼여행이 없다고 속상해할 나이는 지났단 말입니다. 이렇게 싸고 도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말이.”

카일은 속에서 열불이 이는 것을 꾹꾹 눌러 가라앉히며 요우가 세 마디를 할 때마다 한 마디 씩 덧붙였다. 여기서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간 저 웬수 같은 친우를 밤새 벌세우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힐데는 멋쩍게 미소 지으며 요우를 달랬다.

“미안해. 이번만 도와줘. 그 애의 삶에 한 번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제가요?”

싸늘한 대답이 돌아오자 눈치를 살살 보던 힐데베르트가 차고 있던 장신구를 빼 요우에게 건넸다.

“우선 이거 받고. 일당은 따로 쳐서 입금할게.”

24K였다.

유능한 책사인 요우는 의견을 굽히고 물러나야할 때를 기가 막히게 판단할 줄 알았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카일은 눈 앞에서 동료의 변절을 목도했다…….


뇌물을 받은 요우, 재밌겠다며 끼어든 레이, 단장을 향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고르(“나도 돕겠다, 단장.” “아니 괜찮아.”)를 비롯한 동족들의 도움을 받아 힐데베르트가 급히 여행계획을 짜고 있을 때,

최윤은 하나 뿐인 친구를 앞에 두고 푸념 중이었다. 자신이 꺼낸 말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신혼여행을 가게 생겼다고. 그야말로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예현은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좆되겠지.”

윤이 답했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예현의 물음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간 보아서는 영 호구새끼 같긴 했지만. 함부로 판단치 않기로 했다. 무섭지 않은 자였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테니.

“대체 어떤 자와 결혼을 한 거야?”

예현의 눈에 걱정이 깃들었다.

예현에게는 일부러 미카엘에 관한 것을 일체 알리지 않았다. 결혼식에도 초대하지 않았다. 엮여봤자 좋을 것 없는 자였으니. 예현은 그 결정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넌 몰라도 돼.”

예현이 쓰게 웃었다. 자신을 위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불쑥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열심히 살아야겠네.”

쌩뚱 맞은 소리에 윤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 배우자를 소개 받을 수 있는 위치가 되려면 말야.”

윤은 작게 코웃음 쳤다.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어.”

“하하…….”

예현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결국 둘은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밥만 먹고 헤어졌다.

“이 참에 쉰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다녀와.” 예현의 위로에도 불퉁한 생각만 들었다.

혼자 가야 마음이 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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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지혜로운 청설모

    미카엘이어도 힐데는 힐데니까 ... 윤이 나중에 결혼하길 잘했다 생각하게 되기까지 기대돼요

  • 운동하는 산양

    아가공 최윤..ㅋㅋㅋ 힐데 안의 이미지가 완전 애기로 잡힌것 같아서 웃겨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멋부리는 바닷가재

    돌려말해서 거절할 줄 모르는 최윤ㅠㅠㅠ 정말 어리네요...아기다(?) 힐데가 너무 어리잖아 방금 태어났잖아 <라고 말하는 이유 바로 이해됨 ㅠㅠㅋㅋㅋ 요우가 세 마디할 때마다 한 마디씩 거드는 카일 ㅋㅋㅋ 24k 주자마자 바로 맘 돌리는 요우와 요우에게 배신당한(?) 카일 조합이 너무 웃겨요 ㅠㅠㅋㅋㅋ 단장을 향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고르(거절당함) ㅋㅋㅋㅋㅋ 아 작가님의 타이탄즈 너무너무 좋아요ㅠㅠㅠㅠ 아행복해🥰🫶

  • 열렬한 물개

    하.. 최윤은 아기공이 맛다..

  • 코딩하는 올빼미

    ㅜ...ㅜㅜㅜ 너무 재밌어요... 스불재해버린 윤과 힐데가 너무 귀엽고요ㅋㅋㅋ어떻게 부부가 쌍으로 동시에 스불재를 할 수 있는 건지 완전 천생연분이다 세기의 사랑을 할 인연이다 그리고 24K 장신구에 홀라당 넘어간 요우가 너무 웃겨요ㅋㅋㅋㅋ뭔가 돈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닌것 같았는데 장신구 받아서 어디다 쓸지 또 궁금해지네요... 아담 선물이려나?! 그럼 너무 귀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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