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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서사
https://youtu.be/AX7BcBD8-BA?si=66hs8Uw_bbUdk52Q
0.0
하얀은 보호자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의료용 침대의 차가운 살창에 기대어서 앉아 있던 소년은, 자신이 커서 의사가 되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대신하여 말이다.
하얀을 걱정하는 이들이 그의 고민을 안다면 분명 슬퍼할 터였다. 하지만 소년은 그것이 자신을 가엽게 여기는 것인지, 혹은 부모의 뜻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응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응원을 원하는지 물어봐도 속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얀은 이제 스스로와의 대화조차 정말 필요한지 알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생각의 물꼬를 잠가버렸다.
0.1
하얀의 후견자들은 니콜스 부부의 동료와 제자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비교적 젊은 의학자로 구성된 이들 사이에서는 자식은 커녕, 결혼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들은 아이를 잘 몰랐다. 그래서 니콜스 부부의 생전에도, 삼촌이나 이모의 역할마저 버겁고 어설픈 티를 숨기지 못했다. (이따금 하얀에게 선물이랍시고 안겨주었던 것들도 어린이 선물로 죄 엉뚱한 실린더니, 스포이드 따위 투성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부모 노릇에는 더한 무리가 있었을 집단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오합지졸은 서툰 진심이나마 하얀을 아꼈다
그들 중 일부는 후견관계를 증명하는 서류에 적힌 이름 석자에서 벗어나, 소년과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마저 어색한 이들도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제부터라도 진심으로 하얀을 아끼고 사랑해주려 노력했다. 혹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소년에게 들킬까봐, 부모 흉내 내지는 어른 흉내를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노력은 모두 니콜스 부부를 흉내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어설픈 모방은 진심을 흐리기에 충분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한편 겨울은 매해마다 돌아와, 몇번이고 하얀의 병실을 찾았다.
그렇게 여러해 동안의 겨울을 보내고도 소년은 좀처럼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얀은 사고와 수술, 상실된 이들을 진실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게 흘려보냈다. 그러다 간혹 컨디션이 좋아지면, 간호사가 틀어두고 나간 애니메이션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과 격리된 무균실은 안락하고 조용했다. 하얀은 그곳에서 자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그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풍경처럼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하는 애니메이션은, 처음에는 그 내용이 잘 이해되다가도 백색소음처럼 멀어지곤 했다. 그것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처럼 눈을 뜨고 있어도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어느 날은 주인공이 강도를 추격하는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강도는 주인공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거칠게 운전하였다. 결국 악당의 차는 가로등을 박고 폭발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주인공은 급하게 올무를 만들어 폭발음과 함께 공중에 던져진 강도를 구해냈다. 강도는 주인공을 따돌리기 위해 도망치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의 품에 안겨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하얀은 제 손에도 올무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는 몽롱함에서 각성하는 의식을 붙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왜 올무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올무가 필요한 거야?]
-그야, 올무가 있으면 그들을 구할 수 있으니까.
[정말 그럴까?]
-올무를 던져서 침대로 끌어오면 돼. 분명 어렵지 않을 거야.
하얀은 좀 더 의식이 뚜렷해지자, 바로 버저를 찾아 쥐었다. 의사를 호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지금 당장 올무가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들을 구할 수 있어?]
하얀이 기어이 버저를 찾아내어 누르자, 벨은 여태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물음이 귓가에 번졌다.
벨이 울리자, 의료진들이 부단히 달려와 하얀을 진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것을 찾으려 했는지 말하지 못했다. 하얀은 방금 본 애니메이션처럼 부모님을 구해낼 올무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버저를 눌러 사람들을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하얀은 그들의 존재를 떠올림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와버렸다. 평화롭고 안락하던 무기력에서 빠져나오자, 그깟 밧줄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니 하얀에게는 더 이상 올무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구하려던 사람들은 올무로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0.2
하얀을 중심으로 모인 어른들은 자신들이 모두 그의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허술한 공동체는 니콜스 가족을 흉내낼 뿐이었다. 니콜스 부부라는 연결고리가 중심이 된 관계에서 하얀은 가브리엘 니콜스를 연기했고, 진심은 점점 빠르게 퇴색해 붕괴해갔다.
하얀은 과거가 가지는 가치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느끼며, 그 무게에 숨이 막혔다. 그 때문인지 보호자들에게서 안개를 닮은 상실과 슬픔이 퍼져나올 때면, 그 또한 속절없이 그에 동조되었다. 그리고 동조로 하여금 끊임없이 상기되던 슬픔은 이내 변질되고 말았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의 향수와 아픔이, 같은 대상을 그리워하는 어른의, 보다 구체적인 관점에 흡수되어 처음의 강렬한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재료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하얀은 사고 당시의 무자비한 폭력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부모와 생사를 달리하며 단절되는 고통이었으며 세상과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얀은, 언젠가부터 이 끔찍함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고통과 바로 마주하는 것은 괴로웠다. 하지만 하얀은 그것과 대면하면 기묘한 충족감을 느껴졌다. 그것은 하얀을 고양시키고 중독시켰다. 이를 아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 오직 하얀만이 그 사건이 남긴 무언가를 이해했다. 하얀 또한 고통 안에서는 대체될 수 없는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이를 온전하게 이해한 날, 하얀은 더 이상 무엇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미지근한 기대와 서툴기 짝이 없는 모방 사이를 빠져나와, 고통 속으로 도망쳤다. 하얀은 어두운 골목에서 어떠한 종류이든 폭력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러자 불행을 피해갈 줄 모르는 녀석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하얀은 그들과 고통을 주고 받으며 자신이 이것을 바란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진창을 구르자, 상대도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없는 놈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주저 앉은 하얀에게 몇 마디 욕설을 퍼붓다가 돌아섰다. 운좋게도 총을 가진 상대는 아니었지만, 흠씬 얻어맞은 하얀은 결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주먹에 맞은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피가 흐를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하얀은 자신이 산산히 조각나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금 고통의 중심에 서는 순간, 완성된 자신을 느꼈다.
하얀은 언젠가 불길과 굉음의 바로 한 가운데에 설 것을 결심했다.
0.3
결국 의학을 포기한 하얀은 가브리엘 니콜스로 보호받았던 생활을 정리했다.
그의 가족들은 의외의 선택에 아쉬움과 의구심을 가지고 만류하려 했지만, 하얀의 단호한 의사에 설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얀이 험한 길을 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스스로를 탓했다. 그들 중 누군가 ‘니콜스 부부가 살아있었더라면 달랐겠지-’ 물꼬를 틀자, 한마디씩을 더하는 자학이 이어졌다.
그 중 하나는, ‘진짜를 흉내만 낸 주제에 어떻게 선택하겠다 말한 것을 물리겠냐-’ 한탄했다. 보호자로서의 나태함을 관통하는 후회에 모두가 씁쓸함을 느꼈지만, 하얀은 그들을 두고 떠나갔다. 하얀이 탄 한국행 비행기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들 중 누군가는 기도했다. 그가 언제나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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