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병이야 죽어야만 고쳐
빵준
호시절을 타고나지는 못했다.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계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찢고 넘어온 마족 군대가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점령지가 우후죽순 늘어났다. 일반 병사들로는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급하게 마법사들이 동원됐다. 최후의 저지선. 그렇게 불렀다. 그것마저 뚫리고 나면 인간 세상은 멸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어머니는 왕립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였다. 성준수는 그와 그의 동생을 두고 떠나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작기만 한 성지수의 손을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아카데미의 직원이 달려와 그들을 안으로 데려갈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던 전쟁이 끝났다. 저지선은 붕괴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성준수는 아카데미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저보다도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갈 곳이 없었다. 전사자의 아들은 다행스럽게도 학비를 면제받았다. 마법 교수를 기억하는 직원들은 학생도 아니면서 기숙사에 사는 동생을 눈감아 줬다. 그러나 길게 가지 않을 동정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들을 계속 봐주기에는 세상이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았다. 성준수는 악착같이 매일을 살았다. 3년을 버티면 성지수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다. 또 3년을 버티면 저도 어느 정도 쓸만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였다. 3년을 버티면, 어쩌면……. 성준수는 쓸데없는 기대를 지웠다. 그럴 시간에 마법식을 하나 더 외우는 게 나았다.
성지수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성준수는 어렵게 모은 책들을 전부 동생에게 물려줬다. 동생은 저보다 소질 좋은 마법사가 될 거다. 그리고 다시 3년. 성준수가 떠났다. 최후의 저지선이 있던 북쪽으로, 북쪽으로.
“요, 준수.”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쿵, 소리와 함께 까만 물체가 눈앞으로 떨어졌다. 악 소리가 났다. 뭐야 미친.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성준수는 그만 한 입밖에 안 먹은 사과를 떨어뜨릴 뻔했다. 의도치 않게 한 바퀴 구른 불청객이 머리를 털며 일어났다. 햇볕을 등지고 서서 어둡게 보이는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까만 머리카락. 붉은 눈. 기억하는 것보다 훌쩍 키가 컸다.
“전영중?”
네가 왜 여기 있냐. 준수야 그게 1년 만에 만난 동기한테 할 소리야? 내가 뭐 못 할 소리 했나. 대거리하는 투가 헤어지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옷을 다 털어낸 전영중이 성준수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새끼 뭐지. 왜 나무 위에서 튀어나와. 전영중을 빤히 바라보다 말고 성준수는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와삭. 사과를 씹는 성준수를 전영중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준수야 너 진짜……. 뭐. 아니다. 뭔데 씨발. 우리 준수 입 험한 건 여전하네. 알면 좀 닥쳤으면 좋겠다. 성준수가 사과를 깨문다. 전영중이 웃었다.
“준수 혼자 외로울 것 같아서 왔지.”
“뭔 미친 씨발…….”
너 아카데미는 어쩌고. 분명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상식적이지 않았다. 준수야 내가 중요해 아카데미가 중요해? 이거 뭐 대답도 아니고 반문이잖아. 성준수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아카데미. 전영중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또 웃는다. 왜 자꾸 처웃지……. 인상을 쓴 성준수가 사과를 반으로 쪼갰다. 입 대지 않은 부분을 전영중 입에 쑤셔 넣는다. 저 입을 막아버리는 게 조용하고 좋을 것 같아서.
분명 성준수가 먼저 먹기 시작했는데 전영중이 사과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남은 사과를 든 성준수가 전영중을 쳐다본다. 배고팠냐? 전영중이 무슨 말이야, 준수야. 하고 입을 뗐다. 조짐이 안 좋았다. 저렇게 서두를 열어서 정상적인 소리 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배고픈 건 너잖아.”
이틀 굶고 겨우 사과 하나 먹으면서도 그걸 나한테 반이나 줄 생각이 들어? 씨바 처먹어 놓고 염병이야. 도로 뱉어 새꺄. 되겠어 준수야? 전영중이 빙글빙글 웃는다. 성준수가 사과를 마저 씹어 넘겼다. 허기에 반쯤 희게 비어 있었던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 돼지너구리새끼 내가 이틀 굶은 건 어떻게 안 거지. 전부터 계속 따라다녔나? 아니, 저만한 게 따라다녔으면 제가 이틀이나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마법을 썼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게, 평범한 사람의 마나량으로는 이틀 동안 같은 마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막상 먹을 게 들어가자 더 선명해지는 배고픔을 무시하고 성준수가 전영중을 꼬라봤다.
“야. 너 뭐야.”
“아카데미 동기.”
“말고 씨발.”
“설마 친구란 말이 듣고 싶었어?”
아, 좀 위험한 수준까지 긁었다. 전영중이 성준수의 기색을 살폈다. 어? 성준수의 표정은 의외로 평소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배고파서 멱살 쥘 기운도 없는 건 아니겠지. 이틀 굶은 사람의 신체 상태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전영중은 진지하게 걱정했다. 성준수가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친구 아니냐?”
그 물음이 되돌아왔을 때 전영중은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기로 했다. 성준수를 몰래 따라다닌 지는 이제 두 달 정도다. 그 긴 시간 동안 변명거리를 하나도 준비해 두지 않았다. 원래는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더한 폭탄 발언으로 묻자. 이 사고 흐름을 준수가 알면 한 대 후려 팰 것 같지만 삶이라는 게 원래 그 정도는 감수하고 사는 거다. 판단을 마친 전영중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준수야, 난 너 한 번도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냅다 성준수에게 입술 박치기를 갈겼다.
“……줄곧 이러고 싶었으니까.”
휴. 폭탄 발언 완료. 이렇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성준수 앞에서 폼 잡고 좋아한다고 말하나 이렇게 말하나 결과는 똑같은 거 아닌가? 전영중은 합리화를 마쳤다. 그 사이 난데없이 입술의 정조를 빼앗기고 굳어 있던 성준수가 벌떡 일어났다. 전영중이 위를 올려다봤다. 이 미친 존나 씨발……. 우리 준수 어휘력은 여전히 형편없구나. 성준수가 도로 훅 가까워졌다. 나불대려는 전영중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린다. 얼결에 일으켜진 전영중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축축한 무언가가 파고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성준수의 입술은 바싹 말라서 까칠하고, 움직이는 혀는 서툴렀으며, 붙잡힌 멱살은 불편했다. 붉은 눈을 뜨고 있던 전영중이 웃었다. 진동에 성준수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손이 허리를 감고 목을 감쌌다. 전영중은 손쉽게 키스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성준수의 좁은 입안을 헤집고 억지로 타액을 삼키게 한다. 질척한 소리가 번졌다. 숨이 모자란 성준수가 전영중을 퍽 소리 나게 밀어내고서야-한 대 패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전영중은 순순히 물러났다. 아닌 게 아니고 진짜 아팠다. 아카데미 일짱의 주먹은 변하지 않는구나. 깨달음을 얻은 전영중을 두고 성준수가 돌아섰다. 전영중이 눈을 깜박였다. 숨처럼 짧게 웃음을 내뱉으며 돌아서는 성준수는 무엇에라도 이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성준수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전영중이 제 입술에 손을 올렸다. 제법 다소곳한 자세였다.
아 나 방금 혹시 복수?? 같은 거 당한 건가????
성준수가 쫄쫄 굶게 된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냥 챙겨 온 식량이 다 떨어져서였다. 최후의 저지선에 가까워질수록 급격하게 인가가 줄었다. 며칠 전에 들른 그 조그만 마을이 마지막 마을일 줄 알았더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식량을 더 구해 왔을 거였다. 수중에 동화 몇 푼 은화 한두 개가 남아 있긴 했는데 배고프다고 돈을 씹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준수야 너는 상식이란 게 없어? 누가 저지선 가까이에 살고 싶어 하겠냐고. 방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과 하나까지 다 먹은 까닭에 정말로 빈털터리가 된 성준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기운을 아끼자. 저 새끼한테 대답할 힘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걷겠다.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전영중은 성준수와 서너 발짝쯤 떨어져 뒤에서 걸었다. 다행인 점은 저지선이 멀지 않았다는 점이고, 불행인 점은 저지선 근방이 죄 폐허라 뜯어먹을 풀도 없다는 점이었다. 성준수는 눈 돌리는 일 없이 같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따라가기도 심심해진 전영중이 성준수의 뒤로 거리를 좁혔다. 비스듬하게 옆얼굴이 보였다. 원래도 허여멀건했는데 지금은 안색이 더 나쁘다. 전영중이 고개를 기울였다.
“준수야.”
“…….”
씹혔다.
“저지선에는 왜 가는 거야?”
앗, 인상 썼다. 좀 닥쳐와 닥쳐 씨발……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같은 얼굴로 성준수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째 아까보다 보폭이 넓어진 것 같다. 지치지도 않나. 전영중은 대답을 기다려 봤지만 성준수는 조용했다. 전영중은 도로 서너 걸음 떨어졌다. 해가 지고 밤이 깊었다. 성준수는 새벽에나 잠시 눈을 붙인다. 일행이 생긴 오늘은 어떻게 하나 봤더니 달랑 한 장 있는 모포를 전영중한테 던지고 자신은 망토를 둘러 감고 웅크렸다. 전영중이 헛웃었다. 준수 제정신이야? 얼어 죽지는 않아도 감기는 걸릴 날씨였다. 성준수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챙겨줘도 씨발……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겠지. 벌써 잠들었을 리가 없다는 걸 안다. 전영중이 성준수 바로 옆에 붙어 누웠다. 등 뒤에 갑자기 발생한 온기에 미간을 좁힌 성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전영중이 모포를 끌어다 성준수를 덮었다. 준수 동사자가 꿈이야? 이죽거리려는데 성준수가 미간에 힘을 풀고 가만 눈을 감았다. 돌아누운 몸이 전영중을 보고 있다. 전영중은 입을 도로 닫았다. 한참 가만히 있다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성준수의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성준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포 안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다음날 이른 저녁 즈음에 멀리 저지선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영중은 살짝 안심했다. 저기까지 가면 근무하는 병사들이 있다. 식량도 얻고 운이 좋다면 좀 괜찮은 잠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거다. 둘은 부지런히 걸었다. 성문의 앞에서 검문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을 내민 성준수는 연구 목적으로 저지선 북쪽을 탐색하려 한다고 밝혔다. 위험지역인 걸 아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고,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일도 없을 거라고. 저거 마지막 빼고 쌩 구라 같은데. 전영중은 의심스럽게 성준수를 쳐다봤다. 병사들의 절반 정도는 저지선을 넘어가겠다는 성준수를 미친놈 보듯 보고 있었지만 어쨌든 허가가 떨어졌다. 전영중의 신분증을 검사하던 병사가 신분증과 전영중을 몇 번 번갈아 봤다. 신분증을 돌려받은 전영중이 벌써 저만치 멀어진 성준수를 따라 뛰어갔다.
늦은 시각이라 성안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기로 했다. 남는 방 한 자리를 얻었다. 앞서 걸어가는 성준수를 보던 전영중이 문득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이상을 감지한 그가 가까워지기 전에 성준수가 입을 열었다. 오래 말하지 않은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저지선이 아니라 그 북쪽으로 갈 거야.”
그 정도는 이제 나도 알아, 준수야.
“산맥에 용이 살잖아.”
전영중이 눈을 치떴다. 성준수가 조금 휘청였다. 용을 만나야 해. 빌 소원이 있어. 그러니까 씨발,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되는데. 성준수를 부르는 고함 소리. 달려와 끌어안는 팔. 시야가 검게 암전된다. 성준수의 몸이 전영중의 품속으로 무너졌다.
악몽을 꿨다.
아오 씨바거……. 정신이 들자마자 욕설이 튀어나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는데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뭐야 씨발. 이렇게까지 과로하진 않았어. 짜증스레 눈을 떠 보니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다. 뭐?
성준수는 조금 후에 이성을 되찾았다. 낯선 천장인 게 당연하다. 어제 성에 도착했으니까. 배가 고팠다. 이것도 당연하다. 굶었으니까 그렇지. 먹을 걸 좀 사 와야 한다. 돈은 남아 있으니까 괜찮았다. 몸이 무거운 건…… 썅, 이건 대체 뭐가 문제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보니 전영중이 제 위로 엎어져 있었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아오 미친 새끼 진짜……. 그래도 저를 여기까지 옮겨줬을 만한 사람이 쟤밖에 없어서 쌍욕을 한 번 참았다. 그건 그거고 일어나야 하는 건 일어나야 하는 거다. 커다란 상체에 다리가 깔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돼지너구리라고 했더니 진짜 뒤지게 무거웠다. 사람 몸이 이렇게 무거울 수도 있나? 별수 없이 전영중을 불렀다. 야, 일어나. 영중아. 일어나라고. 호칭이 개씨발롬아로 급격하게 진화했을 무렵 전영중이 눈을 떴다.
“준수 일어났어?”
“어……. 다리 저려 미친…….”
욕하는 거 보니 멀쩡한가 봐, 우리 준수. 전영중이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성준수가 일어나 앉았다. 정확히는 침대 밖으로 나서려고 했는데 전영중이 발로 막았다. 바닥이 아니라 전영중의 신발을 밟게 된 성준수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또 뭐야 씨발, 이라고 얼굴에 적혀 있었는데 전영중은 꿋꿋했다. 준수야, 너 침대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오면 너 내가 업고 다닐 거야. 나 뭐 죽을병 걸렸냐? 성준수는 개 질색한 다음 도로 침대로 들어갔다.
“식사하고 있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작은 테이블을 침대 옆으로 끌어다 준 전영중이 자리를 비웠다. 쟤가 여기서 어딜 가봤자 화장실일 것 같은데. 성준수는 테이블을 봤다. 멀건 수프와 빵이다.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사 온 모양이다. 가방 뒤지면 돈주머니 나오니까 값은 알아서 치렀겠지.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사과 하나도 같이 놓여 있었다. 저 새끼 내가 사과를 좋아하는 줄 아나? 성준수는 수프를 다 떠먹고 일어나서 짐가방에다 빵과 사과를 챙겨 뒀다. 침대를 빠져나오면 업고 다닌다는 협박은 못 들은 걸로 쳤다. 쟤도 진짜로 사지 멀쩡한 188을 업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짐을 도로 차곡차곡 정리해 넣던 성준수의 손이 멈췄다. 안쪽에 넣어 둔 돈주머니가 그대로 있었다. 열어서 동전 수를 셌다. 은화 둘, 동화 열일곱 개……. 성준수는 돈주머니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기묘하게 멀쩡해진 몸 상태를 확인하고 뭘 먹은 흔적이 없는 방안을 훑었다. 병사들이 친절하게 공짜로 음식을 제공했을 확률. 내가 사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강체일 확률. 저 자식이 굶었거나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왔을 확률. 그리고……. 이런 씨발. 성준수가 욕을 뱉었다.
예정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성을 나섰다. 방에 짐을 그대로 두고 온 채였다. 알량하게 시간 좀 벌어 보겠다고 꼼수를 부렸다. 좀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달렸다.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데 조금도 상쾌하지 않았다.
산맥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름대로 아껴두었던 마나를 이동 마법으로 낭비했다. 평소처럼 탈진하거나 졸음이 쏟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성준수가 숨을 토했다. 망설임 없이 산맥의 초입으로 들어섰다.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무시하고 산을 올랐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몰라도 상관없었다. 굵은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치려던 성준수가 고개를 든다.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얼굴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성준수가 픽 웃었다.
“가지 안 부러지냐.”
“……준수야.”
몇 걸음 물러나자 생긴 공간으로 전영중이 훌쩍 뛰어내렸다. 오르막이라 자연스럽게 전영중이 성준수를 내려다보게 됐다. 전영중이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성준수는 더 물러서지 않았다.
“왜 나 두고 갔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니새끼가 안 처 뛰어왔잖아. 그러게 누가 오래 자리 비우랬냐. 내가 왜 널 데리고 가야 해. 너 뭐 되냐? 간결한 물음을 떠올린 성준수가 다시 웃었다. 전영중의 시선이 무섭게 꽂혀 들었다. 꼴에 눈에 힘 좀 준다고 내가 쫄 줄 알고. 성준수는 버텼다. 애초 끈질기게 버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생이었다. 이제 와 다를 것도 없다. 산맥 전체가 내리누르는 무게를 견뎠다. 생명체의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를 울린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주먹을 쥐어 감췄다.
“준수는.”
겁도 없지.
“거짓말쟁이네.”
전영중이 한 걸음 내려왔다. 큰 보폭 탓에 거리가 확 가까워졌다. 성준수는 전영중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게 번쩍거리던 눈이 차츰 색을 달리했다.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다. 저 노란 눈. 성준수가 다가섰다. 전영중이 재빠르게 그만큼 물러섰다. 태연한 척하고 있는 얼굴이 아주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용을 만나고 싶다며.”
전영중이 아가리를 벌린다. 검붉은 비늘이 돋아나고 몸체가 크게 불어났다. 앉아 있던 나무가 부러지고 부산한 소음과 함께 산맥이 요동한다. 성준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날리던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용이 말했다.
“왜 도망가?”
거대한 울음이 일었다. 밀려오는 파동에 떠밀려 넘어질 뻔한 성준수가 인상을 썼다. 넌 씨바 힘 주체가 안 되냐? 그러더니 저벅저벅 걸어 다가왔다. 노란 눈이 잔뜩 긴장해서 그를 바라봤다. 고작 인간 하나. 파란 눈동자가 반짝이는.
성준수가 손을 들었다. 대충 닿는 곳을 툭 쳤다. 평소만큼만 힘을 줬는데 손이 얼얼하게 아팠다. 이게 비늘이야 돌이야. 단단하기도 하네. 붉어지는 손등을 대충 문지른 성준수가 대답했다.
“이게 씨발 뭔 도망이냐, 영중아.”
네가 나한테 올 거잖아.
“개새끼처럼 잘도 쫓아와 놓고.”
내가 어디 있든.
“됐고 심장이나 내놔, 이 개씨발새끼야…….”
용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다. 인간계와 마계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고 보통은 마나가 더 풍부한 마계를 선호했다. 하지만 인간계를 택하는 용도 없지 않았다. 마족과 달리 인간과는 특수한 계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원 하나를 이루어 주는 대가로 용은 평생을 함께 살아갈 영혼의 동반자를 얻었다. 용만 손해 보는 장사 아니냐고? 계약을 맺은 용이 일반적으로 더 강한 건 둘째 쳐도, 아주 긴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는 생명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존재에게 평생 재롱을 떨어 줄 반려동물이라는 건 꽤 달콤하게 들리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을 냅다 개새끼로 만들어? 뒤지고 싶냐?”
“아니 준수야 개새끼가 뭐야 강아지라는 귀여운 표현도 있는데…….”
전영중이 내뿜은 콧김에 날아간 성준수가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나서야 전영중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준수야 괜찮아? 성준수가 바닥을 득득 긁으며 일어났다. 미안하면 숨 참아 이 새끼야……. 전영중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러면 아무리 용이라도 죽어. 성준수의 주먹에서 뚝 소리가 났다. 아카데미 일짱의 주먹을 상기한 용이 잠깐 조용해졌다.
“어차피 나한테 와서 소원 빌 거였잖아.”
“용이 너 하나냐?”
뻔뻔하게 굴어보려다 정곡을 찔린 전영중이 괜히 성준수의 손을 붙잡았다. 자기를 쳤던 손을 치료해 주는 꼴이 웃겼다. 얌전히 손 내주고 있다가 치유 마법이 종료되는 대로 손을 빼낸 성준수가 팔짱을 꼈다. 이 갸륵한 새끼는 소원을 들어주겠답시고 상대방의 계약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선빵을 쳤다. 일시적으로 용의 힘을 빌려 쌩쌩해진 성준수는 빡이 쳤다. 너 이 씨발 용이면 재깍재깍 정체나 깔 것이지……. 전영중은 억울했다. 무슨 용건으로 북쪽에 가는지도 안 말해 줬으면서. 알았어도 바로 본신을 드러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좀 그랬다.
“너 그 사과 네 심장이지.”
방심하고 있던 전영중이 움찔했다. 성준수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정신이 있냐 없냐 영중아. 아니 누가 자기 심장을 두고 자리를 비워. 전영중이 변명했다. 아니 그래도 내 눈앞에서 내 심장을 와작와작 씹어먹는 걸 보긴 좀……. 아니 그러면 사과 모양으로 내놓질 말든가. 마법 개 낭비하네. 아니 그냥 심장 씹어먹는 건 그거대로 비주얼이 이상하다니까? 대화에 아니시에이팅이 난무했다. 성준수가 손을 내밀어 까닥였다. 도로 내놔 봐, 뭔 모양이건 지금 당장 씹어먹어 줄 테니까.
전영중이 약간 풀죽은 얼굴로 소환한 심장은 이번엔 작은 보석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먹기 편하라고 작게 만들어 준 것 같긴 했는데 모서리에 식도 다 긁힐 것 같다. 성준수는 검붉은 보석을 집어 들었다. 입을 벌리는데 꼭 그 타이밍에 전영중이 그랬다. 후회 안 해?
성준수는 대답 대신 심장을 삼켰다. 목에서 피맛이 올라왔다. 씨바거 진주도 보석인데 왜 뾰족뾰족하게 만든 거야. 불평하는 대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제 소원 들어 줘.”
“준수야 너는 무드라는 게 없어?”
심장 내놔 때와 같은 조온습으로 성준수가 말했다. 전영중이 갈 길이 멀단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소원이 뭔데? 가벼운 물음이었다. 그런데 성준수가 웃는 게 보였다. 전영중은 본능적인 불안을 느꼈다. 잠깐만, 하고 전영중이 뭘 막기도 전에 성준수가 전영중의 손을 잡아챘다.
“내 눈을 가져가.”
성준수가 소원을 빈다.
“그래서 세계의 틈이 다시 찢어지지 않도록 지켜보게 해 줘.”
어린 성준수는 생각했다. 인간이랑 마족이 그렇게 다른가? 왜 이렇게 쉽게 지는 거지? 성준수와 성지수를 자주 돌봐 주던 아카데미 직원은 이걸 어떻게 쉽게 설명하나, 싶은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북쪽에는 산맥이 있잖아. 세계의 틈은 그 너머에 있거든. 세계의 틈이 찢어져도, 마족 군대가 수없이 그 경계를 넘어와도, 우린 알아차릴 수가 없어. 대군이 넘어온 다음엔 이미 늦지. 산맥을 넘어온 마족들이 미처 준비도 못 한 인간 땅을 휩쓸어 버릴 테니까. 성준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산맥의 용들은 우리를 안 도와줘요? 용은 너무나도 강대한 존재라 참전할 수 없어. 전쟁이 시작되면 강제로 잠이 든단다. 그게 세계의 규칙이야. 그래서 전영중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성준수를 만났다. 네 마법 회로는 이 이상으로 열리지 않을 거란다. 그러니 마법사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렴. 성준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마나를 운용하는 게 눈에 밟혔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자는 틈을 노렸다. 순조롭게 룸메이트가 되고, 지쳐 잠든 성준수의 이마에 아주 살짝 손을 댔다. 굳게 닫혀 있던 회로가 쉽게도 열릴 때 성준수가 눈을 떴다. 무거운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그 푸른 눈을 아직 기억하는데.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눈빛으로…….
전영중은 끝내 성준수의 뜻을 꺾지 못했다. 설득도 해 보고 겁도 줘 보고 화까지 냈는데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너 그거 그냥 영웅병이라고. 네가 뭐 세계의 존망을 짊어진 용사라도 돼? 세계의 틈이 인간 하나가 활개칠 수 있는 아카데미 같아? 눈 하나가 뭐 대수라고 이러냐며 짜증을 내던 성준수는 전영중의 상처받은 표정을 보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성준수가 말했다. 넌 모르지. 마계와의 전쟁이 어떤 건지. 넌 용이니까. 전영중은 침묵했다. 성준수가 전영중의 손을 끌어다 제 왼쪽 눈 위에 얹었다. 그 손은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랑 헤어지고 싶지 않잖아. 성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죽을 때까지만 평화롭자고. 그 순간에 나도 같이 죽을 테니까 뒤는 상관없어. 그 와중에도 그 말이 빌어먹게 달콤하게 들렸다. 전영중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성준수는 눈을 감았다. 고요한 흰 낯이다. 그가 실은 사랑하고 만.
전영중이 눈을 감았다. 용의 마나가 휘몰아쳤다. 곧 장대한 산맥 위로 푸른 구체가 떠올랐다. 감시자의 눈이 세계의 틈을 향해 눈꺼풀을 열었다가 천천히 닫았다. 세계의 틈은 봉인됐다. 그 틈새가 찢기는 순간에 성준수의 푸른 눈도 역시 눈을 뜰 거였다. 인간 세상에 위험을 경고하고 마족 군대를 일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
새파랗게 타오르는 횃불처럼.
검은색의 안대를 샀다. 안감이 부드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하고 다녀야 해? 준수야 그게 무슨 소리야, 쓸리면 피부 다 까지는 싸구려 계속 쓸 만큼 빈곤해? 아오 씹. 쌍욕을 하면서도 성준수는 순순히 머리를 내맡겼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에 좀 사심이 담긴 것 같았는데 한 번 봐줬다. 새 안대를 씌워 주고 구데기 같은 옛날 안대를 뒤로 감춘 전영중이 웃었다. 준수야 훨씬 낫다.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신이 난 건지. 성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 씨바거……. 준수야 애인한테 씨바거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
한동안 개새끼 아니고 애인 맞냐며 전영중을 놀려먹었던 성준수가 웬일로 조용했다. 손을 떼지 않고 성준수의 눈썹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던 전영중이 고개를 숙였다. 안대 위로 아주 살포시 입술을 댄다. 가만 내버려 두고 있던 성준수가 전영중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렸다. 빈 데다 하지 말고. 조금 따뜻하고 이전보다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이제 성준수는 키스할 때 숨 쉬는 방법을 안다.
전영중이 성준수를 끌어안는다. 세계는 오늘도 평화롭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