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

2024.6.6 치키타구구 읽기 전에 쓴 치키타구구 au

🎶 by A

아이는 병찬이 자주 기묘한 꿈을 꾸게 했다. 어느 밤에 병찬은 벽에 늘어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것과 춤을 추고 싶어졌다. 어설픈 발레나 왈츠나, 뭐든지 괜찮았다. 춤을 청하려 손을 들어올리자 그림자도 병찬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자의 성질이 어째선지 새삼스러운 놀라움을 주었다.

손을 높이 뻗으면 그림자는 덩달아 자라났다. 병찬과 그림자는 무럭무럭 길어져 벽을 넘어 까마득히 먼 하늘에 닿았다. 그림자와는 내내 마주보고 있었지만 만질 수는 없었는데도 병찬의 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져 왔다. 깨어나 보니, 품에 안긴 아이의 고사리손을 쥐고 있었다.

모든 요괴가 식사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요괴의 식문화는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이라 병찬이 보기에는 그리 유별난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을 잡아서 생으로 먹는다. 그것이 전부였다.

한편, 인간은 요란하고 요사스러운 풍습을 어찌나 많이 발명했는지 모른다. 요괴 된 입장에서는 인간을 요괴라고 불러 마땅할 지경이다. 그중에 하나는 일요일의 전통으로 널리 회자되고 지켜진다. 적어도 아이에 따르면 그랬다. 고작 아홉 살 먹은 종수는 가스 불꽃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아마 종수를 데리고 사는 병찬이 요리에 일가견이 없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지만⋯⋯.

종수는 제 머리칼 같은 윤기가 도는 까만 면을 금세 끓여냈다. 까치발을 들고 그릇 두 개를 꺼낸다. 김이 오르는 요리가 공평하게 나누어 담아진다.

“이런 건 누가 가르쳤어?”

병찬은 인간 음식의 맛을 모르면서도 일단 칭찬은 해 주었다.

“아빠가. 일요일 아침엔 아빠가 짜파게티 요리사야.”

종수의 부친을 잡아먹은 것은 병찬이 아니다. 떠돌아다니던 요괴들이 이 지역을 덮칠 때 그 가운데 있었을 뿐이다. 요괴는 공동체의 개념이 희박하지만, 사람으로 친다면 그들이 병찬의 친족에 해당할 것이다. 한 동네를 몰살하고 나서 그들이 다 어디로 떠났는지 병찬은 몰랐다.

종수는 면이 붇는 것도 잊고 골똘해졌다. 아빠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볼을 쿡 찔러도 미동조차 않는다. 병찬은 말을 걸어 아이의 관심사를 돌렸다.

“형은 걱정이다, 종수야.”

“뭐가.”

“백 년 키웠는데 맛없으면 어떡하지?”

요괴의 유머가 인간에게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애가 웃어 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무슨 농담이든 블랙홀같이 흡수해 없는 것으로 만드는 성정이니 농담의 질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홉 살 종수는 얼굴에 비해 눈만 너무 컸다. 톡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동그란 눈이 찬찬히 가늘어졌다. 병찬이 눈부신 빛 속에 있다는 듯 찌푸린 채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치였다. 종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신중함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난 자신 있어. 왜냐 하면⋯⋯, 우리 아버지는 제일 맛있는 인간이었을 테니까.”

앳된 목소리에 자부심이 물씬했다. 둘은 종수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살던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너른 마당이 딸린 고택이었다. 봄이면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이 근사했다.

“맛있다고 누가 상 주냐?”

종수를 먹는 상상을 아무리 해도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백 년을 기른다고 썩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백 년 운운은 궁지에 몰린 인간이 지어낸 허언일 게 분명했다. 병찬은 자신이 종수를 물어뜯는 광경을 잠시 그려 보았다. 가느다란 팔이 힘없이 꺾인다. 새의 날개 같은 가벼운 뼈가 부서진다. 아이는 새처럼 나풀거리는 존재다.

아이는 고양이처럼 영악한 존재다. 마당에는 지렁이며 지네며 쥐 따위가 종종 와서 죽었다. 종수는 그걸 발견하면 꼭 눈을 빛내고는 병찬이 보는 자리에 두었다. 종수의 식사를 준비하러 하루에 세 번씩 발을 들이는 주방 바닥 같은 곳에. 코를 막고 꼬리 끝을 잡고 후다닥 내려놓는다. 자비롭게 길 잃은 짐승의 밥을 챙기는 것처럼 보였다.

병찬은 선선히 먹어치웠지만 자기 것이 아닌 걸 취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물감을 이기지 못해 마당의 죽은 그루터기 앞에 쪼그리고 게워 내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벚나무 뒤에 숨어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뱃속이 메스껍거나 속을 비우기가 힘겹지는 않았다. 아이가 열이 나고 배앓이를 할 때 등을 두드려 주며 보면 파리한 낯에 괴로움이 흥건히 묻어났는데, 병찬은 영원히 알 길 없는 감각일 것이다. 요괴의 신체는 인간과는 다르니까.

어린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한지. 아이를 키우려면 소아과 의사 노릇을 능숙히 해내야 한다. 이건 뭐야, 저건 왜 그래, 하는 질문과 ‘재미있는 얘기’ 요청이 걸핏하면 들어오니 마르지 않는 이야기꾼도 되어야 하고. 교사 역할도 뺄 수 없다. 학교에 가면 선생이 여럿 있다는데 다른 아이들은 학교 밖에도 선생이 있다고 하기에,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보고 전화를 걸어 학습지를 구독했다. 저녁상을 치우고 난 식탁에다 학습지를 펴 놓고서 종수는 주먹 쥐어 연필을 비뚜름히 잡고 뒤꽁무니를 잘근잘근 짓씹는다. 병찬은 종수가 한 문제 풀 시간에 네 개를 풀면서 훈수를 둔다. 종수는 온순한 아이라 그대로 받아 적는다. 다음주면 우수수 빨간 비가 내려 있다.

아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데 적성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왜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연민? 병찬에게 그런 것이 깃들어 보았자 극소량일 테다. 죄책감? 단 한 톨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리움이다. 저 아이가 가진 이름 모를 것을 희구하는. 저 뱃속에 든 어떤 것을⋯⋯.

한 끼라도 직접 만드는 일요일이 종수가 그나마 맛있게 먹는 날일 터였다. 평일에는 병균이 죽으라고 뜨거운 물로 씻은 과일을 자주 먹였다. 인간의 식문화라면 전혀 모르거니와 배울 의지도 적었다. 병찬은 몰랐지만, 식단은 늘 평범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삶은 콩을 넣고 부친 계란 프라이. 고등어를 끓여 얹은 핫케이크. 우유가 발육에 좋다고 해서 쌀밥을 말아 주기도 했다. 종수는 끼니마다 있는 힘껏 죽상을 쓴 다음 순순히 입을 벌렸다. 병찬이 죽은 쥐를 삼킬 때와 같은 태도로. 그래서 병찬은 차려낸 상이 오답인지 그럭저럭 정답인지를 알 도리마저도 없었다.

‘짜파게티’를 먹고 난 종수의 입가에 검은색 얼룩이 묻었다. 닦아 주고 조금 지나서 낮잠을 재웠다. 작은 인간은 잠에 빠졌다 하면 자칫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워지며 새근거렸다. 체육대회 준비물로 병찬이 손수 바느질했던 오자미 같은 작은 위. 햇병아리의 갈퀴를 닮은 작은 발.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작은 귀. 아이를 이루는 것들을 보노라면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빛이 바래 희미해진 갈망. 허기는 들지 않는데 갈증이 자꾸만 목을 적셨다.

오래지 않아 종수는 병찬이 불결한 유해를 먹는 걸 싫어하게 되었다. 열 살 무렵부터 조수 사체를 주워 들이지 않더니 단숨에 그 단계를 지나쳐서 미미한 결벽증까지 발병했다. 마른 빨래를 직각 맞춰 개 놓거나 집안을 쓸고닦는 것이 모두 종수의 일이었다. 혹여나 병찬이 어지르는 날에는 매섭게 눈총을 주기도 했다. 병찬은 야단맞는 느낌에 괜히 바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고, 거실을 다 치운 종수는 밖으로 나갔다. 곧 비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낙엽이 쓸리는 소리가 비바람 소리 같았다.

십 년이면 아주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병찬은 중학교에 불려가 종수의 교우 관계에 대한 담임의 걱정을 들었다. 이듬해 종수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다같이 운동을 하는 동아리였다. 농구라는 이름이고 일종의 복잡한 캐치볼이라고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에는 사랑니 두 개를 뺀 것이 기록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즈음부터 종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따로 일기를 쓸 공책을 사는 대신 초등학생 때 병찬이 마련해 주었던 분홍색 키티 알림장을 알뜰히 썼다. 요괴가 제대로 양육자 역을 해낼 리가 없다고 그 나이부터 이미 단념했는지 학교에서 아무것도 받아적지 않아, 모든 페이지가 빈 장이었다. 그 일기장은 날마다 종수의 책상 한가운데 대뜸 놓여 있었다. 병찬더러 읽으라고 명령하는 듯이. 병찬은 굳이 들춰 보지 않았다. 어차피 종수를 먹으면 무엇을 썼는지까지 전부 알게 될 것만 같았다.

만 열아홉, 종수는 대학에 들어갔다. 인간은 여러 방법으로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공놀이를 잘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스물이 되는 해였으므로 종수는 오월에 성년을 맞았다. 병찬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정문에서 기다렸다. 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붐비는 꽃집에서 특별히 산 것이다. 터덜터덜 나오는 종수는 병찬과 눈이 마주쳐도 반색하지 않는 체하며 다가왔다. 짙은 향기가 돌연히 끼쳤다. 종수에게서 처음 맡는 무거운 사향이었다. 향수는 모를 것 같아 직접 사서 뿌렸다고, 성년의 날에 장미면 다인 줄 아느냐고, 종수가 무심히 말했다. 가르친 적도 없는 발칙한 짓을 제법 했다.

모처럼 일요일의 의식을 지키러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 젓가락을 쥐는 손목에는 소매가 깡총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무척 작은 아이였던 종수는 나이가 두 자리수에 이르기 무섭게 성장이 가팔라졌다. 웃자라는 식물처럼 위로만 크다가 골격도 맞추어 단단해졌다. 병찬의 체격을 넘은 지도 한참이었다. 꼭 몸의 문제로 한정된 성장은 아니었다. 변변한 어른의 지도 없이도 종수는 좋아하고 잘하는 걸 용케 찾아냈다. 그거 재밌어? 병찬은 종수가 어깨에 둘러멘 공을 곁눈질했다.

“재미없어. 나보다 잘하는 애가 없어서.”

따분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종수가 비딱하게 턱을 괴었다. 견딜 수 없이 시시하다는 눈치였다. 요괴의 사견으로는 권태에 젖기에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십구 년이든 백 년이든 찰나라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종수의 낯에 올라온 지루함은 점점 정도를 더하다가 흡사 좌절을 닮아 갔다. 병찬에게 먹히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안 남은 사람처럼. 그것만이 남은 목표라는 듯이.

“아쉽네. 형이라면 너 정도는 가볍게 발라 줄 텐데.”

농담 삼아 말하자 종수는 단번에 병찬이 익히 아는 얼굴로 돌아갔다. 병찬을 재 보는 빛이 맴돌았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재는지는 모른다. 종수는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잣대를 세워 나가는 듯하다. 무슨 말이든 집중해서 듣는 종수를 놀려 주는 보람 하나는 여전했다.

“경기 규칙도 모르면서.”

“상대편을 전부 잡아먹겠다고 협박하면 되지. 그럼 농구팀이 뭐야,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고.”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한 듯 종수는 심각해졌다. 편법이라곤 모르는 애였다. 병찬이 해 주는 음식을 먹는 척 식탁 밑에 버리는 적이 없던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반면 역습하는 법은 후천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요괴와 생존하느라 터득한 기술인지도 모르고.

“너 사람 먹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종수는 다소 기뻐하는 것 같았다. 오만한 빛마저 띠고서. 그러나 젓가락을 내려놓고 반듯이 앉아 묻는 목소리는 침잠해 갔다. 오랫동안 고민해 온 흔적이 역력했다.

“⋯⋯너 나 안 먹고 싶지.”

그때는 반대로 한없이 슬퍼 보였다. 병찬이 ‘종수’를 먹는 것과 일반형의 ‘사람’을 먹는 것이 달라야 할 이유를 찾은 것처럼.

“나한테 먹히고 싶어?”

종수는 예의 눈빛으로 다시 병찬을 가늠했다. 어쩌면 종수가 언제나 이렇게 진중한 건 아닌지도 모른다. 오로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 진지하고 신중하게 완벽을 기하는지도 모르는 종수는 병찬을 항상 그런 방식으로 대접했다.

잡아먹을 사람의 사랑을 누려 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요괴 중에서도 대단히 드물 터였다. 그 경험은 몹시 귀하고 조금은 행복하면서도 불행했다.

바람이 차고 맑았다. 오월이지만 영영히 더워질 것 같지 않았다. 요괴들이 반기는 스산한 날씨였다. 가을이면 요괴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병찬은 쓸쓸한 계절을 싫어했으므로 그런 점조차 요괴답지 않았다. 집단에서 동떨어진 존재라는 자각이 상실감을 가속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을 봐서 돌아왔다. 종수는 장미를 물컵에 담그고 커피를 내렸다. 그 쓰고 신 음료를 종수는 무척 좋아했다. 커피에 곁들여 길쭉하고 파삭거리는 과자도 하나씩 먹었다. 과자가 입안에서 바스라질 때마다 그게 어린 종수의 몸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병찬의 눈에는 종수가 그때나 다름없게 보였다. 설거지를 하고, 창을 활짝 열어 놓고서 모처럼 둘이 낮잠을 잤다. 종수와 있으면 자꾸만 꿈꾸는 것 또한 불변이었다.

꿈에서 병찬은 종수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주변은 달콤한 내음이나는 투명한 설탕유리로 세운 미로였다. 벽 너머가 맑게 비치는 것이 미로의 가장 큰 기만이었다. 숨겨진 것 없는 풍경에 안심하고 걸으면 걸을수록 끝간 데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리 헤매도 어딘지 모르는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종수를 허탈하게 바라본 순간에 문득 병찬은 그 미로 속이 이미 목적지라고 느꼈다. 그간의 섭식이 환희도 고통도 주지 못한 건 병찬이 인간 대신 다른 것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알맞은 인간을 먹지 않아서일 것이다. 병찬의 입이 종수를 향해 벌어졌다. 역시 내가 찾는 게 네 안에 있는 것 같아. 백 년만 채우면⋯⋯.

인근 교회의 종소리에 병찬은 눈을 떴다. 고운 목소리의 성가대가 입을 모아 합창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쳐도,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깊은 잠에 빠진 종수의 손등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환난을 내가 기다리므로 (2024.7.10)

*위의 ‘무화과’와 따로 읽어도 무방하고 프리퀄일 수도 있는 뭐 그런 거... 잔인한 묘사 있음

한밤중에 들려온 소리는 얼마나 깊은 잠에 들었더라도 곧바로 깰 수밖에 없을 만큼 끔찍했다. 높이와 음색이 다른 비명이 한데 겹쳐 길게 천지를 뒤흔들었다. 목소리들이 다 끊어지기도 전에 뜯어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물체들이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물풍선 같은 것이 터지는 축축한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쏟아지며 철퍽거렸다.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무리가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 소리가 고막에 대고 입술을 부비는 것처럼 크고 섬뜩하여 종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작은 몸을 더욱 작게 말았다. 손가락으로 귀를 꼭 틀어막으니 심장 뛰는 소리가 고막의 안쪽 면을 북 삼아 부서져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숨소리가 흐느끼는 소리처럼 빠져나갈까 두려웠다. 종수는 입술을 오므리고서 안간힘을 써 가며 최대한 작게 날숨을 내뱉었다. 은신처가 점점 뜨거워지고 공기가 탁해져 마치 냄비 속에서 서서히 가열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더이상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고 말았다.

사위는 고요해져 있었다. 종수는 침실 미닫이문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조심스럽게 밀었다. 건너편 거실 벽 전체에 강렬한 붓터치로 휘두른 것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 회색 벽에 검은색을 칠한 것처럼 보였다. 피에 물든 자리가 어스름을 바탕으로 우거진 숲이 그려내는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그 앞에 사람의 형체가 앉아 있었다. 저것에게 말을 걸면 안 된다고 종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괴이한 정적은 만으로 겨우 네 살이 된 종수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포라는 감정이 몸을 입고 괴물로 돌변하여, 방금 들은 소리와 똑같이 자신을 찢어발겨놓을 것 같았다.

아빠? 종수가 작게 물었다.

그것이 천천히 일어서자 벽지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가 점점 거대해졌다. 그림자는 쑥쑥 자라나 벽의 삼면과 천장까지 뒤덮으며 핏자국까지 전부 삼켜 버렸다.

어? 그 사람이 되물었다.

종수는 얼어붙었다가 딱 한 걸음을 뒷걸음질치고서 넘어지고 말았다. 피와 오물을 칠갑한 사람이 성큼성큼 눈앞까지 다가왔지만 종수는 그 뒤의 그림자에 천착하느라 남자가 꾸미는 일을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는 식은땀으로 젖은 종수의 손등을 내키지 않는 듯이 잡아당겼다. 그러더니 종수의 손보다 깨끗할 리 없는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종수는 기겁하며 빼내려 했지만 아이의 힘으로 어른의 악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종수가 본 사람들 중에 아빠 다음으로 키가 크고, 오래 굶은 듯이 안색에 기름기가 없는 남자였다. 남자는 닦아낸 자리에 혀끝을 살포시 갖다 대더니 곧장 종수의 손을 뿌리치고는 입을 막고 뛰쳐나갔다. 구역질 소리는 아까 들은 소리에 필적할 만큼 끔찍했다.

남자는 태풍을 온몸으로 맞은 듯이 시달린 몰골로 돌아와서 선언했다. 백 년간 너를 지켜 주겠노라고. 보름달이 몹시 파리한 낯을 밝혔다.

너... 사람 맞아? 종수는 떨며 물었다.

요괴인데. 요괴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요괴는 환심을 사겠다는 심산이었는지 며칠간 어린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잔뜩 해다 바쳤다. 첫날은 종수가 부모님과 종종 단란한 외식을 하던 으리으리한 요릿집에서 진수성찬을 날라 왔다. 손님상에 차려진 요리를 훔쳐온 게 분명했다. 음식을 쟁탈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던 몇 명을 죽였을지 모른다. 종수는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거부하고 양팔로 배를 끌어안아서 빈 위장이 뒤척거리는 소리를 숨겼다. 다음날 요괴는 장난감 가게에서 인형을 한아름 가져다 진상했다. 요정부터 공주까지 반투명한 날개가 달리고 구슬이 꿰어진 드레스를 입고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녀 인형들이었다. 남자아이에겐 먼저 로봇이나 공룡을 주어 보는 관습을 모르는 걸 보고, 종수는 새로운 보호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요괴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통 웃지를 않네. 어떻게 해 주면 웃을까?

요괴는 자신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끌어올려 시범을 보이며 덧붙였다. 자, 이렇게 해 봐. 즐겁고 힘이 넘쳐야 상하지 않지! 요괴가 웃는 것을 보는데 마치 영영 잃어버린 아빠와 엄마가 그 뱃속에서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종수는 얼른 침실로 도망쳤다. 종수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유일한 안식처로. 요괴도 그곳에만큼은 쫓아오지 않았다.

종수는 이불 속에서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는데, 울음소리를 죽이려고 주먹을 연신 물어뜯는 바람에 살갗이 너덜너덜해졌다. 먹지 않고 울기만 한 지 사흘째가 되니 어린 신체가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벽이 찾아들 즈음에 종수는 완전히 탈진하여 빈사에 가까운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면 채 피어나 보지도 못했던 짧은 생이 가련하게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어깨를 흔들기에 눈을 떠 보니, 요괴가 나무쟁반에 그릇을 받쳐 들고 문지방을 넘어와 있었다. 종수는 침실에만은 요괴를 막는 신비로운 결계가 쳐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믿기에 이르렀는데, 요괴가 종수의 방을 내버려둔 것은 단순한 친절이었다. 요괴는 종수를 강제로 일으켜 앉히더니 따뜻한 물에 만 찬밥을 한 숟갈씩 떠 주었다. 종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거부하려고 했지만, 곡식의 맛이 엷고 밍밍하게 배어 입술에 와 닿는 물은 너무도 감미롭고 부드러웠고... 감기를 앓을 때마다 부모가 해 주던 것과 꼭 같았다.

요괴는 종수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며 안도하고 나서야 비밀을 공개했다.

기운이 나? 내가 왜 너한테 잘 해 주는지 알아? 백 년 후에 잡아먹을 거라서야. 넌 나랑 백 년을 시작한 거야, 꼬맹아.

그러므로 요괴는 백 년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어리고 약해 요괴에게 맞설 수 없지만, 수십 년 후에 아버지처럼 강건한 어른이 되면 요괴에게 가족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때까지 치욕스러운 삶을 버티어 내고 끝내 종수가 방금 부여받은 소명을 완수함으로써, 요괴에게 부역하는 생을 속죄할 것이다. 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치우는 요괴를 향해 종수는 목을 가다듬었다. 너 이름이 뭐야?

박병찬. 요괴 이름치고는 특이하지? 왜냐면... 요괴는 말을 더 하려다 아직 너무 이른 말이라는 듯이 중간에 관두었다.

요괴가 침실을 떠나고 나서 종수는 한 발씩 바닥으로 내려왔다. 머릿속에 별들이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발아래가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종수는 요괴가 선물한 장난감을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구석으로 휘청거리며 다가갔다. 요괴의 긴 뒷머리를 떠올리며 물까치 깃털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검정 머리 인형을 집어들고, 어머니가 종수에게 흰 종이를 오려 눈 결정을 만들어줄 때 즐겨 쓰시던 핑킹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냈다. 다음에는 기괴한 산발이 된 인형의 목을 서슴없이 꺾었다. 처음에는 고무가 늘어나기만 하더니,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자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두동강이 났다. 들쑥날쑥한 머리칼을 모아 쥔 채로 종수는 빙하 속에 갇힌 듯이 몸을 떨었다. 도래하는 여명 속에서 살의의 냉기를 깨치고 있었다. 복수를 향한 이 첨예하고 냉정한 열망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종수는 되풀이하여 다짐하고,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맹세했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리라. 그리하여 나 자신을 증명하리라...

이 모두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인간의 망각은 백 년보다 훨씬 짧은 시간만을 소요한다. 증명해 내야 한다는 감각만 빼놓고 종수는 거의 다 잊었다. 박병찬의 이름이 왜 박병찬인지를 모른다는 미진함 외에는 대부분이 희미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는 건 요괴뿐이다. 겁 먹은 눈동자와 맞닥뜨렸던 순간부터, 죽어가는 꼬마를 처음으로 품에 안아 본 순간에 그 꼬마가 어떻게 마음을 열었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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