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카우아
2024.5.23
*좌우는 마음대로 읽으셔도 됩니다.
*주의: 종수가 죽고 싶어합니다.
쉬울 줄 알고 온 건 결단코 아니었다.
미국에서라고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 NCAA 디비전 I에 진출했다고 해서 얼토당토않은 승리감에 젖은 적은 없었다. 종수는 이제야 또다시 출발선에 섰을 뿐이었다. 누가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종수는 대학 합격 통보 이메일을 열어 보던 순간을 기억했다. 겨울방학이었고 방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큰 목소리로 부모님께 알리기 전에, 그래서 종수가 고른 메뉴로 외식을 하고 성대한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배시시 웃으며 사진 찍히기 전에. 닫힌 방문 안에서 했던 생각을 기억했다. 기뻐하지 마. 넌 아직 멀었어. 신발끈을 고쳐 조여 묶는 것 말고 너에게 허락된 행동은 단 하나도 없어. 겨우 출발선에 선 걸 가지고 뭐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매일 매 순간은 새로운 시작이다. 밤마다 작은 규모로 죽고 아침마다 태어난다. 스스로를 출발선에 되돌려 놓는 버릇. 그게 사람들이 초심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종수가 이해하기로는 그런데, 남들이 무슨 생각으로 말을 하는지, 남들도 종수와 같은 사전을 가졌는지 알 길이 있나. 종수는 미국에서도 초심을 유지하며 지냈다. 슛 연습. 팀원들과 일대일. 웨이트. 아무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훈련량은 장도고 다닐 때보다 더 늘었다. 잠은 조금 줄었다. 체중은 원하는 만큼 늘지 않았고 키는 그대로였다.
종수는 몰랐다. 키가 멈춘 게 종수의 한계를 점지하는 일종의 신탁이었는지를. 키가 자라는 건 종수가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여 연습하고 마음 졸이며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런 게 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종수가 진학한 농구 명문에는 한국 고교 리그가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고 종수가 꿈으로도 꿀 수 없었던 실력의 선수들이 수두룩했다. 종수가 맞부딪쳐 본 선수들 중에 단연 최고는 최세종이었는데, 인정하긴 싫지만 아버지조차 농구 교실에 갓 입문한 풋내기처럼 보이게 할 만큼 특출한 선수들이 고개만 돌리면 넘쳐났다. 종수의 발이 걸음마다 진창에 푹푹 빠질 때 날아다니는 듯한 몸놀림을 가진 선수들. 하지만 너도 그런 애잖아, 그렇지? 종수가 속한 농구부 사람들은 물론 한국에서 종수의 소식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기대는 숨 막히게 높았다. 바다를 건너온 시선이 뒤통수에 달라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종수가 미국에서도 만 명의 하나에 들 거라는 열광부터 어림도 없을 거라는 회의까지 골고루. 그 기대보다 더 높은 건 종수가 스스로 세운 기준이었다. 딱 한 명을 이기면 되었고 그건 종수 자신이었다.
언젠가부터 그 종수가 종수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 종수는 앞장서서 너무 빨리 달렸다. 대학교 이 학년 때 순리대로 드래프트에 얼리로 나가 다섯 손가락 안쪽으로 지명되어 NBA의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았다. 조재석은 물론 조형석 못지않은 3점 슛을 장착하고 유로스텝도 완성해서 필요하다면 상대의 심장부까지 관통해 들어가는 페네트레이션도 할 줄 알았다. 멘탈이 피치에 몰리면 겨냥이 흐트러지던 약점을 보완해 클러치 상황을 강점으로 만들었다. 4쿼터 막판에도 슛이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닭가슴살과 프로틴을 주식으로 먹으며 키운 코어 근육이었다.
어쨌든 진짜 종수가 걸어간 지점에서부터 종수의 이상향, 현실 이면의 종수도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종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자꾸만 자신이 없어졌다. NBA에서는 얼마나 높이 올라가 활약할 수 있는지. 태풍의 경로가 종수 자신에게도 흐릿해져 갈 즈음에 종수는 또다시 삼 학년, 한국 나이로 스물셋이었다. 공교롭게도 한때 달았던 백넘버와 같은 나이였다.
모든 들숨과 날숨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것은 그 초여름 어느 날부터였다. 아무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 듯한 그 종수의 가벼운 호흡에 비하면 종수는 아주 무겁게 공기를 들이쉬고 있었다. 체육관이 가까운 학교 후문 근처에 구한 스튜디오 아파트의 공기였다. 싸구려 합판 식탁에 앉아서 종수는 땅콩버터를 바른 크래커를 꾸역꾸역 삼켰다. 몸싸움에서 해가 갈수록 심하게 밀려서 증량하려는 노력이었다.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서 몸싸움의 대상도 못 된 지 한참이었지만. 매일이 절벽에 한 손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은 하루였다. 견과류 조각이 자갈처럼 입안을 굴러다니며 천장과 혀를 긁어 놓았다. 비행기 이착륙 같은 굉음이 웅웅거리며 깔려 있었는데 아마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종수는 그 종수가 넘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가장 최선의 종수조차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이명처럼 들렸다.
선명하게 나온 흑백사진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갈수록 잦아졌다. 점점이 종수의 일상에 침투하더니, 농구공을 잡고 있는 순간도 그렇게 변하여 공의 무게가 납처럼 무겁게 종수를 끌어내렸다. 그 무렵에 종수는 한국 유스 캠프에서 스쳤던 선수 하나가 언젠가의 경기에서 ‘공이 너무 무거웠다’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그런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런 뜻으로 의심했다. 점은 선이 되어 종수의 시간 위로 그어진 다음 면이 되어 회색 넓이를 불려 나갔다. 어느새 종수는 그 그림자 속에 있었다. 그곳이 종수가 최종적으로 속한 곳이라 느껴졌다.
이 직감이 맞는지 상담할 곳이 필요했다. 종수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확신하게 해 줄 자격이 있는 원천으로부터. 상담 대상에서 첫 번째로 제외된 것은 가족이었다. 그리고 근소한 두 번째로 한국에 두고 온 모든 인연. 그다음엔 이곳의 감독과 코치, 팀원들, 기숙사 사감. 학교 규정 때문에 수강신청은 했지만 강의실에 앉아 딴 생각만 했던 수업의 교수들. 학교 상담센터도 배제되었다. 많은 케이스를 다루었겠지만 그중에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농구선수의 촉망받는 외아들은 없었을 것이다. 종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타인의 판단을 믿을 수는 없었다. 너는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는 나쁜 버릇이 있어. 이규가 언젠가 말했었다. 아마 종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이규였다. 고등학교 땐 그 말이 조금은 사실이었다 해도 종수는 자신이 지금도 그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조언을 구할 참이었으므로. 믿을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성현들의 뜻을 따르고 대리석에 새겨진 성문들을 마음에 옮겨 새길 것이었다. 되도록 다정과 온기가 배어 있지 않을수록 좋았다.
일반생물학 수업을 결석하고 종수는 중앙도서관을 어슬렁거렸다. 처음으로 눈길을 끈 책은 추천 도서 서가 상단에 있던 소설이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대출한 책을 가방 깊이 숨기듯 쑤셔 넣고 도망치듯이 아파트로 돌아온 종수는 그 자리에서 읽어치웠다. 그리 길지도 않고 종수의 영어로도 너끈히 읽히는 책이 끝까지 넘어갈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웃지 않았다. 책장을 덮으면서 베로니카가 충분히 단련하지 않았다고 그 불성실함을 꾸짖었고, 딱 하나 그나마 와닿은 문장을 연필로 옮겨적었다. “너에게 살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정해야겠구나. 그 어디는 아마도 여기. 작가의 이름을 보니 더 유명한 저작을 들어 본 것이 흐릿하게 떠올라서 그것도 빌려다 읽었다. <연금술사>에서 기억할 문장.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다.”
숱한 경구들 가운데 종수는 핵심을 꿰뚫는 것을 찾아 더듬거렸다. 격언집을 빌려와 넘기며 글귀를 하나하나 검토했다. 죽음에 대한 아포리즘의 홍수 속에서 종수는 몇 구절을 건졌다.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말하길, “재해가 아니라 법칙으로 이해할 때 죽음은 아름다워진다. 죽음은 삶만큼이나 만연해 있다.” 종수의 다짐에 힘을 실어 주는 명령은 또 있었다. “좋은 죽음이 가능할 때 선택하라. 너무 오래 기다렸다간 그럴 기회를 잃는다.” 가비우스 루푸스.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루푸스의 말이 마음에 들어 종수는 철학 서가를 주로 기웃거리게 됐다. 죽음에 대한 천착에 있어서는 철학자들이 으뜸갈 테니 여기부터 먼저 왔으면 시간을 아꼈으리라는 점이 통탄스러웠다. 전문 서적은 영어가 너무 어려워서 대중서밖에 읽을 수 없었는데, 쉽게 풀어쓴 입문 철학서 한 권에 따르면 시계보다 더 정시를 준수하는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한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에서 ‘범죄에 대한 형벌은 필연’이라며 사형제에 찬동했다. 종수가 미국에 와서 받아든 한심스러운 성적표는 범죄에 준했으므로 위대한 철학자의 논리에 따라 처형하는 게 옳아 보였다. 더 읽다 보니 칸트가 자살에는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모순이 알쏭달쏭했다. 아무래도 너무 옛날 사람이라 사고력이 딸리나 보다 하고 앞의 것만 취사선택하기로 했다. 아무리 대단한 사상가라도 모든 말씀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므로 형 집행인의 정의로움만 남기는 게 적절했다.
나이 지긋한 소설가와 죽은 지 이백 년이 넘은 철학자까지 오니 동시대인의 관점도 하나쯤은 참고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주위에서 얼굴 보고 부대끼는 사람들 혹은 한국에서 종수의 소식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다. 종수가 하려는 걸 방해하지 않을 사람. 그에게 종수가 아무 의미 없고, 종수에게 그가 아무도 아닌 사람. 그야말로 노바디. 종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만 아무 여파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활자로만 먼저 만나는 관계가 최적이었다.
종수는 구글에 한국어로 랜덤채팅을 검색했다. 척 보기에도 불순한 의도로 사용되는 사이트 몇 개를 피해 스크롤을 내렸다. 완벽한 익명성과 간단한 인터페이스를 내세운 앱 하나를 깔고 실행하는 동안 종수는 멍하니 의문에 빠졌다. 한국 시간으로 이 새벽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한량인 걸까. 백수건달이거나 종수처럼 불면증을 앓거나⋯⋯. 멀쩡하고 반듯한 인간은 이 화면 안에 없다시피 할 것만 같았다. 종수가 듣고 싶은 것은 판에 박힌 자살 예방 문구가 아니었기에 꽤 알맞은 군상을 고른 것이다. 깨닫자 마음이 모처럼 조금 가벼웠다.
앱은 세 명의 대화 상대를 추천해 주었다. 프로필 이미지는 전부 동그란 머리가 막대기 몸에 얹혀 있는 형태였다. 하나는 노랗고 하나는 회색이고 하나는 파랄 뿐 아무런 차이가 없고 구별되지 않는 완전한 익명들. 종수는 마지막에 있는 파란색을 눌렀다. 상대가 바로 인사를 걸어 왔다.
[ㅎㅇ]
[안녕하세요.]
[ㅎㅎㅎ]
왜 처웃지? 뭐가 웃을 일인지 몰라서 종수는 깜박이는 커서만 노려보았다. 앱을 깔면서 간만에 맑아졌던 머리가 다시 혼탁해졌다. 대화하는 게 벌써 버거웠다. 랜덤채팅을 켠 것은 아주 안 좋은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늦었는데]
[안 주무시네요]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남이야 자든 말든 종수가 알 바는 아니지만.
[미국 살아서요.]
[이열]
[몇 시예요 그럼]
[오후 한 시요.]
[유학 갔어요?]
[네.]
[오]
[나도 대학생]
다행히 상대는 어지간히 심심했던 듯했다. 대화는 끊길 듯 말 듯 곧잘 이어졌다. 벌써 소통에 임할 의지를 잃어버린 종수가 묻는 것만 겨우 대답해도 상대는 끈질기게 말을 걸어 왔다.
[무슨 과예요?]
[대학생이 아닌가?]
[대학생이에요.]
[저는 운동하러 왔어요.]
[무슨 종목?]
[농구요.]
[헐]
[와]
[대박]
[멋진 종목 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뭘 또 쪼개. 농구가 뭐가 웃긴다고. 게다가 갑자기 반말로 변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대화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직감이 얼얼하게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프로필 셋 중 하나를 잘못 눌렀다. 불운이 종수가 죽을 때를 알고 이제야 몰려오는 것이다, 미국에 진출하는 초년성공을 맛보여 준 것을 마지막 자비로 남기고. 하기야 무슨 기대를 하겠어. 랜덤채팅 앱은 보나마나 인간쓰레기장일 텐데. 애초에 왜 채팅 같은 걸 시도했지. 그냥 누워서 천장이나 쳐다보고 있을걸. 종수가 후회하고 있는데, 아마도 단순히 예의를 차리려는 질문 하나가 갑자기 정곡을 찔렀다.
[할 만해요?]
[농구]
종수는 가만히 있었다. 가슴이 꿰뚫린 기분이었다. 큰 잘못을 한 듯이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빨리 뛰었다. 상대가 재촉하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저기요]
[저기]
[헬로]
[어디감?]
[뭐야]
계획한 것만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물어보려던 말이 있었는데, 분명히. 아무도 아닌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질문이 있었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종수는 끝내 하루 미루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시간?]
[한국은 새벽 2시임]
[걍 잘 거 같은데]
[음]
[네. 안녕히 계세요.]
[아니]
[잠만]
[오라고 하니]
[오지 뭐]
[ㅋㅋㅋ]
[근데 저는 무슨 과인지]
[왜 안 물어봐요]
[ㅋㅋㅋㅋㅋ 저]
그렇게 안 궁금할 수가 없었다. 경쾌하게 타다닥 뛰어가는 점 세 개가 상대가 계속 입력 중임을 알리는 동안 종수는 [내일 뵙겠습니다.]를 빠르게 보내고 그대로 대화를 종료했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소통을 끊는 건 아주 쉬웠고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순식간에 사위가 조용해지고 종수는 혼자 남았다.
프로이센은 칸트 말고도 걸출한 철학자를 숱하게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빛나는 저 이름 높은 변증법의 창시자, 헤겔이 말했다. “사물은 격돌하는 힘의 대결에 의해 운동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삶은 살아 있음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 긍정은 부정을 낳아 탄생이 소멸을 야기한다. 종결이야말로 계몽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종수의 결단은 헤겔이 보장하고 심지어 권장하는 자연스러운 이행이다. 종수는 스스로에게 합당한 것을 수여할 따름이다.
독일인 특유의 엄격함은 종수에게도 이미 친숙한 미덕이었다. 종수가 스물한 해를 갈고닦아 내재화한 냉정한 성실함과 비슷했다. 바로 그 성실함으로 종수는 낯선 사유 속에까지 들어가 꾸미는 일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수많은 이들이 지침으로 삼는다는 사상가 미셸 푸코는 근대 권력을 맹비난했다. 논거의 하나는 “근현대의 통치가 생명 유지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죽음을 회피한다”는 것이었다. 생명을 가능한 과대평가하고,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며, 생명에 가해질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적인 것처럼. 그래서 종수는 죽음이 남의 손에 맡겨지기 전에, 시스템이 개입해 개인이 본인을 통제할 기본권을 앗아가기 전에 얼른 칼자루를 쥐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무엇을 읽든지 하나의 결말로 수렴했다. 어떤 것은 직선으로, 어떤 것은 나선으로, 좌우간에 최종적으로는 모두 블랙홀에 끌려 들어가듯이. 아무튼 죽어야겠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날 것이었다. 최종수라는 사람은 딱 그 사람이 하는 농구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무가치했다. 니체가 신을 죽였는데 사람이라고 살아남을 도리는 없었다. 종수의 신은 종수, 그러니까 다른 종수였다. 그 종수조차 소멸하려는 곳에는 이 종수도 남아 있어선 안 되었다.
다시 앱을 켰다. 하나뿐인 지난 채팅 기록에는 상대가 접속 중이라는 녹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종수와 한 약속을 지키러 들어왔나? 아니면 어제 종수를 만났던 것처럼 우연한 말동무를 찾으려고? 종수처럼 어디서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을 시험해 볼 상대를 찾아서?
파란 익명은 대학생이랬다. 보통의 대학생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종수는 몰랐다. 종수가 생각하기에 종수의 번민은 모두 종수만의 고유한 것이었다. 채팅창에 들어가니 이번에는 먼저 반겨 주지 않고 기다리길래, 종수도 내버려 두었다.
괜히 긴장되는 몇 초가 흐르고서야 져 주듯이 인사가 날아왔다.
[왔네]
[약속 안 지킬 줄 알았는데]
[제가요?]
[농구 연습할 때 아니에요?]
[오후면]
[네. 맞아요.]
[너무 담담하게 인정해서]
[할말이 없다]
[네.]
[안녕히 계세요.]
[아니]
[쫌]
[가지말아봐]
[뭔 말을 못하겠네]
[그럼 뭐하는데요?]
[그냥 있어요.]
[저기]
[다친 건 아니죠?]
[네.]
[다행이네]
[근데 왜 그냥 있어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대화였다. 종수는 곧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기억도 함께 말소된다. 그러니 하지 못할 말도 없다. 어차피 사라질 순간들.
[저도 물어봐도 되나요?]
[오 넵]
[얼마든지]
[죽고 싶었던 적 있으세요?]
아주 긴 정적이 흘렀다. 상대가 얼어붙은 게 느껴졌다. 보내온 활자를 가지고 유추하는 것도 아니고 대화가 멈춰 있는데도 근거도 없이 그런 직감이 들었다. 앱에는 신고 버튼도 있었고 그냥 대화를 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종수를 차단해 버리기만 하면 쫓아가서 뭐라고 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남아서 할 말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상대가 보이는 듯한 건 아마도 종수의 순전한 착각이리라. 어쩐지 그 굳은 어깨가 눈앞에 나타나 손만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았다.
장장 십 분을 상대는 말 없이 고전했다. 종수는 달리 할 일도 없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마침표들의 물결이 나타날 때까지. 뭔가를 한참 입력하더니 또 한참 지운다. 잠잠해졌다가 또 점점점.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상냥한 사람이 괜히 이런 대화에 엮였구나, 하고 호의적으로 그 곤경을 바라보던 종수도 슬슬 답답해지고 신경질이 날 때까지.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지. 죽을 사람한테 못 할 말이 뭐지?
결국 온 답장은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초라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네.]
망설임 없이 대답했더니 또 점이 마구 찍혔다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살얼음 같은 기나긴 침묵이었다. 종수는 왠지 책임감을 느꼈다. 아마도 이 대화가 매우 불편하고, 도망치고 싶고, 그냥 이 노란색 익명의 누군가와 아주 조금도 얽혀 있지 않던 어제 낮으로 돌아가고 싶을 상대를 위해 일단 오늘의 대화는 이쪽에서 마무리해야겠다는 책임감이었다. 상대의 진지한 자세에 그 정도 보답은 하는 것이 도의였다.
[혹시 내일도 오실 건가요?]
[올까요?]
[그럴게요]
두 개의 답장이 거의 시차 없이 커다란 안도와 함께 밀려왔다. 종수가 바라던 바와 반대로 가고 있는 듯해서 불길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기 시작했다. 종수에게 아무런 마음도 쓰지 않을 사람이 필요한 거였는데, 이 상대는 심약한 건지 다정한 건지 이미 약간은 그르쳤다. 여하간 내일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거절하면 또 찾으면 그만이고,
[그러면 내일은 드릴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
[내일 말씀드릴게요.]
[알겠어요]
[꼭 오세요]
[네.]
[약속한거죠?]
[기다릴거임]
[알겠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접속 끝내기 버튼을 먼저 눌러 녹색 불을 끄고 불편한 대화를 일단락짓는 것도 종수 쪽에서 제공해야 할 예의이리라.
종수는 손을 들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펴놓고 읽던 책을 하나하나 덮었다. 근거는 충분히 모았고 이제는 그 손으로 준비할 것이 너무도 많았으므로. 마지막 덮은 책의 마지막 장면은 인도의 원시적인 고장에서 수만 명의 전사들이 이유 없이 서로를 죽이는 축제였다. 인명이 무용하게 희생되는 잔혹극에야말로 삶이 집약되어 있었다. 꽃잎 같은 핏방울이 하늘을 뒤덮으며 기꺼이 죽는 이들의 삶을 선명한 색채로 용감하게 붓질하여 찰나의 명화를 만든다. 전부 종수가 잃어버린 감각들이었다. 그걸 되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파란 사람과 재회할 때까지 종수는 하루를 꼬박 들여서 계획했다. 간만에 하루가 분주하고 충만했다. 구글맵을 따라 북미에서 하와이까지 긴 동선이 그려졌다. 종수는 불친절하고 안전관리가 허술한 스쿠버다이빙 업체를 물색하여 별 하나짜리 후기가 딱 두 개 박힌 영세 업소를 찾아냈다. 그곳을 종말점으로 잡고 시작하여 그 전의 과정을 채워 넣는 역순으로 여정을 짰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더니 밤에 채팅을 켤 때가 되자 양쪽 모두 충혈되고 뻑뻑했다. 메시지를 읽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읽지 않고 쓰기만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종수가 할 일은 듣는 게 아니라 알리는 것뿐이었다. 일방적으로 제안하고 수락 여부만 물어보면 끝이었다.
[좀 잤어요?]
[네.]
이런 거짓말도 아무 상관이 없으며,
[굿]
[전 덕분에 못 잠]
그것도 종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부탁이 있어서요.]
[에휴]
[네]
[다음주가 저희 학교 농구부 휴가라서 훈련이 없거든요.]
[그동안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죽으려고 하는데,
도와주실 분을 찾고 있어요.]
[저기 그]
[조금]
[진도가 빠르지 않나]
[차근차근 설명 드릴게요.]
재차 펼쳐지는 점들의 향연을 아랑곳 않고 종수는 작전을 낱낱이 공개해 보였다.
[스쿠버다이빙을 간 걸로 가장해서 물속에서 산소통을 벗고 익사하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마지막 순간에 미련이 남아서 자살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산소통을 다시 쓰거나 물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머리를 눌러서 도와 주시면 돼요.]
[사고로 보일 테니 범죄자 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장소는 하와이로 정했고, 도와 주시는 몇 시간 제외하면 자유롭게 관광하셔도 됩니다.]
[모든 여비는 제가 대고 보수도 지불하려고 합니다.]
[질문 있으시면 알려 주세요.]
[음 우선]
[이 얘기]
[다른 사람한테도 했어요?]
[가족이나]
[학교나]
[아뇨.]
[안 도와 주실 건가요? 괜찮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음]
[이런 어떤 결정?을]
[하기에 앞서서]
[남들하고 상의라든지]
[상담이라든지]
[전문가?의 도움이나]
[어떤]
[혼자 충분히 생각했고, 괜히 소란 피우기 싫어서요.]
[질문은 끝인가요?]
[음]
[관광은]
[저 혼자?]
[네.]
[같이 다니지]
[놀러 가는 거 아니라서요.]
[네]
[뭐 그런건 차차]
[보수는 얼마인지 안 물어보세요?]
[얼만데요]
[마지막 날에 ATM에서 잔고를 전부 인출해서 현금으로 드리려는데, 만오천 불은 될 거예요.]
[아하]
[넵]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다른 분을 찾으면 되니까 억지로 안 하셔도 됩니다.]
[헉]
[아뇨]
[어딜도망가려고]
[제가하겟습니다]
[그머지]
[만오천불?]
[내꺼임]
[오예~]
묻는 말로 보나 태도로 보나 썩 미더운 처형자 같지는 않았지만 시원시원하게 수락하는 건 마음에 들었다. 종수는 그쯤에서 체념하며 타협했다. 똑같은 설명을 랜덤채팅의 수많은 익명을 붙잡고 되풀이하는 게 더 진이 빠질 것 같았다. 둘은 하와이에서 만날 날짜를 정했다. 숙소는 종수가 예약하고 알려 주기로 했다. 비행기표는 각자 산 다음 종수가 보수에 푯값까지 두둑이 얹어 주는 걸로 합의했다. 상대는 이것저것 사소한 것을 물었다. 그중에는,
[근데 님인 줄 어떻게 알아보죠]
[님 어떻게 생김?]
[저는 머리가 곱슬이고, 키는 192예요.]
[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네?]
[아니 키 클 줄 알았다고요]
[농구선수니까]
[농구선수치고는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 물음도 있었다.
[그거야]
[어떤 선수냐에 따라 다르겠죠?]
떠나기 전까지의 며칠은 태풍이 몰아닥치기 직전처럼 고요했다. 종수는 짐을 싸는 틈틈이 유서를 썼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구글맵을 켜서 동선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출항을 못 해서 스쿠버다이빙을 못 떠날까 봐 일기예보도 점검했다. 하와이의 7월은 내내 덥고 화창하다고 했다. 허리케인 시즌이었지만 여행 기간은 비껴나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해도 잠이 안 오면 가슴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오르내림을 느꼈다. 눈을 감고 숨 쉬는 연습을 했다. 물속에서도 똑같이 차분하게 숨 쉴 수 있도록. 익사하고 싶지 않다고 뇌 어딘가가 끈질기게 저항해도 안정적이고 집중된 호흡을 이어갈 것이다. 겁쟁이처럼 숨을 한 모금 참아서 실패한 인생을 몇 초나마 연장하려고 꼴사납게 아등바등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집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농구와 관계없는 물건은 원래도 그다지 사 모으지 않았고, 휴지며 세제 같은 소모품도 때마침 떨어져 갔다. 냉장고는 장을 새로 보지 않고 떠날 날을 계산해서 비웠다. 종수는 마지막 남은 레이즌 브랜 시리얼 두어 줌을 아침으로 털어 먹고 그릇을 물로 씻었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커피메이커용 원두를 더 사 두지 않은 것이 애석했다. 그렇다고 새로 사 올 만큼 식욕을 정성스럽게 충족할 일은 아니었다. 공항에 갈 때까지는 몇 시간 여유가 있어 집을 먼지 한 톨 없이 청소하고 락스로 욕실을 문질러 닦았다. 혈흔 따위를 지우려 함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흔적은 만들어 놓지 않았다. 종수는 모든 아마추어적인 것을 끔찍이 싫어했으므로 몸 어디를 잘라서 죽는 실패율 높은 방법은 시도할 생각조차 없었다.
방에 있는 농구공도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 바람을 빼고 구겨 놓을까, 침대 밑에 굴려 넣기라도 할까 하다가 보이는 곳에 그대로 놔두었다. 책상 아래 그늘진 구석에.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종수는 담담히 손을 흔들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듯한 농구공에 대고. 너와는 힘든 기억밖에 없었어. 바이바이.
나오는 길은 아무도 곧 벌어질 일을 모르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렇게 되도록 치밀하게 계획했으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이 눈에 익은 윗집 이웃을 마주치는 바람에 종수는 흠칫하고 숨을 흡 들이마셨다. 제 발 저리고 뜨끔해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도 몰랐지만, 역시 미국에서 스몰토크가 부족할 걱정은 어불성설이었다. “엄청 큰 백팩을 멨네!”하고 백인 여자는 움푹 팬 푸른 눈을 더 크게 뜨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종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죽을 날까지 하나씩 입고 버리도록 날짜를 맞춘 옷가지가 들어 있다는 말은 안 했다. 공동현관에서 우버를 잡아타고 공항에 가는 길은 체증이 하나도 없었다. 고가도로를 쌩쌩 내달리는 동안 시선 아래에서 여름을 입어 가는 관목이 날아가듯이 뒤로 스쳐 갔다. 아주 화창하지는 않아도 안개와 구름은 엷게 낀 정도였다. 오늘이라고 평소보다 어둡게 뜨지는 않은 태양이 구름 너머에서 작열하는 통에 공항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흐리고 눈이 부셨다. 출발 예정인 항공편이 나열된 스크린에는 단 한 건도 결항이 뜨지 않았다.
아무도 종수를 막아서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농구부에서 종수가 복귀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어쩌면 그보다 먼저 변사체로 태평양 어느 해안에 동동 떠서 발견될 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막아 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비행기는 불안하게 덜컹거리며 이륙하더니 곧 제 고도에 미끄러져 들어가서 순항했다. 갓난아이는 정적인 상태를 두려워하고 요람을 흔들어 주어야 잘 잔다. 그러니 난기류를 만났으면 오히려 잠이 잘 왔을 것이다.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도착하려면 한 번의 밤을 통과해야 했다. 종수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서 미대륙 끄트머리에 내리는 노을과 드넓은 태평양에 스며드는 어둠을 관찰했다. 창밖은 비행기 날개에서 점멸하는 불빛만 빼놓고는 온통 칠흑같이 농밀한 어둠이었다.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종수의 눈이 닿는 곳은 허공이 아니라 바다였다. 그 망망대해에 종수가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 한 자리가 생길 것이었다. 하와이 연안은 총천연색으로 찬란하겠지만 마지막 날숨을 내려놓을 자리는 빛을 게걸스럽게 삼키는 검디검은 암흑이어서 아무도 종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곳으로 사라지기를 종수는 원했다.
숙소는 ‘카이무키’라는 한적한 동네에 있었다. 침실이 두 개인 독채를 에어비앤비로 예약해 두었다.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몹시 피곤했다. 도로 양쪽으로 심어진 야자수가 언젠가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갔을 때 본 것보다 크고 무성하기는 했으나 대단히 찬탄할 만큼도 아니었는데, 같은 버스에 탄 한국인 관광객 무리가 말끝마다 감탄을 연발하고 요란스레 사진을 찍어 댔다. 종수는 가뜩이나 커다란 덩치를 있는 힘껏 움츠렸다. 사진 구석에라도 찍히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왔었다는 증거가 남는 것이 싫었다. 불행하게도 눈은 감길지언정 귀는 막아지는 기관이 아니었다. 백팩을 끌어안고 머리를 파묻어도 주변에서 울리는 환호성과 수다는 똑똑히 들렸다. 하와이에는 벌써 거리마다 노래와 새들의 지저귐이 가득했다. 종수는 녹초가 되어 내렸다. 숙소에 들어가서 씻으면 바로 쓰러져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발을 질질 끌며 걷다 보니 사진에서 본 정원이 나왔다. 이국적인 자주색 반점이 넓게 번진 녹색 식물이 심겨 있고, 길가의 빨간 우체통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하얀 징검돌이 놓인 집이었다. 에어비앤비 주인이 꽤 정직한 사람인지 집안 구조도 사진과 같았다. 부엌이 딸린 거실에 욕실은 하나, 침실은 두 개. 보통 크기 게스트 베드룸과 널찍한 마스터 베드룸. 후자를 고마운 손님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이쪽 방 쓰세요. 아마 그게 종수가 조력자에게 할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될 것이었다.
비행기 시간이 종수보다 빠른 손님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거실 바닥에는 종수 것 못지않게 우람한 배낭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더 커다란, 이민 가방에 준하는 캐리어도.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내가 죽으면 담아 가서 부위별로 팔아 먹으려고 하나, 하고 도시 전설에 가까운 상상을 잠깐 하던 종수는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수면 부족에 찌든 뇌가 마침내 항복했다.
종수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잠깐 기절했다. 의식이 희미해지며 물소리가 옅어지다 끊겼다. 그 자리를 목소리 하나가 채웠다. 누군가 어깨를 잡고 흔들며 종수를 혼곤한 잠에서 깨웠다. 종수가 하려고 했던 바로 그 말을 하며.
“큰 방 쓸래? 형이 양보해 줄게.”
소리보다 더 빠르게 종수를 깨운 것은 눈앞에 꽉 들어찬 현란한 네온 색상이었다. 발광하는 듯이 현란한 핑크를 바탕으로 한쪽 다리를 엉거주춤 들어올린 플라밍고, 파인애플, 활짝 핀 라플레시아 꽃이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해괴한 셔츠를 파는 데가 있다고?
“오. 옷 멋있지? 하와이 도착한 기념으로 공항에서 샀어. 내리자마자 옷가게가 있더라고?”
“뭐 하냐 여기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종수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구부린 남자의 이름을 알았다. 고교 시절에 시합했던 상대의 이름을 대부분 잊었어도 이 선수만은 선명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수와 박병찬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고 종수 자신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 무렵 종수는 압도적인 일 등이 되려고 혈안이었다. 이미 제쳐서 멀찌감치 따돌린 것들은 뒤돌아야 간신히 식별이 되지만, 눈앞을 장대하게 가로막은 장애물은 아무리 피하려 해도 보인다. 박병찬과 같은 코트에 올라 있던 시간은 고작 육 분 남짓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종수의 질주가 제지당할 수도 있었다. 종수의 생에서 손에 꼽게 길었던 육 분이었다.
병찬은 허리를 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외모는 종수가 마지막으로 본 때, 그러니까 사 년 전에서 변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악몽 같은 형광 연두색 농구화 취향 역시 남방 꼬라지를 보니 그대로일 듯하고. 머리카락은 귀밑으로 거의 한 뼘을 내려와 있질 않나. 고등학교 때는 유스 캠프 같은 데서 보면 종수를 포함한 애들보다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태가 났다. 웨이트를 더 갖추어서 체격이 완성되어 있고 젖살이 다 내려 이목구비에 군더더기가 없는 인상이 그랬다. 그러나 종수도 대학생이 된 지금에 와서는 병찬이 그저 대학생들 틈에 있을 법한 대학생으로 보였다.
병찬은 눈을 벽지 어드메에 뒀다가, 전등을 감싸고 돌아가는 실링팬에 뒀다가, 종수를 재발견하며 난감해진 척했다. 표정이 내내 평온한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생쇼를.
“네가 불렀으니까?”
“내가 너를 불렀냐고.”
“그럼 뭐 내가 미리 하와이 살고 있다가 마실이라도 나왔겠니.”
“개짓거리 하지 말고 꺼져.”
“인천까지 비행기만 여덟 시간인데 어디로?”
“재미 없어.”
“응, 나도.”
“그러니까 꺼지라고.”
“갈 데가 없다니까?”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네가 오라고 해서 왔으니까 상관이 있지, 최종수야.”
“이름 부르지 마. 너 오라 한 적 없어.”
“네가 하와이로 오라며. 채팅 앱 켜서 보여줘?”
“그게 왜 너냐고. 구라 까지 마라.”
“하하.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계속하네.”
“그건 너고.”
“넌 진짜 그대로다 야.”
“지랄하네.”
“어쨌든 여기가 내 숙소야. 네가 그렇게 잡았으니까. 사람을 불렀으면 좋든 싫든 책임을 져야지. 그렇지?”
박병찬이 종수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사 년이나 지나서 대폭 수정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사람은 담이 아니었다. 높고 넓은 벽이었다. 아주 꽉 막힌,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벽. 종수는 일어나서 병찬의 어깨를 확 밀쳤다. 병찬의 키는 마지막 봤을 때 비슷했고 체중도 종수보다 더 나갈 리는 없어 보였다. 방심해서 안정적인 스텝을 갖추지 않았던 병찬이 휘청이는 것을 내버려 두고 종수는 작은 침실로 쿵쿵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기 직전에 추격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발 하나는 징그럽게 빨랐다. 병찬이 쾅 문을 열어젖혔다. 종수가 침대에 엎어지든 말든 병찬은 말을 계속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종수.”
“⋯⋯.”
“너 뭐라고 했는지 형아도 다 기억하고 있거든.”
“⋯⋯.”
“형은 그전에 신나게 하와이 구경할 거다? 여기까지 와서 놀아 보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있을 순 없지.”
“⋯⋯.”
“관광해도 된다고 네가 그랬지? 약속한 거야. 착한 꼬맹이는 약속을 지킨단다.”
애송이 취급에 열불이 확 치받쳤다. 듣자 듣자 하니까 사람 꼴을 우습게 아는 모양이었다. 단숨에 몸을 일으키자 매트리스 스프링이 요동쳤다. 그 반동을 이용해서 종수는 우리에서 뛰쳐나오는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병찬은 순식간에 벽에 몰렸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나, 너한테 장난 친 거 아냐.”
“응, 알아.”
“알긴 좆으로 알면서!”
“아냐. 걱정하지 마. 내일부터 사흘간 자유 시간. 그다음 날에 너를 익사시켜 주고. 닷새째 귀국. 그렇게 할 거니까 안심해.”
병찬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지극히 침착하게 종수와 꾸몄던 모의를 복창했다. 입을 꾹 다물고서 종수는 병찬의 웃음기 없는 얼굴 구석구석을 노려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아무것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약속을 어기리라는 계시도 지키리라는 맹세도 끝끝내 찾지는 못했다. 병찬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좀 자라.”
“개소리야.”
“너 다크서클 장난 아닌데. 안색이 오늘내일한다고.”
“어쩌라고.”
“자라고. 나흘째에 죽어야지? 지금 죽으면 안 되지. 자, 뒤로. 뒤로. 옳지.”
병찬이 어깨에 다시 손을 얹어 왔다. 종수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누가 몸에 손대는 것이 늘 지극히 불쾌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농구야 몸이 부대끼는 게 스포츠의 일부니까 당연히 그런 식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농구 바깥에서 살결이 맞닿는 건 영원히 생경했다. 설마 그것까지 병찬이 내다본 수에 포함되어 있었나? 뒷걸음질을 쳤더니 침대에 도로 가까워지고 말았다. 종수는 오금에 닿는 매트리스에 주저앉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잔다 같은 소리 하면 뒤진다.”
“그래. 잘 아네.”
병찬은 늘어지게 하품하더니 기지개를 켰다. 쟤도 피곤한가? 한밤중인 것처럼? 한국과 하와이의 시차를 얼른 계산하기엔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큰 방 너 주려고 했는데, 쩝. 이렇게 됐네. 너도 바꾸기 귀찮지? 고맙다?”
“⋯⋯.”
“내일 보자.”
터벅터벅 멀어지는 발소리를 쫓아가서 이게 무슨 수작이냐고 다그치고 발로 뻥 차서 쫓아내야 하는데, 도저히 기운이 솟아나지 않았다. 오기 전까지 합치면 최소한 이틀 밤은 꼴딱 샌 상태였으니 힘이 들어갈 턱이 없었다. 누우니 온몸이 푹 꺼지는 듯 무거웠다.
착한 어린이는 제때 얌전히 자리에 눕는 거야. 해저에 손을 모으고 누워 차가운 물을 덮는 거야. 칭얼대지 않고 고요히 잠드는 거야.
하와이는 어딜 가나 야자수인지 뒷마당에 면해 있는 작은 침실의 창으로 한들한들 바람에 살랑이는 잎사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편 손 같은 음영이 벽에서 천천히 춤을 추었다. 눈을 감아도 시야가 은은하게 밝았다. 좀처럼 꺼지지 않는 거실 전등 때문이었다. 하품에 기지개에 생색은 다 내 놓고 병찬은 자러 가지 않았다. 종수는 눈꺼풀을 힘껏 치뜨고 문틈으로 병찬의 동선을 좇았다. 미국 가정집답게 주방 벽과 카운터를 꽉 채운 낡은 나무 서랍들을 병찬은 하나하나 열어 보고 있었다. 이따금 은빛이 번득였다. 병찬은 자기 캐리어를 가져오더니 서랍에서 꺼낸 것을 거기다 잘 보관했다. 날붙이를 살금살금 치우는 이유를 짐작하다가 종수는 별안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어쩌면 병찬도 종수의 계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병찬은 종수가 잠들 때까지 집안 곳곳을 오가며 내내 부스럭거렸다.
이상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꼬집어 기대한 건 아닌데도, 말도 안 되지만, 온라인에서 익명의 프로필 실루엣이었던 사람은 오프라인에서도 그럴 것만 같았다. 푸르스름한 네모 몸통에 동그라미 머리통이 붙은 납작한 형상 대신 정말 살아 움직이며 말하는 사람이 출현하니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코입과 팔다리와 이름을 가진 사람. 그것도 아는 이름⋯⋯. 정신 빠진 새끼. 이런 짓에 쫓아오는 새끼가 어딨어. 또라이 아냐. 종수는 머리가 돌고 싶은 게 아니라 죽고 싶은 거였으므로 병찬의 꿍꿍이가 뭐든 간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었다. 딱 무명의 실루엣만큼의 취급을 해 주겠다고 종수는 굳고 결연하게 마음을 먹었다. 손톱만큼도 양보할 의사는 없었다.
병찬이 종수를 깨운 시간은 정확히 오전 5시 22분이었다. 황당해서 핸드폰 시계를 두 번이나 들여다보았으니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오후 다섯 시까지 숙면해 버렸나 착각했다. 오전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부연 오렌지빛이 일몰이 아니라 여명인 걸 알고 나자 도대체 박병찬이 상식이 있는 인간인지 의심되었다.
“잘 자더라. 불면증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왜 깨우고 지랄이야.”
“심심해.”
졸음 섞인 욕을 웅얼웅얼 주워섬기며 종수는 침대 발치 쪽으로 대충 발길질을 했다. 실로 오랜만의 깊은 잠을 방해 받아 원망스러웠다. 발바닥이 병찬의 허벅지를 힘없이 밀쳤다. 병찬은 한숨을 토해내듯이 징징거렸다. 아무도 저쪽이 형이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잠이 안 와.”
“시차, 미친놈아. 시차.”
“시차 적응이 우습게 볼 게 아니네. 너도 미국 처음 갔을 때 힘들었겠다. 안 그랬어?”
“뭔, 인터뷰하냐? 꺼져 좀. 가서 퍼자든 나가서 뛰든 알아서 해.”
그리고 가나 싶었고, 티비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해방인가 보다 하고 종수는 얕은 잠과 요상한 꿈 사이를 휘적휘적 헤매었는데 역시나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스윽 문이 열렸다. 아홉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박병찬은 종수의 잠을 빼앗겠다는 요구를 또다시 당당하게 해 왔다.
“목마르다, 종수야.”
“존나 어쩌라고. 신생아냐? 다 돌봐 줘야 되게?”
“아니. 그냥 물이 없다고.”
“좀 수돗물을 처마셔! 안 죽어.”
“형은 안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든지 그럼!”
“생수를 마시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거란다. 봐, 너도 목마르지? 목소리 다 갈라지잖아.”
종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뒤통수를 웅웅 울리는 두통이 이마를 깨뜨릴 듯 첨예한 두통으로 변하고 있었다. 원통하게도 병찬의 말이 맞았다. 운동을 업으로 삼은 만큼 몸이 보내는 갖가지 신호를 구분할 줄은 알았다. 오버 페이스로 혈당이 떨어질 때, 잠이 부족할 때, 그리고 목이 마를 때의 두통은 모두 다르게 아팠다.
“너도 수돗물 싫잖아. 물 사러 가자.”
“네가 알아서 사 와.”
“오, 형아 심부름 시키는 거야?”
“아니 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종수는 참을 인을 마구 새겼다. 소리를 질러서 좋을 일은 없었다. 박병찬과 싸울 힘 같은 것도 없었다.
“혼자 좀 가라고.”
“집에서 혼자 뭐하게. 약속 안 지키고 설칠까 봐 그런다.”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숙소에서 난데없이 시체가 발견된 걸 수습하긴 아무래도 곤란하니까. 우리 플랜 다 있잖아. 그때까지는 형아한테 협조를 좀 하자.”
다친 게 무릎이지 머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병찬은 이 사건을 기획한 종수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를 지껄여 댔다. 마치 종수가 각본을 쓰고 감독하는 영화에 한 장면 지나가기로 되어 있었던 단역이 메가폰을 빼앗아 가더니 세트장을 휘어잡아 버린 것 같았다.
“너 시키는 대로 하는 거 잘 하잖아.”
“그건 뭔 소린데.”
“그냥, 감독님 말씀 잘 듣는 것 같아 보이길래. 그것도 옛날이다만.”
“물 사다 주면 안 깝칠 거야?”
“물이랑 다른 것도 좀 사 줘.”
“네 돈으로 사.”
“돈은 네가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나? 형은 그것만 믿고 왔는데.”
“하아아⋯⋯. 뭔데 또.”
“가면서 얘기하자.”
병찬은 그러면서 잠옷 티셔츠를 훌훌 벗고 어제의 해괴망측한 하와이안 셔츠를 꿰어 입었다. 옷도 별로 안 가지고 와서 벌써 입을 게 없단다. 첫날 아침인데. 셔츠는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미감을 담당하는 중추가 손상되는 느낌이었다. 종수는 뛰기 일보 직전까지 걸음을 재우쳤다.
“아는 척하지 마라.”
“응 똑바로 가기나 해. 길 끝에서 좌회전.”
병찬은 뒤에서 느긋하게 내비게이션 역할을 맡았다. 앞마당에 파라솔을 펼친 저층 콘도들을 지나 쭉 직진, 4차선 도로가 나오면 횡단보도를 대각선으로 건너고, 해안이 가까워지는 쪽으로 두 블럭. ‘ABC 스토어’라는 특징 없는 회색 간판이 보였다.
“여기가 제일 가까운 편의점이야. 숙소를 꼭 거기다 잡았어야 했니?”
“불만이면 네 숙소 따로 잡든지.”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하와이까지 왔으니 산책 많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오. 무슨 물 종류가 이렇게 많아.”
“입 닫고 아무거나 좀 처 골라.”
“흠⋯⋯. 나는 삼다수.”
“있겠냐고⋯⋯.”
종수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동안 병찬은 냉장고 앞에서 이걸 집었다 저걸 집었다 했다. 그러더니 고른 건 종수가 네 살 때쯤인가 한 모금 마셔본 뒤로 입에도 안 대는 상표였다.
“에비앙 많이 들어 봤는데. 이거 뭐 고급이라며.”
“헛소리야. 에비앙 존나 느끼하고 맛없다고.”
“물이 느끼한 건 또 뭐야?”
“궁금하면 넌 에비앙 먹든지. 안 말려.”
종수는 플라스틱 병들 사이 유일하게 유리에 든 생수를 집었다. 북극해에서 길어왔다는 1급 청정수 운운하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병찬이 이슬만 마시고 자란 도련님 보는 눈으로 보길래 스멀스멀 짜증이 기어 올라왔다.
“올, 최종수 미식가였냐.”
“물 가지고 뭔 호들갑이야.”
“워터 소믈리에? 뭐 그런 것도 있다며.”
“⋯⋯.”
“방금 만 원 나온 거야 물 두 병에? 봉이 김선달이 울고 가겠다.”
“너는 목마르다면서 말은 존나 많아.”
병찬은 종수의 말에 갈증을 기억해 낸 듯이 아 맞다,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고는 물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맛있게 비웠다. 꼴딱꼴딱 목젖이 리드미컬하게 넘어가고 입가에 한 방울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스윽 닦더니, 물맛이 삼다수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면서도 같은 걸로 한 병 더 사 달라고 보챘다.
“볼일은 이게 끝이야?”
“이제 이 물을 들고 여기서 버스를 타.”
“뭔 버스?”
“와이키키 트롤리. 어디 보자, 핑크 라인 정거장이 여기 어디랬는데.”
“그거 타면 집에 가? 아까는 뭐 하러 걸어왔는데?”
“집에 안 가는데?”
“뭐?”
“쇼핑센터 가기로 했어. 어떤 최종수가 형아 선물 사 주기로 해서.”
“존나 처음 들어 보는 얘기야.”
“괜찮아. 적응될 거야.”
핑크 라인이라는 트롤리는 이름이 무색하게 과즙이 터질 것 같은 오렌지색 페인트를 칠한 이 층 버스였다. 굳이 계단을 올라간 병찬은 지붕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뇌가 없냐? 비오면 개노답이잖아.”
“그것도 그러네.”
아무리 면박을 당해도 뻔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낯짝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맨 앞자리에 덩치 큰 남정네 둘이 구기고 앉노라니 굳이 옆자리에 앉아야 하나 싶었다. 종수가 창가에 앉았으니 병찬이 비켜주어야 옮길 텐데, 어쩐지 비켜줄 것 같지 않았다. 가는 길은 미국의 전형적인 소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포장이 잘 된 도로를 따라서 벌써 지긋지긋한 부채꼴 야자수들이 어제 공항에서 오면서 본 것보다 더 높이 자라나 있었다. 화창하기 짝이 없는 날씨에 힘입어 하루만에 키가 큰 것처럼 보였다. 하늘은 맑고 시원한 진한 파랑이었다. 차 안에 불지도 않는 바람을 만끽하듯이 등을 뒤로 젖힌 동승자를 보면 떠오르는 색이기도 했다. 종수의 머릿속에 거미줄처럼 얽힌 심상들 중에 몇 개는 주입된 고정관념이었다. 빨강은 정열 노랑은 동심 파랑은 슬픔.
왜 파랑일까. 얘가 슬퍼했을 거라 생각했나? 부상 때문에, 혹은 장도고에 져서? 아니면 시원한 느낌 때문에 파랑인가? 바람처럼 빨라서? 병찬이 태평하게 좋아했다.
“야, 미세먼지 없어서 좋다. 하와이 사람들은 살맛 나겠네.”
뒤늦게 기억났다. 그냥 조형고 유니폼 색이었구나. 당연한 연상을 설명하려고 쓸데없이 공을 들였다. 어쩐지 병찬이 더 얄미워졌다.
내륙 쪽으로 돌아 들어간 버스는 승객들을 픽업해서 다시 해안으로 나왔다. 종점인 하얀 아케이드 쇼핑몰에 도착하자 일 층부터 모든 승객이 우르르 내렸다. 여러 층으로 된 쇼핑몰에는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흰 벽과 기둥에 반사되며 실내를 밝혀 주어 긴 핸드벨 모양의 조명은 전부 꺼져 있었다. 중앙 통로에는 직사각형의 인공 연못에서 분수가 뿜어져 나와 옆으로 걸어가면 팔에 자잘한 물방울이 튀었다. 오전부터 사람이 꽤 많았다. 병찬은 매장 약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종수한테는 제멋대로 찾아온 불청객인 병찬이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종수를 피로하게 할 줄 알았더니, 딱 정해 놓은 목적지가 있다고 했다. 의외로 나름의 계획은 있나.
“코치를 미국에서 사면 그렇게 싸다며.”
“코치?”
“엄마 가방 하나 사다 드릴까 하고.”
“하⋯⋯. 쇼핑하러 여기까지 왔냐?”
“온 김에 하는 거다, 꼬맹아. 종수 너는 미국까지 간 기념으로 어머니 선물은 했어?”
“우리 엄마가 나보다 미국 훨씬 많이 와 봤을걸. 해외 촬영한다고. 가방 집에 많으셔.”
“그래도 아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골랐습니다 하고 딱 이렇게 안겨 드려 봐. 이제 기분이 다르지. 코치 이 층에 있대. 마이클 코어스? 이것도 여자 가방인가?”
“몰라 꺼져.”
앞장서는 병찬을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대리석 무늬 타일이 깔린 발코니 복도를 따라 가방 상점들이 나왔다. 수많은 가죽 가방들이 신상품 딱지를 달고 진열되어 있었다. 어머니 선물이라고는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크리스마스에 목도리를 사 본 정도에 그치고 다른 여자 선물을 사 본 경험도 일천한 종수로서는 다 똑같은 가방으로 보였다. 차이라고 해 봐야 큰 것과 작은 것, 검정과 갈색, 네모난 것과 동그란 것과 길쭉한 것이 있다는 정도. 세상에 가방이 왜 이렇게 많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호기롭게 올라온 박병찬이라고 그리 나은 것 같지는 않았다. 먹잇감을 찾는 상어처럼 매장을 배회하던 점원이 다가오자 병찬은 자연스럽게 딴청을 피우며 자리를 떴다. 마치 덩그러니 남은 종수가 손님인 격이 되었다. 한국말이 유창한 점원을 뿌리치지 못해 종수는 이 가방은 잘도 팔려나가서 하와이 전체에서 라스트 원이고 저 가방은 이번 시즌에 리뉴얼이 되었고 하는 친절한 설교에 붙잡혔다. 박병찬은 멀찍이 서서 난간에 기대고 일 층을 구경하고 있었다. 밉살스럽기 짝이 없었다. 종수가 넋이 다 나갈 즈음에야 키들거리며 다가오길래, 무르팍으로 허벅지를 퍽 때렸다.
“뭐가 좋대?”
“안 들었어. 네 선물 사는데 내가 왜 설명을 들어야 되는데?”
“그럼 네가 하나 골라 봐. 여자들은 무슨 가방 좋아할까?”
“내가 어떻게 알아.”
“연애 해 봤어, 최종수?”
“그럴 시간 있었으면 연습이나 더 했지.”
“그래? 형은 몇 번 해 봤는데.”
“너 그 말 하고 싶어서 물어본 거지.”
“그렇게 들리는구나. 고의는 아니야.”
“여기서 연애 해 본 건 너니까 네가 고르면 되겠네. 나한테 따지지 말고.”
“그런가? 그런데 아무리 해도 모르겠더라. 좋아하는 사람한텐 뭘 줘야 하는지⋯⋯.”
코치를 나와 몇몇 매장을 더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티격태격하느라 정작 가방에는 제대로 눈길도 줄 겨를이 없었다. 복도 끝의 매장 이름을 뭐라고 읽는 게 맞는지, 훌라인지 펄라인지 풀라인지로 대립한 게 마지막 논쟁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못 산 것을 깨닫고 종수는 적당히 고급스럽고 무난해 보이는 갈색 크로스백을 가리켰다. 그랬더니 너무 흔해서 싫다고 했다. 그 옆에 거는 또 너무 튀어서 싫고, 그 옆은 너무 노티가 나고 그 옆은 또 너무 영하다나. 이 허튼짓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겠다는 일념으로 종수가 “그냥 아무거나 처 골라, 내가 사 줄 테니까”를 제안했으나 어머니 가방은 꼭 자기 돈으로 사야 한다고 고집불통이었다. 천하대효자 나셨다. 그렇게 해서 진짜로 아무것도 못 샀다.
빈손으로 털레털레 나온 병찬은 “돌아가는 길에 면세점 있겠지 뭐”하고 종수가 기가 차서 말문이 다 막히는 한 마디로 방금의 시간 낭비를 일축하더니, 실패에 굴하지 않고 또 한 층을 힘차게 올라갔다. 번쩍번쩍한 잡화상점이 꼭대기층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촌스럽고 조악한 물건들 투성이였다. 무슨 잡다한 물건이든 거기다 알록달록한 난초와 해변, 서핑보드 따위를 좀 그려 넣으면 하와이의 특별한 마법이 입혀진 기념품으로 둔갑하는 걸 종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벽장 가득한 잡동사니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감탄하고 앉았는 박병찬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 갔다. 랍스터가 양 집게발을 펼치고 있는 위스키 글래스를 그렇게 재밌어하며 종수의 눈앞에 들이밀 일인가? 도대체 눈도 안 내리는 하와이 섬들을 축소해 삐뚤빼뚤 초록색을 칠해 넣은 글리터 스노우볼이 웬 말이냐고. 테를 따라 작은 돌고래들이 점프하고 있는 선글라스를 꼭 써 봐야 되나? 게다가 종수한테 씌우려고 들었다. 종수가 질색하며 뒷걸음질 치니 배를 잡고 웃었다.
종수의 뒤통수가 벽장에 툭 부딪혔다. 벽장이 위험하게 흔들거렸다. 자연재해의 전조처럼 불길한 우르릉 소리에 둘 다 웃음이 뚝 멎었다. 고정이 잘 안 되어 있었던 물건 하나가 가장 높은 선반에서 굴러떨어지는 걸로 산사태는 싱겁게 끝이 났다. 병찬이 홀린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운명이다 이건.”
종수의 어깨에 맞고 떨어진 농구공이 데굴데굴 병찬의 발치로 굴러갔다. 농구공으로서는 엉망이었는데, 오렌지 비슷한 브라운에 솔기가 검은색이어야 한다는 FIBA 규정 따위는 완벽하게 무시해서 어떤 공식 경기에도 쓸 수 없는 공이었다. 하와이 기념품답게 쾌청한 파란색에 선명한 노란색 히비스커스 꽃으로 뒤덮인 공이 너무 뻔뻔해서 종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걸 농구공을 만난 기쁨으로 해석했는지, 그 객기 넘치는 공을 집어든 병찬이 장난스러운 낯을 했다.
“자, 받아! 방심하면 안 되지.”
가볍고 빠르게 날아오는 체스트 패스. 미리 읽지는 못했지만 NCAA 디비전 I까지 진출한 선수의 반사신경이 그걸 못 받을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얼마든지 받아서 더 빠르게 되던지고도 남았다. 하지만 종수는 공이 돌진해 오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공은 종수의 심장께에 맞고 생긴 것만큼이나 엉뚱하게 튀어서, 그것까지 종수가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랍스터 위스키 글래스를 박살냈다. 와장창 영롱한 파열음과 함께 박병찬의 낯에 당혹감이 퍼졌다. 그래서 병찬과 조우하고서 처음으로, 종수의 마음에는 만족감이 퍼져나갔다.
주인이 달려와 억양이 강한 영어로 성질을 냈다. 뒷목을 긁적이는 병찬은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냥 조용히 시킬 요량으로 종수는 마이 어폴로지스 서, 쏘리 포 더 트러블을 주워섬기며 끼어들었다. 이 정도 사고를 수습할 현금은 넉넉히 챙겨 왔다. 그러나 병찬은 한사코 자기가 일으킨 사고라며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그 희한한 공까지 같이 덤터기를 쓰고 지불했다.
공을 옆구리에 끼고 매장을 나오는 병찬의 눈초리가 가늘었다. 화나 보이는 게 예정에 없던 재정적 출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야. 그걸 왜 안 받아?”
“이제 농구공에는 손도 안 댈 거야.”
“왜?”
결심이 흔들릴까 봐. 종수는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다. 병찬도 추궁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아는 눈치가 역력했다. 대신 애처롭게 들리는 한숨을 쉬고,
“봐, 종수야. 형은 이제 거지가 되었어.”
종수의 어깨를 잡고 아케이드 반대편 매장을 향해 돌려세웠다. 자꾸 몸을 닿게 하는 게 병찬답지 않게 느껴졌다. 평소의 병찬이 어떤지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짓은 좀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위로의 의미로 선물을 사 줘야겠지?”
“미쳤냐? 내가 왜.”
“오키. 그럼 계속 이 남방 입고 다녀야겠다. 내일도 모레도.”
“어제부터 느끼는 건데.”
“응.”
“너는 보통 또라이가 아니야.”
“내가? 글쎄, 보통인데.”
“조형고 애들도 너 이런 놈인 거 아냐?”
“갑자기 조형고? 나 대학생 된 지 한참이야. 아직 버전 업데이트가 덜 됐구나. 오, 곰돌이 귀엽다.”
폴로 매장 입구에는 데님 캡모자를 쓰고 계절에 안 맞는 니트를 입은 테디베어가 종수만한 키로 서 있었다. 병찬이 머리를 쓱 어루만지고 들어갔다.
“너도 하나 골라. 종수 네 건 형이 사 줄게.”
“옷 안 사.”
“계속 시꺼먼 티셔츠만 입고 있게?”
“뒤질 놈이 뭘 입든지 너한테 뭐가 중요해?”
입 닥치라고 한 말이었는데 박병찬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받아쳤다. 종수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말 한 마디 걸음 하나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게임 속이었다. 종수팀이 한참 전에 가비지 타임에 돌입한 것 같았다.
“기왕 가는 거 예쁘게 입고 가야지. 형아가 종수 수의를 골라 주마.”
고등학교 삼 학년의 쌍용기 대회. 그때 병찬이 다쳐 있지 않았더라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후반을 풀로 뛰었더라면 지금처럼 종수를 농락했을까? 오기가 솟아올랐다. 지고 싶지 않았다. 찍어눌러서 박병찬이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졌다. 종수는 소복처럼 새하얀 포플린 셔츠를 집어드는 것으로 반항했다. 병찬은 곧바로 채 가서 제자리에 놓으며 “어허. 딱 보니까 너는 하얀색은 잘 받지 않아”하고 나무랐다.
“나쯤 되면 모를까.”
“지랄도 가지가지.”
“이런 꿀벌 옐로. 이게 너한테 딱이다. 장도고 때 모습이 눈에 익어서 그런가?”
“꿀벌 옐로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택에 대문짝만하게 써 있잖아. 머스터드라고.”
“종수가 영어는 잘 하는 것 같으니까 형이 한국어를 담당하기로. 이것도 읽어 주라.”
“설마 로열 블루를 못 읽냐?”
“아이고 착하다.”
병찬은 곰인형한테 했듯이 종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도끼눈을 뜨고 확 째려보는데, 아주 운이 없게도 그 타이밍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 버렸다. 아침을 거른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내려서도 먹은 것이 없었다. 박병찬은 어디서 뭘 주워 먹었는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병찬의 눈이 커졌다.
“얼른 계산하고 뭐 먹자. 테라스 쪽에 푸드 코트 있더라.”
종수한테 햇병아리 노랑을 입히겠다는 병찬과 옥신각신하다가 문득 이런 걸로 씨름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에 시들해졌다. 죽기 사흘 전에 노란 옷을 입었든 까만 옷을 입었든 무슨 대수랴. 지켜본 병찬 말고는 아무도 기억 못 할 일이다, 병찬도 이런 사소한 문제는 머리에서 빨리 지우면 좋겠고. 병찬이 계획을 제대로 도와만 준다면 스파이더맨 수트를 입으라건 엘사 드레스를 입으라건 군말 없이 시행할 수 있었다.
새파란 반소매 카라티를 입은 박병찬은 뭐랄까, 그제야 박병찬같이 보였다. 그렇게 자주 보던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더욱. 몇 번 못 본 그 유니폼 차림이 종수의 뇌리에 박혀 있어서.
“옷 고맙다, 종수야. 너도 잘 어울려.”
“먹고 떨어지라고 사 준 거야.”
“그건 밥도 먹고 나서 생각해 볼게.”
푸드 코트에 가려면 일 층으로 돌아와서 분수 옆으로 가로질러야 했다. 정오가 가까워진 몰 안은 점점 북적거리며 활기를 띠어 갔다. 푸드 코트에는 멕시칸부터 퓨전 일식까지 다양한 식당이 모여 있었는데, 종수는 ‘아무거나’라는 말로 병찬에게 메뉴 선정을 일임했고 병찬은 망설임 없이 하와이식 음식을 골랐다. 병찬이 삼 인분을 시키는 바람에 일 점 오 인분씩 올라간 쟁반이 넘치려고 했다.
바다가 가까운 야외 좌석으로 나가 파라솔 아래 멋을 부린 흰색 철제 의자를 빼고 앉는데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둘을 힐끔거렸다. 키가 커서 그러나. 한국에서는 익숙한 시선이었지만 미국에 온 뒤로는 많이 줄어들었는데. 그러다가 종수는 깨달았다. 똑같은 디자인의 카라티를 파랑노랑 입고 마주앉아 식사하려는 모습. 아, 커플티인 줄 알겠구나⋯⋯. 종수는 그냥 지금 죽고 싶어졌다. 병찬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 양손을 재빠르게 싹싹 비볐다.
“오예. 하와이안 브런치.”
병찬의 선택은 스팸 무스비였다. 여행 와서 먹기엔 단순한 감은 있지만 실패도 없는 메뉴였다. 겉면이 바삭해지게 구운 스팸을 흰밥에 올리고 김을 두른 클래식 무스비, 아보카도를 추가한 것, 그리고 ‘로코모코’ 무스비. 스팸 대신 버거 패티와 반숙 프라이, 그레이비 소스를 얹은 것이다. 세트에 딸려 나오는 탄산음료 두 잔은 메론 소다와 라임 환타였다. 스팸통은 감자튀김을 담는 용기로 야무지게 재활용되어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병찬은 클래식 무스비를 절반 베어물었다.
종수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돌아다닐 때만 해도 허기를 거의 못 느꼈는데 단것이 들어가니 눈이 반짝 뜨였다. 텅 비어 있던 뱃속이 요동치면서 당장 음식을 밀어넣으라고 요구해 왔다. 자각했을 때는 반쯤 걸신들린 듯이 무스비를 해치우고 있었고, 맞은편에서 박병찬도 그러고 있었다.
“스팸 먹으니까 어렸을 때 생각 난다.”
“그게 뭔 생각인데.”
“나 별명이 밥반찬이었어. 유치원 때.”
병찬이 집어든 스팸무스비의 김이 도르르 풀려서 밥발이 흩어졌다. 앗. 병찬은 스팸을 먼저 욱여넣더니 입안 가득 쌀밥을 우물거렸다. 태연한 표정으로 태평한 소리를 해 대니 얘가 하와이에 왜 왔는지 기억은 하나 의심스러웠다. 쟁반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에야 위장이 뒤틀리던 허기가 가셨다. 비로소 대화로 돌아갈 여유가 생겼다.
“새삼스럽게 근황 얘기 같은 것도 좀 우스운데 안 할 수도 없다, 그치?”
“⋯⋯.”
“무슨 얘기부터 해야 되나. 너 뭐 하러 왔는지는 알고. 내가 대학생이란 것도 말했고.”
“어디 갔는데.”
“준향대.”
“네가?”
“어. 대박이지? 형이 해냈다는 거 아니냐.”
“왜 주익대 안 갔어?”
“어? 야. 너는 무슨, 주익대가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아니, 됐다. 이건 내 잘못이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내가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네.”
“그래서 왜 주익대 안 갔냐고.”
“뽑아 줘야 가지.”
“너 그래도 고등학교 때,”
하마터면 ‘잘 했잖아’가 나올 뻔했다. 병찬을 칭찬해 주자니 입술 앞에 막 같은 것이 불쑥 팽팽하게 생겨나 가로막았다. 농구에 대한 거라기보단 듣기 좋은 소리라곤 아무것도 해 주기 싫었다, 뭐가 됐든. 무슨 속셈인지 모를 놈한테. 병찬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잘 했다고? 응, 나도 알아. 실력보다는 무릎이 문제지.”
“⋯⋯아직도야?”
“완치는 안 된대.”
“⋯⋯.”
“데리고 사는 거지. 이제는.”
남의 일처럼 무심한 투였다. 무심을 가장하는 건지 정말로 평화에 이르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려고 들기보다는 그저 관심을 끄고 싶었다. 지금은 남과 새로이 연결될 때가 아니라 이미 연결된 선도 다 끊어낼 때였다.
병찬이 헤쳐진 무스비를 제대로 세지 못하고 밥만 퍼먹었기 때문에 짜디짠 스팸이 두어 조각 남았다. 굵은 소금에 버무린 감자튀김도 못지않게 짰다. 병찬이 하나 남은 감자튀김에 케첩을 잔뜩 찍어 주었다.
“자, 네가 끝내라.”
가만 있으면 아주 먹여 주려고 들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손으로 받았다. 바닷물을 잔뜩 삼킨 듯 농축된 짠맛에 이어 침이 고이는 신맛이 났다. 토마토에서 유래한 척 백설탕을 들이부은 케첩의 단맛도. 종수의 입안에서 기본맛들이 혀에 잽과 훅을 날리며 폭동에 가까운 난타전이 벌어졌다. 배가 차고 나서 보니 요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음식 맛을 곱씹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병찬을 보며 종수는 멍하니 생각했다. 생이 끝날 때까지 미각 따위에 재차 관심 둘 일이 있겠나 싶었더니 병찬이 원흉이 되었다.
병찬의 등 뒤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병찬의 곧은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었다. 저러다 다 뽑혀서 날아가는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세차게 흩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고하고 새침하게 앉아 있는 요염한 자태가 가느다란 붓 하나로 그린 선처럼 보였다. 무해한 얼굴로 무슨 별난 꾀를 품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무슨 황당무계한 짓에 종수를 끌어들이려 할지. 어디 맘대로 해 봐. 그래봐야 내일부터 딱 사흘이야. 그만큼만 어울려 주는 척하면 끝이야. 자포자기로 생각했지만, 그랬더니 다시 용기가 샘솟았다. 병찬에게 얼마든지 맞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어떤 기상천외한 주문이 쇄도할 것인가. 얼마든지 휘젓고 주물럭거려 보라지. 다 헛되게 해 줄 테니까.
다음날은 아침부터 노친네 같은 요청이 들어왔다. 병찬은 물의 천국 하와이에도 있을 거라고 짐작도 못 한 액티비티를 제안했다.
“등산 가자.”
등산이 왜 안 좋은 생각인지 수백 개의 이유를 조목조목 다투며 버티느니 순순히 따라나서는 게 차라리 시간과 기운을 절약하리라는 것쯤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병찬은 허리에 작은 가방을 매고 어제 갔던 길로 돌아오면서 ABC 스토어에 다시 들러 산 생수를 집어넣었다. 유리병이 무거워 보였지만 대신 들어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진입로는 버스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졌다. 하와이까지 와서 굳이 찾아올 필요가 있나 싶도록 동네 산책로처럼 특징 없는 산길 입구가 멀리 보였다. 안내소 직원이 검표를 하러 나와 있었다. 둘 앞에 선 관광객들에게 직원이 영어로 뭐라고 설명했다. 병찬은 종수가 전용 통역사라도 되는 듯 옆구리를 쿡 찔렀다. 번역 안 하고 뭐 하냐는 투로.
“예약해야 올라간대.”
“아, 그래? 안 했는데.”
병찬이 제멋대로 끌고 온 길이 막다른 골목을 만난 게 기꺼워서 종수는 비죽 웃었다. 이 낭패는 병찬이 알아서 감당하게 두고 종수는 자유의 하루를 누릴 수 있으리라. 할 거라고는 ‘혼자 있기’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병찬은 종수한테 비켜 보라는 식으로 손짓하더니, 팔을 크게 허우적거리면서 안내원에게 서투른 정도를 넘어 아예 못 하는 영어로 소통을 시도했다. 위 원트 업. 자신을 가리키고, 미. 종수를 가리키고, 힘 투. 손으로 입구를 가리키며, 플리즈. 순 팔로 말하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안내원은 허망하도록 쉽게 “다음엔 예약하고 오세요”하며 들여보내 주었다. 병찬은 “베리 굿! 땡큐!”를 힘차게 외쳤고, 종수는 믿기지 않아 눈을 끔벅거렸다.
“야 뭐하냐 최종수. 처지지 말고 따라와라.”
쟤는 규칙이 우습나? 예약을 괜히 받겠냐고.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말지. 아주 제멋대로다.
“뜬금없이 뭔 등산을 하재.”
“공기도 맑고 좋잖아.”
“늙은이들이나 좋아하지.”
“그래 형 늙었다.”
아무래도 경삿길을 걷는 건 숨이 찼다. 게다가 얼른 정상을 찍고 내려와서 이 바보짓을 끝내려는 종수가 경보 수준으로 빠르게 걷고 있으니 더했다. 입구의 평범함과 달리 하와이의 개성이 녹아 있는 화산길이 분화구 가장자리로 굽이굽이 돌아치며 분지를 감아 올라갔다. 타원형 분지에는 검붉은 거목이 잔디와 갈대 위로 드문드문 서 있었다. 마녀의 머리칼처럼 구불구불 자라난 가지를 보면 필시 누군가 목을 맸을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밤이 가장 깊게 무르익었을 때 홀로 찾았더라면 여기가 종수의 마지막 간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대낮이었고 길동무가 함께 걷고 있었다. 가쁜 숨을 숨기며.
문득 박병찬에게 정말로 궁금한 것은 왜 등산을 하고 싶은지 따위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엄습해 왔다. 그걸 왜 종수랑 하고 싶냐는 거였다. 종수 자신이 보기에도 종수는 유쾌한 동행자가 못 되었다. 숙소에 버려 놓고 혼자 놀러 다니거나 애초에 이런 여행에 안 나섰더라면 서로가 훨씬 편했을 텐데. 왜 번거로운 짓을 일삼고 있을까.
반 걸음 앞서 걷던 병찬이 종수의 생각을 읽고 반박하려는 듯이 우뚝 멈추는 바람에 종수는 움찔했다. 점차 좁아지던 길은 노란 칠이 벗겨져 가는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좁은 개방형 문을 통해 컴컴한 터널에 잡아먹히듯이 들어가는 계단이었다. 병찬은 계단에 발을 얹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기다리는 짧은 시간조차 답답했다. 애초에 병찬의 허튼짓에 휘말려서 여기까지 온 거니 종수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목이 말랐다. 병찬에게 물을 나눠 달라고 하기는 싫어서 종수는 대신 신경질을 벌컥 냈다.
“뭐해? 빨리 올라가.”
“어, 그래야지.”
병찬은 느릿느릿 단차 높은 계단에 발을 얹었다. 비탈길을 걸어올라올 때는 산들바람이 내내 불어 그나마 땀을 식혀 주었지만 계단 오르기는 강도가 달랐다. 덥고 머리로 열이 몰렸다. 계단을 다 올라 비좁은 동굴에 들어서니 바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열이 갇히는 구조인지 공기가 더더욱 뜨거워져 갔다.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피부를 타고 올랐다. 꾸준히 올라가며 태양과 가까워져서 그런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숨이 막혔다.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둠 속에서는 갈수록 가팔라지는 계단의 파이프 난간을 붙잡고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밝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두 눈이 영영 잊어버린 것만 같아질 즈음이었다. 앞서가는 병찬의 목소리가 둥글게 깎인 돌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여기 왜 동굴을 팠는지 알아?”
“몰라.”
“2차 대전 때 벙커로 쓰였대.”
“어디서 봤어? 너 영어 존나 못하잖아.”
“오기 전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별 게 다 있네 블로그는.”
“이런 동굴은 말야, 별로 숨어 있기 좋은 곳 같진 않다.”
“내 말이. 존나 지옥 같아.”
“오, 동의도 해 줄 줄 아네.”
또 쓸데없이 부산을 떠네, 퉁명을 놓으려고 입을 연 순간 신선한 공기가 한 줄기 불어왔다. 낭떠러지 길처럼 곧던 계단이 나선형으로 감기며 점차 빛이 흘러들어오더니 벙커를 나가자마자 사방이 트인 풍경이 갑자기 나타났다. 오아후 섬의 전경이 예고 없이 압도적인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녹음에 덮인 구릉이 넘실거리며 깔리는 너머로 와이키키 해변이 활기찬 도시를 품고 있었다. 반대쪽으로는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끝없이 지붕을 맞댄 주택가 너머로 하와이 제도를 이루는 다른 섬들이 햇빛을 막아주는 모자처럼 하얀 구름을 이었다. 눈부시게 쾌청한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도 상쾌한 수풀 내음이 배어 있었다. 하와이에 온 이래 처음으로 바다의 짠내가 느껴지지 않는 공기였다.
전망대에는 벤치가 여러 개 있었는데, 가족 단위로 온 여행객들이 이미 대부분을 차지했다. 빈 곳을 하나 발견한 병찬이 잽싸게 앉으며 아이고 신음 소리를 냈다. 종수는 혀를 쯧쯧 차며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지금 오길 잘했네.”
“그럼 언제 와.”
“일출 보러 와도 좋다더라. 그러려면 새벽에 나와야 된다는데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서 너무 어두웠을 듯.”
이 새끼 조사를 얼마나 한 거지? 아주 놀 생각이 만만이었구나. 병찬이 빤히 종수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앞머리가 흩어져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가 반짝이며 드러났다.
“종수야, 너도 뭐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봐. 형만 열심히 다 찾아보고 알아보고.”
“⋯⋯다이아몬드 헤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
“다이아 머리.”
“아니 멍청아.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아냐고.”
“음⋯⋯. 누군가가 돌머리였어서?”
“19세기에 영국 선원들이 여기 분화구에서 반짝거리는 돌을 보고 다이아몬드로 착각했대.”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니잖아.”
“영국 선원들이 돌머리였다니까?”
“말이 안 통한다 너는.”
“어디서 봤는데? 너도 블로그?”
“입구 안내판에 영어로 적혀 있었어.”
그걸 읽으며 종수는 그 선원들에 자신이 겹쳐 보여 자조했다. 농구하는 자신이, 아니, 그보다 농구 그 자체가 보석처럼 귀한 광채를 뿜어낸다고 착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종수가 기억하는 거의 평생인 것 같기도 하고 찰나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농구를 싫어했거나 무관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먼 옛날에 이미 지쳤던 것 같기도. 농구공을 처음 잡던 순간부터. 농구에 대한 어떤 것도 명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병찬의 어깨 너머로 뻗어가는 지면은 너무 멀어서 길 위의 사람 하나하나는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올리면 가끔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이 새처럼 지나가다가 사라졌다.
“영어 잘 해서 좋겠다.”
“무슨 소용이야. 농구를 잘 해야지.”
“농구도 너 정도면, 뭐.”
“뭐 잘못 먹었냐?”
“너는 애가 진짜 칭찬해 줘도 꼭.”
“꼭 ‘형만큼은 아니지만’ 같은 소리 하던 새끼가.”
“아아, 하하.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병찬은 말을 잇기를 피하려는 듯 물을 꺼내 마시고 종수에게 내밀었다. 물맛이 무척 달았다. 둘이서 한 병으로 나눠 마시려니 갈증이 미처 다 해소가 안 되어 한 모금이 아쉬웠다.
“글쎄, 나도 요즘은. 마음대로 안 되네.”
“뭐가. 무릎 때문에?”
“아무래도.”
“너 사 학년이지.”
“응.”
“올해 안 나가면 되잖아.”
“하⋯⋯.”
“대학 더 다니면서 기회 보면 되지.”
“드래프트가 문제가 아냐.”
“왜? 준향대에선 그나마 네가 봐줄 만할 거 아냐.”
“지금 학교 주전도 떨어졌다고.”
“네가?”
“지난 달에는 경기 한 번도 못 나갔어.”
“왜?”
“왜겠냐? 병신 새끼니까지.”
박병찬은 턱을 괴고 무릎 아래 허벅지에 팔꿈치를 기댔다. 생각에 잠기는 눈빛이 아득해졌다. 신발코가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을 흙바닥에 슥슥 그렸다. 뒤축이 닳은 때 탄 흰색 농구화였다. 농구화란 코트 위에서 순식간에 마모된 다음 일상용으로 전락했다가 신발장에서 탈락해서 버려지는 것까지가 생애 주기였다.
“농구는 여기까지만 하고 다른 길을 찾을 때가 됐는지도 모르지. 이번엔 진짜로⋯⋯.”
병찬의 두 무릎이 반바지 아래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한쪽에만 살이 죽죽 부르튼 흉터가 나 있었다. 몸이건 마음이건 모든 부분이 고르게 자라는 경우란 원래부터 없다. 한 구석만 맹렬하게 발달하는 바람에 나머지도 거기에 발 맞추려다 보면 가랑이가 찢어져서 고꾸라지는 것이다.
“종수야. 넌 농구 안 하면 뭐 할래?”
“죽을래.”
“아 그랬지 참.”
“까먹으면 너도 죽인다. 이제 모레야.”
“응응 미안.”
대화는 짧게 끊겼다. 그리고 종수는 병찬이 기대하고 있을 질문을 순순히 해 주었다. 이런 류의 질문은 대개 돌려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박병찬 넌 농구 안하면 뭐 할 건데.”
병찬은 종수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도록 침묵했다. 체감으로는 한 쿼터에 필적하도록 긴 정적이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게. 난 농구 안 하는 내가 상상이 안 간다.”
고개를 든 병찬이 무구한 눈빛으로 물었다.
“종수야. 형아도 다 때려칠까?”
종수는 괜히 뒤로 물러섰다.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종수는 농구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아예 목숨을 끊어버리려 하고 있으면서, 박병찬은 죽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른 길을 찾겠다는데 선선히 그러라고, 건투를 빈다고, 사람 좋은 말이 안 나왔다. 이건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해 오는 박병찬 쪽이 나쁜 거였다. 종수보다 두 해를 더 사는 동안 배운 거라곤 심술이랑 사람 난처하게 하는 법이 다인 게 분명했다.
마침 수줍게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관광객이 종수를 난관에서 건져 주었다. 가족과 함께 사진 한 장 찍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희한하게 이런 순간만 되면 매몰차지 못한 종수는 군말 없이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묵묵히 여러 번 셔터를 누르는 종수를 병찬이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기에 신경질이 났다. 종수가 찍은 사진을 돌려보며 만족한 관광객은 둘의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종수가 필요 없다고 하려는데 병찬이 얼른 핸드폰을 건넸다. 종수는 최대한 병찬한테서 멀찍이 걸터앉았다. 병찬이 어깨를 휘감고 브이를 해 와서 소용이 없었다. 관광객은 병찬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배터리 충전 좀 하셔야겠어요.”
땀이 다 식을 때까지 둘은 앉은 위치에서 말없이 바다와 하늘을 내다보았다. 망망한 쪽빛 수면에서 거품의 띠가 하얗게 부서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도는 해변에서 수평으로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사장에서 규칙 없이 부서지는 포말과 달리 바다에는 패턴이 있었다. 파도는 우연히가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서 밭에 파 놓은 이랑처럼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것이었다. 둘은 떠 가는 구름이 고양이를 닮았네 펭귄을 닮았네 유치한 놀이를 좀 하다가 시들해져서 그냥 앉아 있었다. 종수는 눈을 감아 보았다. 최정상을 넘기고 땅으로 다가오는 햇빛이 점점 강해지며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거리는 주홍빛으로 눈 안을 온통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이 위에서 보니까 아무 생각도 없어지지?”
“그런가.”
“그래서 어른들이 산을 좋아하나 봐.”
“그냥 지루한데. 할 것도 없고.”
“흠. 솔직히 나도 그래.”
내려갈 때 병찬은 엉거주춤하며 더 느려졌다. 계단을 기어 내려가는 게 어찌나 느린지 뒤에서 엉덩이를 걷어차 떨어뜨려서 하산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월아 네월아 꾸물거리는 꼴도 왠지 한 번쯤은 봐 넘겨도 될 듯했다. 무르익은 오후가 내려오는 산의 풍경이 종합적으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걷어차는 건 자비롭게 유예해 주었다. 갈대밭 속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뒷머리를 보면서 종수는 난간을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어제의 쇼핑도 그렇고 오늘의 산행도 그렇고, 병찬은 대단할 정도로 종수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정말 저 좋을 대로 일정에 끌고 다녔다. 물론 뭘 제안해도 비토할 심산이었지만. 그걸 아니까 이러는 거겠지. 저녁 일정도 미리 알았다면 종수는 절대 덥석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수는 원래 번잡한 장소를 즐기지 않았으니까. 시끄럽고 번쩍번쩍한데다 호객행위까지 심한 곳은 최악에 최악이 겹친 격이었다. 와이키키 해변 쪽으로 걸어가다가 병찬은 비좁은 골목길 여러 개 중에서도 제일 왁자지껄한 골목으로 틀었다. 입구부터 흥겨운 음악이 들썩들썩 흘러나왔다. 병찬이 자랑스럽게 알려 왔다.
“여기 야시장은 아는 사람만 안대.”
“모르고 싶어.”
“저거 봐라, 최종수. 꼭 크리스마스 같다.”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지.”
병찬이 대뜸 가리킨 건 옆에 세워진 주차 건물 벽이었다. 빨주노초 작은 전구들이 열매처럼 줄줄이 달려 골목을 은은하고 알록달록하게 밝혔다. 8월이 아니라 초여름이었고 크리스마스도 아니었지만 영화 제목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온갖 기념품을 가판대에 늘어놓은 상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훌렁훌렁 품이 넓은 원피스를 입고서 박수를 짝짝 쳐 댔다. 상점의 형태도 건물에 이식된 부스부터 트럭을 개조한 것까지 각양각색이었고, 파는 물건도 너무나 다양해서 만물상을 골목 하나에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병찬은 매대마다 멈추며 한눈을 팔았다. 어느 가게엔 ‘알로하’라고 조각칼로 새긴 나무 팻말과 하와이 자동차 번호판들. 냉장고 자석을 단 훌라춤 추는 원주민 모양의 맥주 따개. 스프레이 페인팅 도색이 하도 어설퍼서 물에 뜨기나 할지 전반적인 기능까지 의심하게 하는 서핑 보드가 차양에 자랑스레 줄지어 걸려 있었다. 종수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자 상인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여름의 파도에도 좋고 겨울의 파도에도 좋답니다!”
주먹에 쥐고만 있어도 혈액순환이 좋아지며 기의 흐름이 개선되는 신묘한 효과가 있다는 돌. 하와이에서 채취한 암석을 깎아 만들었다는 높이 치솟는 파도 조각상. 화려한 꽃과 야자수가 원색을 바탕으로 크게 그려진 셔츠. 전부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박병찬이 입고 등장한 그 흉물보다는 나았다. 영롱한 유리구슬을 여러 겹으로 주렁주렁 엮은 목걸이. 알파벳을 적은 흰 조약돌을 꿰어 만든 팔찌들. 원더풀 언더워터, 리브 인 더 모먼트, 아이 러브 하와이.
한국말을 곧잘 하는 상인이 병찬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런다고 잡혀서 들어 주는 게 바보 같아 보였다. 제법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하와이 특산품! 다른 데 없어, 하며 능청스럽게 제시하는 말이 압권이었다. 현금으로 해. 싸다 싸. 세일! 세일! 병찬이 종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최종수, 달러 없냐? 환전을 거의 안 해 와서.”
엉겁결에 지갑을 꺼내다가 종수는 멈칫했다. 이 새끼 봐. 아무렇지 않게 삥을 뜯네.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만 자신이 죽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다. 종수는 지갑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박으며 앙칼지게 항변했다.
“내가 너 간식 셔틀이냐? 그냥 처먹질 마.”
병찬이 입을 삐죽이며 상인에게 한국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상인은 고급 청해까지는 안 되어 기대에 부푼 미소만 짓고 있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친구가 소상공인을 돕지 않겠다네요. 얘가 원래 좀 주변머리도 없고 분별이 원활하게 되지가 못하고, 아직 애새끼라 그러니 너그러이 양해 부탁⋯⋯.”
“에이 씨 더러워서 산다, 더러워서⋯⋯.”
견과류 초콜릿 상자를 옆구리에 낀 병찬은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늑장을 부리는 걸음으로 시장을 마저 돌며, 살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만지작대고 감탄했다. 우쿨렐레 줄을 튕기는 호작질을 하며 “이것도 살까?” 종수한테 묻지를 않나. 칠 줄 아냐고 물으니 가관인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처음 쳐 본 것치곤 괜찮았지?” 입만 산 새끼. 형아가 버릇을 고쳐 주겠다 해 놓고 육 분만에 코트를 내려갈 때부터 알아봤다.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너는 태어날 때부터 농구 할 줄 알았냐? 형이 알고 보니 우쿨렐레에 타고난 재능이 있을 수도 있잖아.”
머리에 뭐가 들어서 저렇게 지껄이는 걸까? 저 뒤통수 속에 무슨 뜬구름 같은 생각이 켜켜이 접혀 있냐고. 박병찬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건 박병찬밖에 없을 것이므로 종수는 작은 박병찬들이 박병찬의 뇌주름 사이사이 몸을 포갠 양상을 상상했다. 연금술로 유리병 속에서 빚어낸 요정 같은 박병찬들이 손끝으로 뇌를 꾹꾹 찌르며 속삭이는 것이다. 다음엔 최종수를 어떻게 곯려 주면 재밌을까? 이번엔 어떤 파도를 타 볼까?
“근데 너.”
“형한테 말끝마다 너 너 거린다. 장도고에선 아무도 뭐라고 안 하디?”
“뭔 상관인데.”
“아니면 미국식인 거야 이제? 전부 ‘유’인 거야?”
“너, 여기 왜 온 거야?”
“나? 갑자기?”
“왜 멀리까지 와서 이딴 정신 나간 여행을 하냐고.”
“음⋯⋯, 야시장 보려고.”
병찬은 한없이 진지하게, 거의 경건하게 대답했다. 종수가 눈을 부라리니 가소롭다는 듯이 히죽 웃기나 했다.
“동대문이나 처 가지 누가 하와이를 야시장 보러 와?”
“종수 말버릇부터 고쳐야겠네. 형한테 자꾸 언어폭력을 자행하면 아니된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얘 좀 봐. 대답 잘 해줄 것 같이 생겼지?”
야시장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별천지였다. 동물원 우리처럼 큰 새장에 횃대에 한쪽 다리를 접고 앉은 큰 앵무새가 들어 있었다. 끼룩끼룩 소리만 내던 새는 병찬이 바싹 고개를 들이밀자 가까이 날아오며 굿 이브닝 하고 노래했다. 병찬은 신이 나서 자기 이름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작은 해바라기 씨 봉지를 옆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손바닥에 올린 씨앗을 쪼아먹으며 병찬과 알콩달콩하는 새를 보던 종수도 질세라 끼어들어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쳤다. 봉지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앵무는 어설픈 발음이나마 이국의 이름 두 개를 배웠다. 병찬이 앵무새에게 열성적으로 물었다. 종수도 같은 타이밍에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얘랑 나 중에 누가 더 농구 잘 하게?”
종수는 얼른 검지를 들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앵무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계처럼 되풀이했다.
“뼝쨩.”
종수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이런 새대가리가. 새대가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보니까 팁 받는 모자가 놓여 있었다. 뭘 잘했다고 팁을 받겠대? 새를 향해 눈을 흘긴 종수가 걸음을 재우쳤다. 병찬이 처연한 눈으로 종수를 바라보며 또 돈을 뜯으려고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하는 수 없이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팁으로 쏟아부은 병찬은 다음 가판대에서 과일 펀치를 샀다. 물기가 송골송골 맺힌 얼음 컵에 숭덩숭덩 자른 파파야와 근처 섬에서 재배했다는 슈가 애플이 얹혀 있었다. 과육이 감미롭고 녹진한 단내를 풍겼다.
“와. 이런 과일은 처음 먹어 본다. 넌 미국에서 먹어 봤지?”
“아니. 바나나만 먹어서.”
“우우. 재미없다 최종수.”
돈이 없다더니 아까는 그냥 종수 돈이 쓰고 싶었던 건지, 종수 너도 음료 한 잔 고르라며 선심을 쓰길래 야자열매 꼭지를 도려내고 빨대를 꽂은 코코넛 워터를 골랐다. 양손으로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번거로운데다 애매한 신맛이 나 영 실패한 선택이었다. 종수가 실망하는 빛을 본 병찬이 “왜? 얼마나 맛없길래” 하며 한 입 마셔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윽. 진짜 별로다.” 그러면서도 쭉쭉 들이켰다. 본인은 맛으로 먹는 타입이 아니라나. 바꾼 음료를 홀짝거리며 두 잔 모두 바닥을 보일 때까지 돌아다니다 보니 시장길 막바지에 다다랐다. 온갖 키링이 전시된 타공판에는 마이클 조던도 열쇠고리가 되어 달려 있었다. 물범부터 돌고래까지 온갖 동물의 인형이 있었다. 오랑우탄을 가리키며 이거 너 닮았다, 아니거든 너거든, 아니 넌 침팬지다, 넌 아메바다, 지칠 줄 모르는 입씨름이 이어졌다.
길 끝에는 천막 몇 개가 둥글게 모여 있었다. 캐리커처, 타로점,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타임캡슐에 넣으면 삼 년 후 오늘 보내 준다는 우체국, 그리고 헤나 가게. 병찬이 헤나가 재밌겠다며 잡아끌었다. 하와이에 왔다는 흔적을 몸에 새기잔다. 샤워 몇 번 하면 지워지는 게 헤나였지만 그 정도의 앞뒤 불일치는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문신으로 팔을 덮은 주인이 둘을 간이의자에 나란히 앉히고 코팅된 책자를 팔랑팔랑 넘겼다. 병찬은 콧잔등을 찌푸리고 신중하게 도안을 골랐다. 어차피 지워질 그림인데 무엇하러 그렇게 애쓰나. 역시 헛짓거리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그래도 제법 본인의 이미지에 들어맞는 그림을 고르는 데 성공하기는 했다. 날개 달린 헤르메스 모자였다. 그 선택에 만족한 병찬은 대뜸 종수의 것까지 고르겠다고 나섰다.
“이거 봐. 하와이 느낌 나지.”
“목걸이를 팔에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웃긴데.”
“그럼 목걸이 사서 걸래? 형이 쏜다.”
“그린다. 그린다고. 됐냐?”
희고 노란 참파꽃과 보랏빛 서양란을 엮은 목걸이가 잉크 펜으로 손등부터 손목을 휘감으며 간지럽게 그려졌다. 그림 속 꽃잎에서 향기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오른손에 헤나를 받으며 병찬은 출출하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왼손으로 재주도 좋게 아까 산 초콜릿 상자를 뜯었다. 병찬의 손가락 끝에 초콜릿이 녹아 묻었다. 한 조각을 받아 든 종수의 손에도 씁쓰름한 냄새가 배어들었다. 초콜릿은 뜻밖에 와인 같이 향그러웠다. 입안에 남은 과일 주스의 맛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밤이 완연했지만 하와이의 여름은 춥지 않았다. 게다가 천막들 중앙의 작은 광장에는 나무상자에 든 횃불이 놓여 있었다. 마치 가게들이 공유하는 영혼처럼. 장작이 떨어질 즈음 누군가 나와서 기름을 부었다. 일렁이며 타는 불길이 곧게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훈련 때문에 수련회에 늘 빠져서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꼭 캠프파이어 같았다.
손등에 그려지는 헤나에 시선을 두는 병찬의 뺨에는 불꽃의 여러 빛깔이 너울거렸다. 눈동자 속에서 춤추는 주황빛은 마치 황혼 같기도 했고, 대지에 스미는 용암처럼 응축된 열이 느껴졌으며 붉게 물들어 지는 달처럼 구슬프기도 했다.
이튿날은 사형 집행일의 이브였으므로 종수는 병찬이 더 특별한 일정을 준비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침부터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 새벽부터 부슬비가 내려서만은 아니었다. 배를 슬슬 긁으며 거실로 나오는 병찬은 “일찍 일어났네?”하며 움직이는 품새부터가 심상찮았다. 그러고서 화장실 문턱을 넘는 두 걸음을 보자마자, 종수는 알았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한 발을 디디고, 무릎이 움직이는 각도나 바닥을 딛는 힘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음 발을 내딛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느라 미세하게 절름거리는 것을.
통증이 심한데도 태연한 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물론 종수도 같은 선수로서, 매일같이 몸을 혹사하는 사람으로서 구분할 수 있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아파질까 봐 방어적으로 변하는 거였다. 그런 상태가 갈림길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정말 아프게 될 수도 있는 상태. 그러니까 애초에 왜 여길 따라와. 성치도 않은 몸을 왜 끌고 돌아다니는데. 왜 말도 안 하냐고. 멍청이. 머저리 새끼.
화장실에 들어간 병찬은 오늘따라 오래 걸렸다. 종수는 쏟아지는 물소리가 그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처음에는 부아가 치밀었다가, 누구를 향해서인지 불분명한 화가 더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종수는 문을 쾅쾅 두들기고 싶은 충동과 갈등했다.
문이 휙 열리며 머리가 젖은 병찬이 콧노래처럼 “오늘은 훌라댄스 체험이랑 고래 구경 중에 고를래?” 할 때, 종수는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하마터면 얼굴이 부딪힐 뻔했다.
“어우 씨 깜짝아, 위험하게스리. 뒤통수 깨지는 줄 알았네.”
“등산 왜 했어?”
“응? 재밌었잖아. 넌 별로였어?”
“무릎 병신이 산을 왜 올라가!”
“아⋯⋯. 근데 난이도 개껌이던데.”
“구라 까네. 막판에 계단에서 거의 기어갔어 너.”
“계단만 빼면 개껌. 됐지?”
“왜 포기를 안 해.”
“거기서 어떻게 포기해. 거의 정상까지 다 갔는데.”
뭐가 호들갑 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뻔뻔한 낯짝을 보아하니 이러는 게 몹시 익숙해 보였다. 무릎이 위협해 와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폼이 분명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 딱 보니 견적이 나온다. 이 새끼는 이런 쪽으로 프로급이다. 탄식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종수는 한없는 무력감으로 뒤덮였다. 당장 나오는 게, 병찬에게 줄 만한 게 말 몇 마디밖에 없고 그마저도 다 욕설과 원망뿐이었다. 뭘 해도 무릎이 낫는 건 아니었다.
“미친놈.”
“⋯⋯.”
“등신 새끼.”
“⋯⋯.”
“언제부턴데.”
종수는 병찬의 무릎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맞닥뜨린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아팠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병찬의 무릎에서 종수의 뱃속으로 전이된 듯한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계속 괜찮았어 그 전엔.”
“괜찮았던 거 맞아? 너 이것도 구라지.”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냐.”
기지개를 펴고 상체를 뒤틀며 병찬은 긴긴 하품을 했다. 종수가 성질을 내든 말든 한가로워 보여서 더 열을 받았는데, 또 하품 뒤쪽에서야 알았다. 무릎과는 별개로 정말 피곤해 보였다. 수면 부족이 묻어나는 안색이 첫날보다 탁했다. 종수는 병찬이 첫날 했던 것처럼 어깨를 손바닥으로 떠밀어서 소파 쪽으로 보내 앉혔다. 그 와중에도 무릎에 충격이 안 가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훌라춤이랑 고래 중에 뭐가 좋냐니까?”
“이 꼴을 하고 춤 같은 소리가 나오냐?”
“춤 별로면 다른 것도 많아. 저기 내 폰 좀 줘 봐.”
병찬이 일어날까 봐 종수는 순순히 폰을 집어다 주었다. 그랬더니 옳지 말 잘 듣네, 하는 소리나 들으며 머리를 쓱쓱 헤집혔다. 기분이 갈수록 더러워졌다.
“택시로 삼십 분 정도 가면 폴리네시아 문화 체험장 있대. 원주민들이 전쟁에 나설 때 추는 춤이랑 전통 혼례 체험 가능. 아니면 티키 조각상 만드는 목공예 워크샵. 티키가 뭐냐면 하와이식 토템 같은 거래. 아니면 야자수 농장도 있다. 수확한 열매는 집에 가져가게 해 주고 맨발로 나무 타는 게 나름 재밌다는데. 노스 쇼어? 이쪽 가도 되고. 식물원이랑 해양 박물관 있대. 박물관은 좀 노잼인가? 아니면 와이키키 가서 서핑이랑 수영해도 돼. 서핑은 한 번쯤 해 봐야지. 근데 기왕 바다 갈 거면 고래 구경이 제일 좋은 듯. 고래 종류별로 다 보이는 데까지 나가려면 당일치기로는 좀 빠듯하다고는 하는데. 아니면 이올라니 궁전이라고, 오후에 가이드 투어가 있는데⋯⋯.”
병찬은 노트 앱에서 엔터도 안 친 줄글을 불러내 놓고 국어책 읽듯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줄줄 읊었다. 정보의 홍수가 종수의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도주했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고 그저 정신이 다 혼미했다. 이쯤 되니 진지하게 의심스러웠다. 종수의 원활한 죽음은 스쳐 갈 사건에 불과하고 정말 하와이 뽕 뽑을 궁리만 가득해서 온 거라고 믿어질 지경이었다. 종수가 귀를 틀어막든 말든 낭독을 끝까지 마친 병찬이 눈을 들었다.
“이 중에서 뭐 할래?”
종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만 좀 싸돌아다니면 어디가 덧나냐?”
“응. 시간 아까워.”
“네가 말한 거 다 존나 구려.”
“고래 투어가?”
“어.”
“서핑도?”
“어.”
“나무 타는 것도?”
“닥쳐 좀.”
“그럼 그저께 산 공으로 뒷마당에서 농구 할래?”
“싫으니까 제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병찬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장난기와 부드러운 호의를 거두니 차가운 인상이었다. 삽시간에 싸늘해지는 공기가 종수를 당황시켰다.
“왜. 이번에는 쿠크다스 진짜 부서질까 봐?”
숨이 턱 막혔다. 종수는 비스듬히 허공을 노려보았다. 차마 병찬과 눈은 못 마주치겠고, 무릎을 보는 것도 실례 같아서 발코니로 통하는 유리창 너머만 뚫어져라. 물안개가 뿌옇게 끼었던 바깥에는 빗줄기가 굵어져 마른 대기를 적셨다. 솨아 하는 빗소리가 둘 사이의 정적을 메울 정도로 커졌다.
병찬에게 눈을 돌리니 그새 순진하고 말간 낯을 하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시치미를 떼고서. 비겁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떻게 나가.”
종수는 잘못한 아이처럼 약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핑계를 댔다. 궁지에 몰린 종수를 도와주려는 듯이 번개가 거실을 밝혔다. 와이키키 해변 어딘가에 벼락이 내리꽂혔을 것이다. 곧 대지를 뒤흔드는 천둥이 울었다. 아무리 몸 가볍게 밖으로 나돌던 병찬이라도 이런 날씨를 무릅쓰고 나들이를 가기는 쉽지 않았다. 종수 혼자 집에 두지 않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병찬은 처음으로 조금 항복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는 숙소에서 쉬는 것으로 합의에 이르렀다.
아점으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파이브 가이즈에서 베이컨 버거 두 개를 종수가 얼른 사 갖고 왔다. 숙소에 하나밖에 없는 장우산을 쓰고서. 다녀오는 것보다 병찬이 버거 가게까지 같이 간다는 걸 말려서 주저앉히느라 실랑이하는 데 더 오래 걸렸다. 종수는 병찬과 함께 은박 포장을 뜯어서 식탁에 늘어놓았다. 짭조름한 땅콩을 부어 놓고 빵이 습기를 먹어 물렁해진 버거 껍질을 벗길 때쯤 비가 뚝 그쳤다. 하와이엔 소나기가 많다더니 진짜구나. 병찬이 농담하며 웃었다.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서 그런지 아까처럼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아직도 태풍을 몰고 다니네?”
그런 말로 뜬금없이 치고 들어온다. 부끄러워 얼굴에 열이 몰렸다. 종수는 식탁에 수북해진 땅콩 껍질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언제 적 고대 화석 같은 별명을⋯⋯.”
“우린 요즘도 네 얘기 많이 해. 같이 더 뛰었으면 재밌었을 거라고.”
허섭쓰레기가 미국 진출한다고 설치는 꼴이 웃기지도 않더라. 농구 잘 하지도 못하면서. 종수라면 종수에게 그런 말을 했을 텐데. 병찬은 햄버거를 베어 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종수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하는지 아리송한 말을 또 했다.
“우리 같이 뛰어 본 적 한 번도 없다. 그치?”
허기를 면한 병찬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해졌다. 병찬은 안 따라 주는 몸에 더해서 안 따라 주는 머리까지 굳게 버텨냈다. 어떤 의미로는 경탄이 나오도록 고집스러웠고, 어찌 보면 안 잔다고 반항하는 어린애 같았다. 가방에 트럼프 카드를 챙겨 왔으니 원카드라도 하자, 정 할 게 없으면 노가리라도 까야겠다, 나잇값도 못 하고 우겨 대는 모습이. 아무리 저항해 봤자 시차를 거스른 몸이 파업에 들어간 병찬은 말 사이사이 깜박 졸기까지 했다. 이제는 누가 봐도 무리였다. 종수는 병찬을 큰 침실에 밀어 넣었다.
“딱 삼십 분 후에 깨워 줘. 약속한 거다.”
병찬은 다짐을 여러 번 받고서야 누웠다. 입실하던 날에는 잘 세탁되어 햇빛 냄새가 나고 바스락거리던 하얀 침구가 며칠간 식은땀에 젖었다 마른 양 꿉꿉해져 있었다. 환기하려고 창을 여니 습한 흙내음이 끼쳐 왔다. 소나기의 여파로 먼지가 씻겨 내려갔지만 눅눅하고 더웠다. 비가 지나가면 후덥지근한 것이 한국의 장마 같았다.
병찬은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종수의 친애하는 벗 유튜브가 아니라 멜론을 켜더니, 여름의 여행지를 테마로 한 리스트를 찾아 재생했다. “노래를 틀어 놓으면 잠이 잘 오더라고.” 그렇게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병찬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베개 옆에 툭 떨어진 핸드폰은 종수가 주워 협탁에 올려놓았다. 꼼꼼한 수면 위생 관리를 위해 침실은 조용해야 하는 종수로서는 노랫소리가 탐탁지 않았다. 결국은 잠드는 데 실패해서 밤을 새우는 게 일상인 종수도 할 말은 없었지만.
결국 노래를 감상하는 건 오롯이 깨어 있는 종수의 몫으로 남았다. 경쾌한 서프 음악과 달콤한 버블검 팝이 번갈아 나오는 목록에 이름도 공교롭게 ‘하와이’인 한국 밴드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끼어 있었다. 새파란 노래가 자라나 샛노란 홀씨를 흩날리다, 어서 와. 어서 와.
어쩜 우린 아주 먼 길을 돌아, 어느 멋진 날 우연히 만나.
처음부터 이미 정해진 것처럼, 어느 멋진 날 예고도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이 나오는데 정작 우리말이 필요한 쪽은 듣지도 못했다. 새근새근 오르내리는 병찬의 귓바퀴에는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돋아 있었다. 목에서 시원한 로션 냄새가 났다. 향이 익숙하다 하다가, 조금 생각하고 알았다. 하나뿐인 화장실에 있던 남성용 뉴트로지나였다. 금방 코가 적응되어 공기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게 되었다.
몰라 몰라 몰라, 랄라 랄라 랄라.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이 우리를 이끄네.
들을 수 없는 멜로디를 따라 걸어 볼까, 믿거나 말거나 운명이 있다면 당신과⋯⋯.
머리맡에 걸터앉은 종수를 감시하려는 듯 모로 누운 그대로 병찬은 곤한 잠 속으로 끌려가 있었다. 아픈 무릎이 아래로 가 짓눌리는 방향인 게 마음에 걸렸다. 똑바로 좀 누워 봐, 속삭여 보아도 눈꺼풀조차 미동이 없었다. 자는 척 눈만 감은 건지 시험하느라 말을 건 게 무안해지도록 업어가도 모를 것 같았다. 목 아래 팔을 살살 집어넣고 돌려 눕히자 숨소리가 얕아졌다. 종수는 다소 곤란해졌는데, 끼워 넣은 팔을 빼면 확실히 깨울 것 같았고, 그렇다고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비스듬한 자세를 오래 유지할 수도 없었다.
팔베개를 해 준 그대로 종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침대 위로 하나씩 올리고, 이불 위에 누웠다. 시야에 병찬의 얼굴과 머리카락이 가득 들어왔다. 오후로 접어든 햇빛이 비 내음을 말릴수록 코 한 뼘 위에서는 먼지가 춤추며 부유했다.
눈을 감으니 더 단아한 인상이었다. 살결도 고왔다. 새하얀 피부는 아닌데, 따가운 햇볕에는 약한지 뺨이 쓸린 듯한 엷은 분홍빛이었다. 종수는 태양 아래 서면 그을리는 타입이라 작은 차이를 느꼈다. 화상 입을 것 같으면 모자나 사서 쓰지. 무슨 앵무새에 헤나에⋯⋯.
계속해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들릴락 말락 한 숨소리에 귀를 바짝 기울인다. 병찬의 눈가에는 약간의 다크서클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빛의 장난 같기도 하다.
왜 최종수라는 이름의 열대의 불운을 만나러 오기로 했을까? 태풍의 눈이 궁금해서?
병찬의 수척한 기운이 점차 가시고 벽을 흠뻑 물들인 일광이 저무는 노을이 되어 비칠 때까지 종수는 머물러 있었다. 깊이 자는 모습이 마음이 놓였다. 깨면 귀찮게 구니까 그런 거야. 얘가 잘 때가 그나마 평화롭다고. 종수는 스스로에게 말해 보았다. 그러면 뭐하나, 자는 얼굴을 보면 시름이 잊히는 것 같다는 사실은 손바닥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병찬이 좋은 꿈을 꾼다면 종수에게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세상이 시끄럽고 농구가 잘 안 되고 내일 죽을 거라는 사실이 모조리 사소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곁에 다른 사람을 하나 두는구나. 나약해서 그러는 것이다. 혼자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끝까지 눈을 부릅떠야지. 닻을 내릴 항구가 없어도, 아무리 거센 강풍도 피하지 않고 영영 맞서며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배가 되어야⋯⋯.
뒤척이던 병찬이 손을 뻗어 며칠 새 가무잡잡하게 탄 종수의 뺨을 쓰다듬었다. 잠꼬대마저 이상한 사람이었다. 종수는 손길을 물리치지 않았지만 마주잡지도 못했다.
자고 일어난 병찬은 종수를 거느리고 산으로 들로 방방곡곡 놀러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로 돌아갔다. 잠이 덜 깬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성화를 부렸다. 종수가 안 깨워서 늦게 생겼다나.
“이거 일주일에 한 번 뿐이라서 오늘밖에 못 본단 말이야.”
“뭐길래 난린데?”
“시간 없으니까 가면서 가르쳐 줄게.”
차에 태우려는 유괴범 같은 멘트를 던져 놓고는 결국 의지할 게 대중교통밖에 없었다. 병찬은 허둥지둥하면서도 무릎이 아픈 티 없이 걸었고, 종수는 마뜩잖아하며 따라가 트롤리에 올랐다. 이미 이 층은 자리가 꽉 찼고 일 층도 서서 가야 했다. 관광객들의 온갖 세계어에 공통된 흥분과 설렘이 배어났다. 덜컹대는 버스 안 손잡이 하나를 겨우 쟁취해 둘이 나누어 잡고 병찬이 설명했다.
“해 지면 힐튼 호텔 앞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를 한대.”
“겨우 그거 보자고 이 난리를 쳐.”
“너 에버랜드 가면 실컷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알긴 아네.”
“나도 그런가 싶어서 하와이 불꽃놀이는 뭐가 다른지 보려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야자수들이 전부 한 가지인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각양각색이었다. 공항에서 오는 길과 쇼핑센터 쪽 시내와 숙소 주변에 심긴 나무들은 키부터 잎 모양까지 모두 달랐고, 하루의 시간대에 따라서도 다르게 보였다. 버스가 승객들을 우르르 토해낸 길 양옆으로 가지런한 나무들은 파릇파릇한 연둣빛 잎 테두리에 톱니무늬가 촘촘했고, 눈부신 가로등 아래 잎맥이 반투명했다. 자갈과 조약돌이 깔린 길은 튜브를 타고 물장구를 치는 자녀를 부모가 느긋하게 바라보는 호텔 수영장과 투숙객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칵테일을 마시는 데크를 빙 둘러 해변으로 내려갔다. 멀리 수평선에서 푸른색과 다홍색이 섞인 하늘이 연이어져 있었다.
포장도로는 모래사장에 닿아 끝났다. 한 걸음마다 신발에 모래가 들이쳤다. 둘은 번갈아 멈추며 양말을 벗어 들고, 멈추고 신발을 벗어 들고서 맨발을 내디뎠다. 지푸라기 색깔의 모래는 아직 달아올라 있어 족욕을 하는 듯이 따끈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던 병찬이 “여기가 명당인 것 같다”하고 사장 가운데 서서 선포했다. 명당이라고 말하면 명당이 되냐? 그냥 사람 바글바글한 모래밭에 더 좋은 데나 덜 좋은 데가 어디 있다고. 종수는 그만 풋 웃음이 터졌다. 등 뒤에서는 별 다섯 개 고층 호텔들이 바닷가를 굽어보았다. 불이 들어온 창문과 베란다를 차지한 사람들이 난간에 기대고 편하게 관망했다. 병찬이 부러운 눈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런 호텔 방으로 잡지 그랬냐, 종수야. 센스가 없네.”
“진작에 예약 마감이었어.”
“저것도 좀 좋아 보인다.”
병찬이 가리킨 쪽 모래밭에는 어느 일행이 텐트 기둥을 박고 해먹까지 꺼내 걸었다. 수영복 차림의 남녀가 맥주를 따자 병에서 콸콸 거품이 쏟아졌다.
“우리 자리도 불꽃놀이에 집중하긴 꽤 괜찮지?”
병찬이 가방에서 비치타월을 꺼내 바닥에 폈다. 숙소에 있던 걸 챙겨온 타월에 단촐하게 앉아서 노을 구경에 사람 구경을 했다. 불티의 끝자락이 번지는 하늘과 전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인종도 나이도 가지각색인 사람들은 다들 일상의 짐을 벗어던진 듯 밝아 보였다. 수건돌리기를 하는 대학생들도 있고, 두건을 두른 구불구불한 머리를 허리께까지 늘어뜨리고 우쿨렐레를 치는 가수도 있었다. 병찬이 갑자기 “어!”하더니 종수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헐.”
“뭐.”
“저거 그거 같다. 내가 안 산 그거.”
“그거겠냐? 세상에 우쿨렐레가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잘 봐 봐. 색깔이 똑같잖아. 소리 진짜 좋네. 아오 그냥 살 걸.”
“저 사람한테 잘 갔네.”
가수는 감미롭고 쓸쓸한 음색의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하와이에 오죠.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병찬은 한동안 곰곰이 귀를 기울이더니 당연한 권리라는 듯 요청했다.
“가사 좀 번역해 주라.”
“너 빡대가리래.”
“응 그거 너.”
흥겹고도 서글프게 들리는 가락이 계속되었다. 파도는 들렀다가 떠나고는 한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때로는 높고 때로는 낮아지죠. 어리석고 가여운 우리 처지를 용서하기를. 그리고 당신과 내게 사랑 있기를⋯⋯.
구름의 장막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자 음악도 잦아들었다. 저무는 저녁의 어스름 아래 모두 불꽃놀이를 기다렸다. 마치 영화관 같은 잿빛 하늘에 영사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조바심이 더해 갔다. 누군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 둘, 하나. 7시 45분을 삼 초 넘기고 대포를 쏘는 굉음이 났다. 시작 시간을 알고 있었는데도 움찔했다. 요란법석이 고역이어서 종수는 눈을 꾹 감고, 귀를 막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눈꺼풀 너머가 번쩍거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바로 옆에서도. 병찬이 괴성을 질렀다.
“야 종수야! 저거 좀 봐. 그러고 있을 때가 아냐.”
아예 몸을 돌려 버린 종수를 흔들면서 병찬이 닦달을 해 댔다. 급기야는 눈꺼풀을 잡아 벌리기까지 했다. 종수는 병찬을 홱 떠밀었다.
“아 씨 좀!”
“아이고오.”
병찬은 장난스럽게 나동그라지는 시늉을 했다. 더 성질을 내려고 했는데 하늘을 수놓는 광채가 말을 끊었다. 검정색 포장으로 감싸여 속에 든 것을 알 수 없는 구체가 쏘아 올려졌다. 포장이 찢어지느라 유난히 큰 소리와 함께 아낌없이 뿜어져 나온 붉은빛이 사방으로 뻗어갔다. 안에 폭탄을 설치해 산산이 부서지는 새의 알처럼. 핏방울과 잔해가 암흑 위로 후드득 흩어졌다. 종수는 바로 그렇게 죽을 수도 있었다. 총기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권총 자살이 의외로 성공률이 낮다길래 기각했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불을 끈 방에 새빨간 살점이 딱 저런 광경으로 갈가리 찢겨 흩뿌려졌을 것이다. 하지 않은 일을 해치운 기분이 들어 조금 홀가분하고 개운해졌다. 종수는 얌전히 다음 폭발을 기다렸다. 한층 더 선명한 선혈의 색으로 확실한 간접 체험을 하기를 고대하며.
그러나 곧장 기대가 배신당했다. 발사될 때부터 눈이 부신 빛이 새까만 하늘을 가르고 돌진했다. 아까 것처럼 감싸여 있지 않은 순백의 섬광이었다. 빛은 밤하늘 제일 중앙으로 곧게 향했다. 이윽고 사파이어처럼 청량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하와이 섬들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넓은 바다 위로, 그보다도 더 광활한 하늘의 모든 폭을 뒤덮으며 새파란 빛이 선회했다. 강렬한 파란색이 구름 너머에서 희미해져 어딘가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유달리 긴 갈채와 휘파람이 일었다.
종수는 병찬이 보지 못하도록 손가락으로 모랫바닥을 두드려 박수에 동참했다. 진기한 구경이기는 했다. 창공에 수를 놓는 불꽃놀이에 바다가 더불어 어우러진 정경이. 파도와 함께 오는 불꽃이. 해풍은 싸늘했고 땀이 식으니 살갗에 염분이 남아 버석거렸다. 땀에서 나온 것인지 바다의 소금기인지 몰라도 그리 쾌적하지는 않았다. 병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니 체온 때문에 닿은 쪽 볼과 턱만 더웠다.
내일에 대한 얘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종수를 속절없이 잠결로 떠밀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피로가 그제서야 밀려왔다. 생이 끝나기 전 마지막 시간을 잠으로 허비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종수는 잠들고 말았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망을 보는 불침번처럼 병찬이 꼿꼿하고 총명하게 앉아 있어 주어 안심이 되었다. 종수가 놓치는 것을 병찬이 대신 목격해 줄 것이다.
병찬의 시선이 찬란한 광선들이 그어지는 하늘에서 종수에게로 옮아오는 게 느껴졌다. 종수는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마지막 폭죽을 한 번에 소진하며 절정으로 치달아 천지가 흔들리는 굉음마저 어루만지는 듯이 부드러웠다. 뱃고물에 육중한 몸을 부딪히며 장난을 거는 고래가 내는 소리처럼. 병찬과 둘이 타 있는 배가 천천히 흔들리는 듯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 모든 진동은 종수가 모르는 새 막을 내렸다.
꼬박 나흘이 지날 동안 하와이의 평화를 위협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산불이 숲을 휩쓸지 않았고 쓰나미가 해안을 삼키지도 않았으며 지진이 땅을 두 동강 내지도 않았다. 사화산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 헤드가 작심하고 변덕을 부려서 오아후 섬을 용암과 재로 뒤덮지도 않았다. 하와이가 제 2의 폼페이가 되어 종수와 병찬이 화산 분출의 일산화탄소에 질식해 잠든 뒤 쏟아져 내린 화산재의 지붕 아래 그들의 몸이 수년에 걸쳐 분해되고, 퇴적물 틈에 그들이 있던 자리가 거푸집이 되어 이목구비까지 그대로 기록된 공간에 마지막으로 꾼 꿈만 깃들어 있다가 후대의 고고학자들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종수의 원대한 계획을 방해하지 않았다. 모든 게 바라던 그대로인 채, 결전의 날은 매끄럽게 밝아 왔다.
슬리퍼를 신는 병찬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미적대지도 않았다. 종수가 문을 열며 “가자”하니 차분히 “응”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깥에는 오전의 빛이 가득했다. 어제보다 확연히 따사로운 햇볕이 정수리에 내리쬐었다. 하와이는 사철이 여름에 가깝다지만 그들이 방문해 있는 동안 계절의 문턱을 넘긴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눈에 익은 길목에서 트롤리를 타고 해변으로 향했다. 병찬은 이 층에 올라가자고 보채지 않았다. 야자수가 알아볼 수 없는 속도로 휙휙 지나가는 창에 비치는 옆얼굴에서 표정을 읽어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가는 내내 병찬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어떤 말을 해 주지도 않았다. 처음 탄 노선은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빽빽한 수풀 속으로 울퉁불퉁한 흙길을 한참 달렸다. 목적지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울창한 숲속 풍경에 종수가 불안해질 즈음에야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이키키에 대부분의 관광 인구를 빼앗겨 인적이 드문 해안가의 남루한 포구가 버스 전면의 유리창으로 보였다. 소형 모터 보트가 매여 있는 부두 앞에는 흙먼지에 뒤덮인 컨테이너와 엉성한 나무판자 건물 몇 개, 재래식 간이 화장실이 다였다. 종수가 구글 지도로 사전 답사한 그대로의 광경이었다.
판잣집 간판의 ‘폴루 스쿠버다이빙’이라는 글자 위로 팔뚝만 한 도마뱀이 기어다녔다. 종수가 인터넷으로 예약한 업체의 이름이었다. 월드 와이드 웹이 도입되던 시기쯤 만들어 놓고 한 번도 보수하지 않은 듯한 웹사이트였는데, 마치 그 페이지를 현실에 구현한 듯 허름한 업소였다. 변변찮은 실내에는 벽에 못을 박아 대여용 잠수복을 걸어 두었다. 고무가 다 닳은 자동차 타이어에 밧줄을 맨 것을 그 밑에 기대어 놓았는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고객에게 던져 주는 용도로밖에는 볼 수 없었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낚시 의자에 앉아 오수를 즐기던 강사는 손님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 한 듯 화들짝 놀라 깨어나더니, 분명히 명부에 자기가 직접 올려 둔 예약 고객 두 명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도 앉아 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체구가 작고 등이 굽은 사람이었다. 낮잠을 방해받은 것이 달갑지 않아 뚱한 표정으로 강사는 잠수복을 빌려 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못에 닿지도 않는 것을 보다못한 둘이 알아서 내렸다. 구석에 커튼을 친 것에 불과한 탈의실은 거구 둘이 들어가기 비좁았다. 둘은 바짝 붙어 서서 마찰이 심한 고무 재질의 옷으로 힘겹게 갈아입었다. 마치 경기 전에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사는 벽에 걸린 안전 수칙을 가리키더니 건성으로 읽어 주었다. 그들을 응대하는 것만으로 이미 평생어치 노동을 다 하고 있다는 듯이 고달픈 목소리였다.
“다이버는 감압병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출수할 때는 갑자기 솟구쳐 올라오면 안 됩니다. 오 미터에서 반드시 멈추어 안전 감압을 하고⋯⋯.”
아는 사람을 닮았다 했더니 문득 기억이 났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식판을 든 학생을 쳐다보지도 않고 매쉬드 포테이토를 퍼 주는 배식원이었다. 똑같이 늘 무관심하고 고단해하는 태도였다. 지상 낙원 하와이에서도 누군가는 삶에 지치는구나⋯⋯. 그런 생각 속에서 종수는 설명을 한 귀로 흘리다가 병찬을 곁눈질했다. 검은색 전신 잠수복을 입은 병찬은 돌고래처럼 미끈한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펭귄 같았다. 병찬은 경솔하게도 강사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딴생각에 빠져 있는 눈치였다. 종수한테야 안전 수칙 따위는 하등 중요치 않지만 병찬은 잘 기억해 두었다가 지키면서 돌아와야 할 텐데.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나서는 강사를 따라 둘은 물결에 출렁거리는 부두로 올라갔다. 4인승 모터보트는 어찌나 작은지, 달리는 곳이 물 위일 뿐 승차감부터 엔진 소음까지 오토바이 같았다.
다이빙하는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숙련된 잠수부일수록 물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힘을 다 빼지 않도록 모터보트로 다이빙 포인트로 향하고, 헤엄쳐서 뭍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둘은 완전한 초면인데 같은 날 다이빙이 하고 싶었을 뿐이라 다이빙 포인트까지 데려다주는 모터보트만 같이 탔다는 설정이었다. 물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헤어진 이방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까맣게 모르는 것처럼 병찬은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찬은 자꾸 서로 모른다는 컨셉을 깨뜨리고 말을 걸어 왔다. 불쾌함이 종수의 뱃속에서 엉키고 뒤섞였다. 어쩐지 고분고분하다 했더니.
“선크림 줄까?”
“웬 선크림.”
“식탁에 있길래.”
어제 불꽃놀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종수가 물을 사면서 슬쩍 같이 계산해서 병찬의 눈이 닿을 만한 곳에 둔 것이었다. 병찬이 종수의 턱 밑으로 튜브를 쑥 내밀었다. 종수는 고개를 돌리고 싸늘하게 거절했다.
“됐어. 너나 실컷 발라.”
“안 바르면 피부암 걸린대.”
“시체가 암 걸리냐?”
“뭐 어쨌든 난 바르련다, 앗. 아이고.”
튜브를 따려던 병찬의 손이 미끄러졌다. 모터보트가 내뿜는 소리에 풍덩 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가 묻혔다. 하얀 점으로 사라져 가는 선크림을 황망하게 바라보다가 종수는 벌컥 화를 냈다.
“너 같은 새끼한테는 뭘 해 주면 안 돼.”
“야. 그렇게 말할 것까지 있냐? ⋯⋯미안.”
“에이씨⋯⋯.”
“진짜 미안. 좋은 선크림 같던데.”
“몰라. ABC 스토어에 그거밖에 없었어.”
“하와이에서 팔 수 있는 선크림이 몇 개 안 된대. 산호초에 해롭지 않은 성분으로 만들어야 돼서.”
“별 걸 다 아네.”
“선크림 뒤에 다 써 있더라.”
“한국말로?”
“형이 파파고를 딱 깔았지.”
“빨리도 깔았다.”
“산호는 죽으면 색이 하얗게 바랜다더라. 엽서나 티비에서 보는 선명한 색깔이 아니고.”
“쓸데도 없는 얘기 언제 읽어 봤냐.”
“아침에 잠이 안 오길래.”
다이빙 강사는 선장으로 전업하여 맨 앞에서 키를 잡았고, 병찬은 뱃머리 쪽에 앉아 있었다. 평생 바다를 누비던 선원처럼 자연스럽게. 조신하다는 말마저 어울리도록 다소곳하게 팔다리를 접고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에서 종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다로 나오니 더욱 강렬해지는 햇빛이 일으키는 착각인지 몰라도, 그 곱상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새 한 배에 타 있는 세이렌에 홀린 듯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비해 병찬이 너무 평온해 보이는 것 아닌가 불뚝 두려움이 치솟다가도, 세이렌이란 원래가 충실한 자살 조력자였지 생각하면 괜찮은 것도 같았다.
종수의 머릿속에서는 발꿈치를 들고 총총 내달리듯 얕고 가쁜 생각이 이어졌다. 어쩌면 병찬은 나쁘지 않은 동행인지도 몰랐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괜찮을지도 모르고. 이규가 걸린 것보다는 확실하게 나았다. 이규는 종수가 절대로 실망시킬 수 없는 사람에 속했다. 규를 실망시키느니 심해에 뛰어내릴 것이다. 노수민에게도 반드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수민이 종수에게 보여준 것처럼. 임승대한테야말로 절대 얕보일 수 없었다. 주찬양? 그 어린애를 이런 일에?
반면에, 얘는. 박병찬의 경우. 종수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랬었다, 나흘 전까지는. 지금도 그렇다고 종수는 소리 없이 되뇌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려고 애썼다. 그러나 병찬이 선크림을 놓치던 것처럼 생각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러다 보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는 날 무슨 생각을 하지? 미지에 빠져들수록 종수는 병찬을 협박하듯이 을러댔다.
“부모님한테 꼰지르면 뒤져.”
“응 안 꼰질러.”
“진짜로.”
“어차피 너희 부모님 번호 없어.”
“⋯⋯.”
“오. 이쯤이면 망나뇽 나올 것 같지 않아? 오기 힘든 바다에서 나온다던데.”
“⋯⋯뭔 소리야?”
“포켓몬.”
“망나뇽이 포켓몬인 건 나도 알아. 여기서 그게 왜 나오냐고.”
“미국 가서 포켓몬 고도 안 했어? 이그그. 그러니까 죽고 싶지⋯⋯.”
자살사고의 특효약이 게임이라는 양 병찬은 측은해하며 혀를 찼다. 안개처럼 작은 물방울이 튀어 가라앉힌 머리카락 너머로 떠나온 섬의 윤곽이 보였다. 산이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튀어나온 섬은 마치 바다 위를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았다. 배를 떠받친 바다는 열대가 아닌 극해처럼 표면이 수정과 같이 검푸르고 차갑게 번득였다. 파도가 올랑거리며 작은 규모로 부서져 빛났다. 빛이 끊임없이 채굴되는 광산 같았다. 병찬은 종수만큼이나 바다에 푹 빠진 듯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들은 말이 기억의 수면 위로 둥실거렸다. 종수의 친척 어른이 즐겨 하던 말씀인지, 학교에서 배운 속담인지. 그 말을 뇌까리다가 별안간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너도 슬기로운 자는 되어도 어진 자 되긴 글렀구나.
병찬은 그저 반질반질하고 무르게 보였다. 도저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끔찍한 통증을 겪어 보고 숨겨 본 사람으로도 볼 수 없었다. 부상은 이 순간 병찬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병찬이 종수를 향해 몸을 숙이고 정다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마. 기억하고 있어.”
배반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병찬은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낼 것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멀미하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보트가 멈추었다. 수상에서도 급정거가 가능한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항해가 갑작스럽게 끝났다. 오는 동안에는 영겁처럼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너무도 짧았다.
“다 왔습니다!”
강사가 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업에서 해방된다는 듯이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종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종수야말로 속이 울렁거렸다. 다 왔다. 바로 이곳이다. 고대하던 자유를 이제는 선사받는다. 물에 들어가는 단 한 걸음을 남겨두고 있었다⋯⋯.
강사는 오리발과 수경을 내어 주고 등에 짊어지는 공기 실린더에 연결된 마우스피스를 물게 했다. 종수는 스쿠버다이빙의 대표적인 입수법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이언트 스트라이드, 위대한 한 걸음. 선체 끝에 올라서서 공중으로 한쪽 발을 크게 내뻗어 마치 물에 걸어 들어가듯 추락하는 방법이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진 종수의 몸이 수면 아래 몇 미터 깊이로 곧게 가라앉았다. 이내 부력이 공기탱크를 밀어올려 천천히 떠올랐다. 이제부터는 몸에 힘을 빼면 물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가라앉고 싶으면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수면 위에서 본 바다는 하늘의 청색을 짙은 잉크로 농축해서 부은 듯했는데, 경계면 아래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사방이 에메랄드 빛깔로 채워졌다. 물은 작은 빛 알갱이를 먼지처럼 머금고 있는 듯했다. 자잘하게 반사되는 태양빛이 마치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따라서 잎맥 사이를 심록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은 뭍에만 온 것이 아니었다. 경이의 계절. 생동하는 계절. 그 순간 종수는 떠나오기 전에 읽었던 격언집의 한 토막을 기억해 냈다. 영국 시인이 남긴 구절이었다.
뒤에서 수면이 크게 울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찬도 입수한 것이리라. 그밖에는 물밑은 아주 조용했다. 종수는 주의 깊게 바다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바다의 거주자들은 몹시 과묵하여 물속은 마치 우주 공간처럼 고요했으며, 대신 이따금 일어나는 물결은 거칠 것 없이 전파되어 왔다. 종수의 몸을 훑으며 흐르는 물길이 미세하게 휘어지는 것을 통해 병찬이 뒤에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팔다리에 휘감기는 흐름이 거세어졌다. 아래에서 질주해 오는 물고기 떼 때문이었다. 내려다보니 초록색을 띤 구역의 아래층은 담수 진주처럼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플랑크톤 때문이야, 종수는 생각했다. 언젠가의 불면의 밤에 생태 관찰 유튜브가 가르쳐 주었다. 아주 작은, 너무도 많은 생명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물을 뚫고 작은 물고기들이 화려한 오색 비늘을 흔들며 두 사람의 코앞으로 솟구쳤다. 빨대로 휘저은 유리컵 안처럼 소용돌이치는 물거품이 일어 시야를 가렸다가, 사그라지고 나자 물고기들은 수면 근처에서 유유자적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저 공기를 마시러 올라온 것이다.
종수는 느리고 신중하게 오리발을 저었다. 물은 아주 기민하게 감지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차가워졌다. 따스하게 푸르던 바다의 색채도 선명한 한색으로 변해 갔다. 처음에는 수온에 맞추어 눈이 일으키는 착각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바다는 층층이 다른 보석의 진열장이었다. 하강할수록 여러 빛깔의 수호자들이 서로 섞이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에메랄드와 터키 옥색을 지나오니 사파이어 속에 갇힌 듯이 순수한 색채가 드러났다. 거울의 깊은 뒷면에 도달한 듯한 단단한 파랑이었다. 다른 색이 단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도록 증류하고 정제한 듯한 파랑. 너무도 선명해서 물속의 색깔을 꺼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하면 잠수복 천 너머 살갗까지 파랑으로 물들 것만 같았다.
몇 미터를 더 내려가니 채도가 함께 낮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보이지 않는 해저의 바닥이 머지않았다는 걸, 그림자들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모든 붉은색과 노란색 위로 잿빛과 푸른색이 엷게 겹쳤다. 모든 색이 어둠을 향해 치우치는 깊이에 진입한 것이다. 백색광에 감싸인 뭍의 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새파란 층에서는 거의 소리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거주민들이 내는 생활 소음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끔 기포가 둔탁하게 터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희미한 뱃고동 같은 기척이 났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갓 태어난 동물이 낑낑대는 울음을 닮았다. 멀리 있는 고래의 신호일까?
종수는 숨을 얕게 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다 물고기 몇 마리가 다가오는 바람에 그대로 얼어서 숨을 멈추기도 했다. 점박이 무늬가 있는 곰치 떼였는데, 큰 덩치 뒤로 긴 피리처럼 생긴 노란빛 물고기가 꼬리에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었다. 곰치의 탁한 눈과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물고기 눈에 뭐가 비쳤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곰치는 종수에게 아무 관심도 주지 않고 유유히 멀어졌다. 물고기들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침입자들을 용납해 주었다. 그 또한 알 수 없는 수중의 질서였다.
꺽꺽 웃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병찬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딴에는 꽤 세게 친 것 같았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도닥인 정도로 변했다. 쫄았어, 최종수? 마우스피스를 물고 있어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입술을 읽기만 해도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인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가자미눈을 뜨고 째려보고서 더 빠르게 아래로 향했더니 병찬도 유연하게 헤엄치며 따라붙었다.
드디어 바닥 가까이에 도달해 보니, 편편한 화강암이 미끈미끈해 보이는 해초에 덮여 있었다. 따개비가 빼곡하게 달라붙어 있어 암반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본 수면 한쪽에서 경사진 모래톱이 미끄러지듯이 물속으로 들어오다 사라졌다. 종수는 육지를 멀리 떠나왔음을 체감했다. 그 순간 추위도 함께 닥쳐왔다. 이전에 종수가 물에 잠겨본 적이란 목욕물 아니면 수영장 정도가 다였다. 수심에 따라 수온 차이가 나는 환경은 지극히 생소했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이토록 낯선 곳에 오래 있다가는 죽을 것이 확실했다. 혹시 종수가 호흡기를 벗어던지는 데 실패하더라도 동사하게 될 터였다.
병찬은 뒤에서 감시하며 충실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교도관 같기도 하고 충직한 시종 같기도 했다. 어느 쪽에 가까울까, 박병찬은. 물길에 몸을 내맡기고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휘저어 가노라면 이따금 바위가 불쑥 솟아올라 길을 막았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화려한 열대어들이 등장했다. 종수는 은은한 형광을 발하는 지느러미에 시선을 빼앗겼다. 새의 깃털 같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발레리나의 치마 같았다. 잉크를 떨어뜨려 퍼져나간 듯한 무늬가 신기하게 보였다. 위풍당당한 대어가 있는가 하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치어도 있었고, 대부분 무리로 다녔지만 혼자인 녀석도 허다했다.
어떤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무척 얇고 섬세하여 너머로 바위에 붙은 산호들이 비쳐 보였다. 겹겹이 자라난 산호초가 활짝 열린 형상이 어느 주택가 담장에 만발한 초여름 꽃나무 같았다. 종수는 산호 틈에 몸을 숨긴 반가운 줄무늬 물고기를 알아보았다. 니모와 같은 종이었다. 왠지 한쪽 지느러미를 다쳐 있을 것만 같아 유심히 보았더니 니모는 산호 속에 더 깊이 파고들어 숨었다가, 종수가 현란하게 곡예 수영을 하는 해파리들에게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잽싸게 도망쳤다. 허무하고 황당했다. 마치 박병찬처럼 속임수에 능한 물고기였다. 앙증맞고 무해하게 생긴 해파리들도 아마 독이 있었을 것이다. 병찬도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지도 몰랐다. 사람 좋은 척 계속 그래그래, 알고 있어, 안 잊었다니까? 해놓고 여기까지 와서 종수를 배신할 수도 있었다. 구조 신호를 보낸다든지. 먼저 나갔다가 종수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구명대원을 데리고 들어온다든지. 종수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놓고 의기양양하게 선포할 수도 있었다. 최종수 너 같은 애새끼는 형아한테 쨉도 안 돼.
쟤한테 진짜로 지면 어떡하지⋯⋯. 종수는 명계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처럼 확신 없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수경 너머로 까만 눈동자 한 쌍이 종수를 대놓고 관찰하고 있었다. 무슨 인어라도 보듯이 빤히. 눈꼬리에 웃음이 어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차하면 종수의 목을 졸라 줄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가서 판단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차라리 박병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편이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도⋯⋯.
불안한 심정으로 종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홱 돌리고, 발을 젓는 속도를 확 높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물속에서도 종수 자신의 숨소리가 시끄럽게 몰아칠 정도로. 수중 미사일처럼 박병찬의 몸이 스윽 옆으로 나타났다. 여유롭게 슬렁슬렁 백코트를 하듯이. 수경 너머 웃음기로 휘어진 눈을 보고 종수는 병찬이 하고 싶은 말을 짐작했다. 너 수영 안 해 봤지, 형은 이것도 잘하는데. 어쩌면 ‘수영이 재활에 좋거든’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뭍이어서 입을 열 수 있었다면. 종수의 경우 농구 말고는 해 본 운동이 별로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꾸할 숨도 없어 헉헉대면서도 얄미운 병찬의 허벅지를 오리발로 걷어차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역시 물의 벽이 꿀렁이며 방어해 주어 발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진 격이 되었다. 병찬이 행복하게 푸하하 웃어대서 종수는 마음 같아선 상어라도 좀 지나가면 병찬을 갖다 바치고 싶었다.
완전히 가라앉으면 깔리는 군청색이 이른 밤을 연상시킴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하루를 보내는 물밑의 주민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물고기 떼가 바위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자태가 스키로 활강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투명한 비늘에서 비산하는 백금빛이 별빛 같았다. 바위들이 완만한 언덕을 이룬 바닷속은 물 위의 섬과 대칭을 이루는 또 하나의 산지였다. 오르락내리락 끝없이 반복되는 경사가 검푸른 해초와 성게에 덮여 있었다. 거리 감각이 희박해진 따름으로 시야가 몇 미터까지 확보되었다 하고 꼬집어 말할 길은 없었지만, 힘차게 다리를 저어 가면 닿을 거리쯤에 넓은 지느러미를 양옆으로 펴고 쉬는 커다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 어딘가의 빛을 등지고 앉은 그림자처럼 검고 어두웠다. 마치 거대한 가오리나 어쩌면 고래처럼 탐험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 종수는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잠들었거나 숨을 거둔 것 같았다.
종수와 병찬이 나란히 접근해도 그것은 움찔해 도망치지도, 공격해 오지도 않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맥 빠지게도 미지의 바다 괴물이 아니라 둔덕 틈에 착륙하듯 터를 잡은 비행정이었다. 바닷속에 버려진 지 한참 되어 보였다. 양철판은 이미 부식되어 구멍 투성이인 데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조류에 나사가 헐거워져 문짝이 떨어져 나가 속이 훤히 뚫려 있었다. 공중이든 수중이든 매끄럽게 활주했을 유선형 윤곽만이 물속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종수는 청진하듯 손으로 선체를 통통 두드려 보았다. 어디서 어디로 가곤 했을까? 병찬도 그런 것이 궁금한지가 궁금해졌다.
병찬이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는데, 비행정 안에서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난데없이 물거품이 졸졸 솟아 나왔다. 마치 고래가 등에서 물줄기를 뿜어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종수는 성냥갑처럼 비좁은 이 인승 기체 안에 머리를 디밀었다. 병찬이 조종석을 차지하고 파일럿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반응 없는 레버를 당겨도 보고, 유리에 금이 간 계기판도 건드리며. 종수가 들어갈 곳은 조수석뿐이었는데 벨벳 시트가 다 삭아 골조가 드러날 동안 안전벨트는 놀랍게도 멀쩡했다. 나일론이란 얼마나 튼튼한 발명품인지. 등에 공기 실린더를 짊어지고 앉으려니 부대꼈지만 곧 벗어 버리고 편해질 것이다. 종수는 명을 다하기 알맞은 장소를 찾아내 조금은 기뻤다. 소임을 다 끝내어 헤엄치지도 날지도 않게 된 탈것의 뱃속만큼 눈 감기 좋은 곳도 없으리라.
종수는 실린더와 씨름하며 벨트를 매려고 뒤척였다. 의자에 몸을 묶어 놓으면 병찬이 종수를 끌어올리려고 어쭙잖게 몸부림쳐도 딸려가지 않을 시간을 조금은 벌 것이다. 말리지 않고 보던 병찬은 어느 순간 종수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그러더니 다른 손으로 종수의 발밑을 가리키며 무언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어쩐지. 안 그래도 좁은 실내에 떡하니 부피를 차지하는 형체가 있는 듯해 찜찜하더라니.
병찬과 종수의 발 아래 걸쳐 누워 있던 물체는 둥글고 딱딱했다. 지름은 농구 선수의 긴 뼘으로 두 뼘 정도 되었다. 종수는 이끼처럼 뭉친 수초로 보송보송하게 덮인 표면을 문질렀다. 마모되지 않은 육각형 무늬가 드러났다. 꼭 흙에 묻혀 있어 손상되지 않고 발굴된 고대 유물 같았다. 고르게 난 모서리들이 몇 번이고 다시 그려지고 겹친 것으로 보아, 거북은 여러 백 년의 생을 누렸을 것이다.
병찬은 등껍질을 이리저리 톺아보던 종수의 손에서 홱 채가더니 핸들처럼 손 안에서 굴렸다.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빙글빙글 회전하며 몸통 속으로 물을 흘려보냈다. 병찬은 등껍질을 들고 선체 밖으로 나가서 띄워 올렸다가 받아 보더니, 종수에게 얼른 손짓을 했다. 어서 따라 나오라고 부르는 손짓이었다. 종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병찬은 마우스피스를 문 입술을 열렬하게 오물거렸다. 퍽 우스꽝스러워 종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가 그만 짠물을 먹고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병찬도 마찬가지로 입안이 얼얼하도록 짤 텐데 그까짓 것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었다. 뭐라고 뻐끔거리고 싶은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찬의 낯이 갑자기 환해졌다. 아인슈타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일 법한 전구가 떠올라 보이는 듯했다. 병찬은 오른팔을 곧게 치켜들어 손목에서 손가락까지 이어지도록 빠르게 꺾어 보였다. 못 알아볼 수도 없는 동작이었음에도 종수는 눈을 의심했다. 이곳에는 코트도 공도 없었다. 심판도 팀도 없지만 원온원이라는 거겠지. 그러나 골대도 없는데 농구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지? 종수가 아는 농구란 띠 안으로 공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따져 물을 틈도 주지 않고 병찬은 거북이 등껍질을 쥐고 똑같은 스냅으로 밀쳐냈다. 발끝부터 탄력 있게 손끝까지 솟구치는 힘으로. 등껍질은 맹렬한 기포를 달고서 제법 그럴듯한 포물선을 그리며 종수에게 날아왔다. 종수는 반사적으로 능숙하게 등껍질을 잡고야 말았다. 병찬은 오엑스 퀴즈를 하는 것처럼 머리 위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종수가 어떤 질문의 답을 맞추었다는 뜻인가? 그러더니 병찬은 곧바로 몸 앞으로 팔을 내렸다. 종수는 바보처럼 그 율동을 쳐다보았고, 병찬은 팔을 동그랗게 오므린 그대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을 멀거니 보다가 종수는 벼락같이 이해했다. 자기 품이 골대라는 거구나. 어찌나 황당한 발상인지 어울려 줄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종수는 등껍질을 아무렇게나 떨쳐 버렸다. 손을 떠나는 순간 형편없는 슛을 던졌다는 자각에 섬뜩하기는 했다. 등껍질은 괴상한 나선형 궤적을 그리며 골대 쪽에서 크게 이탈했다. 병찬은 얼른 쫓아가 잡아냈다. 코트를 벗어나려는 공을 긁어오듯.
움직이는 골대가 어딨어?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병찬은 마냥 즐거운지 웃는 낯으로 팔 안으로 등껍질을 통과시켰다. 얼떨떨하게도 종수가 득점을 하긴 한 것이다. 병찬이 한쪽 눈을 찡긋해 왔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했더라. 아마 감히 종수를 저지하려 들길래 본때를 보여주기로 작정했던 것 같았다. 몇 년이나 지난 경기를 복기하기도 전에 병찬은 다시 종수에게로 공을 던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깔끔한 슛폼이었다. 물이 동작을 느리게 하여 병찬이 슛을 만들어내는 각각의 단계가 더 잘 보였다. 모든 움직임이 경쾌하고 힘차면서도 가벼웠다.
마음이 조금 더 크게 울렁거렸다. 종수는 다시 정확한 캐치를 했다. 이번에는 응수해야 했다. 병찬이 설치게 놔두기만 하고 종수의 실력으로 꺾어 버리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공을 마주 던지지 않고 코트 밖으로 걸어 나가는 건 유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이나 같았다. 종수의 성실한 성미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병찬의 팔이 제때 림을 이루었다. 종수는 그 한가운데를 겨냥해서, 지나치게 정직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투 핸드 슛을 힘껏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3점 라인 안쪽이었지만 점점 느려지고 흐름에 휩쓸리는 물 속의 환경을 감안하면 로고 샷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거리였다. 손끝을 떠난 공은 회전하며 똑바르게 날아, 아니, 헤엄쳐 갔다. 제대로 명중하여 병찬의 품을 쏙 통과하는 모습에 종수는 자못 뿌듯해졌다. 그러나 기뻐할 새도 없이 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이번에 병찬은 세찬 바람에 실어 보내듯 일직선으로 팔을 뻗어냈다. 슛보다 패스에 가까웠다.
때마침 바다가 조류의 기울기를 바꾸며 장난을 친 탓에 공은 아래쪽으로 발사되어 나갔다. 공이 데굴데굴 구르며 산호 덤불의 숲 위를 스쳤다. 종수는 얼른 비행정을 나가서 공을 주워 왔다. 말하자면 리바운드를 잡은 격이었다. 병찬은 양손을 들고 항의해 왔다. 난 분명히 제대로 던졌는데 억울하다고 심판에게 어필하는 투였다. 종수는 거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농구의 요소는 아무것도 못 갖췄는데도 영락없이 농구를 하고 있다는 게 재밌었다.
물은 더는 공의 길을 희롱하지 않고 땀을 식히는 산들바람처럼 잔잔하게 흘렀다. 종수는 순탄히 득점 기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역습을 당하고 말았다. 무난히 던진 자유투였는데 느닷없이 용솟음치는 조류가 휩쓸어가며 터무니없는 에어볼로 변해 빗나갔다. 종수는 병찬이 했던 것처럼 얼른 팔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엉터리! 이건 엉터리야. 속으로 깔깔 웃음이 터졌다. 결국 겉으로도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병찬 역시 골대 노릇을 하던 자리에서 웃느라 배를 잡고 몸을 못 폈다.
수중농구는 던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둔중하고 편안했다. 물의 무게까지 힘차게 밀쳐내면 공은 그야말로 거북이 기어가듯 느릿느릿 걸어갔다. 종수는 농구를 처음 해 보는 아이처럼 이런저런 시도에 열중했다. 병찬의 오리발 밑에서 플로터도 던져 보고, 뒤로 헤엄쳐서 스텝 백을 해 보려고도 했지만 뒤로 수영하는 법을 몰라서 그건 잘 안 됐다. 공을 껴안고 제자리에서 도는데 한 바퀴에서 못 멈춰서 애매하게 계속 돌아가는 채로 던지면 어쨌든 턴 어라운드 페이드 어웨이였다. 물 위에선 없는 슛도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오리발로 폴짝 개구리 점프를 뛰면 손바닥에 부딪혀 오는 물의 반작용이 제법 되었다. 그 속으로 공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병찬의 품으로 빨려들어가 안기는 공을 보면 마음이 꽉 차올랐다. 무언가가 전달된 느낌이었다. 마치 어떤 말이 가닿은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공을 던진 것만으로 이해 받은 것 같기도 했다.
물속의 공은 하도 느려서 경로를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있었다. 헤엄쳐 가는 공은 마치 정말 살아 있는 거북이 같았다. 느긋한 성정에다 고집도 조금은 있지만 흐르는 바다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기를 수백 년. 몸에 힘을 빼면 물이 떠받쳐 주었을 것이다. 물에서는 넘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곳은 안전했다. 마치 비눗방울에 들어온 듯이 물 밖에 두고 온 일상과 유리되어 있었다. 바깥의 떠들썩한 뉴스를 잊고. 어쩌다 이러고 있는지도 잊고. 바다의 공포를 잊고. 실린더 속의 공기가 고작 몇 시간 분량인 것도 잊고. 조금만 더 나가면 마주칠 심해에 도사리고 있을 포식자들의 존재도 잊고. 미지의 별천지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잊고. 모르는 세상이었지만 모른다는 것이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가볍고 맑았다. 코트 아닌 코트에서 종수는 공을 던지고 바라보는 무아경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그곳에 혼자가 아니었고 공과 단둘도 아니었다. 병찬과 있었다.
빠져나가려는 공을 안아든 병찬이 장난스럽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종수의 슛을 칭찬해 주는 줄 알고 으쓱해졌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솔레이션 사인이었다. 발목 잡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는 게 새삼스러워서 종수는 웃었다. 병찬은 작정하고 침투해 왔다. 땅에서도 산뜻하게 나부끼던 머리카락이 물속에서는 더 자유롭게 춤추었다. 제 아무리 빨라 봤자 골대가 없는데 골 넣을 재주는 없겠지. 종수는 얼른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 밑바닥이 멀어지는 먼바다로 나가다가 방향을 틀어 올라가며. 그 복잡한 술래잡기를 병찬은 끝까지 해냈다. 종수는 바짝 추격당했다가, 어느새 역전당했다.
곡예사처럼 제비를 돈 병찬이 눈앞으로 돌파해 있었다. 병찬이 몸을 쭉 펴고 팔을 호쾌하게 쳐들었다. 이 모습을 종수는 뒤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종수는 긴 숨을 내뱉었다. 병찬의 호흡기에서 기포가 종수와 똑같은 리듬으로 뿜어져 나왔다. 물거품이 일렬로 물을 꿰뚫었다. 동시에 종수의 품에 공이 안착했다. 멋진 덩크였다.
그때 종수를 휘감은 감정은 비단 병찬의 눈에 차오르는 희열이 전염된 것만은 아니었다. 덩크를 성공하면 어떤 표정인지 정면에서 알게 되어 속이 시원한 것만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종수는 숨을 끝까지 내쉬었던 것이다. 병찬과 함께, 하나의 폐를 단 둘이 되어. 슛은 날숨의 끝에서 쏘아야 한다. 던질 힘을 모은 손끝 말고는 모든 부분이 이완된 상태에서. 긴장해 어깨를 움츠리지도 않고, 걱정으로 머리가 산란해져 겨냥이 흐트러지지도 않도록 전부 놓아주고 텅 빈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가장 안정된 순간에 마지막으로 공을 놓아줄 수 있도록.
종수는 튜브에 연결된 공기를 찬찬히 들이마셨다. 단맛이 나도록 신선하고 아찔해서 헬륨이라도 넣은 것처럼 이대로 웃으면 희한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병찬은 이미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종수의 귓가에 대고 흘려넣듯이 가깝게 들려왔다. 바닷물을 들이켜도 마냥 기쁘기만 한 심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병찬은 사레가 들렸는지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통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종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환상적인 꿈을 꾸는 듯이 몽롱해지더니 아예 초점이 나가 버렸다.
종수는 병찬의 팔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키득거리는 병찬은 종수가 놓아 버린 팔이 관성으로 계속 움직이는 모습을 영문을 모르는 듯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 천진하고 무서운 반응이 덜컥 겁이 난 종수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만 등껍질이 품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둘의 발밑으로 느릿느릿 여유롭게 가라앉으며 등껍질은 작은 점이 되어 갔다. 한바탕 놀이가 끝나고 하루가 저물 때, 원래 살고 있던 집터로 돌아가는 듯이.
거북의 귀향길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종수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다. 종수는 숨을 가다듬으며 위를 주시했다. 잊고 있었던 빛이 수면에 어른어른 퍼져 파도를 따라 이랑을 이루어 지나가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병찬은 종수가 팔로 허리를 감아 몸을 엮는 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혹시나 놓칠까 불안해 손을 잡으니 마주 손바닥을 대고 손가락을 얽어 왔다. 마치 왈츠를 추는 모양새 그대로 종수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다리를 차며 올라갔다.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어리둥절해 안겨 있을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병찬의 무게를 달고 있기도 했거니와, 공을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체력을 다 소진했던 것이다.
두고 온 해저보다 육상이 더 가까워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종수는 사력을 다해 헤엄쳤다. 마침내 알게 된 것은 넓게 스며들었던 흰 빛이 작은 원형으로 모여들어 해의 위치를 알리며 병찬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듯 찬연한 빛무리를 만들어냈을 때였다. 하마터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서 수면으로 돌진할 만큼 반가웠으나, 무심한 강사가 주지시키던 수칙이 어수선한 기억 틈에서 제때 고개를 내밀었다. 상승할 때는 언제나 안전 정지를 기억하세요.
종수는 도달해 있는 깊이에서 우뚝 멈추었다. 감청과 청록 사이 가장 맑고 날카로운 파랑의 깊이였다. 병찬의 눈에는 총기가 돌아와 있었고 종수를 끌고 억지로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해저가 부린 환각의 마법에서 풀려난 것이다. 다만 피로와 추위가 누적된 입술이 잘게 떨려 마우스피스를 놓칠 것 같았다. 손으로 제대로 물려 주려니 병찬을 안고 있기에도 팔이 모자랐다. 이마를 맞대 마우스피스끼리 입을 맞추도록 하고 몸을 밀착하면 고정할 수 있었다. 비로소 병찬의 동요가 잠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금 호흡이 겹쳤다. 이번에는 심장 박동마저도. 쿵쿵, 쿵쿵, 거의 시차 없이 포개어져 누구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맥동이 껴안은 두 몸을 타고 흘렀다. 찬물에서도 선연한 감각으로, 청각이 아닌 심장 속의 떨림으로. 물속은 고요했다. 그 고요야말로 바다가 부르는 노래였다. 물밑의 마지막 기억이 된다 해도 저쪽에서라고 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함께 뛰는 심박을 타고 하나의 피가 흐르는 감각을. 새파란 피가.
오로지 파랑의 공간이 둘을 허락하고 있었다. 차갑게 일렁이는 따뜻한 파랑이. 그 색은 찬란하고 순전하고 강렬하고 온전했다. 파랑을 뭍에서 흔히 슬픔과 우울과 침잠과 체념과 연관 짓는 건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강사는 삼 분간 안전 정지하라고 했다. 시계가 없어 잘 지켰는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이곳에서의 멈춤이 영원으로 새겨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순간을 셀 수 없이 떠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둘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수면 가까이에 이르자 얇은 물의 막을 프리즘 삼아 통과하는 여러 빛깔로 감싸였다. 빛의 커튼이 오로라처럼 산란하며 일렁였고, 머리를 쳐드는 순간 모든 색채가 돌아왔다.
근거리에 부표처럼 떠 있던 모터보트는 둘을 금방 발견했다. 작은 체구로 불가사의한 악력을 낸 강사는 둘을 건져내 미역을 널듯이 배에 던져 놓았다. 병찬이 힘없이 강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종수는 병찬이 묻는 말을 더듬더듬 영어로 번역했다. 깊은 물에서 몽롱하고 야릇한 행복감이 들었고, 별이 번쩍이기도 했다. 그러다 출수할 때가 되니 괜찮아졌다. 강사는 병찬의 병명이 질소마취였다고 단언했다. 수심이 깊어지면 실린더의 압축공기 속에 든 질소가 정신이 혼미해지게 만든다는 거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다이빙의 허술한 실태에 종수가 항의하기도 전에 강사는 “그러게 왜 감당도 못 하는 깊이에 들어갔냐”고 혀를 끌끌 찼다. 종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감흥 없이 항구로 배를 모는 강사는 ‘너희처럼 허세 부리더니 곤란에 빠지는 초심자는 진력이 나도록 봤다’는 표정으로 꾸중을 계속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이의를 제기할 기력조차도 다 소모한 둘은 벌 서는 아이들처럼 가만히 앉아서 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타자마자 둘 다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내릴 때를 놓칠 뻔했다.
헤드뱅잉을 하느라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내리니 이미 저물녘이었다. 친숙한 동네를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여행만 가면 숙소를 집이라고 친근하게 부르게 되는 것은 부조리하고 희한한 섭리였다. 진짜 집인 양 익숙한 안정감을 느끼기까지 하고. 정작 종수의 집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여행은 실패했는데 숙소는 당장 내일 아침에 체크아웃이고 항공권은 편도로 끊어서 왔다. 이 뒤로는 아무것도 예비해 놓지 않았다. 종수는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차가워진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만 반복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절망 속에 빠져 있는데, 병찬이 손을 잡아 치우며 눈앞에 핸드폰을 흔들어 댔다.
“이거 찾아?”
웹사이트 안에서 볼드체 글씨가 요동쳤다. 병찬의 폰 화면에 왜 최종수라는 이름이 떠 있지. 예약 내역? 무슨 웹사이트지, 설마 뭐 사기당한 건가? 내 이름으로? 하와이안 에어라인이라⋯⋯. 갑자기 첫날 밤의 부스럭 소리가 이해됐다. 오자마자 어지간히 빨빨거린다 싶더니만, 그게 다 내 여권 쌔비려고⋯⋯.
종수는 병찬을 열심히 째려보았다. 병찬은 또 자기가 안 했다는 듯 딴청 피우는 말투였다.
“이 공항이 맞는지 모르겠네. 네 학교 근처로 대충 한 거야. 미국에는 무슨 공항이 그렇게 많냐.”
“여기 맞아.”
종수는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곳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해는 떨어졌고 하루는 저물었다. 골목은 이미 일과를 마무리하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벌써 창문의 불이 꺼진 집도 있었다.
“공항에서 집까지는 어떻게 갈 거야?”
“알아서 가. 내가 초딩이냐? 길도 못 찾게.”
“하긴 찾았으니까 왔겠구나.”
“이젠 뭐 할 거야.”
“어?”
“또 별 시답잖은 액티비티 하자고 안 해?”
“흠⋯⋯. 이 시간에는 다 닫았을걸.”
“⋯⋯.”
“하늘 구경이나 하자. 나와 봐.”
“천문대 그런 데 가자고? 피곤하지도 않냐.”
투덜대면서도 종수는 기꺼이 따라나섰다. 병찬이 낮게 웃었다.
“눈 있고 별 있으면 거기가 천문대인 걸로 하자.”
“그렇게 정한다고 그렇게 되는 거냐고.”
“인천에서는 안 보이는데 하와이는 어떤지 볼까.”
숙소에 딸린 정원이 제법 잘 단장이 된 줄은 알았지만 지내는 내내 병찬에게 끌려다니느라 둘러볼 생각도 못 했는데, 병찬은 이미 샅샅이 아는 듯 울타리 구석으로 직행했다. 읏차 하며 접이의자 두 개를 꺼내온다. 펼쳐놓으니 제법 근사한 선베드였다.
누워서 마주한 하늘에는 과연 별이 총총했다. 지면 가까이 전갈이 기어가고 머리 위에는 백조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땅과 하늘을 비스듬히 이으며 우윳빛의 부연 띠가 강처럼 흘러갔다. 병찬은 드물게 말이 없었다. 종수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박병찬.”
“엉.”
“무슨 생각해.”
“나?”
“⋯⋯.”
“흠. 마당에 농구골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
“아아. 갑자기 농구하고 싶네.”
종수는 그 대답을 무시했다. 병찬이 종수 쪽으로 돌아누웠다. 시선이 뺨에 와 닿는 자리가 괜히 간질거렸다.
“최종수야.”
“⋯⋯.”
“농구하고 싶지 않아?”
“지금?”
“응.”
“⋯⋯모르겠어.”
“무릎 꿇고 울면서 빌어 봐.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그럼 하고 싶은 기분이 돌아올지도.”
“그게 뭔데. 변태 새끼냐? 그리고 네가 왜 내 선생이야.”
“너 슬램덩크 안 봤어? 농구하는 애 맞아?”
“연습할 시간도 모자란데 만화 쪼가리나 처 보는 정신 빠진 새끼가 어딨어.”
“어휴⋯⋯. 징하다 징해.”
“⋯⋯.”
“사실은 뻥이야.”
“뭐가.”
“무슨 생각하냐고 했을 때. 농구하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단다.”
“그럼?”
“낙화 알아?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 아냐?”
“맞아. 이 형아가 또 문학소년이었지.”
“말도 안 돼.”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병찬은 그 시를 끝까지 암송했다. 종수보다는 별 박힌 밤하늘 들으라는 듯이. 종수는 암송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차분히 말했다.
“너 때문에 가야 할 때를 놓쳤어.”
부드럽게 낭송하는 음성이 듣기 좋았다고, 차마 낯간지러운 칭찬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으므로.
“형이 이 시를 몇 번이나 배웠게?”
“두 번? 유급해서?”
“세 번 배웠어. 대학 가니까 교양에 또 나오더라고.”
“지겨웠겠네.”
“들을 때마다 나름 새롭더라.”
“새로울 게 뭐가 있어.”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이 배웠거든. 그다음에 유급하고 공부한다고 병원에서 교과서 보는데 이 시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야.”
“문학소년으로 거듭났냐?”
“딱 낙화만. 내 얘기 같아서.”
“⋯⋯모르겠는데.”
“농구부 사람들이고 가족이고 친구고 아무도 나를 이해 못 하는 거 같은데 딱 이 시만 이해해 주더라고. 낙화 겨우 열아홉 줄밖에 안 된다? 형이 세어 봤어. 열아홉 줄 가지고 어쩜 이렇게 잘 알아 주나. 믿기지가 않더라.”
“오글거려.”
“그때 보던 교과서에 낙화 있는 페이지만 닳았어. 천 번은 읽었을걸.”
“별로 많이 안 읽었네.”
“어쭈구리.”
“이제 그만 읽어.”
“그리고 이번 학기에 인문대 교양을 듣는데. 첫 시간부터 나오는 거야. 무슨 운명인 것마냥. 신기하지?”
“그만 읽으라고.”
“근데 파워포인트 가득 떠 있는 낙화를 보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뭔데?”
“‘이거 사실 개소리 아냐?’ 싶더라. 똑같은 타령을 세 번째 들으면 그렇게 되나 봐.”
옆으로 기대 턱을 괸 병찬의 눈가에 씩 웃음이 번졌다. 뭐가 웃긴지 모르겠지만 별로 중요치는 않았다. 종수는 눈치채지 못한 새 병찬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병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자는 걸 지켜보던 때처럼 자꾸만 걱정이 없어졌다. 이렇게 마음 편할 때가 아닌데 큰일이네, 하면서도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종수는 괜히 입술을 축였다.
“야.”
“야 너 임마 금지.”
“내 부탁 왜 받아 줬어?”
“공짜로 하와이 여행하고 싶어서.”
“구라 까지 말고.”
“어허. 말본새 봐라.”
“⋯⋯.”
“나 입원했을 때 생각 나서. 비슷한 놈이 또 있구만, 얼굴이나 볼까 하고.”
“⋯⋯나인 거 알았지.”
“미국에 농구 유학 간 애가 너밖에 더 있냐.”
“시발⋯⋯. 괜히 갔어.”
“넌 왜 여기까지 와서 죽으려고 했어?”
“⋯⋯.”
“뭐, 말 안 해도 되고.”
“여기가 1등이어서.”
“무슨 1등?”
“죽기 전에 꼭 가 볼 여행지 100선. 하와이가 1위에 있었어.”
“⋯⋯.”
“마지막이니까.”
직전의 여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흐릿했다. 아버지의 은퇴와 종수가 본격적으로 농구에 전념하기 전의 짧은 사이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가족여행 몇 번. 장도고 졸업여행을 가기로 했던 것은 그해 겨울이 유독 매서워 무산되었다. 미국에서는 방학에 한 번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종수가 하와이를 고른 까닭이야말로 병찬이 낙화에 감동한 사연보다 훨씬 우습다고, 얼마든지 비웃을 만하다고 확신했다. 병찬이 박장대소할 거라 믿고서 종수는 왠지 조금 겁을 먹고 바라보았는데, 병찬은 픽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잘 골랐네. 하와이는 한 번쯤은 와 볼 만 하지 아무래도.”
“뭔 투어 가이드 같이 말해. 지도 처음이면서.”
“처음치고는 꽤 가이드 잘 하지 않았냐?”
“전혀.”
“매정하구만.”
“그러고 보니까 너 그때 왜 말하다 말았어?”
“내가 언제?”
“채팅으로 쩜쩜쩜거렸잖아. 하려던 말이 뭐야?”
“아. 이제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뭔데.”
“별거 아니야.”
“뭐냐고.”
“진짜 별거 아닌데.”
“뭐냐니까.”
“음, 너희 아버지께 연락 드린다고.”
종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남의 멱살을 잡아 본 적은 없었는데 지금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개새끼가⋯⋯.”
병찬의 말투는 삽시간에 심드렁해졌다.
“연락처 몰라서 못 했어. 어떻게 수소문을 해 볼 수는 있었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해 줘야 할까? 나도 바쁜 몸인데.”
“희한한 새끼⋯⋯.”
“지는.”
“바쁘기는 지랄.”
“왜. 형 이래 봬도 한가한 몸 아니다.”
“바쁜 새끼가 그 새벽에 랜덤채팅을 하냐?”
“그거야 대학생이 과제를 하다 보면 이것저것 좀 할 수도 있지⋯⋯.”
“자랑이다 자랑이야.”
그리고 둘은 잠시 침묵 속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희미해져 갔는데, 달을 가렸던 구름이 옅어져서였다. 밝고 은은한 달빛이 내리 비추자 지붕과 나무 꼭대기들이 은빛으로 빛났다.
“시 있잖아.”
“응.”
“나도 시인 한 명 알아.”
“네가 한 말 중에 방금이 제일 놀라웠어.”
“짜증 난다 너.”
“누군데?”
“에머슨. 영국 사람이야.”
“에머슨이 뭐라고 했는데?”
종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으로만 글귀를 떠올렸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함은 여름이 짧으리라는 두려움과 같다. 그러나 우리 몫의 즐거움을 느끼고, 과일을 맛보고, 더위를 견디고 나면, 우리의 하루를 살았다고 말하게 된다.”
종수는 이것도 병찬의 말대로 개소리 같은지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아무래도 모르겠다. 종수는 세 번째 배운 게 아니라 겨우 두 번째라서 그런지. 어쩌면 에머슨이 조금은 틀렸는지도 모른다. 물속의 여름을 보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는 못 했을 것이다. 어떤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영영 헤어지지 못하는 계절이 있다. 종수가 말이 없자 병찬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안 알려 줄 거야?”
“어.”
“치사하다 최종수.”
병찬의 눈 속에 달이 빛났다. 병찬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종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손끝으로 빙빙 돌렸다. 종수는 손을 쳐내지 않았다. 손가락이 슬쩍슬쩍 두피에 닿아 따뜻할 때마다 울컥 목이 덩달아 뜨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병찬의 말투는 애써서 가볍게 한 티가 났다. 이제 조금은 보였다. 언제는 아닌 척 애쓰고 있는 것인지.
“하와이에서 못한 거 너무 많다. 다음엔 더 길게 와야겠네.”
“⋯⋯다음이 언젠데.”
“십 년 뒤쯤?”
“머네.”
“그 전에 또 와야겠다.”
“너 혼자?”
“그건 무슨 뜻일까?”
“같이 와 준다고 안 했어.”
“그럼 넌 누구랑 오게?”
“⋯⋯.”
“⋯⋯.”
“⋯⋯십 년 동안은 뭐 할 거야.”
“그러게. 넌 뭐 할 거야?”
종수는 말 대신 물끄러미 병찬을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싱거운 대답을 했다. 다음 십 년도 농구를 하겠지. 말하지 않아도 병찬이 알아듣는 대답이다. 그러나 그들이 농구 속에서 언제까지나 무사하리라고 보증을 서 줄 이는 아무도 없다. 언제 어떻게 코트를 떠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코트에 올라가건 코트에서 내려가건 절절 끓는 마음과 이별하긴 글렀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농구를 하면 해서 아프고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서 아플 것이다.
병찬이 마침내 중얼거렸다.
“종수야, 있지.”
병찬은 오랫동안 망설였다. 안 어울리게 입술을 달싹이기까지 했다. 아주 어렵게 꺼내는 말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농구였으면.”
그러고는 잇지 못했다. 가정법으로 시작한 문장은 결론을 찾지 못하고 맴돌 뿐 영영 완결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도 종수는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네가 계속 살아도 괜찮다는 답을 내가 대리하여 내려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요지였을 것이다. 그 법정에 재판관으로 설 수 있는 건 농구밖에 없으니까. 아니, 너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차라리 네가 되고 싶어. 바닷속에서 죽으려던 너를 내가 대신 하고 싶어.
할 수 없는 말들은 너무 무거워서 추를 넣고 누빈 담요처럼 종수를 짓눌렀다. 둔한 피로가 몸을 덮쳤다. 고작해야 농구가 목에다 줄을 걸어 놓고 조였다 풀었다 하는 이유, 겨우 공놀이가 이렇게 괴로운 이유 같은 걸 알지 못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구나. 우리 둘이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겨우 축복이라니. 줄 수 있는 게 겨우 진심이고.
그게 너무 싫어서 종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마음이 한심하고 슬프고 가벼워졌다. 종수는 약한 목소리로 병찬에게 속삭였다.
“그만두지 마.”
종수는 병찬의 눈을 맞출 수가 없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만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하려는 말이 간절한 만큼이나 무책임하다고 느껴져 말꼬리가 기어들어갔다.
“잘 될 거야.”
용기를 내서 다시 올려다봤을 때 병찬은 열심히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위로를 받는 데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구나. 병찬에 대해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속아 주는 척 하다 보니 같이 꿈나라로 향하고 말았다. 밤하늘에 빨려 들어가듯이 잠 속으로 미끄러져 가는 길이 꼭 물에 들어갈 때와 비슷했다. 비현실적인 달무리를 베일처럼 쓴 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둥글고 빛나는 보름달이었다. 어찌나 둥근지, 농구공은 필히 저 형태를 따라 빚은 것이리라. 하나도 모난 데 없이 편안하게 감기는 곡선을. 차오른 달은 무척 크고 밝아서 어느 해변에서든, 혹은 바다 위 어디에서든 보일 터였다. 먼바다의 파도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깊은 밤에도 쉬지 않고 철썩이며.
병찬이 나름대로 첩보 작전 펼치듯이 스릴 있게 예매한 보람도 없이, 하마터면 돌아가는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새벽이 추워지는 통에 먼저 부스스 깬 병찬이 종수야, 우리 이러다가 입 돌아간다⋯⋯, 하기에 들어와서 마저 잤는데, 깨어나니 둘 다 병찬의 큰 침대였다.
왜 당신이 내 곁에 있죠⋯⋯? 하며 서로를 파렴치하다 매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병찬이 우버를 부르고 종수는 가방에 짐을 말 그대로 쓸어담았다. 전문적으로 갈고닦아 온 민첩성은 뜻밖에 이런 때에도 도움이 되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 차에 타서 보니, 우버 앱이 알려주는 도착 시간은 다행히도 수속을 밟기에 넉넉했다.
차 안이 점점 밝아져 왔다. 백미러 한가운데 붉은 해가 이글거렸다. 빗지도 못하고 나온 병찬의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병찬은 크게 하품을 했다. 입을 가리지도 않고 하품하는 게 천하태평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속 편해 보이는지 정말 세계 8대 미스터리로 포함해 마땅했다. 종수는 점점 머릿속에 유예했던 생각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이는데. 그래서 이 하와이 여행의 종착점은 어디였던 거지. 돌아가면 무엇부터 해야 하지. 나 여기 왜 왔지⋯⋯. 택시에서 내려선 박병찬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우, 집에 못 가는 줄 알았네.”
그러는 병찬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종수의 마음에 염려가 많아서 괜히 흰 눈으로 보게 되는 거라고 넘겨 보려 해도, 말 하나 몸짓 하나가 끊임없이 심기에 거슬렸다. 이를테면, 왜 그렇게 다운된 표정이야? 진짜 공항 못 올까 봐 걱정했구나, 최종수. 무사히 잘 왔구만, 하며 종수의 어깨를 툭 치는 발랄함이. 일말의 섭섭한 기색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워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닌데, 그래도.
“비행기 타면 바로 기내식 주나? 종수 너는 알지? 나보다 많이 타 봤을 거 아냐.”
병찬에게는 그늘 한 점 없었다. 그저 산뜻하고 상쾌한 모습이었다. 뒷머리가 다 뻗치고 올 때 입고 온 흉물스러운 셔츠를 그대로 주워 입고 왔음에도 무척 멀끔했다. 돌아가는 게 그렇게 기쁜가. 하와이 관광도 다 끝났으니 홀가분하게 손 흔들며 떠날 작정인가. 병찬이 걱정 없어 보일수록 종수는 어쩐지 속이 꼬였다. 대꾸가 더 날카로운 말투로 나갔다.
“몰라, 멍청아.”
“체크인하고 아침 사 먹을래?”
멍청이라고 욕해도 병찬은 화도 내지 않았다. 화낼 가치도 없는 꼬맹이를 대하듯이.
“싫어.”
“너 비행기 타서 후회한다. 아 그냥 형아 말 들을 걸 하고.”
“말끝마다 형아 형아 질리지도 않네.”
“어차피 불러 주지도 않으니까 나라도 불러야지.”
“사람을 애새끼 취급을 못하면 죽는 병 걸렸냐?”
“애새끼인 걸 어떡해.”
병찬은 말갛게 웃었다. 해사하게. 창자에 매듭이 지어져 뒤틀리는 것 같았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화산 터지듯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종수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너랑 있으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병찬이 난감한 체하며 머리를 긁었다. 하나도 진지하지가 않은 모습이었다. 시간은 일 초 일 초 흘러가고 있는데 병찬은 송별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고수했다. 종수의 출발 시간이 먼저라 둘은 종수가 들어가야 하는 심사장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국제선과 국내선은 청사의 서로 다른 층으로 분리되어 있어 병찬이 탈 국제선이 더 넓은 아래층이었다.
병찬이 장난스럽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종수는 홱 뿌리쳤다.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앉지는 못했다. 몸을 최대한 돌리는 게 종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병찬이 종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야아. 그러지 말고 이것 좀 같이 봐 봐.”
“뭔데 또!”
“형 면세품 뭐 살지 빨랑 골라 줘.”
“면세품 같은 소리가 나오냐?”
“형은 들어가서 삼십 분 정도 남는단 말이야. 이거 봐. 역시 블로그가 정리가 잘 돼 있다. 국제선 터미널 면세점은 꽤 크대. 하와이 오면 다들 꿀 사 간대. 오, 프로폴리스. 이거 목 건강에 좋다던데. 엄마 이거 사다 드릴까? 아니면 어제 그 선크림 있으면 살까?”
병찬은 마냥 즐겁게 읽어 내려갔다. 종달새가 지저귀는 듯한 톤으로. 정말 하와이에 놀러 왔다고, 아니, 그보다도 종수를 놀리러 왔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종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서성거렸다. 병찬이 주섬주섬 따라 일어섰다.
“이제 들어가 보게?”
“⋯⋯.”
“앗. 진짜 시간 됐네. 조심히 가라.”
“⋯⋯.”
“집에 잘 들어갔다고 채팅 보내고.”
“⋯⋯.”
“재밌었다, 종수야.”
종수가 표정을 싹 굳혀도 병찬은 끈질기게 만면에서 미소를 내리지 않았다. 헤어지는 게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끝까지 명랑하기로 결심한 모습이 공을 톡 쳐서 빼앗아 가던 모습과 판박이로 겹쳤다. 단 한 번 상대로 만난 경기였다. 단번에 종수의 코앞까지 들어오더니 너무나 손쉽고 간단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종수가 몰고 가던 공을 낚아채 가던 모습. 그러고선 돌아보며 윙크를 날렸다. 이제야 완전히 기억이 돌아왔다. 그때도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 바보 만드니까 좋냐?"
"응?"
"알아들었잖아. 어딜 모르는 척이야. 재수 없게.”
사람을 진심으로 발로 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더는 참아지지 않았다. 자꾸만 언성이 높아졌다.
“너 때문에 다 망쳤어.”
“종수야. 사람들 쳐다본다.”
“지금 시발 그게 문제냐?”
“아니야?”
“왜 이딴 짓을 처 하냐고!”
종수는 격렬하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앙갚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가장 분했다. 병찬은 놀라거나 혼란스러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눈을 조금 크게, 동그랗게 뜨고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가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병찬을 동요하게 할 수 없는 것 같아 도리어 더 조급해졌다. 병찬의 속 안에 들어가서라도 다 헤집고 흔들어 놓고 싶었다. 그 평정을 망치로 깨부수고 싶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그럴수록 제어가 안 되는 말이 계속 치밀었다.
종수는 발을 굴러 가며 목이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인파가 금세 모여들었다. 둘을 동그랗게 에워싼 구경꾼들이 입을 가리고 웅성거렸다. 그런 것쯤 종수는 하나도 상관 없었다. 창피한 마음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같잖은 동정심이었냐고, 설마 네가 나를 이해하는 줄 알았냐고, 내가 너 같은 줄 아냐고 일갈하고 나니 금방 목이 쉬고 말았다. 그래도 종수는 끝까지 울분을 토해냈다.
“뭐? 농구가 되어 주고 싶어? 농구가 우스워? 지가 뭐 된 줄 알아. 넌 시발 아무것도 아냐. 어?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형광 녹색 조끼를 입은 경찰이 인파를 뚫고 들어와 둘 사이를 막아섰다. 종수는 반항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연행한다면 그대로 끌려갈 결심까지 되어 있었다.
상황을 수습한 것은 병찬이었다. 못하는 영어로 에브리띵 오케이, 돈 워리 돈 워리, 손짓 발짓에 끝내는 아이솔레이션 사인 같은 따봉까지 해 가며. 경찰이 가고 나서도 종수는 병찬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울화와 서러움이 복받쳤다. 눈물 한 방울이 맺히려는 걸 느끼고 종수는 황급히, 최대한 야멸차게 돌아섰다. 커다란 물방울은 결국 딱 하나가 흘러내렸다. 닦으면 들킬 테니 닦을 수도 없었다. 목이 몹시 아프게 메었다. 커다란 쇠구슬을 삼킨 것처럼. 아무래도 프로폴리스는 종수한테 필요할 것 같았다.
종수는 비린 피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짓씹어서 울음을 참았다. 병찬은 억지로 돌려세우지도, 빠르게 걸어가는 종수를 멈춰세우지도 않고 놀리지도 않았다. 더는 웃지도 않았다.
“그래 미안. 맘껏 원망해.”
등 뒤에서 들려온 그 말이 끝이었다. 종수는 울지 않으려고 내내 애쓰면서 심사장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와이에는 피서객이 어찌나 많은지 검색대 줄이 여러 번 꺾여 있었다. 다시는 병찬을 보지 않겠다 다짐하던 마음도 긴 줄을 지나오는 동안 조금씩 진정이 됐다. 들끓던 감정이 식혀지자 이성이 돌아왔다. 잘 들어갔겠지. 설마 프로폴리스며 기념품에 한눈 팔다가 비행기를 놓치지는 않겠지. 박병찬이라면 그러고도 남을지 모른다.
종수는 게이트를 찾아 국내선 터미널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하늘다리를 건너다 보니 벽이 유리로 된 구간이 나왔다. 국제선 여객터미널이 아래층이라던 것을 떠올리고 종수는 잠깐 머물러 서 있었다.
거짓말처럼 작은 실루엣이 보였다. 면세점을 바로 앞에 두고 기둥에 기대 선 모습이. 들어갈 생각도 없어 보여 종수는 의아했다. 종수가 보고 있는 줄 까맣게 모르는 병찬은 이내 주르르 미끄러졌다. 주저앉아서, 앉는다기보다도 웅크려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작게 말았다. 그대로 머리를 팔에 파묻었다. 그러고 있는 게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 오싹해졌다. 입원했을 때 침대에서 혼자 하던 자세일까. 낙화였나, 그 시조차 위안이 되지 않을 때마다. 어슬렁거리던 공항 보안관이 거듭 눈여겨보다 다가갔다.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것 같았다. 병찬은 고개를 저었다. 보안관이 떠나고 병찬은 도로 혼자 남겨졌다.
그렇게 의연해 보였는데. 내심으로는 불안했을까. 무서웠을까? 박병찬이 무서운 게 있으리라곤 상상이 안 되었다. 하와이에 있는 내내 호기롭고 쾌활하던 병찬이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었나? 무슨 마음으로 집 안의 칼을 치우고 종수가 돌아갈 표를 샀을까.
병찬은 너무 작아 보였다. 그제야 안아 주고 싶었다. 어쩌면 종수는 그 바닷속에서 정말 죽었고 이 공항은 내세인지도 몰랐다. 모든 생에서는 전생과 다른 선택을 하나씩은 하게 되는 것이다. 내 목을 조르려고 든 손으로 다른 사람을 안아 준다든지 하는.
종수는 유리벽에 손을 대 보았다. 속삭였다. 무섭게 해서 미안해. 그럴 수만 있다면 종수가 모르는 시간까지도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었다. 병찬이 겪었을 시간이 까마득히 길게 느껴졌다.
입김이 서려 유리를 뿌옇게 만들었다. 종수는 그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미안해. 미안해. 나를 원망해. 너 말고 나를 원망해. 그러다 보니 병찬이 보이지 않게 되는 바람에 손바닥으로 유리를 문질렀다. 병찬은 이미 가고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았고 항공기 납치 테러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기내식을 먹고 치명적인 식중독에 걸리지도 않았다. 천재는 요절한다지만 자살은 요절로도 안 쳐 줘. 너는 아직 멀었다, 종수야. 박병찬이 하와이에서 했던 말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불꽃놀이를 보면서 어깨에 고개를 기댔을 때였다. 그 말은 꿈결 속에서 들어서 감미롭고 다디달기만 했던 주제에 강제하는 힘이 있었다. 언령이 깃들어 있는 말이었다. 종수는 다른 식으로도 요절하지 못하는 주박에 걸린 것이다.
게다가 그 힘의 지배라도 받았는지 병찬이 시킨 대로 순순히 하고 말았다. 공항에 내려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타고,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채팅 앱을 열어서 말을 걸었다. [잘 내렸어.] 그러자마자 ‘1’ 표시가 사라졌다. 단번에 읽히자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졌다. 종수는 일단 폰을 덮어 버렸다. 농구할 때는 찰나에 더블 클러치도 과감히 던질 수 있었지만 이럴 때만 되면 순발력이 없는 편이었다. 손 안에서 화면이 몇 번 밝아졌다. 손 틈새로 병찬이 뭐라고 더 하는 것을 그냥 놔두었다. 하고픈 말을 찾을 때까지는 그렇게 두기로 했다.
돌아온 불 끈 집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곧바로 자리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해 보아도 머릿속이 온통 박병찬이었다. 아직도 걔가 무슨 생각으로 거기 나타났는지 모르겠어. 뭐가 좋다고 그런 걸 덥석 응하지. 도대체 진의가 뭐였을까. 아니면 아무 꿍꿍이도 없었던 걸까. 병찬의 머릿속은 바닷속처럼 그저 평화롭게 생긴 걸까? 어쩐지 그것도 말이 되었다. 인어공주가 살 법한, 열대어가 살랑살랑 지나가고 산호초들이 인사하는 오색찬란한 만화경. 이제 종수는 디즈니에서나 보던 그런 풍경이 실제로는 어떤 모습인지를 알았다. 그곳에 있던 병찬이 눈을 감아도 계속 떠올랐다.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마음이 달아 도저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 바코드가 붙은 철학책들이 여전히 책상에 쌓여 있었지만 책도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종수는 손가락을 꼽아 셈해 보았다. 이틀 연체됐을 것이다. 뜬눈으로 뒹굴다 종수는 불을 켰다.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종수가 두고 떠났던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종결되지 못했다. 깨끗하게 쓸고닦은 공간에 종수의 삶이 무방비하게 풀어헤쳐져 있었다. 정갈하게 매듭지어지지 못한 채로. 청결한 작별에는 끝끝내 실패했다. 먼 길을 떠났으나 해내지 못한 것만 하나 늘어 돌아오고 말았다. 가면 갈수록 미결이었다.
부모님께 남긴 유서가 책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문득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사를 가장하려고 했던 주제에 이것밖에 안 되는 아들이어서 죄송했고 정말 감사했으며 사랑했다는 유서를 남겨 놓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끝에는 줄줄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고마웠다고 써 놓았다. 유소년 농구교실 선생님, 장도중과 장도고 감독님, 같이 뛴 선수들, 대학 코치⋯⋯.
쓰지 않을 수 없는 유서였지만 남겨 놓을 수도 없는 유서였다. 종수는 종이를 들고 그대로 박박 찢었다. 구겨서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 던진 종이 뭉치는 제대로 명중했다. 원래의 계획을 완전히 폐기했냐고 물으면 그건 종수 자신도 몰랐지만 적어도 유서의 수신인에 박병찬을 포함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는 선뜻 좁힐 수 없었다. 내 계획을 망친 사람이라고 쓸까. 바람처럼 나타나서 나를 가로막은 사람. 눈을 감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바닷속이 생긴 것은 병찬의 공로였다. 한동안은 물결이 아른거릴 것이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쓰레기통 뚜껑이 진자처럼 흔들렸다. 그 진동에 옆에 있던 농구공이 종수의 발치로 데구르르 굴러나왔다. 가지런히 박음질한 네 개의 까만 곡선이 반듯하게 정렬되었다. 공은 앞면으로 종수를 마주했다. 농구공에 앞면이 어딨느냐고 모르는 사람들은 말하겠지만 농구를 해 봤다면 누구든 알았다. 공은 풍부한 표정을 지었다. 선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 왔다. 어떤 날은 매서운 시험에 처하고 때로는 다정하게 달래 주기도 하지만 그저 담담히 묻는 경우도 있었다. 공이 종수를 응시했다. 단순 명백한 물음이 던져졌다. 소리 없는 질문이 병찬의 목소리로 들렸다.
자, 이제 어디로 갈래?
핸드폰은 택시 안에서 난리더니 이후로는 대체로 잠잠했다. 채팅을 열어 보니 병찬이 몇 마디 더 해 놓았다. [형 없어서 심심해?] [집에 들어갔지?] [뭐 좀 먹었어?] [자냐?] 그런 것들이 왜 궁금하냐고. 종수는 괜히 심술 맞게 [야] 하고 짧은 답을 보냈다. 바로는 아니었지만 금방 ‘1’ 표시가 없어졌다. 하나가 사라지면 혼자가 아니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금방 답장이 왔다.
[엉]
병찬에게 뭐라고 할까. 어디로 갈까. 종수는 마지막으로 망설였다.
[?]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야]
[최종수]
종수는 피난처가 없어도 모든 봉우리를 종주해 냈어야 했다. 어떤 파고에도 부서지지 않는 절벽이었어야 했다. 종수의 한 몸 밖에는 돌아갈 장소가 없어야 했다. 오아시스 없이 달구어진 사막에서도 타들어가지 않고 건널 수 있어야 했다. 또 다른 종수와 완벽하게 합치될 때까지. 그림자와 아주 작은 오차도 없이 맞닿고 맞물려 그 속으로 녹아 사라질 때까지. 그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 있어야 했다. 종수라는 사람을 버리는 게 종수의 기쁨이었어야 했다. 그 임무가 실패한 것은 종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사람 때문이었다.
내가 나보다 더 미워할 사람. 잠 못 드는 밤마다 그날 당신이 나를 살려 놔서, 내가 놓아주지도 못하게 해서 또 이렇게 만들었다고 저주할 사람. 기억할 만한 밤하늘과 보름달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사람. 공기보다 물의 저항이 더 가벼웠던 이상한 현상과 아무 용기를 내지 않아도 쉬어지던 숨을 함께 증언할 사람. 부서지지 않는 부드러운 파도를 맞잡고 춤추었던 바다가 나 하나를 위한 까만 동굴이 되어 주기는커녕 한없이 고집스럽게 파랬던 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네 잘못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네 탓이야. 그렇다는 걸 너도 알아야 해. 이 말을 너도 들어야 해.
네가 필요해.
박병찬이 필요했다. 그 몸짓. 그 체온. 그 목소리. 그 이름.
[박병찬]
종수는 화면을 켠다. 불이 밝아지면 입력창에 다섯 글자를 새겨넣는다. 심호흡도 준비 동작도 없이, 엄지가 이끄는 대로 다짜고짜.
미워할 사람이 되어 줘.
[나랑 사귀자]
마침표를 찍지 않고 보낸다.
Aloha kāua
♪♪
Love to you an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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