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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의 사랑을 믿노라! (2)(完)

이현x승주 경찰AU


편경장, 너 아버지가 소망서 경제팀 계장이라며? 왜 그동안 얘기 안 했어?

그러니까 그날은, 편승주의 지구대 근무 1개월 기념 환영회 겸 매달 있는 회식 날이었다. 이현이 서에 처음 출근하기 이틀 전이기도 했다. 묵묵히 구석 자리에서 제사를 지내는지 고기를 먹는지 모를 편승주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 그거를… 꼭 얘기를 해야 하나요? 승주가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반대편 자리에 앉은 박경장이 목소리를 크게 높이며 웃었다. 아 그럼요~ 나 같으면 엄청 자랑했을 거 같은데? 멋있잖아요? 부자가 두 분 모두 경찰인 거. 편승주는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속이 울렁거렸다. 표정이 굳어가는 걸 느꼈는지 삽시간에 회식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뭐, 됐어. 우리 지구대에서 일 잘하는 편경장이 중요한 거지. 느그 아버지 뭐 하시냔 얘긴 뭐 다 옛말이지. 야. 먹어라 먹어. 다 식겠다. 편승주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억지로 식사를 마쳤다. 집에 오는 내내 속이 더부룩 했고, 결국 집에 도착하자마자 속을 다 게워 냈다. 지능 수사팀 의무 복무 기간 동안 있었던 일이 천천히 머릿속을 지나쳐갔다. 내일 쉬는 날이라 다행이다…. 양치만 겨우 하고 침대에 몸을 내던지고 지친 몸을 웅크려 까무룩 잠들었다.

회계사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살던 아버지가 돌연 경찰이 되겠단 얘기는 집안에서 꽤 큰 이슈였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입에 풀칠할 정도로 벌어뒀으니까. 그냥. 우리 가족 사는 땅인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줄면 좋잖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곤조곤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곰곰 생각하더니 여보는 내 삶 말고 다른 사람 삶도 구하려고요? 했고 아버지는 얼굴이 새빨개져 호통을 쳤다. 이 여편네가. 조용히 하고 밥, 밥이나 마저 먹어. 반 공기도 안 먹고 무얼 그런걸 물어…. 식탁에서 웃음이 활짝 폈다. 승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아버지 일을 따라가려고 세무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가 꽤 멋있어 보였다. 그런 승주의 눈빛을 읽었는지 아버지가 목을 가다듬고 한 마디 더 얹으셨다. 그리고, 세무사도…. 특채 과정이 있댄다. 뭐, 순경부터지만. 넌 어리니까 오히려 시작이 빠르다고 할 수 있지.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는 세모눈을 떴다. 여보. 우리 승주 지금 시험공부 잘 하고 있는데 왜 헛바람을 넣어요? 아니, 그냥 궁금할까 봐. 말해 준 거지. 헛바람은 무슨…. 아버지의 의도가 어찌 됐든. 승주는 준비하던 시험은 시험대로 마저 잘 보고… 그런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편승주는 어떤 일이든 착실하고 똑 부러지게 잘 해내는 편이었고, 암기량이 그렇게 많다는 세무사 시험을 한 번에 붙었다. 아버지 덕도 컸지만, 자는 시간 빼고 달달 공부만 한 보람이 있었다. 특채 과정을 준비하기 전에 병역의 의무를 하러 갔고, 그동안 공무원 시험에 필요한 자격증도 미리미리 따뒀다. 물론 부모님께는 비밀로 했다. 시험 붙자마자 군 문제 해결하는 거 보니 너네 아버지랑 똑~같다며 웃던 어머니 곁에서 승주도 같이 웃긴 했는데… 약간 양심에 찔렸다. 말을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속이고 있는 것 같아서…. 운전면허 1종부터 시작해서, 어학 점수, 한국사 시험까지 보고 나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제대하고 승주는 아버지와 똑같이 저녁 식사를 하던 식탁에서 저도 경찰 할래요. 필요한 자격증 다 해뒀어요. 하고 폭탄 고백을 했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떡 벌리더니 아버지의 허벅지를 때렸다. 으이구, 이 양반. 헛바람 집어넣을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야 했어. 어머니는 반대편에 앉은 승주의 손을 꼬옥 잡고 다치지 말고, 네 몸과 마음 다 꼭 지키며 일해야 해. 해주셨다. 승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

중앙 경찰 학교 높게 걸려있는 슬로건을 보니 승주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탄탄히 준비된 자격증과 아버지의 조언을 살짝 얹어 쉽게 통과한 시험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체력 시험이었다. 낙제는 절대 하지 말고, 고점을 노리다가 다치지만 말자가 승주의 목표였고. 시험 날 승주는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다람쥐 같았다. 물론 윗몸 일으키기와 팔굽혀 펴기, 악력은 좀 힘들었고. 달리기만 잘했다. 그래도 낙제점은 하나도 없었고, 체력 시험이 약한 승주치고는 꽤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을 받으러 들어가는 승주가 걱정되어 마중을 나온 어머니와 아버지를 품에 꼬옥 안고 승주가 씩씩하게 다녀올게요 했다. 사는 게 그렇게 귀찮고, 숫자랑만 놀던 승주가 거리낌 없이 하고 싶던 일이 생기는 건 기꺼웠지만, 그만큼 걱정도 많았다. 어머니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손을 높게 흔들었다. 다치지 말고! 승주도 마주 보고 팔을 흔들었다.

중앙 경찰 학교는 기숙사제이기도 하고(당연하게도) 시골에 톡 떨어진 지리적 특성답게 함께 지내는 동기들과 친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승주와 같은 방을 쓰는 사람 중 20대 초반은 승주밖에 없었고, 그런 승주가 기특하고 신기한지 동기들은 항상 승주에게 쫄쫄 다가와 물어보는 것도 많았다. 와, 그럼 중경은 같이 다니고 졸업하면 바로 수사 경찰이 되는 거야? 개 멋있네. 우린 지구대에서 좆빠지게 구를 때 개 멋있는 수사관이 된다니…. 승주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래도 6, 6개월은 지구대 근무해요. 그리고 저, 저희 아버지도 경찰이셔서…. 그게 엄청 멋있어 보여가지구…. 동기들은 그 소리를 듣고 펄쩍 뛰었다. 진짜? 아버지도 경찰이셔? 야! 진짜 대박이다! 얘들아! 일로 와봐! 승주네 아버지도 경찰이시래! 야, 너네 아버지도 형사라고 하시지 않았냐? 승주야, 너네 아버진 어디서 근무하셔? 소, 소망서 경제팀에 계세요. 와 진짜? 그럼 혹시 아버지도 특채셔? 네. 회, 회계사…. 와~ 대단하시다. 그 돈을 포기하고 경찰이 된다는 건 진짜 사명감 아이가? 헉. 시발. 사투리. 이거 고쳐야 되는데. 승주는 간만에 느끼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마냥 싫진 않아서 키득거렸다. 반년 동안 집에서 떨어져 혼자 지내는 걸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동기들은 승주를 잘 챙겼고, 승주 또한 그것이 싫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동기들에게 의견을 제시했고, 그들은 꼬인 것 하나 없이 아 그르냐? 한마디 하며 승주에게 다시 봐달라고 했다. 서로 같은 목표를 갖고 달리는 동기 사이에서 그 정도 피드백은 아프지도 않다는 것처럼 웃었다. 그래서 그럴까. 같은 집단에 있으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착각을 했다. 애석하게도.

아, 안녕하세요…. 편승주입니다.

6개월의 특채 시보 기간을 가까운 지구대에서 보내는 동안 배운 것도 많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중경부터 이어오던 ‘같은 식구’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서 그럴까. 첫 출근을 하고 들어선 사무실은 승주의 인사도 듣지 않고 각자 바쁜 모습에 더 긴장됐다. 쭈뼛쭈뼛 입구를 막고 서있자 뒤이어 들어오던 경사 둘이 승주를 훑어봤다. 아, 편승주? 편순경 맞죠? 네, 네. 안녕하세요. 아 오늘이었구나. 이쪽으로 와요. 커피 마실래? 카페인을 딱히 먹고 싶진 않아서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먹기 싫음 말고. 여기가 자리고요. 어… 일단 지금 좀 정신없어서. 기다려볼래요? 승주는 자리에 멀뚱멀뚱 앉아 주변을 살펴봤다. 바쁘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모든 사람이 예민해져 전화에 대고 소리치는 게 보였다. 범죄자를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조금 뒤 이것저것 매뉴얼을 챙겨온 사람이 자신을 김경사라고 소개했다. 어쩌다 소망서를 지원했어? 여기 진짜 불지옥 근무지인데. 중경 성적도 잘 받았다며. 승주는 아, 아버지가 소망서에 계셔서…. 라고 답했고. 꽤 부산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승주를 쳐다봤다. 승주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 편… 편씨면…. 편계장님? 왠지. 비슷하네. 파티션 너머로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고, 승주는 머리가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난 생긴 건 어머니랑 판박이라고 했는데. 어떤 면이 닮았단 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서 승주는 뭐, 뭐가 비슷해요? 라고 물었고. 승주의 앞에 있던 김경사가 승주의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야, 너 왜 그래. 오자마자 사고 치고 싶어서 이래?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단순히 궁금했던 건데…. 승주는 틀어막힌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을 삼켰다.

야, 너 이거 다 마실 때까지 집 못 간다니까? 우리 퇴근 좀 하자~

승주는 식당 테이블 위에 놓인 사발에 잔뜩 섞인 알코올 집합체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냅다 들어 목구멍으로 액체를 쑤셔 넣었고, 반도 못 삼키고 뛰쳐나가 식당 앞 가로등을 붙잡고 다 게워 냈다. 뒤늦게 뛰쳐나온 김경사가 승주의 등을 두드렸다. 에휴. 가자. 집에. 승주는 택시 뒷자리에 꾸겨 넣어진 채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근무 시작한 지 1년 6개월이나 지났지만 적응할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조국이 믿는 젊은 경찰관들이 왜 매번 회식 자리에서 술을 되는대로 막 섞어 마셔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늘 숙취에 시달려 휴일을 헛되게 날려 먹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득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집에 기어들어가 씻고 눕자 휴대 전화에 뜬 어머니에 문자가 보였다. 아들!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쉬지? 엄마랑 디저트 가게 갈까? 승주는 손을 겨우겨우 뻗어 답장을 입력했다. ‘응, 근데 같은 팀 사람들이랑 점심 먹기로 해서. 오후에 봐요.’ 살면서 할 생각도 없던 거짓말이 겹겹이 쌓여간다. 사명감으로 쌓아온 탑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지능수사팀 생활을 3년 정도 하자 승주는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놨다. 무뎌진 사명감은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지…. 란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고, 그런 넋 놓은 정신이 실수를 불렀다. 탕비실에 불려 가 왕창 혼이 나고 나서는 기진맥진 해져서 자리에 돌아갈 생각도 안 들었다. 코코아 한 톨은커녕 커피믹스만 가득한 탕비실에 덩그러니 앉아 찬물을 마시던 종이컵을 씹었다. 멍한 귓가에 소음이 흘러들어왔다. 어차피 특채라 5년 채워야 하는데, 뭐 별 수 있겠어 지가. 싫으면 옷 벗던가. 우리 서 들어온 것도 지 아버지 품에 숨으려고 온 거 아니야? 낙하산으로? 말조심해. 암만 그래도 편계장님한테 혼난 걸 걔한테 풀어? 그것도 니가 인수인계 잘못한 거라면서. 적당히 해. 애 잡겠다. 아니 그니까. 힘들면 옷 벗으라 그래. 지도 잘못한 거 알아서 버티는 거 아니야? 걔 잘못이 뭐가 있다고. 주고받는 말은 형태가 없지만 무게추를 잔뜩 품고 승주의 어깨 위에 눌러 앉았다.

눈물이 핑 돌아 앞을 가리는 와중에 머릿속에는 며칠 전 어머니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아버지를 따라, 사람을 구하게 된 승주가 기특해. 장하고. 품에 작은 바움쿠헨을 잔뜩 든 상자를 안겨주며 그렇게 말하셨었다. 집에 가서 먹어. 바움쿠헨은 나무 케이크란 뜻이다? 나무처럼 땅에 깊게 뿌리 내린, 든든하게 큰 아들이 자랑스러워. 건네주던 어머니의 표정이 눈물방울에 맺혀 차디찬 바닥으로 떨어졌다. 꿈을 크게 가져야 부서지는 조각도 크다고 했는데, 편승주는 너무 산산이 부서져 조각을 모아내기도 어려웠다. 깨진 파편 위를 걷는 기분을 매일 느꼈다. 그렇게 아픈 삶을 5년을 꼬박 채우고, 지구대로 도망갔다. 뻔하고 재미 없는 얘기였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격지심이었으니까. 내가 아버지만큼 멋진 사람이었다면 그럴 일 없었겠지. 하는.


그럼 지난 두 달 동안 낯가림 하신 거예요? 라는 질문을 하든가 말든가 옆에 있던 진순경이 편경장 입안에 쌈이 밀어 넣었다. 질문에 승주가 고개나 두어 번 끄덕이자 아~ 진짜 난 또. 제가 뭐 실수한 줄 알고 엄청 걱정했거든요? 그쵸 박경장님 어쩌고저쩌고 쫑알쫑알 김순경은 도대체 뭘 먹긴 하는지 입에 음식을 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많았다. 지난 한 달 동안 이현과 승주는 주간에서 야간으로 넘어가는 근무일 동안 매일 저녁을 같이 먹었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가끔 야간 근무가 끝나면 서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승주가 손님 방을 내어주기도 했었다. 덕분에 승주는 혼자 한 달 동안 버텼던 지구대 생활보다 이현과 함께 보낸 2주 만에 원래 성격대로 돌아왔다. 그 뒤로 2주는 할 말 따박따박하고. 종종 장난도 치고. 왠지 사람이 귀찮지만 또 잘해주면 금방 웃는 겉과 속이 똑같은 편경장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런 편경장의 변화에 지구대 사람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다들 그 어떤 날보다 신이 나 산책 나간 강아지처럼 펄쩍거렸다. 그들이 그렇게 신난 동안, 태생이 거짓말 하나도 모르고 살아왔던 승주는 이제야 어깨에 올라와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니까… 원래 궤도로 돌아오는 동안 함께 해준 이현에게 착실히 호감도가 쌓였단 얘기다. 그게 승주 혼자만의 감정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일 먼저 어깨의 짐을 내려놓는다면 그것이 이현이었으면 했다. 이런 얘기를 듣고도 그대로 친구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혼자 속에 품고 이대로 계속 지내는 게 제일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부딪혀서 속을 어지럽게 했다. 맨정신으로 앉아 있기엔 속이 복잡해서 눈앞에 있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소주잔을 냅다 쥐고 입에 털어 넣으려고 하자 다들 벌떡 일어나 말렸다. 어어, 편경장님! 사이다 드세요. 이거 소주잔이에요! 누가 편경장님 술 드렸어요? 아이고, 아서라. 우리 편경장님~ 소화도 잘 못해서 밥도 깨작깨작 드시는 분이 술 드시면 술병 나요~ 암만 내일 연차 쓰셨다지만. 요건 아니지~ 자, 다람쥐는 사이다나 먹읍시다~

아 차가.

응? 차가워요? 아닌데. 미지근한 코코아인데. 열나나?

승주의 이마에 손을 대보더니 이현이 흠… 하는 소리를 내며 가만 앉아있었다. 느리게 눈을 꿈벅이는 시야에 이현의 이목구비만이 꽉 차게 들어왔다. 사이다나 먹으라던 김순경과 박경장은 승주가 그동안 미안했어요…. 하고 웅얼거리자 요란을 떨면서 우리 편경장 누가 괴롭혔냐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가게 사장님한테 사과는 진순경이 했다.) 오늘 눈물 쏙 뽑고! 내일 다 털어냅시다! 하며 한잔 두잔 편경장의 소주잔이 쌓였다. ‘그날’ 이후 알코올 냄새도 맡기 싫었던 승주는 아까의 복잡스러운 마음과 울컥거리는 감정이 올라오자 아부지가 알코올은 홀수 잔으로 받으랬어요…! 하며 냅다 소주를 원샷했다. 그걸 바라보는 이현의 표정이 좋진 않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이현이 손등을 톡톡 치며 많이 마시지 마. 라고 작게 속삭인 말 때문에 심장이 더 콩닥거렸기 때문이었다. 들리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며 생각을 하기 싫어서 냅다 알코올로 이성을 마비시켰다. 잠시 졸려 눈을 감았다 뜨니 이미 집 소파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자신이 보였다. 혹시 몰라 저번 주에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몸을 힘겹게 일으키니 이현이 곁에 앉았다. 어우. 술 냄새. 그렇게 말하며 살짝 찌푸린 미간을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또… 울적해서. 코끝이 핑 도나 싶더니 금세 눈물이 찼다. 어어. 울라고 한 말은 아닌데. 왜 울어요? 승주야. 울지마. 허둥지둥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러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승주는 더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조금 울면 그치겠지 싶었던 승주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계속 눈물만 죽죽 뽑아내자, 이현은 문득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됐다. 고작 술냄새 난다는 말 들은 것치고는 너무 서럽게 울길래.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해줄래요? 하니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조심히 끄덕였다. 얘기를 하겠다고 해놓고 한 번 터진 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자 난감해졌는지 이현이 끙… 소릴 내다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지구대에 오면 하나씩 나눠주는 경찰수첩이었다. 말하기 힘들면 써 볼래요? 볼펜도 있어. 여기 적으면 내가 다 혼내줄게요. 그다음에 음…. 물건 함부로 태우면 불날수도 있으니까. 같이 찢어 버릴까요? 파쇄기라도 빌려올까? 승주는 이어지는 말에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볼펜을 꾹 쥐고 있더니 작게 웃었다. 눈물이 수첩 위에 떨어져 이현이 적어놨던 메모는 엉망이 됐고, 승주의 얼굴을 말할 것도 없이 눈물범벅에 팅팅 부었다. 어 웃었다. 울다 웃으면 뿔난다고 했는데…. 승주 어떡하지? 그, 그게. 뭐예요. 바, 바보 같애……. 승주는 손등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이현의 수첩을 빤히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 지 갈피도 안 잡혔지만. 당장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작게 끄적이고 수첩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어서. 수첩 뒤에 숨을 수 있다면 숨고 싶었다. 그럼에도, 당신도 날 사랑하길. 나를 구해낸 사람을 위한 내 사랑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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