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rs in the night

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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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과제.

진부해.

 

 

 여자는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장신구 하나 없는 마른 손가락으로 불 들어오지 않는 검은 화면을 두 차례 톡, 치더니 품 속에 핸드폰을 넣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를 무감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남자의 일상에 여유란 가뭄 속 드물게 내리는 소나기 같다는 것을 유년시절부터 이해했음에도 둘 사이 자리 잡은 칭호로 하여금 드는 씁쓸함이 유독 서리 같은 공백을 만들었다. 명백하게 이 관계 속 흉작을 이룬다. 제 눈앞에 존재하는 순백의 것처럼 은은한 공허함이 자리 잡았다. 오감을 자극하는 왁자함이 유난스럽게 존재하지 않던 하루였다. 여자 홀로 존재하는 청춘의 방이 불편한 침묵으로 이루어졌다. 여자는 시작조차 없는 결과물을 날카롭게 쏘아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무채색의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곤 길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답답함이 여자를 맴돌았다.

 

 

 

*

 

 

 

뭐 해?

 

 

 여자는 다시금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진작 껐어야 할 핸드폰 화면엔 여전히 불이 들어와 있다. 목맬 정도로 간절하진 않았지만, 기대하는 것을 쉬이 무시할 수는 없던 것인지 여전히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를 눈앞에 내버려 두며 답장에 집중한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었고 간원처럼 여자의 속도를 늦춘다. 짙어지는 밤과 대비되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추락하는 천왕성에 맞추어 발 구르는 소리가 한 번 들려온다. 탁, 적막 속 유일한 여자의 소음이다.

 

 

진부 하다기에 새로운 거.

 

 

 잔잔한 알림음. 주관적인 흐름은 늘 객관적이었던 남자에 의해 기준을 잡아간다. 지루함으로 가라앉으려는 공기를 다시금 생동하게 만드는 것이 일상과 상이한 문장이었다. 시간이 지나 꺼져버린 핸드폰 화면을 켜놓고 붙드는 여자는 고개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자신이 남자에게 던지던 물음표와 다른 성질이다. 역으로 받는 의문. 유추하는 남자의 마음, 혹은 행동. 혼자 내놓는 스무고개에 제멋대로 답과 오답을 판가름한다. 추상과 맞닿아 있던 여자에겐 꽤 버거운 난제였다. 돌고 돌아 생각하는 사고회로는 늘 답을 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안 바쁘면 잠시 나와, 과방 앞이야.

 

 

 상대 없는 수수께끼를 홀로 푸는 시간 사이, 울리는 또 다른 알림음. 추리를 포기하고 이내 출제자에게 답을 받아내는 것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길지 않았고, 그렇다 해서 짧지도 않은 그 문장에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여자의 은빛 눈이 제 크기보다 더욱 확장된다. 말하지 않아도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익숙한 고양감. 침묵 속에서 은은히 들리는 인기척 같은 것에 여자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기민하게 돌아가는 고개가 문으로 향한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를 다시금 내버린 채 여자는 문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낮은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둔탁하다. 한 걸음씩 여자의 독백이 묻어난다. 정말 너야? 진심으로? 이 시간에? 캐묻는 물음표의 근본이 확연한 기대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데, 여자의 고민은 1초에서 끝이 난다. 당장 핸드폰을 붙잡고 남자에게 답장을 더 보내기엔 이미 자신의 발은 이 방의 출구와 너무 가까이 닿아있다. 입술의 표피가 말라간다. 무언가를 삼켜 움직이는 여자의 목울대와 함께 가느다란 손이 문고리를 잡는다. 천천히 아래로 밀어 당기는 문에선 달칵, 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소음이 들린다.

 

 보이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여자는 단번에 파악한다. 늘 공상에 빠지던 스스로도 지금이 현실이란 것을 자각하고 있다. 이 밤에 뜬 별처럼, 밤이 지고 다시 뜨는 태양처럼,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빛나는 금색의 눈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환한 복도 사이로 유일하게 어둠을 가진 머리카락이 현재 상태를 알려주듯 남자의 이마를 덮고 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괜찮은 컨디션, 눈 밑에 내려온 약간의 피곤함. 남자를 조목조목 뜯어보고 나서야 여자는 입을 연다.

 

 

" 지금 몇 신데, ... 뭐 하다 왔어? "

" ... 내일 시험이라. 피곤해. "

" 그럼 집에 바로 가지. 왜 온 거야. "

 

 

 여자는 이 대화의 간극이 살짝 멀다고 느낀다. 제 눈썰미에 확신을 가진다. 부정할 수 없는 기대감, 반가움, 그리고 무의식 속에 각별히 간직한 남자라는 존재. 그런 복합적인 요소들과 다른 방향의 말이 남자에게 전해진다. 모든 것이 무색하게 여자가 가진 이성이 남자가 고하는 상태를 듣고 나서야 현재의 스스로를 조율한다. 인간이 가진 당연한 욕심이 여자의 천성에 의해 배제된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리 속으로 읊더니 낮은 한숨을 쉬며 걱정과 배려가 뒤섞인 문장으로 하여금 남자를 뒤돌리려 한다.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던지는 것보다 우회하여 남자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기색이 다분한 왜, 라는 문장이 끝에 덧붙여진다. 남자의 침묵이 이전보다 더욱 길어진다. 공기가 다시 무거워진다. 밤의 흐름이 두 사람을 관통해 다시금 서리를 내린다. 이 관계가 또다시 미루어진다고, 여자가 예상하면.

 

 

" 글쎄... "

 

 

 남자가 입을 연다. 모호한 대답과 달리 여자와 마주한 시선을 피하는 기색은 없다. 본인을 닮은 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눈과 무채색으로 투명하게 일렁이는 눈이 서로를 담는다. 나른한 목소리가 살갗을 살짝 드러낸 여자의 팔을 타고 마른 손을 잡는 듯하다. 여자는 입을 다문다. 균형을 맞추고 현재를 조율하던 이성의 저울이 한쪽으로 치우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우세한 지 여자는 잘 알고 있다. 승자가 정해진 판의 규율대로 여자는 남자에게 손을 뻗어 감각을 현실로 가져다 놓는다. 움켜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따뜻하거나, 어쩌면 차갑거나, 맞닿은 피부의 온도가 변해간다. 느릿하게 엮는 손가락이 남자의 틈으로 깊게 파고든다. 단단하게 잡아낸 것을 제 쪽으로 당겨 남자와의 거리를 좁힌다. 여자의 얼굴에 번지는 조소가 섞이는 숨으로 하여금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 쉬었다 가. "

 

 

 여자는 남자를 자신의 공간으로 이끈다.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고, 오롯 여자의 것만 가득했던 방에 다른 존재가 들어찬다. 고요함은 흩어지고 나누던 소리들이 익숙하게 어우러진다.

 

 

 

*

 

 

 

 공백 가득했던 캔버스가 하나둘 채워진다. 여자와 남자가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 나누는 말들은 별다른 게 없다. 캔버스 위로 연필이 스치는 소리, 두꺼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일상의 백색 소음들이 공기 가득 자리 잡는다.

 

 여자의 손길이 닿아 형상을 가진 것들이 제법 꽉 채워질 때 즈음, 남자가 내던 소리가 끊긴다. 여자는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고 나서야 그것이 조금 오래되었음을 깨닫는다.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 가죽 소파에 기대 잠든 남자가 한눈에 보인다. 숨소리와 함께 들렸다 내려가는 가슴이 남자의 정신세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증명한다. 자신의 지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여자 또한 그 호흡에 맞추어 자신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둔탁했던 굽의 소리를 더욱 낮추고 살며시 남자에게 다가가는 여자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남자에게 다다랐을 때, 그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시선이 유독 집요하다. 제 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각하는 것이 남자에 대한 이해, 혹은 .... 방해하는 것이 남자의 상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여자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자는 새벽에 가까워지는 이 밤에 유독 연약한 사람이었다. 사고의 회로가 완전히 장악된 정신머리는 이미 기울어진 저울을 돌려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 여자는 한참의 사색을 마친다. 그리고 남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남자를 뒤덮는 것은 하얀색에 가깝다. 색을 가진 머리 또한 빛을 받으면 무채색이었으니 말이다. 여자는 가죽 소파 위에 제 무릎을 놓고 남자 옆에 제 팔을 뻗어 단단하게 잡아낸다. 뿌득거리는 가죽의 마찰음이 유독 크게 들려온다. 채 묶지 못한 머리카락들이 흘러내려 등나무 꽃과 같은 모습을 가진다. 그림자 진 남자의 얼굴을 담는 은색의 눈이 두어 번 떨려온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지 못한 문장에 행동의 이유가 들어차지 않는다. 변명도 통하지 않을 지금의 상황에서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여자는 고르다가 이내 포기한다. 뻗었던 팔이 굽혀지고 창백한 얼굴이 남자에게 더욱 가까워진다. 걸맞지 않은 여자의 뜨거운 숨이 남자 주변을 맴돈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한 번 벌어졌다 다물린다. 그리고 남자의 귓가에 천천히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감을 가진다.

 

 

" -."

 

 

 여자는 무언가 중얼거린다.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반듯한 활자를 뱉어내 듯 침착한 호흡이다.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여자의 얼굴이 조금 떨어진다. 눈을 돌려 감고 있는 남자의 속눈썹을 담다가 이내 접할 듯 말 듯한 몸의 거리를 완전히 벌린다. 남자 근처에서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여자는 그대로 남자 옆에 풀썩, 앉는다. 소파에 기댄 머리 때문에 정리되지 않고 낭자한 여자만의 행성이 곳곳에 흩어진다. 규칙적으로 남자와 호흡을 맞추며 꿈에 빠진 남자를 한참 바라보더니 여자의 눈이 한 번 접힌다. 작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듯 비밀스럽다. 듣지 않았으면 아쉬울 거고, 들었다면 꽤 만족스러울 문장인 것처럼.

 

 

" 잘 자, 승혁아. "

 

 

 여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남자 옆에서 눈을 감는다. 문득 같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여자에게서 들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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