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것들

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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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꽤 장대한 서사시를 가지고 있었으나 책으로 엮어내면 한두 편에 불과한 외전에 더 가까웠다. 꽉 담아내어 하나하나 구경하라고 드러내기엔 어느 비현실적인 이론처럼 잠깐 보았다 말아도 되는 이야기였다. 그냥 이랬구나, 까지가 적당한. 그래서 서단혜는 입을 다물었고 이해를 요하지 않았다. 물음표를 던지면 적당한 눈웃음으로 무마하고, 느낌표가 나오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게 본인이 가진 난해함의 표현법이었다. 사람들과 섞여 가만 서있던 서단혜는 언제부터였는지 남들보다 멀리 보는 버릇을 가졌다. 아득한 침묵이 곧 세상의 뒤편으로 갈 것처럼 위태로웠다.


 얇은 종이 자락 마냥 나풀거리던 서단혜는 사각형인지, 삼각형인지도 모를 공간 안에서 고요함을 지킨 채 보이지 않는 것을 쫓았다. 목적성이 구체화되지 않은, 모호함이 유영할 뿐이었지만, 체계화되지 않은 발자국을 여러 번 찍어가며 그림자처럼 검게, 혹은 황금처럼 노랗게 일렁이는 별의 흐름을 수용하는 듯했다. 손가락 사이로 갈라지는 물길은 거쳐가는 것들이었고 그것은 도려낸 피부처럼 분리되어 서단혜의 속도보다 점점 느려지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돌아가는 길의 표식, 그런 의미였을 지도, 혹은 버리고 가는 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단혜는 구태여 그것에 수식어를 달아놓지 않았다. 어차피 순환엔 무엇이든 무용할 뿐이었다. 의미를 붙이기엔 다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천성을 운운하기엔 서단혜의 처음은 도리어 상반된 느낌이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 때를 상상하면 의외의 것이 튀어나오듯 서단혜만의 창세기는 보편 형이상학의 개념이 빗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서전에 넣는다면 질타받기 좋은 유복한 환경이 어린 서단혜에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백지 같았고 그것을 등진 채 웃고만 있는 것이 때 묻지 않게 충만했다. 부모님이 수화기를 들 땐 투박한 헤드셋을 귀에 뒤집어쓰고 친근감 있게 흘러나오는 알파벳을 따라 읊었으며 집안에 왔다 갔다 했던 검은 사람들에겐 허리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가끔가다 거친 손으로 쓰다듬받는 머리카락은 날개뼈를 다 가릴 정도로 길었고 관리를 잘 받은 듯 형광등 빛을 반사하며 찰랑거렸다. 어느 날 부모님이 쥐여준 작은 보석엔 당연한 듯 기뻐했고 은색으로 일렁이는 두 눈이 보석에 비춘 형상을 보며 순수하게 반짝였다.


 "엄마, 나 이 보석 안에 사람들을 담아보고 싶어."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양 볼이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웃으며 광채 가득한 것들과 함께하는 미래의 자신을 꿈꾸었다. 백지 구석에 작은 다이아몬드 하나를 그려 넣은 것처럼. 그런 서단혜의 말에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부모님이 하나둘 가져다 놓는 보석들은 꽤 높은 선반 위에 장식되었다. 저마다 색이 달랐고 빛나는 정도도 상이했다. 서단혜의 시선이 그 선반에서 떨어지는 일은 꽤 드물었고 가진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아마 계속 그럴 것이라며 서단혜는 스스로를 예견했다.

 변수가 없었다면 말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서단혜의 손에 보석 대신 칼을 쥐여줬다. 손안에 가득 찬 투박함이 서늘했고 날을 잡지도 않았는데 손바닥을 베어낸 것처럼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의문과 섞인 불안함에 무의식이 부추기는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서단혜는 부모님을 올려다보았다. 웃지 못하는 낯이 닿으면 부모님은 그제야 몸을 조금 숙여 서단혜와 시선을 맞추었다.

 "단평아, 엄마랑 아빠가 혹시 몰라서 그래. 세상엔 위험한 사람들도 많고…"

 그 말 줄임표 뒤에 어떤 내용이 왔었는지, 서단혜가 굳이 기억하고 있지 않는 것은 그 또한 괜찮다 치부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해서, 조금 과보호 같겠지만 유일한 핏줄이었으니까. 여전히 어렸던 머리로 서단혜는 그런 합리화를 하더니 허공에 칼날을 세워 휘둘렀다. 묵직한 감각에 짓눌리는 듯해도 익숙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파동을 타고 이어지는 작은 선이 모여 백지 윗부분에 조금 커다란 칼을 그려 넣었다. 첨예한 날의 형상으로부터 전해지는 무언의 불온함이 서단혜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얇은 혈관 사이로 통하는 피가 시리게 사무쳤다.

 그리고 서단혜가 제 선반에 있던 보석들을 전부 바닥에 흩뿌려 버린 건 고작 중3 때의 일이었다.

 계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아빠 다리 밑을 기어 다니던 체크무늬 옷 아저씨, 혹은 엄마가 머리채를 잡고 벽에 패대기친 탓에 일어나지 않았던 단발머리 아줌마, 제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누나, 누나네 아빠한테 저희 엄마 아빠 좀 봐달라고 하면 안 돼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요. 라고 울먹이던 파란 모자 남자아이. 필사적으로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 했지만, 필연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무수한 것들이 천재지변처럼 몰려와야 시야가 트였다. 서단혜는 안주할 수 없었다. 외면할 수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리고 말았을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토했다. 창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서단혜란 인간은 그러지 않았을 것처럼, 그 시절의 서단혜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심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누군가들의 불행에 구역감이 올랐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불쾌함이 등 떠밀 듯 서단혜는 급하게 벗겨진 신발 한 짝을 줍지도 못한 채 제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성치 않은 발을 이끌고 성큼 방에 들어가더니 도처에 있는 빛들을 쓸어 넘어트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을의 색을 받아 바닥에 저마다 발광하는 것이 너무 소름 끼쳐서, 서단혜는 그 단단한 것을 향해 작은 주먹을 내리쳤다.

 누군가의 피와 눈물을 빨아먹고 굳어버린 돌덩어리들. 조각나는 파편들이 손을 파고들 때 나는 짧은 비명이 물에 젖어 방 안을 채웠다. 통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에 타인의 심장이 깃든 것만 같다고, 자신이 쥔 칼로 도려내 버렸기 때문에 남들과 분리된 게 분명하다고, 서단혜는 근육을 깊게 찔러대는 박동 소리를 고통스럽게 귀에 담았다. 바닥에 고여가는 핏물이 비로소 백지를 완전히 적셨다. 구석에 그린 다이아몬드도, 위에서 형형하게 모습을 드러내던 칼도, 전부 붉게 사라지더니 백지였던 것은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오랜 시간 간직했던 꿈이 휘발되는 것은 아무 문제없었다. 절망에 매몰되기엔 스스로의 삶이 당장 종막으로 접어드는 것도 아니었기에 서단혜는 바닥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당장 제 역할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손을 위아래로 까딱이더니 책상 위에 있던 가위를 쥐고선 검붉게 물든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걱거리는 불협의 소음이 무언갈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울퉁불퉁하게 짧아진 제 머리를 보며 서단혜는 사색에 잠겼다. 장막 드리운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 응시하더니 호흡을 길게 뱉어내고선 음울한 방을 나섰다. 서단혜는 정처 없이 걷기만 해야 할지도 모르는 먼 미래 따위 고려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 듯 거세지는 첫 흐름에 몸을 맡겼다.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의 계절이었다. 건조해진 눈두덩을 한 번 꾹 누르더니 서단혜는 챙긴 것 하나 없는 몸으로 슬리퍼만 신은 채 집을 박차고 나왔다.

 서단혜는 집을 나오자마자 경찰서로 향했다. 느릿한 걸음부터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꽤 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닿고자 하는 것은 서단혜의 시야에 금방 자리 잡았다. 한밤중에도 어두운 길을 밝히는 것이 서단혜의 유일한 피난처 같았다. 서단혜는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손을 뻗어 경찰서 문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닿는 손잡이의 온도가 답지 않게 뜨거웠다. 위압감을 억누르고 드러나는 주관적인 선의가 충동처럼 힘을 가졌다. 서단혜는 이를 한 번 꽉 물고선 잡은 손잡이를 밀어 얇은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고압적인 분위기를 나름 환기시킨답시고 누가 달아놓았을 법한 종소리가 울렸다. 긴장이 풀려 힘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슬리퍼의 찍, 하는 소음이 경찰서 내부의 정적을 깼다. 완연해지는 서단혜의 몰골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세를 일으켰다. 누구는 급한 걸음으로 뛰쳐나와 피가 다 굳어버린 서단혜의 손을 감쌌고 누구는 경찰서 구석에 있던 담요를 꺼내 들어 서단혜의 어깨 위로 올렸다. 얘, 무슨 일이니. 부모님은 어쩌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니. 쏟아지는 염려들이 페이드아웃되듯 서서히 작아졌다. 귓가를 잠식하는 적막과 함께 공허한 은빛 눈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닿았다. 다 말라서 부르튼 입술을 움직이자 갈라진 틈으로 붉은 것이 새어 나왔다. 서단혜는 고해하듯 자신이 베어낸 부모의 목을 기어이 두 손에 들어 올렸다.

 "...최근 OO동 OO 폭력 조직에 대해 신고할 게 있는데요."


 서단혜는 제 삶에 다시금 백지를 세워 올렸다. 제 손으로 부모를 버렸다는 것 빼곤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형태를 가졌다. 유별난 그 특이점마저도 일부러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부분이었다. 백지는 백지일 뿐, 실질적으로 종이의 재질 같은 건 누구도 잘 고려하지 않으니까. 새로웠고 평범했던 서단혜는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냈고, 편의점에서 파는 샌드위치 하나를 가지고 수능장에 들어가 경찰행정과를 수석으로 합격했다. 공부 외 남는 시간은 전부 아르바이트에 할애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단칸방에서 살았으며, 주인 할머니와 매일 같이 나누는 대화로 피는 섞이지 않았음에도 손녀딸 소리를 들으며 삶에 필요한 애정을 대강 채웠다. 노란 장판 서사의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길에도 공백에 획이 하나씩 그어질 때마다 서단혜는 자신이 완성됨을 느꼈다. 이대로 살면 된다고, 유년 시절 부모가 지은 죄를 이렇게 청산하면 되는 거라고, 자신이 뒤집어쓴 타인의 피를 이렇게 닦아내면 되는 거라고. 경찰 시험까지 빠르게 합격해 제복을 갖춰 입는 순간에도 서단혜는 제 길에 완벽한 종착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달하면 이 세상에서 깔끔하게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다만, 징크스처럼 서단혜의 예견은 늘 현실과 달랐고 곧은 직선 옆에 둥근 선 하나를 더했다. 서단혜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길어지고 있던 머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단혜 경장이 이쪽에 좀 더 빠삭하잖아. 좀 깊게 맡아줬으면 해서."

 "...왜 제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까?"

 "에이, 숨길 걸 숨겨야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몰라도 이 경찰서에서 서 경장 업적 모르는 사람 없어. 좀 껄끄럽긴 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사회에 공헌한 거나 다름없잖아."

 "..."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한 번 생각해 봐. 세월 좀 지났으니 얼굴은 가물가물할 거고, 이름도 바꿔서 들어오지 않았나? 그럼 지금도 아는 놈들 없을걸?"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이유라면 많지. 그거 알아? 난 처음 서 경장이랑 현장 뛸 때 서 경장이 범인인 줄 알고 잡으려고 했잖아. 아니 경찰 중에 누가 마스크랑 모자까지 둘둘 싸매고 현장을 나가냐고. 나 참... 아, 그리고..."

 "하, ...팀장님이 뭘 말씀하시고 싶은진 잘 알겠으니까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 ...그래! 아무튼, 내일까지 고민해 보고 말 좀 해줘. 요즘 이쪽 인력도 별로 없어서 골 때리거든. 내가 서 경장 엄청 믿는 거 알지? 잘해보자고." 

 뒷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 팀장과의 사이가 많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은 위험해서 시키지도 않는다는 그 짓거리를 자신에게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 서단혜에겐 결국 이 경찰서 내부도 이득으로 돌아가는 곳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계기였다. 게다가 애써 숨기고자 하는 걸 들춰내는 꼴을 보아하니 기실 어떻게든 자신을 그 치 떨리는 곳으로 밀어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경장이 된 지도 얼마 안 된 날이었다. 직속 후배 하나가 들어오니 위아래로 생기는 잡다한 일 처리는 전부 서단혜가 맡았고 그 와중에도 외부에 제 행색을 숨기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신없는 건 부지기수였다. 팀장실을 나오자마자 서단혜는 참고 있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폐부에 들어차는 불편한 감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까지 고민하라며 굳이 배려를 해줘도 그 시궁창의 광경을 다시 눈에 담으라 하면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던 서단혜의 답은 하나뿐이었다. 서단혜는 화를 곱씹으며 곧장 자리로 돌아가 겉옷부터 챙겼다.

 "나가시게요?"

 "응."

 "경장님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얘, 태호야. 너희들이 가지는 담배 타임 나는 다른 걸로도 가지면 안 되니? 얌전히 일이나 해. 알았지?"

 차마 제 화를 핑계로 직속 후배라는 애한테 오롯 풀어낼 수 없었으니 서단혜는 그 순수한 추궁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나긋이 대꾸했다. 덧붙여 나오는 시늉이 지켜본다는 협박 같았지만, 제 후배의 눈치가 팀장이 어디서 뺨을 맞고 와도 팀장님 오늘 약주하셨나 봐요, 까지만 그치는 사람이었기에 마음 편히 하고선 서단혜는 챙긴 겉옷을 입고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시간을 셈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 서늘한 가을의 도입부였다.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도 딱 이 시기였나, 이젠 시답잖게 치부할 수 있는 제 과거를 회상하며 서단혜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후배의 말대로 담배 하나 입에 꼬나 물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던지라 근처 편의점에서 산 딸기맛 막대 사탕을 하나 입에 무는 서단혜의 꼴이 영 경찰 답지는 않았다. 뱉어낼 연기가 없어 제 입안으로 사탕만 굴리며 하늘만 보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사색에 깊이 빠져있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지만, 굳이 와서 서단혜에게 오지랖 놓는 사람이 없었다는 건 그만큼 경찰서 내부에서 가지는 인간관계가 협소하다는 증거였다. 자세를 고치면 삐걱대는 나무 소리가 괜히 처량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그것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 고요함에 쉽게 차분해지는 것도 서단혜의 일상이었으니까. 복잡한 명제들을 미뤄두고 온통 공백으로 채우는 서단혜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등받이에 기대고 앉은 자세가 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경장님 여기 계셨어요?"

 "...어, 태호야. 일은 다 하고 나오는 거야?"

 "누구 욕 먹일 일 있나요. 제가 일 안 하면 다 경장님이 감당해야 하는데."

 다만 그날은 달랐는지, 서단혜 옆을 꿰차고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 제 옆에 들어차는 거구에 서단혜는 자세를 다시금 고쳐 앉았다. 나갈 때 은근슬쩍 꼽은 줘놓고 따라 나온 것이 아니꼬운 듯 서단혜는 건조한 눈두덩을 한 번 꾹 누르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에 찔리는 구석은 있었는지 태호 역시 서단혜를 모방하며 제 눈썹 위를 문지르더니 노골적인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알고는 있다니 다행이네. ...담배 피울 거니? 비켜줄까?"

 "아뇨아뇨. 그, ...팀장님이 경장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잠깐 들어버려서요."

 저처럼 바람이나 쐬러 나온 줄 알았지 화두를 자신과 팀장으로 떼는 게 의외였는지 서단혜의 시선은 한참 태호에게 머물다가 떨어졌다. 담뱃갑이나 라이터 하나 쥐고 있지 않은 태호의 빈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너... 하, 우리 태호. 귀만 커져서 어떡해. 나중에 어디 가서 숨을 때 귀만 보이겠네."

 "아잇 경장님! ...아니, 그게 의도한 건 아니었고..."

 "아냐?"

 "아니에요! ...아무튼, 들어보니까 경장님이 좀... 꺼려하시는 것 같길래요."

 뒤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태호는 머뭇거리는 듯 조금 오래 입을 달싹였다. 위로라도 해주려는 걸까, 이 상황에 농담이라도 해보려는 걸까, 선배 위로하는 후배 따위를 그리며 기특함에 들뜬 서단혜의 두 발이 위아래로 교차하며 반복해 움직였다. 가벼운 공기가 두 사람을 맴돌았다. 그리 5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결심이 선 것인지 태호는 침을 발라 번들거리는 제 입 위로 운을 뗐다. 타인의 예상에 휘둘리지 않는 그 말은 누군가의 생각보다 더 뜨겁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거 제가 할까 싶어서요."

 가라앉지 않을 듯 나풀거리던 서단혜의 두 발이 동시에 멈췄다. 가벼운 중량은 너무나 찰나였던 것처럼, 공기의 무게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추락했다. 태호의 그 결심이 무색하게 말을 뱉자마자 틈도 안 주고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는 서단혜의 안색은 태호의 말과 대비되게 서늘했다.

 "... ...너 미쳤니?"

 내려다보는 시선이 명백하게 책망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첨예한 은색의 눈이 태호를 관통했다. 한기 어린 숨을 뱉으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서단혜의 흉부가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하, 난 또... 그래 멋대로 기특하다 생각한 내 잘못이지.

 "...경장님 화나셨어요?"

 "화가 안 나게 생겼니? 열정이 많은 건지, 아니면 말단이라 다 쉬워 보이는 건지 모르겠는데, 함부로 그런 일 한다고 말하지 마."

 "그래도... 그동안 경장님이 저 많이 봐주셨고..."

 "기태호,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너 지금 내 속 일부러 긁어? 봐줬다 느꼈으면 봐준 대로 있어야지. 그런 일이 무슨 은혜 갚기라도 되는 줄 알아?"

 속사포로 뱉어내는 서단혜의 말들이 태호에게 벼락처럼 내리쳤다. 약간이라도 갈라진 틈에 끼워 넣는 것이 걱정인 것 같기도 했고, 무모함을 꾸지람하는 것도 같았다. 다만, 태호는 고개 숙이긴커녕 올곧게 서단혜를 마주했다. 흑백으로 상반되는 두 시선이 건조하게 맞닿았다.

 "...그럼, 그 일은 누가 하는데요? 경장님도, 저도 안 하면, 결국 다른 사람한테 돌아갈 일이잖아요."

 "..."

 "그럴 바엔 그냥 제가 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경장님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 벤치에서 나는 소음이 거북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도리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검은 눈동자에서 서단혜는 익숙한 구역감을 느꼈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경장님 마저 쉬다가 들어오세요."

 서단혜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태호는 빠르게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스치는 뺨에선 얼얼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서단혜는 그런 감각을 오롯 느끼며 태호가 떠난 자리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호의 말이 맞았다. 누군가 하지 않는 일은 결국 돌고 돌아 다른 누군가에게 떠밀릴 것이었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걸까, 아니면 여전히 구차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걸까. 제 나름의 선으로 발붙이고 있던 이곳에서 여전히 떼어내지 못한 편린들을 가지고 외면만 하려는 것이 너무 뼈저리게 느껴져서. 지나치게 역설적인 본인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서단혜는 다시금 벤치에 앉았다. 입안에 있던 사탕은 어느새 다 녹아 사라져 플라스틱 막대만이 혀의 움직임을 따라 굴렀다. 금방이라도 그 혀를 찌를 것처럼, 차라리 찌르길 바라는 것처럼 서단혜는 그 막대를 입에서 한참 빼지 않았다. 골머리 앓는 듯 이마를 감싸 쥐는 탓에 서단혜의 옆머리가 밀려 올라갔다. 덮이는 속눈썹 그림자 사이로 먹물 같은 상념이 드리워졌다. 다른 것들로 꽉 채웠다 생각한 서단혜의 백지 위에 지난 흔적들이 부유물처럼 떠올랐다. 얇은 선들을 뒤덮고 붉게 물든 붓 자국이 거칠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결국 발걸음을 자처한 것은 서단혜였다. 사유함이 길진 않았다. 자극되는 선의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겉치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판단의 오류를 이분법적으로 가름하고 고뇌하는 것이나, 뼈대 갖춘 역할을 스스로에게 완벽히 조립할 틈도 없이 태호의 말을 도화선으로 삼아 되돌아가는 길은 꽤 순탄했다.

 정보는 간단했고 어린 기억에 의존해도 찾는 것이 수월할 정도로 변하지 않은 곳이었다. 머리보단 몸을 더 많이 쓰는 족속들이라 가능한 이야기인 걸까. 서단혜는 터져 나오는 비소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정보는 어디서 구해왔냐는 물음에 얼버무리는 팀장을 보아하니 숨어든 쥐새끼가 자신이 처음은 아니었던 듯했다. 동태조차 묻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감과 동시에 작은 빛이라도 들어오면 스포트라이트처럼 이목이 집중되는 건 시간문제니 제발 이상한 동정심 같은 건 갖지 말라며 서단혜는 귀에 진물이 들어찰 정도로 팀장에게 강조받았다. 방금 제가 웃은 건 신나서 그런 것처럼 보이십니까? 자신이 그렇게 인본주의적 존재처럼 보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너스레 떠는 것은 그런 팀장의 우려를 한 귀로 흘려보내는 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말이다. 한동안 나오지 못할 거란 사실을 팀장에게 어떻게 들었는지 마지막 출근 날, 태호는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서단혜의 손에 담뱃갑 하나를 쥐여주었다. 저번엔 죄송했어요. ...그리고 이거... 거기선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신념을 꼬집던 하극상을 용서할까 하다가도 어이가 없는 발언이었다. 발각되고 총 맞아 죽는 것보다 분수에 맞지도 않은 것을 입에 억지로 물다가 폐병으로 죽는 게 먼저 아닐까, 서단혜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눈물 젖은 수건으로 저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서단혜는 그것에 딱히 외로움 같은 것을 느끼진 않았다. 이미 다 무뎌진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실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예상보다 더 깔끔하게 덧칠된 무뢰한들의 소굴로 들어설 때부터 놓았어야 하는 요소였다. 서단혜는 깔끔하게 묶어내던 머리를 풀고선 한 걸음씩 나아갔다.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드러나는 양상은 꽤나 좋았다. 평범한 상가들이 들어찬 곳에서 조금 커 보이는 중견기업처럼 묘사되는 것이 그 시간에 여전히 머무른 채로 무식하게만 있진 않았구나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는 서단혜의 한쪽 입꼬리엔 작은 멸시감이 맴돌았다.

 방문 소식을 전하는 것부터 널따란 방까지 들어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굳이 이런 곳까지 찾아올 인물은 흔하지 않았을 테니까. 새삼 이전에 나눈 팀장과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얼굴 가물가물할 거라더니, 과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까지 숨기고 들어갔으면 큰일 났을지도 모를 미래가 서단혜에겐 꽤 아찔했다. 너무나 간단하게 마주할 수 있는 보스라는 사람의 얼굴이 자신에겐 여전히 익숙한데, 상대라고 자신의 얼굴이 완전하게 잊힐까. 현재에 언급되지 않는 진짜 서단혜에 대해선 그동안 처신해 오던 자신의 행색이 한 몫하는 듯했다. 과거의 스스로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다고."

 "네."

 "시간은 많이 지난 것 같은데, 굳이 지금 와서 날 필요로 하는 이유는?"

 "... ...아버지랑 어머니가 그렇게 될 걸 알면서 끝까지 절 보호해 주신 거, 알고 계셨죠?"

 다짜고짜 묻는 것에 보스라는 사람은 누가 봐도 모르는 눈치였다. 유지하던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갈라지는 구멍이 서단혜 눈엔 너무나 쉽게 보였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허상의 것을 현실로 가져다가 존재한다며 눈 까뒤집고 강조하는 사람 앞에서, 애매한 추론을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장하기엔 자신이 가진 것들의 힘이 너무나 약했으니까. 심지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왕들이 왜 그리 무속신앙에 휘둘렸는지만 보면 피해 갈 수 없었던 현상이나 다름없었다. 평소라면 턱을 문지르며 웃고 있었을 서단혜였지만, 그 행위가 자신을 어떻게 궁지로 몰아갈지 뻔히 보였기 때문에 움찔거리는 얼굴의 근육을 바로 잡았다.

 

 "전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고요."

 "...자세히 이야긴 해줄 수 없어. 그리고 그냥 그 바깥에서 평화롭게 살아도 되는 걸 굳이 여기에 발 디딜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단평아, 옛정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여기까지 찾아온 노력이 가상한 것도 있고. 온실 속 화초는, ...그냥 온실 속 화초로 평생 있는 게 나을 때도 있어."

 침묵은 길어졌다. 배려하는 말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서단혜를 주시하는 눈에서 필연적인 불신이 느껴졌다. 흙탕물에서 굴렀던 제 연륜을 증명하듯 쉽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형식적인 구실이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과거 최측근이었으면서, 핏덩이였던 것이 다 자라서 이렇게 오니까 조금 위협적이었나. 내리깔지 않는 서단혜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전 그거면 돼요."

 "복수? 누가 네 부모를 그렇게 팔아넘긴 줄 알고 복수 같은 걸 하겠다는 건지."

 서단혜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꼿꼿하게 뜨고 있던 눈이 살짝 밑으로 옮겨갔다. 밀고 당기기가 안된다면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모르면 알 때까지 구를 겁니다. 가는 길마다 붙잡을 수 있는 놈들 입이란 입은 다 찢어발기고, 칼 들이대는 놈들은 전부, ...전부 심장을 도려내서 죽일 겁니다."


 그리 서서 한참 말머리를 꺼내지도 않고 가만있더니, 책상 하나를 두고 보스와 마주하던 서단혜는 발을 떼고선 선회해 넘어가 보스 바로 앞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느낌이 스스로를 억압하듯 속을 가득 메웠지만, 애써 꾹 누르곤 서단혜는 자세를 낮췄다. 굽혀 들어가는 관절에 내려다보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보스와 맞춰지더니 이내 마주하지도 못한 채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응시했다. 차가운 바닥에 닿는 무릎이 수치스럽게 시렸다. 감정으로 호소하는 것에 일말의 진심도 담지 않았기 때문인 걸까, 서단혜에겐 그 온도가 선명한 모욕감이었다. 묶지 않아 길게 늘어진 밝은 머리가 건조하게 떨어졌다. 베일처럼 가리고선 고개 숙여 바닥을 보는 서단혜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무릎 위로 쥔 주먹은 손톱이 박혀 붉은 자국이 났다.

 "부모님이 그럴 필요 없다 했더라도 전 이랬을 겁니다. 통수에 못 박히는 일이 일상 같은 쓰레기장이라 해도 사람마다 평생 지키고자 하는 게 있는 거잖아요."

 "..."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옛정을 생각한다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

 서단혜를 앞에 두고 있던 보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하게 서단혜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고민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제 꼬봉들을 시켜서 그대로 끌어낼 셈인가, 고개 숙인 서단혜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서게 되는 것이 꽤 아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서단혜의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보스라는 사람이 직접 서단혜의 팔을 잡고 일으키는 것은 명백한 긍정의 의미였다. 얼굴의 일부를 가리고 있던 긴 머리카락까지 친히 귀 뒤로 넘겨주는 것을 보아하니 갑자기 옛 추억이라도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정 같은 게 없어서 모든 악의가 쉬운 줄만 알았더니, 답지 않게 대놓고 드러나는 물렁한 부분이 서단혜의 심기를 거슬렀다. 고개를 들어 마주하는 것에 복잡함이 스며들었다.

 "...네 아버지와의 의리 생각해서 해주는 거야. 낙하산 이야기 안 돌게 처신 잘하고. 복수에 성공한다 해도 이런 곳에서의 일들은 쉽게 청산 못 하는 거 알지? ...그럼, 열심히 해 봐. 단평아."

 단평, 서단혜는 자신이 버렸던 두 글자를 다시 주워 들고선 제 새로운 이름, 그리고 이젠 익숙해져 버린 지금의 이름에 조잡하게 끼워 넣었다. 군데군데 얼룩이 져서 더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백승혁 오늘은 안 나갔지? 그쪽으로 보내서 얼굴부터 익히게 해 줘. 보스는 그런 말을 남기고 서단혜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더니 제 아랫사람들을 이끌고 지나쳤다. 살짝 웃으며 화답하던 서단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나 손쉽게 들어선 이 출발점을 막상 밟고 나니 막막함이 절로 밀려왔다.

 과거나 현재나 이면의 세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 유년의 서단혜는 인형의 집처럼 예쁘게 꾸민 다각형에 처박혀 있었으니 더 심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깔아놓은 화살표가 대놓고 가리키는 오물통에선 실낱같은 인간성의 썩은 내가 여상하게 진동했다. 자그마한 광휘조차 없으니 유별난 정의감만 갖지 않으면 엉덩이 붙이는데 꽤 수월할 지도 모르는 인간쓰레기적 면모가 득실거렸다. 본인의 선천적인 이질감을 어떻게 동화시킬지 서단혜는 걷는 와중에도 목까지 채운 단추 하나를 풀고 머리까지 묶으며 고민했지만, 이전에 떨던 너스레와 다르게 팀장이 강조한 그 쓸데없는 동정심이 뒷 창에 비추어진 길바닥 패배자들한테까지 닿는 듯했다. 무르게 깜빡이는 은색의 두 눈은 애써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교화시키는 버릇을 고칠 필요성은 있었다.

 부하가 서단혜를 이끄는 곳은 이전보단 아니었지만 꽤 공간감이 큰 방이었다. 개인 취향이 반영된 듯 삭막한 사무실 느낌과 달리 모던하게 배치된 흑백의 가구들에선 샌달우드 계열의 잔향이 짙게 남아있었고 진열장에 나열된 화려한 술병들은 소소한 취미인 것처럼 보였다. 흔해 빠진 골목의 수호자들과 다르게 지위에 대한 추측이 수월할 정도로 가득 찬 물질적 풍요의 근원이나, 책상에 놓인 위스키 잔만 보더라도 평범한 안내자는 아닌 듯했다. 조직의 생태계가 천차만별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금방 고위 간부에게 데려다 놓는 건 낙하산에 대한 명실상부의 증명 아닌가. 서단혜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모니터 위로 살짝 튀어나온 검은색 머리카락이 자리에 있음을 나타냈다. 왁스칠을 한 건지 조금만 움직여도 드러나는 이마가 굴곡 없이 매끈했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사람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서단혜는 그 이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긴장한 티 역력한 부하는 가운데 놓인 책상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외부인도 다 아는 내용을 굳이 귓속말로 전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조직의 룰이겠지 싶어 서단혜는 감흥 없는 눈으로 둘만의 밀회를 감상했다. 썩 낭만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새로 왔다고."

 "네, 보스가 일단 형님 쪽으로 붙이라 해서..."

 힐끔, 있는 공간과 대비되는 색의 시선이 한 번 올라오더니 서단혜를 응시했다. 유순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날카롭지도 않은 눈 아래로 촘촘하게 쌓인 속눈썹엔 어느 정도 젊은 느낌이 묻어 나왔다. 부드러웠지만 역설적으로 단단했고, 생의 절반도 안 살아본 듯했지만 관록은 충분해 보였다. 백승혁이란 사람을 대강 파악해 보려는 듯 서단혜는 그 노란 시선을 오래 마주했다.

 "알았어. 가봐."

 다만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백승혁이었다. 백승혁은 금방 손을 휘휘 저으며 부하를 물렸다. 형식적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는 빠른 발걸음을 하며 방을 나섰다. 서단혜는 조심스러운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한 번 곁눈질하더니 백승혁 쪽으로 다시금 주의를 돌렸다. 부하들에겐 엄한 것 같고, 속에서 적어 내리는 백승혁에 대한 첫인상이 꽤 잡다했다.

 한참을 앉아있던 백승혁은 쿠션감 있는 의자의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훤칠한 키에 시선은 금방 서단혜를 내려다보는 쪽으로 뒤바뀌었다. 완전히 드러난 행색엔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배경만 모르고 있다면 누구나 잘 사는 사람인가 보네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검은 착장이었다. 그럼에도 서단혜는 그것에 빛난다, 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그림자가 머무는 세계들이 본디 그러했어도 백승혁의 노란색은 유독 분투하는 순응에 가까운 듯했다. 저와 유사했지만 엄연히 다르다, 낯선 얼굴인데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빛바랜 것이 한 번 닦아두면 좋을 것 같은데, 서단혜는 무의식적으로 제 습관을 곱씹고 있었다. 그런 딴생각이 겉으로도 드러났던 것인지 백승혁은 말없이 서단혜를 가운데 있는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서단혜 또한 반추운동하는 무의식을 집어넣고선 이끄는 대로 군말 없이 다리를 붙였다.

 "...뭐, 귀한 분이라고 불러야 하나?"

 부르는 호칭에서 고른 티가 뚜렷했다. 위아래로 훑는 것은 경계였고, 앉자마자 두 손을 깍지 껴 모은 건 권위적이었며, 다리를 꼬는 건 하대하는 쪽에 가까웠다. 자신에게 보이는 행동거지나 예상되는 호칭의 선택지들에 서단혜의 눈썹이 한 번 들썩였다. 닦아내고자 했던 마음이 절로 들어가는 듯했다.

 "이름은 있는데 말이에요."

 "보스가 이름은 안 알려줬거든."

 "단평이라고 부르면 돼요."

 "성은."

 "두 글자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나요?"

 묻는 것에 서단평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회피하는 물음표에 이유는 다양했지만 두 가지만 꼽자면, 하나는 처음 본 사람을 반말로 대하는 건 이곳 사람들이 가진 당연한 예의인가 싶었고, 둘은 타인의 입에 늘상 올라가 불릴 과거의 성까지는 자신이 인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온난한 색이었음에도 꽤 낮은 온도를 가진 시선이 서단혜에게 자리 잡았다.

 "성은 딱딱해서 싫은가 보지."

 "아무래도요."

 "우리 초면이지 않나."

 "이렇게 쌓는 친밀함도 나쁘지 않을까 싶어서요."

 "소속이 딱히 없을 거라곤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회사였으면 상사일 사람한테 태도가 너무 편한 것 같단 말이지."

 "소속은 없을 거고, 여기가 회사도 아닌데."

 "은근슬쩍 말도 놓고."

 "설명을 간략하게 한 것뿐이에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자신을 응시하는 백승혁에 서단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뭐가 문제냐는 것처럼 눈만 끔뻑이고 있는 것이 일부러 백승혁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농후했다. 굴러먹는 건 본직에서 충분히 해냈으니까, 여기서까지 무례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건 좀 억울할 것 같거든. 기왕 갈아 끼운 두 글자에 진심을 다하는 듯 서단혜는 제 팔짱을 끼고선 백승혁을 따라 다리를 꼬았다. 날 선 눈이 형광등 빛을 받아 은색으로 번득였다. 표정 하나 변하진 않았지만 당기는 줄이 팽팽해짐을 증명하듯 허, 하는 소리와 함께 백승혁이 숨을 뱉었다.

 "당신이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진 잘 모르겠지만, 여기 놈들은 보스를 뒤에 두었다 해서 이제 막 들어온 사람을 마냥 봐주진 않거든. 적당히 하면 좋을 것 같군."

 그 놈들 중에 당신도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만, 들리지 않을 대답으로 서단혜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백승혁의 충고에 응수했다.

 "그렇게 보였다면 주의할게요. 그래도 친밀함은 진심이라서."

 적막이 길게 이어졌다. 붉게 물든 종이 위로 흑과 백의 체스판 하나가 그려지는 듯했다. 말을 놓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상대의 패를 읽으려는 것처럼 견제하는 꼴이 첫 단추를 명료하게 잘못 끼우고 있었다. 처음 발을 디딜 때 목구멍으로 토해내던 거부감은 어디 가고 그새 스며든 것처럼 난이도를 상으로 잡는 서단혜의 행위가 썩 현명하진 않았다. 본인도 인식하고 있던 어리석음이었지만 미래를 계산해도 예견해 봤자였던 이전의 경험을 잘 학습한 것을 보면 딱히 상관은 없었다. 경직된 근육이 나른하게 풀렸다. 등받이에 기대어 백승혁을 바라보는 서단혜의 자세가 꽤 편해 보였다.

 "아무튼, 첫인사가 늦었네요. 잘 부탁해요. 승혁 씨."

 제 후배 이름 석자를 부르던 것과 비슷한 어투로 서단혜는 백승혁의 이름을 담았다. 나긋하게 감기는 받침들 사이로 혀가 나뉘는 듯했다. 반골기질이 아님을 보이는 것처럼 서단혜는 꼬고 있던 다리나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선 등받이에 댄 제 몸을 천천히 떼어냈다. 접히는 구간마다 주름지지 않는 실크 셔츠가 움직임을 따라 팔랑거렸다. 서단혜는 상체를 앞으로 옮기더니 소파 끝에 걸친 채 한쪽 손을 펼쳐 백승혁이 있는 방향으로 내밀었다. 눈을 접으며 웃는 것에 가식이 묻어 나왔다. 끌어올리는 입술 아래에 찍힌 점에선 작위적인 느낌이 만연했다.

 "아 근데, ...혹시 담배 잘 피우세요?"

 빌어먹을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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