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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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 by Mii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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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김현우x양연재

W.Miiin

같은 학교에 같은 시간대에 강의가 있는 주제에 따로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연재가 발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낸다. 아직도 그 말이 잊히질 않고 뇌리 깊숙이 박혀있었다. 김현우 환자분 보호자 연락처 맞나요? 멍청하게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네? 소리나 하다가 겨우 온 병원이었다. 내가 그딴 말을 왜 들어야 하는데. 연재는 터지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그와중에 1인실을 쓰냐. 이름표가 딸랑 김현우 하나 있었다.

 

“… 뭐하냐?”

 

극적인 재회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뭘 했는지 그 짧은 등굣길에 교통사고가 났다니까 좀 그래도 아픈 모습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병원복 입고 이마에 거즈 붙인 게 전부다. 게다가 마주친 표정은 멍청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동그랬다. 특히 눈을 동그랗게 뜬 현우가 연재를 보다 손에 든 귤을 깠다. 귤을 네 개로 가르고 한 덩어리를 입에 넣더니 우물거린다.

 

“… 누구세요?”

 

귤을 다 씹더니 한다는 질문이 고작 저거다. 하. 연재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꽤 싸늘한 표정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가 큼큼거리며 제 목을 가다듬었다. 문턱을 통과한 채로 삐딱하게 서서 현우를 바라보자 시선을 피했다. 어쭈. 연재의 눈썹이 들썩인다.

 

“현우야, 우리 같이 동거했는데 기억 안 나?”

 

분명 의사의 말로는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구두로 들은 건 그냥 가벼운 타박상 정도라길래 안심했더니, 누구세요? 연재가 생각을 해봤다. 누구세요 가 언제 나와야 옳은 반응인지. 그러니까, 예를 들면, 김현우가 나를 잊었다던가. 덕분에 팔자에도 없이 연재도 나름의 연기를 시작했다. 일종의 간보기와 같았다.

현우가 잠시 고민한다. 옅게 웃는 연재의 모습에 느리게 눈을 끔뻑인다. 남은 귤 세 조각 중 두 조각을 입에 넣었다. 꽤 취향인데.

 

“기억 안 나는데…. 미안. 그럼 나 퇴원하면 같이 가는 거야?”

 

눈썹을 팔자로 늘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하. 들릴 듯 말 듯 수긍한 연재가 현우의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귤 한 조각이 손에 들린 걸 빤히 본다. 침상에 앉아 시선의 높낮이가 달랐다. 현우가 연재를 올려다본다. 먹을래? 맛있어. 간지러울 정도의 말투로 말한 현우가 연재의 입 앞까지 귤을 가져다 댔다. 작은 입의 틈새를 통해 귤을 밀어 넣는다. 짧은 사이에 손가락 끝으로 입술의 촉감이 스쳤다.

현우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원래 동거를 이렇게 하나. 애인은 아니었던 걸까. 뭐 썸이라도 탔나?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 연재의 속도 나름 바빴다. 어디부터 어떻게 놀려먹어야 좋을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 현우의 팔이 자연스럽게 연재의 허리를 감았다.

 

“…”

 

연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 현우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간다. 이거네. 한껏 굳은 허리에 감은 힘을 더 줬다. 가까이 붙은 몸에 현우가 고개를 기대본다.

 

“기억 못 해서 미안. 그래도 이름이라도 알려줄래? 금방 떠오를 수도 있잖아.”

 

눈매를 살 접어 웃는다. 올려다보는 연재의 얼굴은 더 취향이었다. 얄쌍한 눈매나 복슬거릴 것 같은 머리카락 같은 게. 한 번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쓰다듬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갈비뼈 언저리로 고개를 묻은 채 가만히 호흡을 하는 걸 느꼈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는 병실의 문이 열렸다. 현우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담당의였다. 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한 담당의가 큼, 헛기침을 했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어 보이셔서 바로 퇴원 가능하십니다. 다만 교통사고라는 게 그 어떤 사고보다 내상의 위험성이 있어서, 정밀 검사를 위해 내일 한 번 더 방문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할 말이 끝난 듯 망설임 없이 병실을 빠져나가는 담당의에 현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연재가 저를 내려다 보는 중이었다. … 딱 한 번만 저 눈매에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바로 퇴원 수속 밟을까? 피곤하네.”

“… 그러자, 그럼.”

 

팔을 푸는 현우에 연재가 다 들릴 정도로 숨을 내쉬었다. 그게 꼭 현우의 귀에는 안심하는 것처럼 들렸다. 기세등등해진 현우가 짐을 챙긴다. 그 뒤로 서있던 연재가 고개를 까딱였다. 알아챘으려나. 혼신의 연기였는데 김현우 반응 보면 제대로 오해된 것 같다. 반쯤 의도한 상황이었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는 겨우 참았다.

 

접수처에서 청구를 마친 현우가 연재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붙자 연재가 잠시 고민한다. 작업 친다던가 하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기억은 없어도 몸에는 익어있는 행동이라는 걸까. 가깝게 붙는 몸에 연재가 한 발자국 물러선다. 기척을 느낀 현우가 고개를 돌린다.

 

“왜?”

“근데 난… 너무 붙는 건 좀 그래, 김현우.”

 

눈치보듯 저를 바라보는 연재에 현우가 아, 하고 탄식했다. 어, 어, 그래? 멍청하게 대답하는 건 덤이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로 거리가 이 미터 쯤 벌어졌다. 체감상 그랬다. 현우는 고작 세걸음 물러나 놓고 그렇게 생각했다. 또 이건 너무 먼 것 같다고.

막상 집 앞에선 다시 붙은 상태였다. 걸을 때마다 팔뚝이 스쳤다. 현우는 스칠 때마다 움찔거렸다. 당장에라도 팔뚝을 지나쳐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당연하다는 듯 드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한 것 같다. 이 정도면 최소 짝사랑에서 연애까진 간 걸 텐데. 연재의 눈치를 본다. 김현우가 무슨 생각하는지 눈 감고도 알겠다.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땐 정말 익숙했다. 분명 여기서 생활을 했고, 몇시쯤 잠을 자고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강의를 가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생각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 안에 제 옆에 선 이만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직도 이름을 모른다. 연재가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걸 보다 망설인 현우가 입을 열었다.

 

“… 혹시 그래서 이름이 뭐야?”

“… 아. … 연재. 양연재야.”

 

연재가 웃으며 제 이름을 소개했다. 입꼬리 경련 오겠네. 평생 현우를 바라보며 웃을 양을 한 번에 다 처리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억지웃음 짓는 거 분명 김현우가 싫어했던 것 같은데. 사고가 나면서 잃은 게 기억뿐만 아니라 취향도 포함인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덕분에 오늘 강의는 말아 먹었고.

 

“밥 먹을래?”

“너 나 좋아해?”

“…”

 

순식간에 연재의 말문이 막혔다. 밥 먹을 거냐고 물어봤더니 어떻게 하면 돌아오는 질문이 좋아하냐는 거야. 근데 표정이 짐짓 진지해서 태클도 못 걸겠다. 다만 이번엔 정말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하는 어쩌면 비웃음처럼 들릴 수도 있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현우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복잡해지는 게 보였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어쩌면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담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뭐?”

 

겨우 표정을 가다듬고 되물었다. 무슨 질문이냐는 뜻도 맞을 거고, 왜 그런 질문을 했냐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현우가 짧게 고민하다 뒷머리를 털었다. 이게 아닌가. 고개까지 갸웃댔다. 신발을 벗으며 내부로 들어선다.

 

“아니. 그냥, … 그냥 물어본 거야.”

 

문득 궁금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좋아했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근데,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 사실상 방금의 반응으로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느 누가 좋아하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되묻겠어.

정말 별 이유는 없었다. 병원에선 잔뜩 굳었으면서 묵묵하게 퇴원 수속도 기다려주고 집도 함께 가주고, 저를 잊어버렸다는 말에도 화를 한 번 안 냈다. 이름을 물어보는 거에도 다정하게 대답해줬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모든 게 설렜고, 좋았다. 정말 그럼 짝사랑일까.

하지만 역시 결과적으론 다른 이유로 감정을 깨달아서 그랬다. 저렇게 웃는 게 보기 싫다. 광대가 어색하게 올라가게 억지로 웃는 웃음이 싫었다. 기왕 웃는 표정을 볼 거면 진심으로 웃는 게 보고 싶었다. 그런 게 그냥 모든 요소가 모여서 제 마음이 양연재를 향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 정말 별거 아닌 고작 동거인에서 끝날 정도의 사이라면 이만큼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역시 이상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양연재에게서 느껴지는 것도 사랑 같아서 그랬다. 묘한 괴리감이 다가섰다. 차라리 고백을 안 한 사이라서 그런 거라면 그게 더 납득이 가겠다.

 

“김치찜 괜찮아?”

“어, 응. … 좋아.”

 

연재가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볼수록 김현우의 반응이 이상하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저게 무슨 반응인 거지. 딱 하나만 확신할 수 있었다. 김현우는 기억을 잃었던지, 잃지 않았던지를 떠나서,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현우가 연재를 꼬실 것처럼 했던 모든 것들이 제게 부메랑처럼 돌아간 걸 알까.

차라리 평소의 김현우가 나았다. 싫어하는 것처럼 반응이 나올 때까지 붙어오는 거나, 표현하는 거나, 그런 김현우가 나았다. 이제라도 그냥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답답하게 그러지 좀 말라고. 입이 안 떨어진다. 두어번 뻐끔거리던 입을 그냥 닫아버렸다. 함께 다물린 김현우의 입을 보다 시선을 다시 휴대폰으로 돌린다. 김치찜을 주문했다. 금방 사십 분 걸린다는 알림이 떴다.

 

“… 그 연재야 나 좀 씻고 올게. 손이 끈적한 것 같아서.”

 

어색하게 웃은 현우가 익숙하다는 듯 화장실로 향했다. 집의 구조상 처음 온 이방인 같은 사람이 찾기 쉬운 화장실의 위치는 아니었다. 연재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시선으로 좇았다. 뭐가 문제인데. 정말 양연재만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현관부터 화장실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걸음이다.

세면대를 틀고 그 아래로 제 손을 댄 현우가 물소리에 한숨 소리를 묻었다. 손이 잡고 싶었다. 스치는 팔에 계속해서 잡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손에 땀이 찼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상당히 이상하고 상당히 기묘하다. 이만큼의 감정을 느끼는 게 맞는 걸까. 정말 기억을 잃어서 그런 걸까. 모든 걸 다 기억했다. 근데 딱 한 존재만 기억에 없었다. 그게 양연재였다. 대뜸 뭐하냐고 물어봐 놓고 갑자기 사근사근한 말투가 된 양연재. 기억해내고 싶다.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무엇이길래 손바닥 뒤집듯 반응이 바뀌었는지가 궁금했다.

비누칠을 하며 손바닥을 벅벅 닦았다. 담당의한텐 말 안 했다. 기억을 잃었다던가 하는 거. 애초에 양연재라는 존재를 만나기 전까진 기억을 잃었다는 의식도 없었으니까. 드라마나 영화, 소설 같은 데서 보면 잊었다고 해서 다시 찾아주는 약 같은 건 없길래. 하…. 현우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양연재.”

“… 어?”

 

기억이, 돌아왔나. 소파에 앉아있던 연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주친 눈이 그래 보이진 않았다. 혼란스럽다는 듯 시선이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 움직였다. … 후. 짧게 숨을 고른 현우가 연재를 바라본다.

 

“왜?”

 

왜, 냐고. 저도 궁금했다. 왜 굳이 본인이 연재를 부른 건지. 묻고 싶었다. 정말 날 안 좋아하냐고. 그럼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게 맞냐고. 기억하는 네가 대신 알려주면 안 되냐고. 근데 무서웠다. 원래 같으면, 그러니까, 아마 양연재도 알고 있을 김현우라면, 상대가 누구든 이런 감정을 느낄 리가 없다. 나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현우에겐 아직도 그게 당연했다.

근데 그게 안 통했다. 정말 딱 눈앞의 연재에게만 그 감정이 통하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건데, 양연재가 김현우를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걸까.

 

“… 아니야.”

 

결국 묻지 못했다. 어떤 답변을 들어도 안 된다. 기억이 얼른 돌아오던가, 아니면 아예 평생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연재의 곁으로 붙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다는 걸 네가 알까. 연재의 표정을 계속해서 응시해도 저 눈동자에 피어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고작 양연재라는 존재 하나를 기억 못했다고 잃은 게 너무나도 많은 기분이었다. 제 감정과 양연재의 감정이 가늠조차 안 됐다. 무엇을 잊은 걸까. 무엇을 잃은 걸까. 마주친 눈동자에 키스하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 그렇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입안을 떠돌았다.

연재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물을 뚝뚝 흘리는 손바닥과 복잡한 표정의 현우를 번갈아 바라본다. 괘씸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김현우가 괘씸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연재의 시선을 피하던 현우가 연재의 곁으로 와 소파에 앉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재가 입을 열었다.

 

“말을 왜 하다 말아. 할 말 있는 거 아녔냐?”

 

결국은 짜증나는 마음이 동반되어 연기 같은 거 때려치웠다. 멱살을 잡고 저 기억을 잃은 멍청한 머리를 몇 번 후려치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더 이상 연기 같은 거 다 필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턴 연재가 현우에게서 멀어졌다. 현관으로 걸어가자 당황한 표정의 현우가 따라 일어선다.

 

“어디 가게?”

“알아서 뭐하게.”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놓쳐선 안 된다고. 재빠르게 현관의 연재에게로 다가갔다. 신발을 꿰어신는 허리를 끌었다. 휘청인 몸이 현우에게로 기대진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연재의 등 뒤로 닿은 현우의 심장 박동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미안해. 두고 가지 마. 너 기억 못해서 미안해. 어? 조금만 더 기다려주라. 진짜 금방 기억해낼 수도 있잖아.”

“… 어쩌라고.”

 

허리를 비트는 연재에도 현우가 팔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꼼짝없이 붙잡히게 되자 연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잃을 게 따로 있지. 현우의 무의식이 스쳤다.

 

“걍 잊고 살아. 그 정도 사이였나 보네, 우리가. 이 집이 네 기억 속에서는 누구의 집인데? 나도 이젠 모르겠다. 김치찜 잘 먹고.”

 

주머니 속 담배를 떠올렸다. 병원에 다녀오느라 하나도 못 피운 사실이 그제야 머릿속을 스쳤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김현우 보호자를 자처했을까. 연재의 눈이 점차 초점을 잃어간다. 놔라, 좀.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 가지 마….”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울린다.

내가 뭘 들은 거야? 연재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깨 위로 고개를 박은 현우가 느리게 들썩이고 있었다. 어쩐지 어깨가 축축한 것도 같고. 골때린다. 웃음이 터진다. 작은 웃음소리에 현우의 고개가 들렸다. 눈이 마주친다. 현우가 가만히 회색 눈동자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안 가면 안 돼?”

 

안 된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흐르는 눈물에 잠시 막혔을 뿐이었다. 가든 말든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붙잡아서 뭐 하려고. 야. 연재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우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몸이 오도 가도 못하게 제대로 속박됐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차오른 눈물에 연재가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내가 왜?”

 

현우의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건 당연했다.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 연재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의식하지 못하고 뱉어낸 말이었다.

 

“… 다시 말해봐.”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울먹이는 목소리가 어깨를 타고 넘어온다. 연재가 긴 숨을 터뜨렸다.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그럼 오늘이 고작해야 첫 만남일 주제에. 좋아한단다. 감당이 되겠냐? 혼잣말하듯 웅얼거리자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라는 것에 감당까지 필요할까. 현우는 저와 마주한 눈동자가 유해졌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해놓고 시선으로는 사랑을 속삭였다. 연재는 그 눈동자 안을 꿰뚫어 보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닿아왔다. 그래 그럼, 그냥, 너 알아서 해라. 반쯤 포기한 채로 다시 신발을 벗었다.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잃은 건 너고, 잃어진 건 나니까.

그 감당을 말한 거였다.

딱봐도 김현우는 그걸 말하는 지 모르는 것 같다.

바보 개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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