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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벗 삼아 끊임없이 눈 속을 맴도는 검고 파란 점. 한 켠을 가린 눈매는 오래된 빙하처럼 푸르스름하고 한 줄기의 머리카락은 고목의 가지처럼 풀리는 일이 없다.
라자데 Razade
밀레시안, 20대 초반의 엘프 여성체
170cm
삼하인
: 언제나 하나의 외형만을 고집한다. 에린에 온 이래 홍채 한 번 바꾸지 않고 옷만 몇 번 바뀌었다. 조금 밝은 살구빛 피부에 작은 세모꼴의 귀, 허리까지 땋아내린 검푸른 머리, 안대로 한 쪽을 가린 연한 하늘색 홍채, 잘 웃지 않는 입술, 가는 속눈썹이 올라간 눈매와 함께 움직이면 누군가는 서느런 매력이라 평하고 누군가는 타인을 배척하는 모습이라 평한다. 본인은 어떻게 불러도 신경 쓰지 않는다.
: 품이 넉넉하고 크게 튀지 않는 옷을 선호한다. 노출은 없으면 좋고, 있어도 괜찮았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가슴과 등이 보이는 옷을 기피한다. 대부분의 옷을 제 머리와 눈 색을 따라 검고 푸르게 물들였다. 좋아하는 색은 흰색과 파란색이지만 설원에서는 둘 다 잘 보이지 않으니 외출복은 거의 다 검푸르다. 날개도 헤일로도 꼬리도 선호하지 않아 조금 심심할 정도로 깔끔한 겉모습을 유지한다. 기껏해야 머리끈이나 장신구를 살짝 추가할 뿐이다.
: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가 유독 눈에 띈다. 원래 앞머리로 가렸으나 여러모로 움직이기 불편해 머리카락 대신 안대를 쓴다. 머리색과 비슷할 뿐 특징은 없는, 그저 붕대를 둘둘 감아둔 수준에 그친다. 안대 안쪽이 보고 싶다 말하면 순순히 안대를 풀어주지만 아무래도 말없이 건드리는 건 싫어한다. 안대 속의 눈은 드러난 눈과 색도 시력도 똑같다.
: 말솜씨가 없다. 사교성도 부족하다. 사람들하고 말을 섞을 필요를 못 느낀 게 반이고, 비밀이 늘어갈수록 입을 다무는 게 반이다. 그렇잖아도 사근하지 못한데 말마저 매끄럽지 못하니 종종 오해를 산다. 이 때문에 중요한 말을 할 때는 특히 천천히 말하는 버릇이 있다.
: 약한 것들에게 한없이 무르다. 다만 그의 기준에선 다시 살아날 수 없는 모든 것이 약하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다. 여하튼, 약한 것들에겐 화낼 일도 한 번 참는다. 특히 어린 것에게 더 심하다. 아마 아이를 기른다면 원하는 걸 다 들어주다 응석받이로 키울 것이다.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팔 한 번 잘못 잡는 걸로 꺾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영 냉정해지지 못한다.
: 솔직하다. 일부러 웃지 않는 게 아니라 즐겁지 않아 얌전하다. 에린에 온 초반에는 왜 사람들이 즐거운 일 없이도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예의적인 미소와 선의의 거짓말을 간신히 배웠어도 실생활에 쓸 일이 적으니 아직 서툴다. 이런 자신을 아니 가식과 거짓을 꾸미는 대신 차라리 입을 다물고 버티는 걸 선호한다.
: 고집이 세다. 남의 말에 휘둘리는 일이 적고 저 혼자 결론을 내리고 끝까지 가는 일이 잦다. 그나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며 경청하는 시늉이라도 하게 됐다. 더 예전에는 남이 입을 떼기도 전에 저 혼자 불쑥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 애정과 신뢰에 따라 반응이 제법 차이가 난다. 아니, 차이보다는 차별에 가깝지만 전혀 고칠 생각이 없다. 싫어하는 것을 괴롭히느니 좋아하는 것을 더 아낀다는 점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신뢰하는 이에게는 곧잘 풀린 얼굴로 웃고, 사랑하는 이가 주는 거라면 길가의 모래라도 기쁘게 받는다. 애정에 따라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사람이 바뀐다.
: 그러니 사랑이 고장 낸 저울은 언제나 한 쪽으로만 기울어진다. 원한 적 없는 애정에 둔하고 받아도 마냥 기뻐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닙니까? 쉽게 그런 말을 했다.
: 소울스트림에 오기 전의 기억이 없다. 그래서 많은 것을 모방했다. 책을 통해 대화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존대를 먼저 익혔다. 처음에는 늘 상대방을 ~씨로 부르며 딱딱한 문어체만 사용하다 적절한 구어체를 익혔다. 그래도 반말은 같은 밀레시안이 아니면 영 어색해하게 여긴다. 에레원은 종종 그의 영웅을 두고 기사님 같은 말투를 쓴다고 놀린다.
: 자는 것을 좋아하며 한 번 잠에 들면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러나 필수가 아닌 유희로 자는 탓에 수면에 드는 날은 불규칙하다. 한 번 잠들면 평균 수면시간은 11시간. 어디에서든 잘 수 있는 특기가 있어, 과거 아델리아 천에 둥둥 뜬 채로 잠들었다 놀란 레이널드에게 건져지고 잔뜩 혼났다. 그러나 이제는 티르 코네일, 그리고 자신의 농장이 아니면 전혀 잠들지 못한다. 지정한 장소에서는 어지간한 일로도 일어나지 못하지만 그 외의 장소에서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체의 특성 덕에 며칠 동안 깨어있어도 멀쩡하다.
: 미각은 멀쩡하나 먹는 일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입이 아주 짧다. 에린에 온 초반에 식사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더니, 입과 위장에 무언가 있는 상태를 다소 어색하게 여긴다. 그에게 식사는 유희도 필수도 아닌 사교의 일환으로, 타인과 식사할 필요가 있을 때만 음식을 섭취한다. 유일하게 흥미가 있는 음식은 술. 맛보다는 알코올 특유의 취기를 즐기는 쪽이다. 이 때문에 온갖 술만 모아놓은 가방이 따로 있고 농장 한구석에는 담금주 통이 가득하다.
: 음식과 요리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과 별개로, 다난들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배워서 가방에 늘 식재료를 쌓아두고 조리법도 바로 배워둔다.
: 여타 밀레시안들이 그렇듯 부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조금 아픈 치료에 불과하다. 죽었다 일어나면 몸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오니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한다. 죽음과 관련된 기억이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늘 되살아나고 멀쩡해지는 육체로만 살아왔으니 두려울 까닭이 없다. 이 때문에 타인을 돕다 죽는 걸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농부에게 농사를 맡기는 것처럼 죽지 않는 이에게 위험을 맡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이런 육체여서 안심하는 부분도 있다. 쉽게 죽는 육체였다면 여정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 단 한 순간도 영웅으로 나지 않았다. 잘해봐야 장삼이사, 못하더라도 갑남을녀. 불사의 육체 안에는 위대함도 용맹함도 강인함도 없다. 서사시와 황금보다 민요와 보리죽을 더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는 소박한 천성. 볕 좋은 날 낮잠 잘 여유만 있으면 만족할 존재. 부귀와 명성 위에 사랑을 두는 부류.
: 그러니 영웅담 또한 없다. 오르페우스는 오직 에우리디케를 만나기 위해 저승을 건너갔고 그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위해 무기를 들었다. 에린에 있어야 자신의 과거를 알 수 있다고 믿는 한, 사랑이 없더라도 이 땅을 지켜야 했다.
: 이전 세상의 기억과 흔적이 거의 없다. 다른 별에서 왔다고 부르기 우스울 지경이다. 살아온 사회의 문화, 언어와 말투, 개인사, 습관, 심지어 숨 쉬는 법조차. 그는 에린에 도착하자마자 숨이 막혀 죽었고 나오는 또 쓰러지기 전에 호흡부터 가르쳐야 했다. 차라리 처음 태어났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터다. 그러나 그는 제 상태를 무지가 아닌 '망각'으로 부른다. 자신은 그저 많이 잊었을 뿐이며 이계에서 살았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들숨도 없는 영혼의 밑바닥에 어떤 약속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그에게 단 하나 남은 것은 어떤 약속이다. 장면이라 불러도 좋고, 기억이라 불러도 좋으나 그는 약속이란 어감을 더 기꺼워한다. 반드시 너를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라는 어떤 속삭임, 라자데라는 단어, 그리고 저것들을 떠올리자 몰려드는 추위와 외로움. 이것들이 그에게 남은 전부며 집착하는 대상이다. 라자데가 이름이냐는 나오의 질문에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봤으면서, 또 기억을 잃을까 봐 당장 제 이름으로 정할 만큼 애착을 가진다. 그 때부터 그는 라자데로 불렸다.
: 약속을 떠올릴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외로워함에도 여전히 다른 건 떠올리지 못한다. 언어와 전달 방식은 무엇이었는지, 그때의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머릿속에 떠오른 '라자데'는 무엇인지, 데리러 오겠다는 당신은 누구였는지, 하다못해 왜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외롭고 추운 느낌이 드는지.... 전부 다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외로움이 이유 없이 생겼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 그 사람. 혹은 친애하는 그 이. 여전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기에 라자데는 약속해준 인물을 그렇게 부른다. 이름조차 모르니 애매한 단어를 붙였다. 그러나 음절에 실린 감정은 전혀 가볍지 않다. 그의 페넬로페이자 에우리디케, 청포도 익는 고장이며 이타카. 에린 전역을 통틀어 친애하는, 을 붙이는 유일한 존재. 그를 아는 이들이 살짝 헛웃음을 지을 정도로 발음마다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항상 기억나지 않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그 사람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낸다. 누군지만 알았더라도 진즉 에린을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테다.
: 종종 그 사람의 꿈을 꾼다. 내용을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꿈을 꿀 때마다 슬프고 외로웠다. 이토록 그립고 쓸쓸하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고민한 결과 추위를 느꼈다는 점에 매달려 에린의 추운 곳이란 추운 곳은 전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정 도중 카스타네아 앞에서 발레스를 언급해 반감을 사거나, 티르 코네일 주민들과 인사할 시기를 살짝 놓친다든가, 손발이 파랗게 질렸다 까맣게 되는 건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그 사람을 찾아내서 돌아가는 게 삶의 유일한 이유였다.
: 그러던 중 모리안의 꿈을 꿨다. 에린의 존망은 관심 없는 문제고 포워르와 반목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땅이 위험에 빠지거나 소울스트림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사람과 만나기 더 어려워진다. 이 두려움이 그를 글라스 기브넨과 크로우 크루아흐 앞에서도 살아나오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 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 이토록 그리워함에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는다. 모리안의 꿈을 꾸기 전까지는 보이는 사람마다 자신을 아는지 붙잡고 물어볼 정도로 맹목적이었으나 글라스 기브넨을 잡은 이후 뚝 끊었다. 시드 스넷타의 드루이드가 그에게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절박한 이는 어디서든 이용하는 법입니다. 그 이후로는 그 사람을 찾는 대신 자신이 누구보다 유명해지고 강해져서 에린 전역에 소문을 퍼뜨리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 에린을 지키는 동안 몇몇 이들에게는 깊은 정도 들었으나 여전히 최우선 목표와 가장 소중한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바로 떠날 수 있게 많은 것을 남기지 않는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약속은 함부로 하지 않으며 자신의 농장에도 그가 없으면 안되는 식물이나 동물은 들이지 않는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언제까지고 너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떠나는 순간 꼭 인사를 하겠다는 이별 연습이다. 이조차도 신과 인간과 포워르를 통틀어 에레원에게만 맹세했다.
: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변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외관 또한 그 사람에게 주는 증표이자 미련이다. 눈을 가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본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걸 편의 상 잘라놓고, 다시 궁여지책으로 따라했다. 환생도 기회가 될 때마다 하며 몸에 흉터가 남지 않게 한다. 지울 수 없는 흉터라면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는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깊다. 그 사람이 얼굴을 보고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웅이 된 나를 어색하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 한 마디로 줄이자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다. 모든 애정을 그 사람에게 주었기에 작은 국왕에게도, 수호자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줄 것이 별로 없다. 단 한 번도 퇴색되지 않은 마음과 약속이 죽지 않는 심장에서 무엇보다 고귀한 위치를 가진다. 그토록 그 사람을 사랑한다.
: ...아니, 그는 잔열조차 꺼져가는 센마이에서 돌이킬 수 없이 예감했다. 성소에서 약속할 때도, 작은 국왕이 그에게 친애를 표할 때도 느낀 공포가 발목을 잡고 등골을 쓸어올린다. 다시는, 다시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에린에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버리고 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오래 기다렸고 에린의 기억은 좋든 싫든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 수백 년 동안 방치된 사랑은 원망과 피로가 되어 이제는 차라리 그것들을 놓고 싶다. 이토록 모호한 기억이라면 완전한 망각이 나았다고 끝내 인정한다. 이따위 희망을 언제까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놓지 못하는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울고 싶어한다. 친애하는 당신, 기약없는 약속 하나를 위해 수백 년을 떠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 ...소울스트림의 '정화'는 그에게 꽤 쓸모있다. 기억을 지우진 않아도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흘려 보낸다. 스스로가 지쳤다는 인식은 있으나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찾으면 해결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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