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이 이대로 박제되면 좋겠다.
나 그냥 철부지로 살래. 이렇게 아빠가 모는 트럭 조수석에 앉아서 아빠가 틀어주는 트로트와 뉴스를 흘려들으며 툭 툭 내던지는 실없는 농담과 수다에 정신 팔린 채 살래. 언제까지나 어리숙하고 순진한 애로 살래. 어느새 머리가 다 벗겨진 아빠를 놀리고 아빠 몰래 찍은 투 샷을 인스타에 올리고 아빠가 피우는 담배 연기에 눈살을 찌푸리고 겨우 그런 게 하루의 전부라 걱정이라곤 실낱만치도 없는 생을 살래. 아빠가 날 너무 사랑하는 바람에 고약하게 자라버린 멍청한 어리광쟁이 아가씨로 살래. 웃어넘기기에도 바쁜 하루를 살래.
우리 삶이 이대로 박제되면 좋겠다. 그럼 아빠가 사준 정장이 내 몸에 걸쳐질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야. 아빠의 머리가 더 이상 빠지지 않는 대신 내 머리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좋아. 아빠의 병이 심각해지지 않는 대신 내 건강이 되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아빠의 칠순 잔치가 아득히 멀어지는 대신 내 졸업이 끝없이 유예 당해도 좋아. 정말 아주 진심으로 좋아. 우린 앞으로 나아지지 않겠지만 나빠지지도 않겠지. 그래도 충분해. 만족스러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어.
아빠, 행복이란 이런 건가 봐. 과거도 미래도 현재보다 나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오늘이 너무 귀해서 손에 꽉 쥐고 놓기가 싫어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이런 건가 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도 성에 안 차서 빼앗길 게 뻔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 그만큼 소중해서 괜히 화까지 나는 이 기분이 행복인가 봐. 넘실대는 온갖 감상에 몸 둘 바를 몰라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노래까지 불러대고 내 충만함을 어디에든 마구 과시하고 싶은 이 욕구가 행복인가 봐. 아빠도 나랑 놀아줄 때 행복하지? 내 얼굴만 봐도 행복해지지? 역시 그렇지?
2023 / 10 / 1 / 11:56 찍음
2024 / 5 / 21 / 09:34 그림
2024 / 5 / 21 / 13:5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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