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은 이렇게 시작해야 옳겠지.
나는 내 청춘을 무위에 투고하는 모든 행위를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죠. 내 사랑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그 사랑과는 결이 다른 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내 글을 읽을 정도라면 아마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아직은 모르더라도 조만간 깨닫게 될 테죠.
내가 남 사랑하기를 얼마나 즐기냐면요. 아주 유려한 세레나데를 지어다 매번 다른 사람에게 바치는 게 취미랍니다. 여긴 우리끼리니까 고백하자면 청혼을 아무렇게나 남발해댄다는 평 말인데요, 맞는 말이에요. 부끄럽게도 적확해요. 나는 사랑에 있어서 배려도 없고 무책임합니다. 뚱뚱하게 살찌운 메시지를 받아다 읽어보든 말든 나는 내 감상을 그이에게 던져두고 새 그이를 찾아 떠나면 땡이지요. 어때요, 이제 내가 좀 음험해 보이나요? 그렇지요? 변명 좀 해놓자면 내가 그렇다고 정말로 혼인신고서를 내미는 것도 아니고, 딱히 연애를 청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냥 사랑한다, 사랑하겠다, 앞으로도 함께 하자, 그런 보편적인 말을 예쁘게 정돈해 보내는 게 전부니까 일단 성급하게 혼내지 말고 대충 봐줍시다. 네? 어떻게 안 될까요? 잡아먹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사랑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 그이가 사랑받음직한 인물인가를 따져보는 과정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특히 이런 사랑은 말이죠, 나 혼자 할 수는 없답니다. 어디다 미끼 삼아 휙 던져둔 내 마음을 훗날 아무 데서나 온 아무개가 홱 주워가는 식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니지요. 알다시피 나는 박애주의자가 될 만한 깜냥은 전혀 없거든요. 싫다는 사람 붙잡고 내 딴에나 아름다운 궤변을 죽 늘어놓을 의향은 더더욱 없고요. 그래서 나의 그이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임과 동시에 내가 주는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찰나에만 일치하는 일회용 사랑은 또 싫으니 되도록 영원불멸해야 해요. 쉽지 않아요. 세상에 몇 없어요. 사실 처음엔 사람 보는 눈이 없다 보니 수신인 칸을 잘못 적는 실수가 좀 있었다지만 이제는 나름 가려내는 데 도가 튼 선수랍니다. 그러니까 화낼 필요 없어요. 만약 벌써 내게 분노하고 실망하고 괴롭기까지 하다면 당신을 적어도 여기 적힌 대로는 사랑해 주지 않을 게 뻔하다니까요. 안심하세요.
말미에 밝히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사랑을 논하려 드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의 수많은 그이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심상을 미루지 않고 참지 않고 지우지 않고 보기에 좋은 정도로만 꾸며 선보이는 행위 또한 내게는 사랑일 뿐'이란 내밀하고도 심오한 주장을 볼 사람은 죄 와서 다 보라고 공개 일기장에다 낱낱이 적어두는 사람일 뿐이죠. 논쟁하지 맙시다. 각자의 사랑을 실천하기에도 바쁜 것이 우리네 삶이에요.
J에게: 내 마음이 덕지덕지 붙은 문단을 그득그득 채울 곳이니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해야 옳겠지. 전시되길 원하지 않았다면 유감이야. 하지만 너무했잖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을 해놓고 나만 간직하라니.
2024 / 05 / 08 / 23:00 찍음
2024 / 05 / 13 / 22:16 그림
2024 / 05 / 14 / 00:44 씀
2024 / 05 / 14 / 10:13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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