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하는 법을 알려줘

나를 좋아하는 법을 알려줘 1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몇가지 항목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생일이나 이름 같은 것. 생일(탄생일)이 있기에 내 존재가 세상에 비춰지고, 이름이 있어 다른 사람과의 차별성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나의 부정은 정말 중요한 사항이다. 생일이 너무 싫은 나머지 이상한 단어를 만들어 부르거나, 이름이 싫어 필명·가명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의 시작점부터 거절을 하고 있는 데, 현재의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까. 아무래도 무리인 거 같다.

눈을 감으면 자신의 부정이 크게 닿아온다. 우선 불안이 엄습해온다. 나에게 있어 불안은 죽음의 형태를 띄고 있을 때가 많다. 가상의 죽음이 다가온다. 감은 눈을 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생각 조차 떠올리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요소들이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고 나를 만들어내는 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니, 나도 상상하지 못할 삶이다. 그렇다고 딱히 부럽지는 않다.

자신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는 신체의 외양도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의 몸은 흔히 ‘여성’이라 부르는 형태로 되어 있다. 증거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성기와 튀어나온 유방, 건강한 나머지 한달에 한 번 피를 토하는 자궁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이 모여 사회는 나를 여성으로 판단하고 있다. 법적 여성, 주민등록번호 2번이 나의 주소다.

나는 올바른 주소에 서 있는 게 맞는가. 아무래도 아닌 듯 하다. 잠시 회상을 해보자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린 현재의 나는 아버지와 상당히 닮아있었다. 그러나 이차성징을 겪은 나는 어머니와 닮은 신체변화를 경험했다. 수염도 떡벌어진 어깨도 굵은 목소리도 나에겐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어? 이게 아닌데? 신이시여, 업그레이드에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고민이 많다. 한창 그럴 나이다. 거기에 돈도 집도 없으니 매일 매일이 굶주린 고뇌로 가득하다.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고 아직도 맴돌고 있다. 나는 당연하게도 면도를 하게 될 거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사타구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저기 서서 나의 사고를 부정하는 대중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나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내가 아니다. 잘못된 껍데기를 쓰고 태어나버렸다. 그렇다면 나에게 꼭 맞는 껍데기는 무얼까. 보통은 위의 내용을 읽으면 ‘남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생각한다. 정답이다. 나는 남자다. 문제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민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버린다.

기호를 적어보자면 남성, 긴 치마, 네일 아트, 단발 머리, 등을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여성’성을 수행할 때의 기호 목록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쯤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생각이 하나 있다. 완전한 남성이 아닌게 아닐까? 일부 여성이 섞여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자. 여성복으로 나온 의복을 입는 긴 머리의 시스젠더 남성은 드물긴 하지만 존재하고 있다. 상황이 복잡해졌지만 적당히 말하자면 여성 신체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기호만으로 ‘너는 사실 여성이 맞을거야’라는 주장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은 생각이 빙 돌아 다시 원점으로 나를 돌려보냈다. 나는 남성이 맞다. 나는 트랜스 남성이고 병원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나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난관에 부딧히게 된다. 돈, 돈이 없다. 그렇게 날 것의 잘못된 껍데기에 뒤쌓인 채 살 방법 밖에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나를 여성으로 오인하고 있다. 나는 돈을 위해 그에 부응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온다. 스트레스는 우울과 불안을 가져오고 죽음이 다시 나를 찾아오게 된다. 살아서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제나 죽음이 문턱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거짓 껍질만 아니었더라면 죽음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를 부정한다는 건 반 쯤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닮아있다. 너무 오랜 시간 자신을 경멸하고 거부해온 나다. 이런 내가 스스로에게 호감을 표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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