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당신과 나 사이
우리는 모두 다르다.
* 2차시 합평에 낸 최종본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에 빗대어서야 세상을 인지할 수 있다는 말일 테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는가. 물리적으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이고,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다른 경험의 총합일 텐데, 그렇다면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바라보는 동일한 세상은 과연 정말로 단일할까.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은 위 물음을 극대화한 것으로도 보인다. 처음 벌어진 사건은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다. 체르뱌코프가 재채기를 했고 앞자리에 있었던 브리잘로프 장군의 대머리와 목에 침이 튀었다. 그러나 여기서 파생된 주관적 해석은 인물마다 아주 제각각이 된다. 체르뱌코프는 그가 가진 배경과 감수성에 의해 아주 심각하고 부정적인 사건으로 해석했고, 장군은 기억에 남지도 않는 저녁의 해프닝으로 잊었으며, 체르뱌코프의 아내는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긴 하나 어쨌든 그 일이 사과하면 해결될 정도의 실수로 판단했다. 제삼자인 독자로서는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라고 김소연 시인이 <마음사전>에서 말했듯이, 어쩌면 진정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고 오해와 착각만이 켜켜이 쌓여 우리 사이를 지탱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한때 그 점에 대해 낙담스러운 적이 있었다. 인간은 결국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면서도 낱알 같은 모래알로 밖에는 살 수 없는 걸까, 그러한 점과 점들이 모인 사회는 얼마나 바스락대는 사막일까 하면서. 지금은 그렇게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어도 결국 서로 다른 레이어에 서 있어, 온전히 겹치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다름이란 나와 당신이 각기 존재함의 증명이며, 다채로운 세상의 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시에 대한 평론을 조금 인용해보고자 한다. 김수예 시인의 <피어나 블루블루> 시집에 실린 문신 시인의 평론을 보면, "내가 당신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고, 당신 또한 또 하나의 당신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존재의 궤도가 있는 법이고, (중략) 당신은 당신의 궤도에서, 나는 나의 궤도에서. 그러다가 가끔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때로는 등 돌리고 아주 멀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궤도의 리듬을 우리는 삶이라고 해왔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당신과 나 사이를 노래할 수 있음은 당신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사이가 있다는 말이 퍽 안온하게 다가왔더랬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살아온 궤적도, 가치관도, 경험도 다르다. 먼 별처럼 사이가 아득한 우리가 우연히 만나 연을 이어 나감은 차이와 다름을, 서로를 상상할 수 있어서라고 믿는다. 여기, 내 친애하는 지인이 즐겨하는 말이 있다. 조금 변형해서 인용해보자면,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을 이타적으로 만든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타인과 자기 밖의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자는 다른 이를 쉽게 타자화하고, 자기 이해 밖의 존재는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니 상처입혀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상상력의 빈약함은 곧 인지하는 세상을 좁히며 누구와도 궤도를 맞물리지 않게 할 것이다. 나라는 인지필터를 거쳐 살아가는 물리적인 세상이 해석된다. 당신을 통해서 인지된 세상은 나의 세상과는 또 다를 것이다. 어느 누구의 세계도 같지 않으나, 같지 않기에 우리는 다름을 알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함께 나아감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함께 걷는 끝에는 가장 멋지고 다채로운, 잘 된 오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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