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작법서

인풋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창작과 강박

人工事件 by go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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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입니다. 제가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만드는 이유가 되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서, 지금 와서 읽으면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쓴 글이므로, 이곳에도 업로드해 둡니다.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창작물을 싸구려라고 비하하는 것은 독자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니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고상한 가치를 지닌 글은 아니라고, 평소의 스트레스를 배설한 것뿐이라고 얼마 전에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도 모호하게는 알고 있었지만 내 글이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것이란 사실이 마음에 와닿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건 괜찮다. 내 글이 형편없단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괴로운 것은 이 세상에 배울 것이 무한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많다니!

이 세상에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많다니...

MBTI 테스트에서 T와 F를 수치화하듯 1번과 2번 항목의 비율을 나타낸다면, 나는 90퍼센트 정도 2번에 속하는 사람이다. 매력적인 글을 읽으면 다시 보지도 않을 거면서 무조건 아카이브를 한다. 재미있는 연재 기사를 발견하면 1편부터 모조리 읽어야 한다는 불안을 느낀다. 나를 거치지 않고 세상에 흘러 들어간 소설을 보며 발을 구른다. 국어사전을 켜놓고 내가 모르는 단어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괴로워한다.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콘텐츠의 양은 한계가 있다. 베스트셀러 좀 안 읽는다고 살아가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식의 영역은 터무니없이 넓고, 따라서 전부 소화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는 한편, 끊임없이 세계의 무한한 정보와 자신의 좁은 지식 영역을 비교한다. 조급해하면서 보통 유튜브를 켜서 내가 놓친 일본 밴드가 있지는 않은가 확인을 한다. 어떤 걸작보다도 국어사전이 나를 어렵게 만든다.

언제부터 이렇게 초조해하였는가. 나는 무엇이 이렇게 무서우며,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인가. 이 급박함의 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선가 읽은 두 개의 문장이 있다.

  1. "작가는 다방면에서 전문가여야 한다."

작법을 논하는 인터뷰를 뒤져가다가 보았던 문장. 기억이 모호해져 피상적이고 둔한 문장으로 변모했으나, 막 수확했을 때에는 이것보다 예리하고 뾰족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떠올리며 동의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을 읽는 이유를 찾으려던 무렵이었다. 독서는 언제나 나의 취미란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미스 추(미스 추는,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소설 장르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단순미래와 의지미래라는 소설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에 몰두한 것에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건설적인 원인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 작가의 소설은 재미있다. 종이책인데도 전개가 빠르다. 뒤통수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해지는 전개가 반복된다. 오로지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소설을 웹소설 플랫폼보다도 그 작가를 통해 먼저 접했다. 사랑을 사랑해로 표현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작가의 소설이라면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방식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사랑의 근거를 책 맨 뒤 페이지에 나열된 길고 긴 참고문헌 목록에서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실수였다. 취미에 이유를 붙이는 순간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건설적' '합리적' '실용적' 이런 형용사는 취미에서 한 오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

사실은 재미있어서 좋았다. 오락영화처럼 질주하는 스토리에 매력을 느꼈을 뿐이다. 토막 상식이 틈틈이 들어간 해상도 높은 서술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매력 포인트였다. 그러니까, 짝사랑 상대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 사람은 똑똑하니까" 하고 대답하는 꼴이다. 사실은 잘생겨서 좋아하게 된 것뿐인데.... 성격이나 지능 지수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나는 얼굴만 본 건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직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조금 초점에서 벗어났다.

여기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보겠다.

  1. "거의 모든 사람이 비슷한 뇌 용량을 가지고 있다."

해당 인터뷰에는 1개 국어 사용자가 만 단어를 안다면, 2개 국어로는 각각 5000자씩밖에 알지 못한다는 비유도 나온다.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한국어가 쪼그라드는 것을 체감했던 나는 이때 이후로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했다. 영어도 일본어도 다른 외국어도 좋지만 역시 내가 잘 하고 싶은 것은 한국어였다. 유년기에 내 정신을 진동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태준의 문장강화였다. 뇌의 지분을 한국어 이외의 다른 언어들에 내어주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기타 언어가 한국어를 잡아먹는다고 생각하면 침대에 누워서도 눈이 안 감겼다.

한편 내가 질투한 작가들은 다들 너무나도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적재적소에 써야 할 단어를 썼고 군데군데 똑똑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들어가 있었고 그렇게 열-심히 글을 쓰는 와중에 남의 글도 열심히 읽고 소설만 보는 게 아니라 논픽션도 잔뜩 읽고 거기에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아름다운 코멘트를 달고.... 내가 언어학개론 한 권을 가지고 몇 달씩 읽고 있을 때 그들은 읽은 책으로 피사의 사탑을 쌓고 있었다.

영화도 멋있는 것만 봤다. 알프레드 히치콕, 구로사와 아키라, 장 르누아르 이런 사람들 거.... 소설 선정에도 힙스터력은 드러났다. 처음 들어보는 헝가리 작가의 소설을 극찬하는 글을 읽은 나는 지극히 대중적인 나의 취향을 원망하며 눈물을 쏟았다.

하여튼간에 나의 구식 텔레비전 같은 글을 보다가 그들의 글을 보면 눈이 부셨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글은 종류도 무척 많았다. 재미로 밀어붙이는 하드보일드적 문장, 쫀득한 만연체, 깔끔한 번역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장르도 엄청 많았다. 로맨스도 미스터리도 SF도 전부 좋았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해야 전부 가질 수 있지? 계속 고민했다.

여기서 한심하게도 1)에서 내린 결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사람들은 다 똑똑하잖아.... 그럼 나도 똑똑해지면 되지 않을까? 이때 똑똑하다의 정의를 명확히 하였어야 했다. 적확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사람의 사고는 어느 정도 사용하는 어휘에 의해 재단된다. 새로운 개념을 창조할 때는 언제나 새로운 단어가 동반되고, 보통 사람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단어를 빌린다.

좁은 어휘풀에서 놀고 싶지 않다.

남들과 똑같은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 이 시대의 교양인, 깨어 있는 시민, 명철한 지식인이 되고 싶다!

복잡하게 뒤섞인 욕망으로, 달려가듯이 머릿속에 텍스트를 집어넣었다. 꾸역꾸역 아카이브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적 수준이 올라간다거나, 뛰어난 교양인이 된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격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읽은 윌리엄 포크너의 글은 너무 어려웠다. 미술사 연표를 보다가 금방 손 뗐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분석하다가 챕터 원에서 포기한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의무감으로 하는 인풋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인풋이 아니라 취미여야만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분석해서는 알 수 없는 포인트가 있었고, 게걸스럽게 씹어 삼켰을 때에만 알아차릴 수 있는 그 포인트에 보통 나는 매료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지 뭔가 해낼 수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내고 싶은 것인가?

창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포스타입에 처음 가입하고 작심삼월 이벤트를 신청했을 때, 답신 메일에서 작가님이라는 칭호를 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예술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있다. 똥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아무래도 된다는 쪽이 요즘의 대세인 것 같다. 예술은 잘 모르지만, 똥에 대해서는 안다. 똥은 무엇인가? 먹은 음식 중 소화하고 남은 찌꺼기가 배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은 배설이다. 인풋은 섭취고 습작은 소화고 아웃풋은 배설인 것이다. 똥에 우열을 따질 수 있는가. 미켈란젤로의 똥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똥 중 어떤 것이 우수한가. 야채 꾸준히 먹고 탄단지 골고루 섭취한 황금똥도 훌륭하지만, 컵라면과 탄산음료와 정크푸드의 찌꺼기라고 해서 나쁠 것이 있나.

나는 똑똑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잘생겨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멋진 똥을 싸고 싶었다.... 히치콕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아도 멋진 똥을 쌀 수 있을까? 창작이 똥을 싸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어쩐지 그럴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생겼다.

어느 날 안정효의 오역 사전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의 머리글, 9페이지 가장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군것질을 하듯 재미 삼아 야금야금 하는 공부가 가장 더디면서도 사실은 영어를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한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조급해해서는 안 된다. 구구단처럼 1단부터 9단까지 차례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니까.

창작도 그렇다. 소설은 작법서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움직이는 동력은 나의 삶이다. 나의 경험과 관심사와 지식에서 양분을 얻어 자라나는 것이다. 작법서는 말 그대로 작법서. 약으로 따지자면 처방전. 물을 이틀 간격으로 주세요, 그런 문장이 나와 있는 설명서일 뿐이다. 그것을 씨앗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씨앗이 될 수 없는 것은 감정과 취향이 완전히 배제된 식사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고, 좋아하는 글들을 생각했다. 왜 좋았지?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글 너머로 작가가 보인다는 것은 칭찬으로 쓰이지 않지만, 나는 어쨌든 그 사람의 여정이 그 글에 담겨 있어서 좋았다. 샬럿 브론테가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구나, 최근 전라도 여행에서 돌아왔구나, 언어학을 좋아하는구나. 문장에 지문처럼 찍혀 있는 그 사람의 개성.

개성은 한계에서 나온다.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볼지 선택해야 한다. 유한한 시간의 일부를 어디에 들이기로 선택하는가에서 그 사람의 개성이 드러난다. 무엇을 사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지에서 드러난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서 정작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보 과잉 시대에 진정한 인풋은 포기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서 새하얀 구글 문서 화면을 등지고 타인의 활자를 읽는다. 이 조급증은 아마도 선천적인 성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빠르게 소멸되는 순우리말 어휘, 없어지는 방언, 변화하는 맞춤법. 그런 것들이 버겁다. 생겨나는 밈, 좋아하는 작가의 일상, 잊어버린 취향. 평생 달려도 전부 안을 수는 없다. 인류가 쌓은 학문의 탑에 나는 벽돌 하나도 공헌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쌓기는커녕 평생 단 하나의 탑도 제대로 오르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의 결여된 전문성을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그런데 뭐...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다. 그냥 쓰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똑같다.

야금야금 조금씩, 놀이하듯이 틈틈이. 계속 읽는 수밖에. 창작은 살아가고 읽고 보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것의 반복이니까, 계속 배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조금씩 넓혀 나가야 한다. 예를 들면, 가보자고, 가늘고 길게, 어떻게든 되겠지, 의 정신. 그러한 정신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좀 더 괜찮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는 서두의 말은 취소하겠다. 생각해 보니까 걸작을 쓸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나는 추악하게도 남의 창작물을 질투한다. (원래 본인의 욕망을 직시하기란 힘든 법이다....)

사실은 끝내주는 글을 쓰고 싶다. 사랑받는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설정한 예상 독자에게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는 그러한 글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블루투스 키보드를 매일 두드린다. 정복할 수 없는 산을 꾸준히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러면서 놓치는 게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어쨌든 이게 좋다. 재미있다. 즐겁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짧고 간결하게 의도를 설명한다. 나는 글을 잘 못 써서, 이렇게 길게 쓰지 않으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사실 서로에게 외국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HSK로 따지면 3급 정도 되는 어설픈 실력이지만, 의도가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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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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