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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에메아젬│5.3 스포/칠흑비화 기반

OVERTURE by KNOWN

- '아젬'의 성별은 정해지지 않았으니 편하게 판단하고 읽어주세요

“결국 또 결론은 안 났지. 네가 양보하지 않으니까.”

“네가 타협을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 나는 충분한 가능성들을 제시했어.”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아젬은 실로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에메트셀크를 응시했다. 드넓고 텅 빈 회의장에는 고작 두 사람이 남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끝나지 않는 공방 끝에 나머지 열두 명은 일시 해산한 직후였다. 그리고 똑같이 자리를 뜨려 했던 에메트셀크는 안타깝게도 다시 아젬에게 붙들려 자리에 앉은 참이었다. 뿌리치지 못하고 기어이 한 마디 대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에메트셀크는 대화 상대로서 아젬이 아주 불편했다.

반박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니까.

“말했잖아, 그들에게 필요한 건 확신이라고. 선택지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그들에게는 그만큼의 시간이 또 기다림이 되잖아. 누가 봐도 그게 더 비효율적이야.”

“제시한 의견을 묵살하는 네 태도는 옳았다고 생각하나? 더 ‘비효율’적인 시간이 되기 전에 내가 끼어들어서 잠시 해산한 거야. 그러지 않았으면 네가 말한대로 정말 의미없는 토론이 되었을 거다. 아젬.”

아젬은 답답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짚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계곡지대가 무너지면 수원이 막혀. 수로를 다시 뚫는 것만 해도 한참 걸리고, 골렘 소환까지는 일주일도 안 남았어. 그럼 그 전에 땅 크리스탈을 제거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잖아?”

“보고서는 봤나? 동원되는 인력과 소모되는 시간만 헤아려도 이미 주어진 시간 안에 제거란 불가능하다고 했을 텐데.”

동쪽 숲의 계곡지대는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땅 크리스탈이 뭉쳐진, 엄청난 규모의 크리스탈 광맥을 형성한 지역이었다. 최근 점점 땅 속성의 농도가 짙어짐에 따라 크리스탈 골렘의 형성이 불가피해진 상황으로, 오늘 14인 위원회의 마지막 의제로 오른 주제가 이것이었다. 에메트셀크를 비롯한 대다수의 의견은 골렘 토벌 인원을 선별하는 것, 아젬의 의견은 그 전에 크리스탈을 전부 제거하는 것.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지금 아젬과 에메트셀크의 대화로 충분한 파악이 가능하다.

“왜 못 해? 가능해. 물 크리스탈로 상쇄시키면 그만이야.”

“……같은 말의 반복이 되는 것 같은데, 축적된 땅 크리스탈의 양은 하루이틀만에 제거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모든 작업에는 인력이 동원되는데, 네가 제시하는 모든 방법이 그 부분에서 비현실적이라고.”

“흐음.”

당장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아젬은 팔짱을 끼고 에메트셀크를 길게 응시했다. 퍽 부담스러운 시선이 떨어지자 에메트셀크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당장 아젬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하고 타협해. 토벌에 자원하는 시민들도 있으니 시간은 꽤 단축될 거야. 계곡지대가 완전히 무너질 일도 없어. 동쪽 숲의 수원이 중요하다는 건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니, 내일 엘리디부스에게는 다시,”

“역시 심핵은 터트려야겠는데.”

조용히 넘어가나 싶더라니, 에메트셀크의 말이 끝나기 직전 아젬의 목소리가 재차 치고 들어와 에메트셀크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였다. 아젬의 표정은 가면 너머로도 흔들림 없었다.

“네 말은 충분히 이해했어, 에메트셀크. 하지만 온전히 토벌에만 집중하기에는 사전 조사에 따른 결론이 불충분한 것 같아서 말이야.”

“불충분, 하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절로 되묻고 말았다.

“보고서에 올라온 크리스탈의 순도 수치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봤어?”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규모와 순도는 동시에 조사 했……”

머릿속에 담아둔 보고서를 한 줄 한 줄 더듬던 에메트셀크가 대답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아젬이 무엇을 지적하고 싶어 하는 건지 깨달은 듯 말이 없자, 아젬은 거보라는 듯이 턱을 도로 치켜들었다.

처음 민중 토론을 거쳐 올라온 보고서를 14인 위원회가 의제로 올려 수리하고, 최종 보고서를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이러면 보고서는 최소 두 개가 되는데, 이 사이에 재조사를 거치며 몇몇 크리스탈의 순도값이 처음 기재된 기록과 달라졌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크리스탈은 점점 그 순도가 올라가기에 당연한 일이라 여겼으나, 아젬이 지적하고 나서야 에메트셀크도 자신이 한 가지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젬은 지금 막 에메트셀크가 깨달은 부분을 굳이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보고서에서 계곡 지대에 형성된 모든 땅 크리스탈의 순도 상승 수치가 똑같았잖아. 형성된 시기도, 크기도 전부 다르니 성장 속도가 제각각일텐데 마지막으로 기록된 닷새 간의 수치 상승 속도가 균일하다는 건,”

“……이미 일체화 되었군. 뭉쳐지지 못했을 뿐.”

자연 발생되는 골렘의 심핵은 가장 순도 높은 크리스탈로 만들어진다. 순도가 최고치를 찍는 순간 주변 크리스탈 수치가 동일하게 상승하기 시작하는데, 이 단계에 이르기 전 골렘이 소환되므로 즉시 토벌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일반적인 골렘은 부위마다 순도가 상이하기에 약한 부위를 순차적으로 파괴하며 토벌한다. 균등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취약 부위 탐색 난이도 자체가 올라가므로 토벌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했다.

순도 수치의 변화는 당연하고, 애초에 골렘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균등화가 이루어진 선례가 없었기에 간과한 부분이다. 인정한다.

“그렇지? 그러니까 못해도 심핵이 될 크리스탈은 제거해야 돼.”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네.”

에메트셀크는 순순히 인정했다. 순도 포화를 찍은 심핵 크리스탈을 파괴하면 일체화는 멈출 수 없어도 균등화는 멈출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결국 토벌도, 제거도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어쩌겠는가. 금일 중으로 다시 위원회를 소집하여 회의를 재개할 수밖에. 가만히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에메트셀크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다시금 아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하지?”

“네 말을 듣고 나도 보고서 내용을 다시 검토해 보다 깨달았을 뿐이야. 우리 14인 모두가 멍청이였던 거지.”

아젬은 태연하게 자신을 포함한 14인 위원회를 폄하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에메트셀크는 기가 찼다. 정말 한 마디도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다.

“어쨌든 내 덕분에 오류를 찾았으니 된 거 아니야?”

“질리도록 말한 것 같지만…결론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네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래도 결국 내 말은 들어주면서.”

“맞는 말을 할 때.”

서로가 ‘아젬’이자 ‘에메트셀크’가 아니던 시절에도 충돌은 심심찮게 일어났던 두 사람이었다. 토론을 벌이면 언제든지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으며 설령 같은 편이어도 근거가 대립했고, 결국에는 두 사람의 대립으로 공방이 이어지다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두 사람의 토론은 아모로트 시민들 사이의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아젬이 먼저 위원회로 들어갔을 때, 에메트셀크는 그래도 그가 그 자리에 오른 만큼 어느 정도 수용성있게 변화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자신까지 그 자리에 합류하고 보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똑같음을 되새겼을 뿐이다. 아젬을 새는 바가지 수준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으나, 그와 부딪치기 시작하면 싫어도 끝을 보게 되는 입장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기분파, 명석한 두뇌와 거침없는 언변, 순간적인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버리는 그의 행동 방식은 '하데스'와도, '에메트셀크'와도 상극을 달렸다.

그럼에도 이 질긴 인연이 여태 이어진 이유 역시도 그들이 상극이기 때문이리라.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딱히 일부러 멀어져야 할 이유도 없었다.

뻗어나가는 잡생각을 갈무리한 에메트셀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위원회를 다시 소집하지.”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요한 공기에 불안함을 감지한 에메트셀크가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전까지 아젬이 서 있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반쯤 열려있는 회의실 입구를 보고 나서야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바깥으로 나가니 익숙한 친우가 의사당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하는 게 아닌가.

“…휘틀로다이우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친우가 입을 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과, 제 의문점을 당연히 해소시킬 답을 갖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는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젬은 막 동쪽 숲으로 떠났어. 크리스탈 순도 측정 이데아, 중화용 물 크리스탈 골렘의 심핵, 함께 할 동료들을 데리고 말이지. 이데아를 대여했다는 증서를 아젬이 빼먹고 가서, 전해주러 왔어.”

“이,”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내리누른 에메트셀크는 잠시 숨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한숨을 길게 내뱉은 뒤에는 이성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친우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잠자코 서 있을 따름이다.

가면 위로 미간을 매만진 에메트셀크는 얼마 안 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난 재소집을 해야 하니 이만.”

“아젬은 안 불러도 괜찮겠어?”

“보고는 할 거야. 결론이 나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너도 그거 주고, 관리국으로 돌아가기나 해.”

“그럴까나.”

벗의 반응을 예상한 듯, 휘틀로다이우스는 웃음기 어린 대답과 함께 에메트셀크에게 증서를 건네준 뒤 순순히 등을 돌렸다. 산들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에메트셀크도 결국 의사당 안으로 돌아갔다. 묵묵히 라하브레아의 방을 두드리고, 재소집의 때를 알린다. 다시 모인 위원회의 누군가는 수긍하고, 누군가는 저처럼 또 탄식하겠으나, 결국 태양 아래 그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깨닫고 빠르게 수용할 것이다.

“거창한 이름이군.”

증서를 품에 넣은 에메트셀크가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회의장의 문을 열어 젖혔다.

태양은 여전히 그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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