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철학논고

[라이소피] 마지막

순정철학논고 라이프니츠 X 소피아

덕질용 by 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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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따로 다녀."

라이프니츠가 왼쪽 발을 질질 끌면서 걸으며 말했다. 어젯밤, 쉘터를 급습한 좀비 떼를 피하려 2층에서 뛰어내리다 잘못 착지하여 생긴 부상이었다. 그 이후로 걸음은 미묘하게 느려졌고, 그는 이따금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참으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마에 묻은 피를 대충 문질러 닦던 소피아가 외쳤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야? 합류 지점까지는 한참..."

"도움이 안 되잖아. 아까도 내가 아니었으면 둘 다 죽었어. 짐을 하나 더 달고 있는 거라고."

소피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라이프니츠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는 사실이긴 했다. 2시간 전, 쓰레기 더미 뒤에 숨어있던 좀비 세 마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생긴 갑작스러운 전투. 힘이 좋고 부상이 없는 소피아가 두 마리를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렵지는 않은 싸움이었으나, 완전히 머리통을 박살 내지 않은 게 문제였다. 방심한 사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 마리가 재빠르게 소피아를 덮쳤고, 재빨리 좀비를 쳐내 자신을 살린 건 라이프니츠였다. 갑자기 달린 탓에 그의 발목은 상태가 악화됐고, 목덜미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은 좀비들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 낸 것을 확인한 소피아가 그제야 라이프니츠의 상태를 살폈다. 도톰한 겨울 교복 덕분에 물린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목이나 손등에 이리저리 쓸린 자국이 있긴 했지만, 그건 소피아도 마찬가지였다.

"... 미안. 물린 데는 없어?"

"어. 근데... 아니야."

굳이 말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쉬어야 했고, 발목은 당분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곳에 사람이라고는 자신들밖에 없었고, 좀비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랐다. 폐허가 된 도시의 변두리에서 소피는 두리번거리며 그나마 쓸 만한 물건을 찾으려 했다. 라이프니츠는 바닥에 주저앉아 배낭을 뒤적거렸다. 비상식량과 물통 두어 병이 손에 잡혔으나, 썩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소피아는 라이프니츠의 발아래에 자신의 가방을 얹어놓고는 말했다.

"앉아있어. 고정할 만한 거나... 쓸 만한 게 있으면 찾아올게."

"소피아. 합류 지점까지 혼자서 갈 수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둘이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 아, 저기 약국 있다."

소피아는 기가 차다는 듯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약국을 가리켰다. 유리가 깨지고 문이 부서진 약국에는 다행스럽게도 물품이 꽤 많아 보였다. 자신의 가방을 왼손에, 라이프니츠의 가방을 오른손에 든 소피는 라이프니츠를 부축하려 다가갔다.

"부축해줄 필요까진 없어. 일단 가서 목발이나 붕대가 있나 보자."

조금 무안했지만, 키 차이가 꽤나 나는 친구를 부축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소피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이프니츠는 소피의 손에서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는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통증은 가신 듯, 표정은 평온했다. 그는 소피의 머리카락에 말라붙어 있던 피에 잠깐 시선을 두다가 이내 바닥을 응시하며 걸었다.

"일단 붕대로 묶어놓기는 했는데... 역시 깁스나 목발은 없네."

약국을 빠르게 휘저으며 붕대를 찾은 소피는 능숙한 솜씨로 라이프니츠의 발에 굵직한 나뭇가지를 대고 묶었다. 여유분의 붕대로 자신의 오른쪽 손등을 감싼 라이프니츠는 약국에 오자마자 자신의 가방에 쓸어 담았던 식염수와 증류수, 드레싱 따위를 소피의 가방에 욱여넣고 있었다. 액체류는 무게가 많이 나가서 그러겠거니 싶어, 소피는 약국에 남아있던 영양 젤리와 연고 따위를 챙겨 그의 가방에 챙기려 했다.

"필요 없어. 나는 이미 있거든."

"그래? 그럼 내 가방에 넣지, 뭐. 더 쓸만한 건 없는 거 같지? 그런데, 오른손에 붕대는 뭐야? 물리기라도 한 거야?"

"아까 멀쩡한 거 봤잖아. 쓸리는 게 아파서. 됐고, 나가자."

그리고 약국을 나오자마자 말을 이따위로 하는 것이었다. 소피는 피비린내 나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부상자가 할 말인가? 당장 찢어지자마자 어디서 좀비가 몇 마리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다친 곳 없이 힘 좋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짐이 되는 존재란 말인가?

"아까는 내가 방심한 거 맞아. 근데, 너 합류 지점까지 나 없이 혼자서..."

"갈 수 있어. 무전기는 네가 가져가. 쓸데없는 짐은 다 줄인다."

한 손으로 소피아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무전기를 건네는 라이프니츠의 표정은 견고해 보였다. 소피아의 속은 답답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피 냄새와 시체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곳에 그를 두고 혼자 움직일 수는 없었다. 소피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손을 두어번 털던 라이프니츠는 소피아의 목 양옆으로 손을 내밀고는 서툴게 그녀의 머리를 묶었다.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잘 묶지도 못하면서."

"... 그냥. 나는 남쪽으로 간다. 훨씬 가깝고, 남은 생존자가 분명히 있을 거야."

"아까부터 계속 뭔 소리야. 오는 길에 좀비가 얼마나 득실거리는지 봤잖아. 너 머리라도 물렸어?"

"소피아. 왜 우리가 갑자기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모든 일은 결정되어 있다는 건 너도 잘 알겠지."

"라이프니츠."

"모두 예정된 일인 거야. 너와 내가 지금 따로 움직이게 되는 것도, 내가 발을 다친 것도."

그의 고집이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안다. 발을 다쳤으니 나 혼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러는 거겠지. 그럼에도 소피아는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소피아는 라이프니츠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 찢어지면, 우리 다시는 살아서 못 봐."

"..."

조용히 눈을 피하는 그를 보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소피아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는 한참을 바닥을 응시하더니, 이내 한발짝 앞으로 다가와 소피아와 이마를 잠깐 맞댔다.

"살아서, 리케온에서 다시 볼 거라고 약속하지."

보기 드문 미소였다. 거짓말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 그를 잡을 수는 없었다. 라이프니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합류 지점은 북쪽. 그가 향하는 곳은 남쪽. 엉성하게 묶인 머리를 다시 묶고 싶었지만 내버려 뒀다. 부서지고 지저분한 거리에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둘은, 결국 그곳을 벗어났다. 피 냄새도, 매스꺼운 냄새도 한풀 꺾일 즈음, 라이프니츠는 손등에 둘렀던 붕대를 풀었다. 개방된 상처가 좀비의 이빨에 긁힌 탓에, 아까부터 욱신거리던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씩 곪아가고 있는 상처는 흐릿한 눈으로 봐도 심각했다.

"하..."

온몸이 뻐근했다. 시야는 아득해진 지 오래라, 소피아의 머리를 제대로 묶어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적당히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라이프니츠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금 즘이면, 북쪽으로 꽤 이동했겠지. 이성을 잃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모습을, 소피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소피아의 눈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을 애써 피한 게 후회됐다.

"... 소피아."

마지막으로 본 게 너라서 다행이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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