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철학논고

[벤소피] 홀연히

순정철학논고 벤 X 소피아

덕질용 by 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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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원래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다. 평소보다 이른 복귀 호출과 교문까지 직접 찾아온 담당자. 숨을 헐떡이며 소피아의 손을 잡아 끈 그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뛰쳐나가려 했다. 한눈에 봐도 다급해 보이는 모습에 일단 이끄는 대로 뛰긴 했지만, 어처구니는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일단 뛰어요."

몇 초 지나지 않아 설명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영화처럼, 하늘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마치 벽이 무너지듯 허물어지고 깎이는 세계를 목격한 소피아의 목덜미에서 식은 땀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갑작스러운 어둠과 적막이 그들을 덮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공포를 극대화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자, 소피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숨이 차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안 보여요."

"제가 다른 복귀 지점을 알고 있어요. 손 놓지 마시고, 뛰는 거에만 집중하세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무엇보다 힘차게 뛰는 다리와, 터질 것 같은 심장. 뇌는 다리보다 느렸다. 상황 파악을 끝내지 못해 멍청하게 나온 말과 달리 다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무슨 상황인데요. 애들이 아직 학교에..."

"보면 모릅니까? 아, 안 보이는구나. 당장 우리라도 탈출해야 한다고요!"

"잠깐... 잠깐, 애들이 학교에..."

"한지혜 씨 목숨이 우선입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보이지도 않는 주변을 살피던 소피아는 순식간에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공간. 눈부신 빛과 푹신한 의자가 연구실임을 나타냈다. 눈동자를 빠르게 옆으로 굴리자, 만신창이가 된 담당자가 보였다. 바닥에 널브러져 숨이 찬 듯, 목을 부여잡으며 안경을 고쳐 쓴 담당자는 재빨리 달려와 한지혜의 상태를 확인했다. 발이 한번 꼬여 넘어질 뻔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숨 쉬어져요?"

"네, 네. 괜찮아요. 근데 그러면, 거기 있던 사람들은..."

"연구는 중단합니다. 이쪽 지구 사람들 생명이 우선이에요."

"설명을 좀 해줘요! 아까부터 계속..."

담당자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평소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목을 한 번 가다듬은 그는 여상하게 말했다. 매일 복귀 시간을 말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연결 신호와 한지혜 씨의 활력징후가 급격하게 악화됐어요. 급한 대로 제가 투입된 겁니다. 지금 쌍둥이 지구의 상태는... 확인되지 않아요. 그 어떤 신호도."

리케이온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느닷없고 허무하게 끝났다.

"충격이 많이 크실 거 압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당분간 다른 일자리를 주선해드릴게요. 정신과에 가신다면 비용은 이쪽으로..."

일자리는 거절했다. 취업계를 썼다고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어떻게 됐을까. 내가 본 건 뭐였을까. 내 인식이 잘못된 걸까? 쌍둥이 지구가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다들 살아있을까? 뭐든 좋으니, 살아는 있다는 단서 하나만. 하나만 있으면 좋을 텐데.

"하아..."

리케온에서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본 것들은 그저 허상이었나. 꽤나 오래 울었다. 인사도 하지 못한, 아마도 더 이상 보지 못할 직장 동료들. 아니, 친구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장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는데. 내일 보자며, 잘 들어가라고 했는데. 한지혜는 다시 눈을 문질렀다. 퉁퉁 불어 터진 눈도, 정신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들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회상하고, 그들의 사상을 다시 공부했다. 그들을 잊고 싶어서, 그리고 잊고 싶지 않아서 많은 감정과 노력을 쏟았다. 방 한쪽에 쌓인 전공 책을 볼 때마다 리케이온이 떠올랐다. C+의 주역으로만 인식되었던 그들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존재들이 되었기에.

"... 네. 이제 괜찮아요."

서인식에게는 주기적으로 연락이 왔다. 그는 짤막하게 한지혜의 안부를 묻고 회복 잘 하라는 인사만 남길 뿐이었다. 달리 뭔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연락과 일상으로 몇 달을 보냈다.

"졸업 축하해."

"하아, 이제 대학생 신분도 아니라니."

차차 잊게 됐지만, 가끔은 그들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은 이곳이었고, 어쨌든 잘 살았다. 문득 그들이 떠오르는 날에는 버리지 않은 전공 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끝난 쌍둥이 지구에서 소피아로서의 삶은 생각이 많아지게 했다. 그리고 꼭 이런 날이면, 스피노자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일 지구가 망한다면 오늘 뭘 할 거야?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본 질문일 것이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말을 한 사람은 사실 스피노자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쌍둥이 지구에 존재하는 스피노자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때 그의 호감도는 꽤나 높은 편이었기에 괜찮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내일 갑자기 지구가 망한다고 하면, 뭘 할 거야?"

아마 망설임 없이 답했었지.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제대로 떠올려지지 않는 얼굴이 어렴풋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그날의 선선했던 바람과 은은한 풀 냄새가 떠올랐다.

"나? 그야..."

그럼에도 어째선지 그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표정도, 말투도. 눈물을 닦았다. 한지혜는 스피노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이러나저러나 뭐든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 가끔 삶이 팍팍하고 왜 살아야 하나 싶을 때, 그의 사상은 큰 위로가 됐다. 몇몇 학생들은 사이비라느니, 못 알아먹겠다느니 딴지를 걸었고 현실의 스피노자도 결국 파문당했지만, 소피는 그의 철학을 좋아했다. 이따금 그와 나눴던 대화가 무작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작 기억하고 싶은 대화는 떠오르지 않는데. 이렇게 가끔 그와 나눴던 말들을 곱씹다가,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깨닫게 됐다. 나는 내 생각보다 너를 많이 좋아했구나. 단순한 한 명의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리케이온에서 함께 했던 사람 중 한명으로서 좋아했구나.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지만, 인정하고 나니 어째선지 마음이 가벼웠다. 속에 갇혀 썩어있던 감정을 받아들인 날, 한지혜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에서..."

시끄러운 사람들의 대화 사이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일행과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한지혜의 관심은 뉴스로 향했다. 가게 안은 시끌벅적했지만, 자신의 귀에 들린 한 단어에 한지혜의 눈이 커졌다. 잠깐 망설이던 한지혜는 모든 감각을 뉴스에 집중했다.

"... 쌍둥이 지구를... 소식입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가능성에..."

띡. 주인장이 채널을 돌린 탓에 이후의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갈 곳 잃은 한지혜의 시선이 식탁으로 향했고, 가슴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쌍둥이 지구라는 단어를 들은 게 맞나?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내가 아는 그 쌍둥이 지구가 맞을까? 뉴스에 나왔다는 건, 실제 생명체가 발견됐다는 거 아닐까? 학계에서 주목할 정도면, 정말로...

"살아있는 걸까요?"

한지혜는 간만에 연구소에 방문했다. 지금은 무슨 연구를 하는 건지, 대부분의 문이 잠겨있고 유일하게 열려있는 탕비실에는 동그란 식탁과 의자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인식이 타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그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몇 달 전부터 신호가 다시 잡히기 시작했어요. 이미 5년이 지난 만큼, 굳이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서인식의 눈 밑에는 시커먼 다크서클이 진하게 깔려있었지만, 한지혜는 그 눈 밑을 한 번 바라보고는 시선을 커피에 고정했다. 고소한 커피 향에 잠시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요. 정말... 다들 살아있을 수도 있겠네요."

"네. 더 알게 되는 게 있다면 연락을 바로 드리죠. 오신 김에, 다음 연구에도 참여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뭔데요? 페이만 괜찮으면..."

소피아로서의 삶이 끝난 후, 약 1년간은 연락이 왔다. 1년이 넘어가며 시들해졌지만. '그날' 이후로 어쨌든 자신은 인생을 잘 살고 있었고, 가끔가다 리케이온을 떠올려도 그저 즐거운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전공을 좋아하긴 했는지, 결국 대학원에도 갔다. 서인식의 다크서클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내 코가 석 자였다. 연구소가 현재 진행하는 연구는 한지혜의 호기심을 끌지 못했기에, 몇번의 짧은 담화 후 미련 없이 연구소를 나왔다. 연구소를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한지혜의 이마에 느껴졌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들떴다. 살아있겠구나. 틀림없이 다들 잘 살고 있겠지.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순수한 기쁨과 다들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뿐이었다. 집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 깔끔하다!"

볼링핀 10개가 깔끔하게 쓰러진 뒤, 한지혜는 위풍당당한 태도로 손목을 흔들며 뒤를 돌았다. 이제껏 지기만 했던 자신의 팀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머쥔 날이었고, 그날의 저녁값이 걸린 내기였다.

"봐. 자신 있댔..."

신난 어투로 자신의 스트라이크를 자랑하던 한지혜의 말이 멈췄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평소 반만 뜨고 다니던 눈이 홍채를 완전히 드러냈다.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자란 꽁지머리. 키가 좀 더 큰 듯, 제법 올려다봐야 하는 얼굴과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옷차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들리자마자 떠오르는 목소리.

"이제는 진짜 잘 하네. 안 봐줘도 되겠는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지혜의 눈동자에 벤의 얼굴이 비쳤다. 당황스러움에 다물어져 있던 입이 다시 움직였다. 만남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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