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철학논고

[로크소피] 가을밤

순정철학논고 로크 X 소피아

덕질용 by 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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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잠긴 거 같은데?"

소피아는 연신 문고리를 돌려댔다.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로크도 근처로 다가와 문고리를 세게 흔들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소피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폰 안 가져왔어?"

"교실에 두고 왔는데. 너는?"

"나도..."

피곤한 직장인은 포기가 빨랐다. 소피아는 문고리를 놓고 쌓여있는 매트리스에 풀썩 앉았다. 봉사활동 때문에 오늘 자신이 청소한 체육관 창고는 깔끔했다. 자신의 밑에 있는 매트리스도 물론. 로크는 문을 두어번 더 두들기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오늘도 정시퇴근은 글렀구나. 소피아는 고달픔을 속으로 삼키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야자도 끝난 시간이고, 이쯤이면 기숙사생들도 모두 기숙사로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아마 퇴근 못 할 것 같고, 여기서 잔 다음에 바로 교실로 가야겠지. 머리는 아침에 화장실에서 감아야 하려나. 아냐, 하루 정도는 안 감아도... 묶을까. 평소에 5시만 되면 집에 가던 홉스가 왜 하필 오늘은 이 시간에 체육 창고에 들른 건지. 호기심을 참지 못한 게 문제였다. 로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통학하는 거 아니었어? 왜 이시간까지 학교에 있었던 거야."

"라이프니츠한테 보충 수업..."

"아."

로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적이 흘렀고, 조그맣게 난 창으로는 바깥의 찬 공기가 들어왔다. 소피아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어쩐지 둘이서 카페에 갔을 때가 떠올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번에도 건의문 쓰다가 학교에서 잠들었었지. 그러고 보니 홉스의 다리를 걷어찬 이후 로크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째선지 그는 마주칠 때마다 이전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소피아가 로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여기 온 건데?"

"홉스가 요새 이상해서..."

"걔는 멀쩡할 때가 언제야?"

"그러게. 아니, 근데 그냥 이렇게 있을 거야? 날 밝을 때까지?"

로크가 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몇 번 더 돌려보고는, 누구 없냐며 소리를 몇 번 질렀다. 그러는 동안 소피아는 구석에서 담요를 찾고 매트리스를 옮겼다. 매트리스 두 개로 구성된 침대와 이불 대용인 담요는 급조한 것 치고는 괜찮은 모양새였다. 문 양쪽 맞은 편 벽에 침대가 하나씩 생겼다. 탈출을 포기하고 소피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 로크는 당황한 듯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자게?"

"별수 없잖아. 너 안 잘 거야?"

"그럴 수도... 아니, 그건 아니긴 하지."

"네 거는 맞은 편에 갖다 놨잖아. 좁긴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창문 닫으면 그렇게 춥진 않을 거고."

"아니, 그래도..."

역시 좀 아니었나 보다. 소피아는 자신이 바닥에서 자야 하나 고민했다. 사실 팔팔한 고등학생이 바닥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나, 어쩐지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과 달리, 이 팔팔한 남자 고등학생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웠나보다. 로크는 여전히 어벙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럼 둘 다 이대로 밤을 새울까."

소피아는 창문을 닫고 로크 옆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둘 다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역효과를 불러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존 로크는 거짓말도, 표정 관리도 못 했다. 정말 못 했다.

"뭔 소리야! 소피아, 그냥 너는 누워서 자."

그는 재빨리 소피아의 손을 잡고 일으켜, 매트리스 쪽으로 끌고 갔다. 소피는 고분고분 매트리스에 누웠다. 솔직히 더 이상 실랑이를 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로크는 말없이 매트리스의 하단부를 잠시 응시하다가, 자신의 교복 마이를 소피아의 다리에 덮었다.

"담요 있어."

"아니, 나는 안 추우니까..."

나도 안 추운데. 소피아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저 터질 것 같이 새빨간 얼굴을 한 사람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담요까지 소피에게 덮어준 로크는 반대편 벽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애써 바닥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너도 피곤하잖아. 누워서 자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아."

"이래서 어린 놈들은..."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몇 시쯤 됐으려나. 소피아는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는 걸 느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 잘 자.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 오기 전에 깨워줘. 침 흘리고 잘 수도 있으니까."

"하아, 너는 진짜... 알겠어."

아직 밝지 않은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로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 불편한 자세로. 양팔로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삐딱하게 걸친 그는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창가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새삼스럽지만 그의 넘긴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아는 로크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실의 존 로크는 음악가같이 생겼던데, 얘 피아노 같은 거 연주할 줄 알려나. 이번에는 시선을 손가락으로 옮겼다. 의대 가면 수술은 잘 하겠지. 그나저나 얘는 제일 껄렁하게 다니면서 은근히 깐깐하네. 통학 시간에는 조느라 들지 않았던 온갖 잡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눈을 뜬 로크와 소피아의 눈이 마주쳤다.

"어..."

"아, 그게. 속눈썹에... 먼지가..."

왠지 구차했다. 소피아가 자신도 모르게 로크의 눈가에 손을 갖다 대자, 로크는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뒤로 뺐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직전에 문이 덜컹거렸다. 아직 등교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문을 연 사람은 학생회장이었다. 홉스는 놀란 기색 없이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소피아와 눈이 마주치자 홉스는 웃으며 말했다.

"소피아 양... 이랑 로크? 여기에는 왜?"

"... 어제 교내봉사 하다가 놓고 간 게 있어서. 로크는 같이 찾아주려고 왔다가 갇혔어."

"뭘 놓고 갔는데?"

"손목시계. 잠깐 풀어뒀었거든."

로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소피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홉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원래 여기 문 잘 잠겨? 어제 소피아랑 나랑...!"

"소피아 양이랑 너랑 뭐?"

"... 갇혀서 곤란했다고. 교내 시설 점검을 다시 해야겠어."

"아, 안 그래도 말인데. 어제 교내 시설을 점검하느라 늦게 갔거든. 어제 딱 창고 열쇠를 교체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

소피아와 로크는 서로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홉스는 평소의 여유 넘치는 태도로 문을 열어젖혔다.

"뭐해? 수업 안 듣게?"

"한지혜 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추가 수당 입금해드리죠."

"네. 진짜 피곤하네요... 창고에서 자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존 로크의 호감도가 급격하게 상승했어요.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 만 했다. 다른 철학자들과는 해본 적 없는 경험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손 예쁘던데.'

소피아는 퇴근 준비를 하며 그에 대한 생각을 했다.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었지만, 잡생각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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