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철학논고

[벤소피] 환절기

순정철학논고 벤 X 소피아

덕질용 by 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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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게도 더운 여름의 끝이었다. 소피아는 얼굴로 비치는 햇빛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목덜미에서 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입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탔다. 교탁에 물병이 있었지만, 둘 외에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는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노을을 바라보던 소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름도 다 끝났네."

"그치. 덥지는 않아? 머리, 묶은 걸 본 적이 없는데."

"딱히. 더위를 잘 안 타서."

목 뒤가 갑자기 시원해졌다. 소피아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잡아 묶듯이 위로 올린 벤은 다른 쪽 손으로 목에 부채질을 했다. 특별히 시원해지지는 않았지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미적지근했던 소피아의 목이 조금이나마 상쾌해졌다. 안 해도 돼. 소피아의 말을 가볍게 넘긴 벤은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까 그 얘기 좀 다시 해볼까?"

"할 얘기 없다니까."

"쌍둥이 지구라니. 현실감은 없지만 재미는 있네. 그곳에서의 나는 어때?"

목구멍이 턱 막힌 듯했다. 그냥 전공 책 속의 인물일 뿐인데, 한 명의 평범한 학생에게 말하려니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게 갑작스레 떠올랐고, 소피아는 이유 모를 울렁거림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내뱉지 못 할 말들이 속에서 메아리쳤다. 파문당했어. 공동체로부터 저주받고, 그들과 따로 떨어져나와 다락방에서 렌즈를 깎으며 살았어. 돌아가지 않았어. 소피아는 잠깐 뜸을 들이다 장난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웬 유난이래.

"... 너무 옛날 사람이라 잘 모르겠는데. 너 조상님 뻘이야."

"조상님까지 가는 거야? 말하기 싫다는 건 알겠어."

"아니 진짠데... 애초에 지구 반대편이라고."

"아하. 근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나에 대해 알고는 있나 봐?"

실수였다. 그냥 냅다 잡아 뗐어야 했는데. 사람이 한두명도 아닌데 네 인생을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답했어야 했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을 고르던 소피아의 시선이 벤의 시선과 마주쳤다. 왜 갑자기 성적 발표 후 벤이 자신을 도와줬던 게 떠오르는지. 소피아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학생회장이랑 얘기하는 건 어떻게 알고 들었어?"

"교실에 놓고 온 게 있어서. 일부러 들은 건 아냐, 진짜로."

"... 그래. 조심 안 한 내 잘못이긴 하지."

"그래서 중간고사 보는 날에도 교무실 갔었구나. 시험을... 응, 그렇게 봐서."

맞는 말이기에 소피아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벤은 입꼬리를 잠깐 올리고 평소의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뭐, 소피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비밀로 할게.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고."

"진짜?"

"그래. 근데, 궁금하긴 하네."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습하고 화끈거리는 바람이 소피아의 목을 스쳤다. 벤의 눈동자가 소피아의 눈동자로 향했다. 자신의 머리를 푼 벤이 엉성하게 소피아의 머리를 묶었다. 손이 시원해서,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려던 소피아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내 호감도는 어느 정도였는지."

"야, 네 호감도는 네가 알지..."

"그런가? 아아, 머리 풀지 마! 잘 묶었는데."

"뭐래. 다 튀어나왔잖아."

소피아는 머리를 거칠게 풀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산뜻했다. 해가 거의 다 져가는 시간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의 설렘인지. 소피아는 말없이 가방을 챙겼다.

"먼저 갈게."

가을이 오긴 왔나 보구나. 소피아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복귀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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