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철학논고

[라이소피] 과외

순정철학논고 라이프니츠 X 소피아

덕질용 by 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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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소피아는 올 것이 왔다는 긴장된 표정으로 라이프니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노에 차서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이려 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라이프니츠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소피아를 불러냈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차라리 교장과는 면담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축을 기다리는 소처럼 처량하게 눈을 떴다. 미적거리며 라이프니츠를 따라 교실을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시끌시끌한 점심시간의 복도에서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라이프니츠가 입을 열었다.

"과외를 받자."

"... 과외? 무슨..."

"네 중간고사 성적을 모르지는 않겠지. 너 때문에 내가 쓰러진 것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세계 빙의라면 외국어 능력 정도는 당연히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억울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보건실까지 그를 업고 갔던 기억이 떠올라 소피아는 말을 삼켰다. 그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소피아는 애써 피하던 눈을 마주쳤다. 안 그래도 중간고사 성적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호감도가 급락했을 터, 어떻게든 복구해야 했다.

"그래. 근데 누구한테 받으란 거야?"

"나한테."

"다시 생각해볼게."

"뭔 소리야. 너 퇴학당하고 싶어?"

라이프니츠가 폐과보다 소피아의 퇴학을 먼저 언급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소피아에게는 이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라이프니츠한테서 과외라니. 차라리 지도교수에게 과외를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소피아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니, 아니 그치만! 너 안 그래도 바쁘잖아. 과외라면 르네도 있고, 앤도 있고..."

"데카르트는 몸이 안 좋아서 오전 수업도 안 나오는데 과외할 시간이 있을 리가. 앤은..."

라이프니츠는 잠깐 말을 멈추고 고민하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성적표를 받던 날, 손을 먹을 듯 이를 떠는 앤을 떠올린 소피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프니츠도 소피아와 눈을 맞추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벤은 퇴학을 나란히 바라보는 신세니 말할 것도 없고, 남은 건...

"그 왜, 나 로크랑도 친하고..."

사람이 마음이 급하면 큰 실수를 하는 법이다. 소피아는 자신도 모르게 헙, 하고 입을 막았다. 수리과 학생의 이름을 들은 라이프니츠의 고운 미간이 찌그러짐과 동시에 못마땅하다는 듯한 그의 시선이 소피아의 이마에 꽂혔다.

"로크? 과학과의 존 로크?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소피아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아니, 아니를 연신 외쳤다. 차라리 지금 같은 상황에서 코피라도 나면 보건실로 뛰어갈 수라도 있을 텐데, 그러기에는 신체가 너무 튼튼했다.

"아니, 우리 학교 말고 다른 학교에..."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었다. 라이프니츠는 말 없이 소피아를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두꺼운 교과서를 책상에 쿵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근엄하게 말했다.

"2주 안에 다 외우게 해주지.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

"하아아아..."

소피아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현실 세계에서 졸업논문 쓰는 것도 빡세 죽겠는데, 여기서도 철학 과외라니. 아니, 잠깐. 얘한테 과외 받은 내용을 졸업 논문에 써도 되나? 머리에 뭔가 번뜩이듯 스쳤다. 출처는? 어떻게 쓰게?

'전공 책 싹 다 뒤지면 하나는 나오겠지...'

갑자기 머리 속에서 샴페인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조각보 논문이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소피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프니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교과서를 소피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소피아가 뭐냐는 듯 올려다보자,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동화 읽듯 교과서라도 읽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표시해 온 부분 내일까지 읽어오고, 내일 나랑 토론을 하자."

그는 의자를 가볍게 끌어내고 앉아, 소피아와 눈을 마주쳤다.

"매일매일 토론을 하면 성적이 늘 수밖에 없겠지."

'아니, 나는 토론이 문제가 아니고 글자부터 배워야 한다고...'

차마 저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에, 소피아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논문에, 리케이온 다니면서 그리스어 공부라니. 오늘은 못 자겠구나. 앞이 깜깜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몰라..."

"소피아, 자퇴 서류를 준비해라."

"아아, 농담이야! 첫 번째 지문에 따르면, 근거는..."

이제는 꽤나 유창하게 질문에 답하는 소피아를 보며, 라이프니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소피아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속이 터질 듯 답답했지만, 그런 것치고 소피아는 부지런히 과외 준비를 해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느릿하게 글을 읽고 소심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나날이 소피아는 발전했다. 우선 글을 빠르게 읽게 됐고, 며칠 동안 자신에게 깨지며 토론을 반복하자 이제는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라이프니츠 나름대로 뿌듯함과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시간이 늘어갔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웬일로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자, 소피아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책에서 그에게로 옮겼다.

"... 하여 정리할... 라이프니츠? 조는 거야?"

라이프니츠가 다소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탓에, 그가 조는 걸로 착각한 소피아가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흠칫 놀란 라이프니츠가 자신도 모르게 소피아의 손목을 잡았다가 당황하여 재빠르게 놓았다. 정작 소피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그를 놀릴 뿐이었다. 기계 같던 애가 조는 모습도 보고. 현실 인물의 모습이 겹쳐 보여도, 그 역시 평범한... 아니, 좀 비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아하하, 졸았구나? 너 그러게 동아리 좀 줄이라니까."

"... 그러게."

무슨 소리냐고 답하려 했지만, 그는 지금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가볍게 넘겼다. 그냥 변덕이었다. 날은 점점 따뜻해졌고, 하복을 입을 날이 다가왔다. 방과 후 조용한 교실에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칠판을 넓게 비추는 따사한 햇살. 이따금 바깥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목소리. 평화롭고도 나른했다.

"이어서 한다? 따라서..."

어떤 순간은 영원한 기억의 편린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소소한 웃음을 주고는 한다. 소피아는 인식하지 못 했지만, 라이프니츠와의 과외는 꽤나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철학이 좋아서 철학과에 오긴 했지만, 반복되는 과제와 시험, C+ 때문에 전공에 대한 애정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다른 걸 신경 쓰지 않고 순수하게 철학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됐던가. 라이프니츠는 툴툴대면서도 은근히 자세하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고, 피드백 또한 꼼꼼했다. 라이프니츠가 무슨 마음으로 자신에게 과외를 해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도? 과외 시간이 끝나자마자 책을 덮은 라이프니츠가 물었다.

"너, 다음 학기 아고라 참가할 거야?"

"으응? 아고라?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과외를 받았으면 결과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니야."

"결과는 기말고사 성적으로 충분한 거 아니야?"

"그래."

웬일로 순순히 라이프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아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는 누가 봐도 분노를 참으며 억지로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말 성적부터 보고 얘기하자고."

"아, 퇴학 안 당하면 당연히 참가해야지."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네."

"하, 다행이지..."

퇴학은 면했으니까. 소피아는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성적표를 구겼다. 라이프니츠의 과외는 효과가 뛰어났다. -11점을 메울 정도로 상승한 점수. 라이프니츠조차 성적표를 나눠줄 때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평온하게 소피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아고라는?"

"으음... 고민 중이긴 한데."

사실 언제까지 리케이온에 다닐지도 모르겠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소피아는 나름 고민했다. 추가수당도 없는데 굳이 논문을 한 편 더 써야 할까? 아마 참가 안 할 거 같은데. 그에게 답하려 입을 열 찰나, 라이프니츠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느릿하게 입술이 움직였다.

"... 좀만 더 고민해보려고."

"그래, 그러면."

라이프니츠는 내가 뭘 쓸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단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소피아는 성적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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