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
무츠노카미 요시유키X남심신자 cp
23.04.28
1
늦은 새벽이다. 해가 뜨려면 서너 시간이 더 필요한 늦은 가을의 밤. 혹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두껍게 만든 이불을 덮은 옆자리가 뒤척인다. 이불 속에서 더운 공기가 새어나오고 그 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든다. 무츠노카미가 희미하게 숨을 내쉰다.
아,
그가 눈을 떴다.
2
무츠노카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옆에 누운 그의 주인은 방금 막 눈을 떴다. 다시 악몽을 꾼 건지, 옅은 잠에서 깨어난 건지, 저도 모르게 눈을 뜬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의 주인은 지금쯤 방을 벗어나 발 아래로 보이는 뒤뜰로 달려나갔을 것이었다. 이불 속으로 숨어든 탓에 옆자리가 둥글게 부풀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밤공기가 찼다. 찬 공기에 열이라도 나느니 차라리 더운 이불 속에 있는 것이 나았다. 무츠노카미는 잠시 일어난 척을 할까, 생각하다가 자는 척 하는 쪽을 택했다. 마침 몸이 너무 더워져서 다리 한 쪽이라도 빼버릴까 생각하던 참에 힘 들일 필요 없이 이불을 반쯤 빼앗겼으니 잘 된 일이었다. 그는 말없이 반쯤 떴던 눈을 되감았다. 함께 누운 이불 위로 주인의 맥박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조금 빠른 폭으로 들려오던 작은 소리는 점차 손끝에서 흐릿해져갔다. 이불이 들썩였다. 이불에 엉겨붙어 엉망이 된 머리가 이불 밑에서 쑥 솟았다. 무츠노카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분명 그럴 것이라 여겼다.
3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열려있는 문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밝아 노란 빛으로까지 보이는 달빛도 똑똑하게 비춰들었다. 풍경을 '조절' 할 수 있는 만큼 자연의 '간섭'을 크게 받지 않는 이곳에서 밝은 달빛과 총총한 별빛과 도심에선 찾아들을 수 없는 사근대는 풀벌레소리는 당연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가운데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에 모순으로 구성된 장소는 있어야 하는 것도 없어도 되는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사계절의 꽃이 동시에 피고 함께 자랄 수 없는 식물이 자랄 수 있으나,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그래서 당연히 아무것도 없고, 그 '풍경'을 지운다면 남는 것은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듯한 폐가만이 남는 것과 같다.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을 불러온 대가는 모든 삶이다. 그는 모든 삶을 이곳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비단 그의 주인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날 곳이 없다. 자의든, 타의든, 선택했다면,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 고운 갈색 머리카락이 푸근한 베개에 놓인다. 귓가로 열 담긴 숨소리가 들린다.
4
눈을 감은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 본래도 보통 인간보다 훨씬 예민한 그들은 '인간'과 함께하며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법을 학습했다. 그럼에도 전장에 나가면 잊어 두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것과 같이 어느 한 감각이 차단된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들이 힘을 준다. 생존 본능과 비슷하다. 가령 지금의 무츠노카미에게는 차단된 시각만큼 조그맣게 들리는 한숨소리와 그의 주인이 몸을 비튼 탓에 생긴 손끝에 닿는 이불의 스침같은 작고 사소한 것들이 다시없이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롭고 고요한 상황이지만 다르게 말한다면 뭐 이들 역시 생존의 범위에 들어가기는 한다. 무츠노카미는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손가락을 꿈틀댔다. 가까이에 있던 주인의 다리가 손끝에 닿았다. 부드러운 체온의 온도는 정상 범위다. 그는 잠시 찌푸렸던 이마를 펴고 짧게 꾸며낸 잠투정과 함께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다. 그 쪽으로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낮은 바람이 들어온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어차피 그에게는 의미 없는 것이다.
5
열린 문틈으로는 다른 도검남사들이 목숨을 걸고 관리하는 정원이 보인다. 벌레를 싫어하는 그들의 주인을 위해 최소한의, 지금처럼 자연을 보일 수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갈아 엎어버린 덕에 그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형체 없는 빛과 찌르륵대는 익숙한 풀벌레의 소리 뿐이다. 조금 멀어진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가라앉는다. 무츠노카미는 한쪽 귀로 그의 숨을 재며 수를 센다. 희미하게 눈꺼풀 위로 들어차는 달빛에 가는 눈을 뜨면 빛이라곤 없는 암흑같은 방 안을 비추는 바깥의 자연광이 들어온다. 가지치기가 잘 된 낮은 나무와 촘촘하게 쌓아올린 돌담벼락, 혼마루를 관통하는 시냇물 호수에 바람이 이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리지 않을 소리. 잠시 차가워졌던 이불 속이 서서히 다시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주인이 다시 꿈지럭댄다. 무츠노카미는 재빨리 눈을 감는다. 고개를 돌린 탓에 멀리 있던 숨이 눈을 뜰 새도 없이 뺨 가까이에 다가온다.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소리없이 그의 가슴께에 내려앉는다.
6
그의 주인은 눈치가 기민하고 나라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노력가지만 무츠노카미가 정말로 자고 있는 것인지 자고 있는 척을 하는 것인지는 구분하지 못한다. 그건 그가 자는 사람을 볼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에게 무츠노카미가 조금은 단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다. 그는 무츠노카미가 인상을 찌푸리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무츠노카미의 이마를 건드리다 작은 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돌아눕는다. 무츠노카미의 가슴이 오르내림에 따라 가슴에 얹힌 손바닥 역시 함께 높낮이를 달리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의 머리가 무츠노카미의 가슴에 닿는다. 그는 얇은 피부와 차가운 철 너머로 세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담는다. 육벽 깊은 곳에서부터 들썩이는 진동이 닿은 피부를 타고 궤를 함께한다. 그가 숨을 내쉰다. 무츠노카미는 아직 살아있다.
7
빛 한점 들지 않는 방 안이라도 그의 주인은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옆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는다. 그에 비해 동체시력도 암시도 훨씬 뛰어난 무츠노카미로서는 그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단지 그럼에도 그 자신을 꼭 찾아내니 이해하지 못한대도 좋은 것이다. 조금 까슬한 입술이 벌려진 입가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굳은 손가락은 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긴 속눈썹이 내려앉을 때마다 발끝에 미미한 힘이 들어간다. 그가 다시 입맞춘다. 인간들은 입술이라는 것을 가만히 갖다대기만 하는 행위라도 입을 맞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츠노카미에게 이러한 그의 입맞춤은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의 약속처럼 느껴지곤 한다. 오늘을 살아 돌아 오겠다는 맹세의 기도인 것이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는 따갑다. 아주 살짝 간지럽고 거칠게 일어난 입술은 찌르는 듯하다. 건조한 입맞춤은 점점 가까워진다. 무츠노카미는 이럴 때면 항상 눈을 번쩍 뜨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는 일은 없다. 오로지 가만히 누워 그에게 내리는 버석한 연심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8
밤은 항상 짧다. 무츠노카미에게 밤과 낮은 늘 비슷한 시간이지만 그에게 밤은 낮보다 길다. 그러나 그의 주인에게 밤은 더없이 짧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것이 잠들어버리는 밤만을 기다려왔듯, 온전한 그의 시간은 더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잠에 빠져들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그는 어떻게든 잘게 부수어 빈틈없이 애용한다. 도망치고 도망칠 수 없게 되고 다시 도망치고 다시 잡혀오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비로소 찾아오는 안식은 그의 곁에 함께 눕는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간사해서 잊으려 하면 떠오르고 잊지 않으려 하면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당연히 예외도 있다. 그는 한때 그의 모든 것이었던 사카모토 료마라는 남자를 잊을 수 없다. 그의 주인이 불만을 표하며 넘어가는 것은 무츠노카미에게 꽤 당혹스러운 일이다. 물건에게 주인이 바뀌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무츠노카미는 그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썼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주인은 료마를 그와 동일선상에 놓지만, 무츠노카미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주인이 그러하듯, 무츠노카미에게 밤이 길듯이, 그의 주인에게 밤은 너무나도 짧다. 서로에게 온전히 소유하는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9
그의 주인이 다시 한 번 입맞춘다. 조금씩 길어지는 입맞춤의 마지막은 언제나 잠든 무츠노카미의 입술이다. 불편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면서까지 그의 주인은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길게 늘어뜨린 어두운 갈빛의 머리카락은 드러난 이마에 닿아 간지럽히고 곱게 정리되어 밑살이 드러난 손톱 아래는 다정한 투로 그의 뺨을 휩쓸고 지나간다. 마치 인공호흡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지 않은, 더운 숨이 잇새로 스며든다. 무츠노카미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리는 것을 신경쓰지 않는 그의 주인은 나지막하고 아주 온화하게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그의 입술이라는 것을 삼킨다. 머리를 들어올리지 않으려 빳빳히 힘이 들어간 목덜미는 옅게 힘줄이 돋지만 아무도 눈을 뜨고 있지 않은 지금에야 눈치채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을 맴돌지만 그의 속은 덥기만 하다. 옅은 숨소리를 내고 어깨를 들어올린 그의 주인은 다시 아무 말이 없다. 그는 조금은 물기 어린 입가를 쓸고서 다시 이불에 파묻힌 채 그의 옆에 눕는다. 여전히 무츠노카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그럴 것이라 여겼다.
10
그의 주인은 당연한 것을 찾듯 무츠노카미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 아래에 얼굴을 파묻는다. 꽤 오랫동안 눈을 감지 못하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간지러운 숨소리는 연하게 잦아들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어깨에 남아 자리를 잡는다. 팔꿈치에 닿아오는 그의 가슴께가 규칙적으로 변했을 즈음, 풀벌레들만의 규칙이 세 번쯤 바뀌었을 무렵, 무츠노카미는 눈을 떴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어스름해진 방 안이 유독 선명하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무츠노카미의 팔 아래로 그의 주인의 손이 이불에 떨어진다. 그는 묵묵히 이불을 끌어당겨 하나뿐인 주인의 몸을 빈틈없이 덮는다. 닫을 수 없는 문틈 사이로 물기 어린 꽃향기가 스며든다. 진한 시선은 덮인 이불 위로 내려앉고 형체 없는 나비는 그저 둘의 곁을 겉돌다 자취를 감춘다. 구름을 벗어난 달빛에 방 안이 다시 이지러진다. 더운 온기가 서린 이불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하다. 무츠노카미의 숨은 바깥으로 흩어진다. 느리게 깜박인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이 찬다.
11
무츠노카미는 고개 숙여 잠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은 무츠노카미를 거부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낮이고 밤이고 항상 그래왔듯, 그가 깨어있건 잠에 들었건 상관없이, 언제나 그래왔듯. 무츠노카미가 그 곁에 함께 누워 재차 눈을 감는다.
아,
그가 다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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