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헤븐) | 드랍

海燈 by 고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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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구석진 곳에 멈춰서 숨을 골랐다. 오늘 도대체 몇 번이나 일이 꼬이고 마는지, 한숨을 푹푹 내쉰 나머지 내일 치 숨마저 끌어다 써야 할 지경이었다. 한 달 전에 저장했던 파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오늘에서야 드러났고, 그 파일을 제대로 수정한 뒤 저장하려는 순간, 멀쩡하고 성능 좋았던 컴퓨터가 블루스크린을 띄우며 퇴근을 요청했다. 조금만 더 일해 주면 안 되겠니, 사정하며 다시 켜 파일을 열었더니 임시 저장도 무엇도 되어 있지 않았다. 별수 있겠나 싶어 다시 파일을 수정하자니 다른 급한 결재 건이 물밀듯 닥쳤고, 숨이라도 잠시 돌릴 겸 커피를 뽑아내려 버튼을 누르니 역시나, 멀쩡했던 커피 머신은 다시금 고장 팻말을 달고 말았다.

세상 그 무엇도 순순히 제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가령,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고 하자.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빙 둘러 가니 장애물의 밭이 자신을 반겨 주었고, 그것을 일일이 피하지 못하고 넘어지다 보면 목적지는 성큼 멀어져 있었다. 다시금 뛰어가다 미처 보지 못한 구렁텅이에 빠져 이만 좌절되나 싶을 때, 지나가던, 혹은 알고 지내던 어느 선량한 이의 도움으로 구제받았다. 그러고 나면 다시 태어난 듯 힘을 얻다가도, 또다시 딱딱한 벽과 마주하면 이마를 콩콩 박으며 얕은 원망을 품었다. 그리하여 꾀죄죄한 몰골로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우습게도 지나온 길 어딘가의 표지판이 잘못되어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여튼, 현재의 자신은 겨우겨우 보금자리라 할 만한 곳을 마련했고, 이곳에서 일상을 지키며 탈 없이 살아가는 것도 아슬하게나마 이어갈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안주하는 과정에는 뼈를 깎을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쉬지 않고 긴장한 채로 살기는 고되었으나, 걸어온 길과 자신 주위의 모든 존재를 둘러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가 내걸렸다. 그래, 이런 식으로 버티며, 낙심치 않고, 또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설사 구르고 깨지고 닳아빠지더라도. 그리하여 눈을 감고 심호흡 두 번, 저 자신에게 할 수 있다 암시하기를 수 초. 한데 돌아서려는 순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울어요?"

최근 들어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종종 자신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거기다 가끔은 속내를 전혀 모르게끔 무언가 한 꺼풀 덧씌운 듯한 목소리. 우냐는 말에 뒤돌아보며 소리 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런 일로 울 사람처럼 보였어? 쾌활하고도 가볍게 받아치지만, 아무래도 역시 불운의 뒷맛은 쌉싸래했다. 그래도 괜찮다 여기는 이유는, 어찌 되었든 간에 주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귀하고 또 즐겁기 때문이었다. 붙잡을 기회만 된다면,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좋았다. 그러나 이내 시선이 사서 명찰과 들고 있는 책 몇 권에 가 닿자, 대화를 길게 이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 책 정리하러 왔구나. …아이쿠,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정리……, 아앗, 아 아니야 내가 해결할 수…… 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불운의 향연이었다. 몸을 비키다 비죽 튀어나와 있던 책 모서리에 정수리를 박고, 정신을 차리려 손으로 짚었던 서가의 나사가 산책을 나간 것인지, 기울고 만 받침 따라 책 두어 권이 미끄러져 떨어지며, 바닥에 닿기 전에 잡고 말겠다는 듯 손을 내뻗다 발이 엉켜 중심을 잃고 허물어졌다. 와중에도 아차차, 고꾸라지는 형태를 그대로 담은 목소리는 도서관 에티켓을 지켜 내내 조곤조곤하다는 것이 애처롭다. 책 떨어지는 소리는 안타깝게도 우렁찼으나……?

보통 때라면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바닥과 인사했을 터인 책들이 얌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이런 현상에는 익숙한지 놀란 티 한 점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한쪽은 죽을상이었고, 한쪽은 여느 때와 같이 웃는 낯이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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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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