遺書
일리메 | 커뮤 신청서 쓰다가 드랍한 거
내가 죽었다니 퍽이나 유감입니다. 기실 유감이랄 것도 없지만, 저 자신에게 조의를 표하지 않으면 또 누가 해주겠습니까? 아무도 없으니 혼자서라도 이딴 종이 쪼가리를 끄적거리고 있을 수밖에는 없는 거예요. 이걸 보는 당신이라도 내게 조의를 표해줄까, 글쎄요, 적어도 죽은 뒤의 저는 아무도 믿지 않을 심산입니다. 뭐, 영 심심하면 백합화라도 하나 꺾어 내 죽은 자리에, 아니면 흐르는 물 가운데 바쳐주세요. 유서 보는 값은 그걸로 치자고.
하찮지요. 홀로 목숨 끊을 용기가 샘솟질 않아, 그에 더해 발목 붙잡는 아우성마저 사라지질 않아, 나는 그저 살아있었 (줄을 두어 번 그은 흔적) 태엽이 수만 번 감기어 바르작대며 움직이는 인형으로서의 나날을 보냈을 뿐입니다. 웃음은 닳아빠졌고 감정은 이성을 따르고 이성은 또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라 명령했습니다. 내 죽은 친구 에밀리는, 어린 손으로 가시 찔려가며 엮은 화관보다도 어여쁘고,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도록 둔 약조보다도 소중한 아이였습니다. 저 자신을, 자신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만개한 수선화 정원을 사랑했던 아이. 그랬던 아이가 육신의 병을 얻고 추해진 제 모습에 무너지고 오열하며 죽여 달라 애원하던 날들을 나는 못 잊습니다. 몇십 날을 이어졌던 절규는 끝내 내가 그 애를 죽이고 나서도, 그에 백 날을 더한 악몽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발악하며 죽었나요? 부디 그랬더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은 추하더라도 생동감 넘치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내 일생 한 아이의 아집으로 점철되었지만, 그것이 퍽 나쁘지만은 않았다 여기며 가렵니다. 심해의 왕국에 금잔화는 지고 없으리라, 뒤안길에 둔 이들에게 무궁한 파랑 있으리니.
중세 아포칼립스 커뮤에 내려다... 유서 항목만 쓰고(유서 항목이라니 룽하지 않나요) 드랍해버린 걸 발굴해냈네요 아놔 유서만 띡 써놓고 그만둔 게 웃기고 마음에 들어서 올려봄...
오리지널 설정에서 에밀리는 이렇게 죽지 않았지만(인외니까...신이니까...)... 인간+아포칼립스 세계관 속의 에밀리라면 이런 결말도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냥 AU로 먹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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