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 :: 아득히 먼
고요 | 190823 백업
유달리 잠을 설쳐 피곤했던 밤을 보낸 뒤엔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알람시계가 제멋대로 떨어져 침묵시위를 하고, 끼워두었던 책갈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양말을 신으려 들여다보면 죄 짝짝이뿐이었으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토스터가 열과 성을 다해 식빵을 태워먹었다. 쌉싸래한 탄 맛을 불평 없이 넘기다, 손목시계마저 제 역할을 못하고 삐걱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서관 일 층의 시계가 아홉 시를 울리려 숨을 들이키는 순간 간신히 미끄러져 들어오면, 그러면 사서들은 이제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 자신이 잘못한 것이었으며, 사서들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가 세계를 좁히고 얻은, 가늘고 이해타산적이지만 그가 얼굴 맞대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인연이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방해만 될 뿐이니 나오지 않아도 된다 신신당부하지만 그는 꼭 제 도서관을 돌보고 싶었기에.
그러니까, 웬 토끼모자 쓴 이가 자신을 잡고 넘어졌던 날의 이야기였다.
평일이었다. 월요일도 아니었다. 오후 열 시까지 고집 부리듯 남아 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근처 마트에서 늦은 장을 봤다. 시들어빠진 파 한 단, 양파 하나, 스팸, 소시지, 간신히 하나 남아 있던 어묵까지 낚아채 장바구니에 담고, 이번에는 마악 다 떨어진 쌀이나 잡다한 것들까지 제때 기억해내 계산까지 끝마쳤다. 웬일로 무탈한 장날이네, 생각하며 트렁크를 열려던 찰나.
그때서야 그날의 마지막 불운이 찾아들었다.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 처박힐 듯했다. 강하게 잡아끄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와중, 구십도인지 백팔십도인지 모를 만큼 황망히 돌아가는 시야에는 무사히 자신의 집에 안착했어야 할 부대찌개 재료가 흩날렸다. 이어 까무룩 스쳐지나가는 것은 주마등인지.
어머니를 애타게 찾던 아버지, 외국인이라며, 머리가 붉다며 놀리던 친구들, 그가 인생의 걸림돌이라며 일침을 두고 떠나던 어머니, 교우관계만 놓고 보자면 비교적 순탄했던 청소년기, 사색과 함께 마주했던 의문의 산, 갖은 실패, 좌절, 꺼지는 불길, 회의와 자책, 끝으로 치닫고자 했던, 그리고.
아, 이다지도 짧을지언정 강렬하다는 것을 진즉 깨달았더라면, 영원을 바라다 찰나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을 줄은.
그는 자신이 한동안 이 갈급함에 허덕일 것을 알았다. 다만 견디고 나아가야 했다. 배움을 헛되이 여기는 불썽사나운 짓을 다시금 저지를 수는 없었다. 설령 스승이 제 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래.
구르고 깨지고 닳아빠지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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