喪失
일리메 | 190327 백업
너의 인류애에 경외를 표한다.
사라진 별자리의 기억,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흙을 밟았던 기억, 서로 얼굴 맞대고 웃으며 온갖 것에 이름을 붙였던 기억……. 찬찬히 되짚다 마주치는 공백이 늘어났음을 깨닫는다. 추억이 있던 자리에 희부연 안개만 남았다. 기억을 카페 서고에 일일이 남겨두었지만 펴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이것이 정녕 제가 겪었던 기억인지조차 헷갈릴 터이니, 그렇게 범람하는 의문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조차 베어먹을 터이니 그저 두고만 있는 것이다.
제 세계의 보금자리에 잠시 머문다. B612보다 크지만 바오밥나무 대여섯 그루면 쪼개어질 법한 소행성에 세워진 소담한 카페였다. 카페 선 자리를 뺀 모든 터, 정원에 심었던 목련이 그새 피었다 져 어둡게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허망했다. 시간을 돌려 백색 빛을 돌이켜볼까 하다 그만둔다. 당초 이러기 위해 심은 꽃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줄기에 손 한 번 얹어보고는 자리를 옮겼다. 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었다.
카페는 마법으로 내부를 확장한 탓에 쾌적하고 넓었다. 1층에는 두어 명의 마법사, 그리고 카운터에 앉아 펼친 잡지를 얼굴 위에 덮어둔 채 세상 모르고 자는 점원 하나. 그러다 네 인생도 쥐도새도 모르게 접히겠다, 한 마디 할까 싶었으나 이번에도 그대로 두었다. 그래, 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지……. 지금을 즐기자, 점원 친구. 조용히 담소를 나누던 손님에게 눈인사를 하곤 지하, 제가 머무는 방으로 내려간다. 물에 잠기듯 숨쉰다.
소파에 엎어졌다 일어났다 서성이다 휘 둘러본다. 밭은 숨이 차고 손끝이 떨리고 시선 둘 곳이 없었다. 자주 그랬다. 마냥 머릿속 가득 이름들을 그려보다 참지 못하고 마지막 이름으로 달음박질친다. 그나마 얌전했던 사고는 근 사백오십 년간 물음표만 찍어대었다. 물음에 답해줄 이는 이미 없어졌는데, 곤란한 일이다. 서고에서 책 한 권을 꺼내려다 머뭇거리고, 표지를 한번 넘겨보곤 다시 꽂아넣는다. 필시 다 외웠던 책인데 이제는 기억이 없다. 무섭다. 인류가 제게 쾌락과 노화를 품에 안겨준 모양이었다.
가만 손을 내려다본다. 차라리, 차라리 이 몸뚱이가 정말로 시체였으면 좋았을 텐데. M33에서 벗어나고자 행했던 일까지는 좋았다만 그 뒤가 문제였다. 먼 곳 소행성대에서 큰 돌덩이를 끌어 여기 갖다놓은 점이나, 건물을 짓고 단단히 결계 둘러친 점이나, 소문 듣고 찾아온 마법사를 환대하다못해 아예 대대적인 광고까지 내버린 점이 그랬다. 위선을 베풀곤 겸손한 척도 하질 않았다. 몸에 박인 위선이 역겹다. 나는 너랑 다르잖아. 그렇지?
눈물이 또 말랐다. 눈을 비빈다. 홀로 있으면서 생기는 공백에 빠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흰자위며 눈가며 붉게 내려앉고, 시야가 흐려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게 될 때쯤 손을 떼어본다. 벗겨진 살갗을 비집고 나온 피가 오랜만이라며 인사 나누고는 낙사한다. 그것이 제 미래의 모습이었으면 했다. 따가움을 손끝으로 점점이 더듬다 자리에 눕는다. 바닷물이라 생각했던 것이 포르말린 냄새를 그득히 머금고 있었다.
들린다. 아니, 아니……, 그래, 들린다. 의미도 없고 목적도 모를 희미한 웅얼거림이었다. 그것을 진즉 뇌 속 기계들이 주는 잡음일 거라 치부하고는 대꾸 없이 돌아눕는다. 시끄러워. 웅얼임이 잠시 멈추더니……, 멈추더니, 그 다음이 어땠더라. 대꾸를 들었는지, 그러기도 전에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공 백이 자꾸만 자리를 차 지하고 - -- ------- ---- -----------.
내 소원이 이루어졌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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