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뱃숲/웨인클락]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무비 기반으로 클락 부활 직후의 일입니다.

처음엔 그저 실수라고 생각했었다. 가끔 무언가를 잊거나, 잃어버리기도 하니까. 특정 단어가 순간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싸매며 끙끙거리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지미에게 물어보기도 했고, 늘 들고 다니던 수첩을 잃어버린 날도 있었고, 갑자기 집으로 가던 길이 낯설어 걸음을 멈춘 적도 있긴 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클락은 생각했었다.

그랬었는데.

화려하지만 우아한 느낌이 가득 담겨진 실내, 마찬가지로 품격이 있어보이는 화려한 사람들. 크지 않지만 소란한 대화 소리와 그 소리에 묻힐 듯 묻히지 않은 음악 소리. 온통 낯선 사람들과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그는 당황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제가 여기에 왜 온 것인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꽈악-

콰직!

온 몸을 휩쓰는 긴장에 클락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고, 그 탓에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이 부러졌다. 허망하게 제 손에 두동간 난 만년필을 바라보며 클락은 더더욱 혼란에 휩싸였다. 얼핏 봐도 시중에서 쉬이 구할 수 없어보였던 탓이었다. 제가 이런 걸 살 수 있었던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았다. 제가 산 것인지, 혹은 누군가에게 받은 건지. 받았다면 누구에게 받은 것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순간 발끝을 타고 기어오르는 한기에 클락은 제가 무언가로부터 먹히고 있다 생각을 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벗어나야했다. 하지만 무언가 그를 옭아매고 있는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걷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처럼.

턱-

"미스터 켄트?"

클락은 순간 제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새까매지던 눈앞이 다시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온 몸을 옭아매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발끝부터 기어오르던 한기마저 물러나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제 이름이 떠올랐다. 귓가에 나즈막히 울리는 그 부름에. 제 이름 하나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라 클락은 저를 부른 이를 바라봤다.

드문드문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자연스럽게 잡힌 미간의 주름, 조각한 듯 각진 턱과 걱정이 담긴 다정한 갈색 눈동자. 그 나이에 걸맞게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중후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분명 저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이었으나 클락은 그를 알고 있었다. 눈앞의 그 또한.

그 순간 화잔등만하게 커진 클락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브루스 웨인의 등장에 힐끗힐끗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정되고, 소란한 소리가 호수에 파문이 일듯 울렁울렁 퍼졌다. 브루스 웨인은 그런 일이 수두룩했기에 재치있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으나 브루스는 지금 그래선 안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기에 조용히 클락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란한 소리가 멀어지고 겨우 두 사람만 함께 자리한 장소에 오자 지나치게 고요했으나 그것을 클락도 브루스도 신경쓰지 않았다. 클락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리 탓이었고, 브루스는 여전히 후두둑 떨어지는 투명한 눈물 탓이었다. 클락 켄트의.

"무슨 일이지?"

"그게... 그러니까..."

"클락. 나를 봐."

"......"

"천천히, 생각나는대로 말해."

조합하는 건 제가 알아서 할테니 그저 말하라며 마주쳐오는 갈색 눈동자에 클락은 발끝에 머물러 있던 긴장마저도 떨어지는 걸 느꼈다. 클락은 오래 숨을 참았다 토해내는 사람처럼 겨우 숨을 내쉬며 하나하나 말을 이어갔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건지.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아서..."

무서웠어요, 작게 속삭이듯 삼켜지는 그 말까지 가만히 듣던 브루스는 새하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투박한 제 손으로 살며시 닦아주며 제 머릿 속에 단단히 박혀있던 한 가지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슈퍼맨, 클락 켄트는 강하다는 사실을. 물론 그가 강하긴 하나 그 또한 살아있기에 약하다는 사실을 새로이 새겨넣고서 브루스는 묻고 싶었던 것을 하나 물었다.

"클락. 나는 누구지?"

순간 브루스는 빛이 난다 생각했다. 물기 어린 푸른색 눈동자와 여전히 새하얀 볼을 타고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과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듯 했다.

"브루스. 브루스 웨인."

투두둑.

어디선가 얼어붙었던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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