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마틴] 우당탕탕 햄스터 키우기
사이퍼즈 2차 창작 / 2021년 데샹마틴 인외 합작 참가 글
* 데샹마틴 인외 합작 참여작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올립니다.
* 데샹마틴 인외 합작 페이지 https://onedaysdm.wixsite.com/nonh
태어나기를 여우로 태어나 제 목숨 부지하고자 사람을 피해 숲에 숨어 산 게 대략 이백여 년. 이백 살이 되던 해에 사람 말을 익혀 우습게도 신수 대우를 받으며, ‘챌피’라는 성을 받아 백작가에서 호화롭게 살았다. 다만 그 가세가 기울어 도로 숲으로 돌아간 일도 꽤 오래전 일이었다. 안온한 삶을 놓쳤던 걸 생각하면 배가 조금 아팠지만, 숲에서 구른 시간이 있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숲은 평화로웠다. 인간들 말마따나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지만 말이 무색하게 숲은 오래도록 변함없었다. 달라진 거라곤 계곡의 물맛이나, 내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점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나이를 놓쳤다. 봄이 지나 겨울이 찾아올 때쯤 나이를 더하는 건 무척이나 따분하고 또 의미없는 짓이었음으로. 강줄기 너머 저 멀리 있는 기억을 손끝으로 가늠해 세월을 매만질 때면 그제서야 세월의 흐름을 짐작코는 했다. 대신 버려진 오두막을 깨끗히 정리하고 터전으로 삼고 산밑으로 내려가 인간들과 어울렸다. 먹거리며, 문화생활이며, 제 연애 사업이며 모든 일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찍!!!”
적어도 요 쥐처럼 생겼지만 쥐는 아닌 생명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쮜이이익!!”
“좀 주는 대로 받아먹어요! 얻어먹는 주제에 왜 이렇게 입맛이 까다로워?!”
“쮸익!”
하얀 햄스터가 내 손에 든 잡곡을 죄다 바닥에 패대기치더니,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아무런 죄 없는 내 손마저 때려버리고 잽싸게 침대 밑으로 도망쳤다. 먹고 자는 거 해결해줬더니 기고만장해져서는 이젠 집주인 머리 위에 있으려고 들었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어봤자 내가 굶는 것도 아니고, 하는 짓 예쁘다고 저 원하는 걸 사주지도 않을 텐데. 어차피 제 입으로 들어갈 거 조신하게 두면 어디가 덧나나? 주제를 알라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리며 바닥에 흐트러진 잡곡을 주워 담았다.
저 하얀 햄스터와 만난 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을을 왔다 갔다 하며 정보를 취합해본 결과 저 하얀 털 뭉치는 햄스터라는 동물로, 주로 옥수수와 해바라기 씨를 포함한 여러 곡물과 귀뚜라미, 과일, 야채 등을 주식으로 삼으며, 지체 높으신 귀족 나리들께서 애완용으로 종종 키운다고들 했다.
특이하게도 이 햄스터는 ‘내 말’ 즉, 동족이 아닌 동물들의 말은 물론이고 인간의 언어를 이해했다. 아직 말은 못 하는 단계인지 연신 ‘찍찍’거리기만 했지만, 이렇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짐승은 극소수였기에 반갑다고 하면 반가웠다. 동물 친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저 성격만 아니었음 축하파티를 성대하게 열어줬을 것이다.
‘예’, ‘아니오’라는 대답만으로는 아쉽게도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여우인 걸 알면서도 이 집에서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침대 밑을 내주었다.
“그런데 햄스터씨, 이름 같은 건 없어요?”
같은 지붕 아래서 사는 동물끼리 이름 정돈 알고 지내는 게 맞았다. 비록 우리가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화할 때는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냐며 침대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햄스터는 침대 밑, 그것도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세수하는 것 마냥 두 손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귀족 나리들께서 왜 키우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귀족들은 늘 저렇게 작고 별난 것들을 좋아했다.
“쯋.”
“그 냉담한 반응은 뭐예요?”
햄스터는 슬쩍 내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차는 것처럼 울음소리를 내곤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반응이었다.
“보통 짐승에게 이름이 없는 건 나도 알아요. 무리 지어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을 짓는 게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도요. 그래도 우리 같은 존재에겐 있으면 편하잖아요. 당신 스스로 만든 이름쯤은 있을 것 같은데. 저는 마틴이라고 해요.”
좁은 공간에서 대화하기엔 여우의 모습이 편할 것 같아 금방 여우의 모습으로 변해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햄스터는 대화에 어울리기 싫었는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어디서 난지 모르는 해바라기 씨를 까먹기만 했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해바라기 씨를 소중하게 들고선 야무지게 잘도 먹었다. 먹다 남은 잡곡보다는 해바라기 씨가 좋은 모양이었다. 숲에서 굴렀을 햄스터가 어떻게 입맛이 고급진지. 마을 사람들 말대로 귀족의 손을 탄 걸지도 모르겠다.
“근데 당신도 참 신기해요. 여우가 앞에 버젓이 있는데, 여유롭게 해바라기 씨나 까먹고 있잖아요.”
햄스터는 영역 동물이라고 그랬는데. 포식자인 여우가 뻔히 제 영역까지 침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햄스터가 여유로운 모습을 내보이니 괜히 장난기가 동했다. 유치하게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따뜻한 나무 향에 은은히 사과 향이 밑에 배어있었다. 맡으면 맡을수록 빠져드는 굉장히 중독적인 향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당연하게도 햄스터가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화를 냈다. 괘씸하다는 듯 금방 뒤돌아 코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바람에 물러나야 했다. 작은 손이 어찌나 매운지, 몇 대 맞았다고 코가 얼얼했다. 발톱에 긁혀 상처라도 났나 유심히 살펴보는 사이, 햄스터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저번에 마련한 모래 목욕통에 들어가 온몸을 닦아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때리는 게 어딨어요.”
“끼이이이익!”
햄스터가 저런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들었다. 높게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말 그대로 소름이 끼쳤다.
“내가 당신을 입안에 밀어 넣은 것도 아니고…. 미안해요. 동물일 때는 이런 일에 자각이 없거든요. 요즘은 인간으로 있었을 때가 더 많아서.”
그렇게 때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모래가 통 밖으로 튕겨 나갈 정도로 털을 박박 닦고 있었다. 포식자가 자신을 탐색했다는 사실보다는 제 털을 더럽힌 게 끔찍해 내보이는 행동이었다. 다른 동물을 생으로 잡아먹는 짓은 애저녁에 그만뒀지만 신기한 반응이긴 했다. 우리가 같이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그정도의 신뢰와 확신이 생겼을 리도 없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방비할 수가 있는 거지? 원래 생각도 하고 말도 하는 짐승들은 다 이런 법인 건가? 자신만 생각해도 그런 별종이었기에 납득이야 금방 했지만, 실제로 지켜보니 유별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더 말을 걸었으나, 단단히 화가 났는지 모래통에 들어가선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었다. 그새 햄스터에겐 멋들어진 집이 생겼다. 아니, 방이 생겼다. 버려진 수납장의 서랍을 다듬어 안에 톱밥을 가득 넣어 선물해 주었는데, 애완동물 취급당한다고 생각했는지 기분 나빠했다. 오히려 제 영역을 넓히겠다고 내 침대까지 기어들어 오는 기이한 상황까지도 벌어졌다. 인간으로 있을 때는 잠결에 자다 뭉개 버릴 것 같고, 본모습으로 있을 땐 잠결에 무심코 먹어버릴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햄스터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머리맡에서 뻔뻔하게 잠을 청했다. 기껏 만들어준 방은 햄스터의 보물창고가 됐다.
이따금 주머니가 넉넉할 때면 잡곡과 섞어 해바라기 씨를 가져왔다. 이 형편에 그래도 챙겨줘서 그런지, 이젠 겸상도 했다. 햄스터는 저녁 시간에 맞춰 잘 보이는 자리에 나와 나를 기다렸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햄스터를 식탁에 올려주고 상을 차렸다. 햄스터와 여우가 함께하는 만찬이라니. 문장만 두고 봐도 실로 기묘한 조합이긴 했으나, 우리는 생각보다 좋은 식사 메이트였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고, 햄스터는 일방적으로 듣는 쪽이었지만 간혹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울려주었다. 500년도 더 묵은 여우가 들고 오는 이야기가 재미없을 리 없었다.
요즘은 사과가 제철이라 질 좋은 사과를 싸게 구할 수 있었다. 보기 좋게 빨갛게 익은 사과가 향도 좋았다. 아직 덜 마른 누릇누릇한 이파리에서 일찍이 가을의 흙내음이 느껴졌다. 일주일에서 이주일 이내로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을 테다. 가을이 왔다.
사과를 네 등분을 해 한 쪽은 햄스터가 먹기 좋게 잘라 해바라기 씨와 함께 주었고, 나는 허브와 소금을 곁들인 익힌 닭고기를 준비했다. 생으로 먹는 고기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익힌 고기는 예술이었다. 불의 발견 만만세. 실로 완벽한 상차림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싱글벙글 웃으며 운을 떼자 햄스터가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마저 다 먹고는, 휴지를 손수건 마냥 사용하며 입가를 가볍게 두드려 닦곤 올려다봤다. 식탁을 같이 하며 늘 보는 모습이었건만, 기품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적어도 요 햄스터가 귀족 나리와 가까웠던 건 확실했다. 햄스터는 왜 그렇게 즐거워 보이냐는 눈치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까지 귀여운 모습으로 궁금해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인간한테 고백받았어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으니 덩달아 햄스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 웃긴 나머지 당신 얼굴 좀 보라고 거울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이렇게 인물 좋고, 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좋고, 눈치도 빨라 매너 넘치는 제가 인기 없을 리가 없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며 사과 한 쪽을 입에 집어넣었다.
“제 매력을 제외하더라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어요. 당신이 이 집에 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거든요. 오히려 좀 늦은 감이 있었죠. 그쪽이 워낙 조심스러워서.”
“찌이잇…!”
그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마음에 안 드는 양 그 작은 손으로 연신 삿대질을 하며 요상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 울음소리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에요? 상대가 인간일 뿐이지 교제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잖아요.”
“끼이익, 찍!”
“잔소리하고 싶어 보이시는데, 창세기 이래 이런 마음을 품은 동물이 저만 있었겠어요? 없었음 제가 전례를 만들면 되는 일이고요. 설마, 저 혼자 짝이 생겨서 배 아픈 건 아니죠? 괜찮은 사람 소개해줄까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놀린 것에 화가 났는지 앙증맞은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게 눈으로 보였다. 반응이 이렇게 재밌는 줄 알았으면 일찍부터 놀리고 다녔을 텐데. 이 재미를 뒤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닭고기를 포크로 찍어 먹은 후, 육즙에 베인 허브향을 만끽했다. 간이 딱 알맞았다. 나는 어쩜 요리도 잘하는지. 얄밉게 사과 한 쪽을 입에 쏙 넣었다.
“우리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흔한 것도 아니고, 사는 건 또 지겹도록 오래 사는데 작은 즐거움마저 없으면 어떡해요? 인간이랑 열심히 사랑하라는 신의 계시나 다름없다고요.”
마지막 남은 하나를 마저 입에 넣었다. 달큼한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요리도 훌륭했고, 욕도 참 많이도 얻어먹었다. 말을 못 알아먹는 내가 그렇게도 답답했는지, 햄스터는 이내 무어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시끄러웠지만 저 성질머리 더러운 햄스터가 내 농담에 화내고 있는 꼴이 꽤 볼 만 했다. 인간이었음 머리에 피가 다 쏠려 얼굴이 벌겋게 됐으리라. 그 모습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냅킨으로 입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나랑 하면 되잖아.”
매력적인 중저음이 갑작스럽게 우리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 내용도 범상치 않았다. 내가 이상한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었지만, 햄스터의 반응을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무엇에 먼저 놀라야 할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그러고만 있었다. 접시에 묻은 육즙이 슬슬 굳어갔고, 식탁 위에는 불편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은은한 조명만이 잠자코 이 모든 걸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이 무슨 발언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앙증맞은 손으로 두 입을 막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제 감정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전달했단 사실에 굉장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지나가다 물벼락을 맞아도 저런 얼굴을 하지 않을 텐데. 그 모습을 실컷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고백 대상이 대상인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이쪽에서 먼저 운을 뗐다.
“이름이 뭐예요?”
“…까미유.”
“예전에 물어봤을 땐 없었다고 했으면서.”
“없다고 하진 않았어. 전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
“재수 없어.”
재수 없다는 말에 까미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상황 자체가 우스워서,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 얘기나 꺼내고 웃고 있는 게 우스워서, 또 저 하얀 털 뭉치에서 매력적인 중저음이 흘러나오는 게 안 어울려서, 이름이 까미유여서, 여태 사과와 해바라기 씨가 남아있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진짜 나 좋아해요?”
웃음을 미처 다 거두지 못한 채였다.
“빌어먹게도 그렇게 됐어.”
“누가 고백을 그렇게 멋없게 해요? 저한테 고백한 인간은 나 좋다고 시도 읊어줬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할까?
“됐네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편하지도 않았고, 우스운 고백에 계속해서 웃음도 나왔지만, 기분이 묘했다.
까미유는 이제야 해바라기 씨에 손을 댔다.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 소리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졌다. 접시에 묻은 소스는 완전히 굳어있었다. 접시에 물을 받아두고, 식탁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먼저 까미유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정말로, 까미유가 말을 뗐다. 그 과정이 요란스럽기는 했지만, 이제 내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건 이걸로 끝이 났다.
“…그럼, 그 인간이랑 사귀고 있는 건가?”
“어렵게 꺼낸 말이 고작 그런 거예요?”
“나에겐 중요해.”
햄스터가 진지하게 말한다고 분위기가 잡히진 않았다. 그의 태도를 보면 진지하게 대답해줘야 했는데,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 금방이라도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난감했다.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냥 한 번 튕긴 거였죠.”
“사귀는 것처럼 굴더니.”
“그거야 당신 반응이 재밌어서 그랬죠. 미리 먼저 눈치챘음, 그 사람이랑 자고 왔다고 했을 거예요.”
“재수 없긴.”
“서로 쌤쌤으로 쳐요.”
“그럼 나한테도 기회를 주는 건가?”
허.
“당신이 인간이 되는 법을 터득하면요…? 햄스터인 당신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햄스터가 전의 바보 같은 얼굴을 다시 내보였다.
“…우리가 맨날 밥도 같이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잤던 건 다 뭐라고 생각한 거지?”
“와, 설마…. 그게 다 절 좋아해서 그랬던 거였어요?”
“말하면 말할수록 내 처지만 딱하군.”
“저 혼자 뮤지컬 찍은 거면서. 짝사랑이 원래 다 그런 법이죠.”
까미유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저를 식탁에서 내려준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손바닥으로 올라와 얌전히 앉아 나를 쳐다봤다. 손을 내 눈높이에 맞춰, 나 또한 까미유를 쳐다봤다. 동족도 아니고, 거기다 피식자인 햄스터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긴 어려웠다. 그런데도, 내게 고백한 인간보다 요 귀여운 햄스터에게 계속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미 추는 기울어져 있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한 달 뒤든, 몇백 년 뒤든, 언젠가 눈앞의 햄스터를 사랑하게 될 거란 예감이 막연하게 들었다.
“날 기다려줄 생각은 없을 거고.”
“당연하죠. 당신 인간 되는 거 기다리는 동안 그 인간이 먼저 죽을걸요? 기다려달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알죠?”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별개로 이건 진심이었다. 세월을 물 흐르는 듯이 보내던 일이 익숙했지만,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품고 인간이 될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제아무리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삶이 무한했던 건 아니었으니. 그럴 시간에 다른 즐거움을 누리는 게 나았다.
“난 인간으로 변하는 방법도 진즉 알고 있었어. 너무 오랫동안 인간으로 변할 필요가 없어서 그 방법을 잊은 것뿐이지. 네 생각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짧든 길든 기약 없는 약속은 안 좋아해요.”
까미유는 얼굴도 모르는 인간을 질투하다 말을 뗐다. 말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에 몸이 저절로 반응한 거였다. 질투란 감정이 아니더라도,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줄 자극만 있다면 몸을 일깨울 수 있을 테다.
어디선가 그런 동화를 봤었다. 키스로 왕자의 저주를 풀어주는 낭만적인 이야기. 우리가 저주에 걸린 건 아니었지만, 우습게도 이야기 속 장면이 떠올랐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만 있었더니 까미유는 더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저 혼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괘씸했다.
눈을 감은 채 다짜고짜 입을 맞추었다. 당황한 나머지 돌이 된 털 뭉치가 느껴졌다. 두 손에서 느껴지던 복슬복슬한 털의 감촉이 굳은살이 잡힌 단단한 손으로 바뀌었고, 맞잡은 손에서는 이전에 느낀 적 없는 온도를 느꼈다. 키는 나보다 조금 더 컸나.
맞닿은 두 입술에서는 뜨거운 숨이 몇 번을 오갔다. 아까 먹었던 달큼한 사과 향이 맴돌았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입을 떼어냈다. 잠깐 입을 맞춘다는 게, 답지 않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더 안 해?”
눈을 뜨니 새하얗고 촘촘한 속눈썹을 가진 미남 하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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