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므주인라토] 조각글
라므리x주인♀️ (+라토)
살금살금. 혹여나 2층의 누군가 잠에서 깨어날라. 발뒤꿈치를 든 라므리는 도둑질하는 길고양이처럼 사뿐히 계단을 딛는다. 보스키의 코 고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2층의 집사들은 고된 훈련에 지쳐 단잠에 빠진 모양이다.
'그 동안 하우 씨의 훈련이 힘들어서 주인님을 볼 겨를이 없었지.'
그러니 이건 자신에게 주는 상이다. 주인님의 자는 얼굴을 조금만 보고 돌아오리라. 주인님을 만날 수 있단 사실만으로 흐응, 익숙한 콧노래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뻔했다.
라므리는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헙, 틀어막았다. 위험하다, 위험해. 그렇지만 주인님 생각만 하면 자꾸 콧노래가 나오고 입술이 샐쭉 올라가는 건 도저히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살금살금, 주인님의 방 앞에 도달한 라므리는 당장이라도 문을 벌컥 열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 담으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천천히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채 닿기도 전에 철컥 소리와 함께 주인님의 방문이 열렸다.
주인님이 날 마중 나오신 건가? 부푼 기대도 잠시, 라므리는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개한 철쭉처럼 화려한 진분홍의 머리카락이 살랑, 그의 발목께까지 내려와 춤춘다. 얼음장처럼 시린 상대방의 파란 눈이 라므리를 재밌다는 듯 내려다본다.
"... 크흐흐. 라므리는 왜 이 시간에 주인님 방 앞에 서 있지?"
"하... 하하, 그게 라토찌..."
왜 하필 이 녀석이랑 맞닥뜨린 거냐. 젠장. 젠자아앙... 라므리는 우왕좌왕하다가, 문득 라토야 말로 대체 이 왜 여기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주인님과 대체 이 시간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건가.
"라, 라토찌는 왜 주인님 방에서 지금 나오는 거야?"
라므리가 흥분해서 묻자, 라토가 검지 손가락을 입 앞에 가져간다. 조용히 하란 암묵의 신호에, 라므리가 합, 입을 다문다. 라토는 차분히 다른 손에 들린 것을 눈 앞에 내보인다. 그의 손에는 얇은 그림책 한 권이 들려있다.
"잠드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책을 읽어드렸을 뿐이야. 평소에는 플루레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오늘은 밤새 작업을 한대서. 그래서 주인님께 대신 읽어드렸지."
그림책의 큼지막하고 화려한 수채화 삽화는 미숙한 라므리의 눈에도 어린 아이들을 겨냥한 분위기가 확연히 풍긴다. 주인님이랑 플루레에게 그런 걸 읽어주는 거야? 목구멍 끝까지 질문이 차올랐지만 끝내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참았다. 기분에 따라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라토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그런 말을 할 용기는 없으니까. 라므리는 본심을 숨기며, 라토에게 방긋 웃는다.
"그렇구나, 라토찌! 수고했어! 이만 들어가서 푹 쉬어. 난 주인님께 볼일이 있으니까."
턱. 라토를 지나쳐 주인님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라므리의 뒷덜미를 라토의 가느다란 손이 잡는다. 일부러 잡힌 것도 몰랐던 척 무시하려 했지만, 마치 거대한 바위에 옷이 걸리기라도 한 듯 라므리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대체 저 얇은 팔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라므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되돌아보았다.
"아..하하.. 라토찌. 왜 그래?"
"주인님은 주무시고 계셔."
"그, 그런 건 상관없는데~ 나는 주인님이 주무시는 사이 방을 청소해드릴 뿐이니까."
"크흐흐... 그러다 주인님이 깨면 어쩌려고?"
라토의 입술은 기분이 좋은 듯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번뜩이는 눈동자에선 주인님의 잠을 방해했다간 그 동안 자신이 박살 낸 천사들과 같은 꼴로 만들어 주겠노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으으... 나크가 순찰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기 전에 빨리 주인님을 뵙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자신이 이 야밤에 주인님 방에 몰래 들어가려 했단 사실을 라토 뿐만 아니라 나크한테까지 들켰다간 더욱 상황이 복잡해지리라. 심지어 루카스 님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갈지도 모른다. 루카스 님에게까지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최악의 시나리오가 라므리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던 그때,
"라므리?"
주인님의 목소리가 방 안쪽에서 들린다. 사랑하는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라므리는 라토의 손길이 한순간이나마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때를 놓치지 않고 라므리는 그의 손길을 뿌리친다.
주인니이임! 그는 마치 주인님의 부름을 들은 강아지처럼, 라므리는 활기차게 주인님 방 안으로 달려갔다.
"이런..."
주인님의 잠을 방해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방금 막 잠드셨는데. 라토도 놓칠세라 재빨리 라므리의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간다.
"너, 라므리..."
"히익! 주인님, 살려주세요!"
라므리는 주인님의 침대 위로 텀블링을 하듯 몸을 날려 주인님의 침대 뒤로 굴러 들어갔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주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라토가 동화책을 완독하고 이제야 겨우 잠을 청하려 했는데, 이번엔 라므리라니. 주인의 미간이 곤란한 듯 패였지만,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두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진 않았는지라 그녀의 입 끝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대강 어떻게 된 상황인진 알 만했다. 아마 자신이 잠들 때 몰래 방에 들어오려던 라므리가 라토랑 딱, 마주친 거겠지.
성큼성큼, 라토가 라므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나온다. 라토를 저대로 뒀다간 오늘 내 방에서 칼부림이 나겠는데.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침대 뒤에 숨은 라므리의 손을 잡고 라므리를 침대 뒤에서 끌어낸다. 주인님의 손길에 힘없이 끌려와 주인님 침대에 폭, 앉은 라므리는 겁에 질린 눈으로 주인님을 바라본다.
"주, 주인님...?
"진정해, 라토. 라므리는 내가 불렀으니까... 밤에 체스를 하자고 불렀거든. 그렇지, 라므리?"
설마 주인님이 라토에게 자신을 넘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주인은 라므리에게 말을 맞춰달라는 듯 라므리에게 살짝 윙크하고 있다. 잠시나마 주인님께 불손한 마음을 품었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주인님은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었다.
"주인님…."
주인님이 나를 위해 이런 거짓말을 해주시다니. 주인님의 고운 마음씨에 저는 감동했어요. 라므리는 코끝이 시큰함을 느끼며 애써 차오르려는 눈물을 삼킨다. 주인님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당장이라도 폭, 안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라므리는 그녀에게 똑같이 윙크를 다시 돌려준다. 아무래도 본인은 윙크가 아니라, 양쪽 눈을 모두 꾹 닫았다 떴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체 모를 신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라토는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러나 주인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이 이상 라토가 라므리에게 이의를 제기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은 데블 팔라스. 주인의 저택이자, 주인의 말이 곧 법이니까. 그것만은 미야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라토 또한 소중한 주인님의 말을 거스르고 싶은 마음이라곤 티끌만큼 없기에, 그는 오늘의 희극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그는 마치 무대를 마친 주연 배우처럼 우아하게 상체를 숙이곤 주인의 방에서 퇴장했다. 문이 닫히고 사뿐사뿐, 라토의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촛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이제 어쩐담. 라토가 라므리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어서 구해주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손을 잡고 있구나. 주인은 라므리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라므리의 손이 꼭, 주인의 손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맞잡아온다.
"라므리?"
주인이 라므리의 이름을 부르자, 대답은 없지만 커다란 반지를 주렁주렁 낀 그의 손가락이 꼼지락이는게 느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므리가 있는 방향에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인님.. 저 집사로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주인님이랑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오랜만이라서."
어둠 속에서도 라므리의 두 눈은 마치 한 줄기의 빛을 쫓듯 자신을 뚜렷이 향하고 있었다. 콩닥콩닥. 라므리의 손 끝 너머로 그의 빠른 맥박이 달콤한 음악처럼 전해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도, 라므리는 여전히 온몸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조금도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구나. 이 어리광쟁이를 어쩌면 좋담. 주인은 그런 라므리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 라므리, 지금 나 매우 피곤한데."
라므리는 예상과 다르게 단호한 주인님의 대답에 주눅이 들었다. 아무리 다정한 주인님이라 한들 이 시간에 막무가내로 침실로 들어오는 건 무례한 행동이었을까.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으려는 순간, 주인의 따스한 손이 그의 손을 더욱 꼭, 감쌌다.
"이대로 라므리의 손을 잡은 채로 잠들어버릴지도 모르겠네."
"네...?"
"라므리는 안 피곤해? 실수로 주인님의 침대에서 깜빡 졸아버릴 것 같지 않아?"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 라므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진다. 아마 빛 아래서 봤다면 제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었으리라. 아아, 그렇고 말고요. 사랑하는 주인님, 당신이 옳고 말고요. 아무래도 전 이곳에서 찔레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공주처럼 잠들어버리고 말 것 같아요. 지금 막 강력한 마법에 걸린 것 같거든요. 사랑이라는 아주 강하고 달콤한 마법이요.
"저도 매우 피곤해요, 주인님."
전 아마, 평생에 걸쳐도 이 마법을 풀어내지 못하겠죠. 왜냐하면 당신이 건 마법이니까. 그리고 당신이 내게 준 건 축복이든 저주든, 모두 빠짐없이 소중한 보물일테니까.
* 밑의 결제선은 채널이 터지거나 사라졌을 때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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