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말

누구도 너를 적대하지 못하리라

노트북 고장났을 때 노트에 쓴 아무말 퍼레이드 (미완)

그가 탄생한 날 하늘이 이르길, 누구도 너를 적대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모두가 발드르를 아끼고 사랑했다. 아름다운 발드르, 태양 같은 발드르, 사랑받는 발드르, 창공 같은 푸른 머리칼과 황금 같은 금빛 눈의 발드르…….

그러나 발드르에게 내려진 것은 결코 사랑의 운명은 아니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으나, 예언은 발드르의 승리에 대해 노래했지 사랑에 대해 이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발드르, 태양 같은 발드르는 모두에게 사랑받으면서도 사랑을 몰랐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발드르에게는 그저 당연히 받아야 할 전리품처럼 여겨졌으리라.

그리하여 모두가 발드르의 사랑을 갈구하였다. 저 드높은 하늘의 신부터 길가에 피어난 들꽃까지, 세상 만물이 발드르의 한 줌 시선을 받기 위하여 몸부림쳤다. 그럼에도 발드르는 그 누구에게도 내려앉는 법이 없었다. 발드르의 시선은 더없이 가벼워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를 멈추는 일 없이 떠돌아다녔다. 한 번 내린 곳에 다시 내리는 일 역시 없었다. 세상은 드넓었고 발드르를 사랑하는 이는 대해의 물방울보다 많았으므로.

다만 모두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꼭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리다. 발드르는 더없이 아름답고 선했으므로 세상의 대부분이 그를 애정하였으나, 하늘을 찌른 산맥 깊은 곳의 호수에 자리잡은 마녀 겨우살이만은 그에게 무심하였다. 애초에 저승의 문턱에 위치한 겨우살이의 거처와,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발드르의 저택은 드높은 하늘과 저 깊은 지하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이 날까지 만날 일도 없었다. 발드르가 저승에 내려간 남편을 구해 달라는 여신의 부탁을 받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마녀 겨우살이는 저승의 문턱에 기거하는 대신 사후세계를 엿보려는 무도한 자들을 돌려보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명부의 신마저 아름다운 발드르를 무척 사랑하였으므로, 겨우살이의 주인은 자신의 첫 번째 문지기에게 그의 발걸음을 막지 않을 것을 주문하였다. 어차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발드르의 걸음을 고작 겨우살이가 막을 수나 있겠는가. 때문에 겨우살이는 대수롭지 않게 그를 보내 주었다. 단지 발드르가, 더없이 찬란한 그 발드르가 겨우살이의 앞에서 멈추었을 뿐이다.

발드르가 물었다. "당신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겨우살이가 답했다. "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그 답을 들은 발드르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하였으므로, 겨우살이는 자신의 답변을 후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가 당신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립니다. 아름다운 당신, 태양 같은 당신, 사랑받는 당신. 저승의 왕마저 당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영지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발드르는 걸음을 옮기지 않고 답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겨우살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이 세상에 속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발드르도, 겨우살이 스스로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발드르는 겨우살이가 연 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겨우살이의 거처를 당장 떠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저승의 문을 계속 열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겨우살이는 문을 닫았다. 발드르는 마녀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창공을 가르던 주신의 눈동자가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되지 않을 것임을 발드르도, 겨우살이도 알았다.

발드르는 정확히 한 달이 되는 날 다시 겨우살이를 찾아왔다. 애가 탄 여신이 친히 지상으로 내려와 간곡한 부탁을 하고 간 이후로 보름이 지난 날의 일이었다. 겨우살이는 자신의 주인에게 들은 대로, 일전 발드르가 방문하였을 때 그리하였던 것처럼 저승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축복받은 발드르는 이번에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전 발드르가 저승에 들어서지 않은 일로 명부의 왕이 무척 상심하여 제게 푸념하였으므로, 겨우살이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발드르여, 어째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발드르가 답했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겨우살이는 부정할 의지마저 잃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를 갈구합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울고 웃습니다. 나와 함께하고자 하는 이는 밤하늘의 별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째서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겨우살이는 간단히 답했다. "그것이 당신에게 중대한 일입니까?"

발드르는 고개를 저었고, 겨우살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 이만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가십시오. 당신을 아끼고 신뢰하는 이에게 가십시오. 저승의 군주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드르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겨우살이는 결국 그냥 문을 닫았다.

발드르가 다시 명부의 문턱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였다. 여신의 남편은 여전히 저승에 있었고, 여신은 반쯤 광기에 차서 옷을 쥐어뜯었으며 저승의 신은 여전히 발드르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겨우살이는 내심 그의 방문을 반겼다. 발드르가 오기 여섯 시간 전부터 명부의 왕은 겨우살이에게 이번에는 기필코 태양 같은 발드르를 들여보내라며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명계의 문은 방문객을 맞기 한참 전부터 열려 있었고, 겨우살이는 일찌감치 문 앞을 지키고 서야 했다. 발드르가 그 앞에 당도할 때까지.

저승의 문 앞에 도달한 발드르는 겨우살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영 들어가지 않을 기색이었기 때문에, 결국 겨우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양 같은 발드르여, 명부도, 여신의 남편도, 여신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승의 문이 당신 앞에서 세 번 열렸으니,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 역시 이번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발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당신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겨우살이는 무엇이든 답하겠다는 호의를 담아 답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발드르는 간단히 말했다. "바로 당신의 이름입니다."

겨우살이는 일전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것이 당신에게 중대한 일입니까?"

발드르의 대답 역시 이전과 유사했으나, 동시에 달랐다. "중대한 것은 아니나, 그저 묻고 싶습니다."

겨우 이름자를 알려주는 것 정도야 겨우살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마녀는 나직히 답을 주었다. "겨우살이,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입니다."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인 발드르는 그에 호응하여 입을 열었다. "나는 찬란한 일광의 발드르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발드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겨우살이는 간단히 대꾸하고선 열린 문을 가리켰다. "이제 약조하신 바를 이루실 시간입니다."

역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웃으며 말한 발드르는 이번에는 정말로 저승의 문턱을 넘어 끝없는 명부로 걸어들어갔다. 나오는 길은 들어가는 길과 같지 않았으므로, 겨우살이는 이 이후로 열릴 일 없을 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발드르에게 이미 세 번 열린 이 문은 그의 앞에서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발드르와 마녀가 다시 조우할 일 역시 없을 것이다.

실제로 겨우살이의 일상은 당분간 평온하였다. 저승을 방문한 발드르는 명부의 군주를 만나 여신의 남편을 돌려받았고, 모든 신의 기쁨 속에 지상으로 돌아와 영광을 누렸다. 여전히 지상의 모든 것이 발드르를 갈망하였다. 저승의 문턱에 자리잡은 마녀, 겨우살이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으되, 발드르, 오직 발드르만이 하나 변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그 자신의 마음이었다.

발드르는 그리하여 다시 저승의 문턱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전 통했던 길을 걸어도 겨우살이가 머무는 호수로는 향하지 않았다. 평탄한 초원도, 깎아지른 산맥도, 느리게 흐르는 강물도 발드르를 겨우살이의 거처로 이끌지 않았다. 그는 닷새간 길을 찾다가, 길을 알 만한 이에게 묻기로 했다. 세상을 지나는 바람이 발드르의 시선에 멈추어 그의 주위를 휘감아 돌았다.

발드르는 서풍에게 물었다. "봄을 불러오는 당신,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를 아는지."

서풍은 답했다. "아름다운 발드르여, 저는 알지 못합니다."

발드르는 남풍에게 물었다. "여름을 불러오는 당신,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를 아는지."

남풍은 답했다. "태양 같은 발드르여, 저는 알지 못합니다."

발드르는 동풍에게 물었다. "가을을 불러오는 당신,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를 아는지."

동풍은 답했다. "사랑받는 발드르여, 저는 알지 못합니다."

발드르는 북풍에게 물었다. "겨울을 불러오는 당신,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를 아는지."

북풍은 답했다. "발드르여, 찬란한 발드르여,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어떤 바람도 겨우살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발드르는 그들에게서 떠나갔다.

지상을 맴도는 바람이 알지 못한다면 하늘을 가르는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발드르는 그리하여 만물을 내려다보는 태양을 향해 물었다. "창공을 가르는 당신,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를 아는지."

태양은 답했다. "나의 아이야, 나는 알지 못하노라."

대낮의 태양이 알지 못한다면 한밤의 달은 알고 있을 것이다. 발드르는 그리하여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 하늘에 떠오른 달을 향해 물었다. "창공을 가르는 당신, 여윈 나뭇가지의 겨우살이를 아는지."

그는 그리 물으면서도 달 역시 겨우살이의 존재를 알지 못하리라 넘겨짚었으나, 달의 답변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태양의 금지옥엽아, 너는 어찌하여 나의 아이를 찾느냐?"

발드르는 기꺼이 답했다. "그이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달이 다시 물었다. "축복받은 생명아, 너는 어찌하여 나의 아이를 그리느냐?"

막힘없이 흐르는 개울처럼 자신만만하던 발드르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은 그이가 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드르의 답을 들은 달이 차분히 답하였다. "나의 세 번째 딸은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애의 운명이니라."

발드르는 그럼에도 입을 열었다. "밤하늘의 군주여, 잔혹한 제왕이여, 저는 그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에겐 마음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달은 자신의 딸을 더없이 애정하였으나, 달 역시 발드르를 사랑하는 만물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달은 다섯 강과 일곱 산맥을 넘어 깊은 산맥 속에 위치한 겨우살이의 호수로 향하는 길을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발드르는 달에게 감사를 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미래에 무엇이 남는지 예지한 달만이 그저 탄식을 남길 뿐이었다.

~언젠가 이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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