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꿈

이터널 선샤인 AU

知香 by 지향

우리의 실험에 동참해 주세요.
미나세 씨의 기억은 귀중한 자료가 될 겁니다.

왜 제가 협조해야 합니까?

당신도 느끼지 않았나요?
마루야마 씨에 대한 감정은 언젠가 기필코 서로에게 방해가 될 겁니다.
정말로 발목이 잡히기 전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호의예요.

hx_sa3님 커미션

#1

미나세 미카는 파스파레의 무대를 처음 보았습니다. 메인보컬이 참 열심히 한다, 정도의 건조한 감상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미카는 어쩐지 그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2

중요한 기억을 지워 주겠다는 제안에 미카는 흰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구태여 자신의 것을 잃고자 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마루야마 아야를 들먹이자 미카는 심각해졌습니다. 저들이 제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렇게 티를 많이 내었던가? 누군가 알아차릴 정도라면 곧 모든 사람이, 그리고 당사자가 알게 되는 것도 금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민 끝에 미카는 실험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하룻밤 만에 특정 기억을 모두 지운다니, 굉장한 기술이에요. 미카는 묘한 소리를 내는 기계에 머리를 내맡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생각보다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3?

그러나 막상 지워지는 기억 속에 진입했을 때, 미카는 곧바로 후회했습니다. 지워지는 기억들이 손에 닿을 듯 그려지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해 환히 웃던 얼굴들이 희미해져 갔습니다. 스테이지 위에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들이 흐릿해져 갔습니다.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 왔습니다. 미카 씨!

- 이날의 마루야마 씨는…… 아, 함께 장신구를 구경하러 갔었지요. 곧 당신도 저를 떠나겠지만요.
- 그러겠네요. 미카 씨는 아쉬우세요? 저를 잊는 게 말예요.
- 가능하다면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이 기억 속에서 당신을 두고 떠나는 저를 용서하세요.
- 괜찮아요. 분홍빛 꿈으로 남았다면 형태를 띠지 않아도 좋을 거예요.

미카는 아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장신구 가게에서 나왔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든 가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4

어떤 기억은 너무나 부끄러워 서둘러 잊고 싶었습니다. 또 어떤 기억은 눈물이 나도록 잊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억들 사이를 거닐며 미카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지워질 기억일 뿐이라면, 그 안에서는 제멋대로 굴어도 좋지 않을까요?

#??

그날은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터지는 불꽃 아래서 미카는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 마루야마 씨를 사랑합니다.

그 말에 아야는 놀라 미카를 바라보았습니다. 당황한 듯한 얼굴에 점차 수줍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 정말요? 음,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쩐지 부끄러운걸요……
- 그러니까, 저도 좋아해요!

미카는 걷잡을 수 없이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곧, 자신이 행복했다는 사실조차 잊었습니다.

#??

- 마루야마 씨를 사랑합니다.
- 엣, 정말로요?! 아니, 이게 아니라…… 저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었습니다. 공원의 호수 앞에서 아야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미카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입을 열기도 전,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

- 마루야마 씨를 사랑합니다.
- 갑작스러워서……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
- 기다려 줄 수 없을 거예요. 이 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

미카는 수많은 가능성의 우주를 떠돌고 또 떠돌았습니다. 닻이 없는 배는 대양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습니다. 몇십 번째 기억에서 눈을 떴을 때 미카는 아야에게 하려던 말을 잊었습니다.

- 마루야마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었던 것 같은데……
- 기억이 나면 말씀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몇십 번째 기억 역시 잊어졌습니다.

#?

- …… 미래가 불투명하다면, 그만큼 무대에 올랐던 미카 씨의 지난날들이 선명한 행복의 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 아닐까요? 저는 미카 씨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카는 그 말을 들으니 울컥 화가 치솟았습니다. 아니, 그때의 나는 화를 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의미를 알 수 없는 상념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난 후회하지 않아요, 내 지난날들은 단 하루도 예쁜 색을 띠었던 적 없어요!

아야는 눈을 깜빡였습니다. 놀란 것 같았습니다. 긴 적막이 흘렀습니다. 혹은 그저 찰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 후에 아야가 입을 열었다는 겁니다.

- 후회하지 않으신다면 다행이에요. 지난날들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건 슬프네요.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예쁘지 않은 색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름다워 보일 수 있잖아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미카는 아야에게 화를 냈다는 걸 후회했습니다. 미안해요. 그리 말하자 아야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습니다.

- 제가 기억할게요, 예쁜 색으로 반짝이던 미카 씨의 순간들을.

#?

미나세 미카는 파스파레의 무대를 처음 보았습니다. 메인보컬이 참 열심히 한다, 정도의 건조한 감상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미카는 어쩐지 그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 설마 이것까지 지워지나요? 이때의 나는 마루야마 씨를 __하지 않았는데……

#3

실험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미카는 - 당연하게도 - 잊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연구원들은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사람이라도 됐던 걸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예쁜 분홍색 꿈을 꾼 것 같습니다. 분홍색은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기억이 없어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습니다. 해는 뜨고 또 졌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갈 길을 갔습니다. 똑같은 일상이 돌고 돌았습니다. 분명 지구는 어제처럼 돌고 있었습니다.
미나세 미카는 자전축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한가운데서 돌던 톱니바퀴가 맥없이 빠진 듯했습니다. 고작 한 사람을 잊었다는 이유로 이런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 걸까요?

#4

- 미카 씨! ……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미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사람도 똑같은 일상에 변화가 생긴 듯했습니다, 마치 자신처럼요. 미카는 기억을 더듬어 이 사람이 어느 후배 그룹의 보컬이라는 정보를 떠올렸습니다. 저를 아십니까? 그리 묻자 그 사람은 무척 놀란 낯을 했습니다. 저를 잊어버리셨나요?

마루야마 아야라는 후배 아이돌은 제게 중요한 존재였던 듯했습니다. 옛 방송을 조금만 뒤져 보아도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 매우 후한 평가를 내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은 언제나 부드러웠습니다, 자신이 지은 표정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이요. 저 시절의 미나세 미카와 자신은 결코 같아질 수 없을 겁니다.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조리 잊었으니까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왜 기억을 잊고자 했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조금 원망스러웠습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사람 하나가 빠졌을 뿐인 삶이 이토록 공허해야 하는지.

#5

- 나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눈이 내리는 겨울이었습니다. 앉아 있기만 해도 뼈가 시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곳에 앉아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니, 믿기지 않았습니다. 생각에 잠긴 마루야마 씨를 미카는 가만 바라보았습니다. 키가 작고 귀여운 사람. 구태여 잊고 싶었다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대관절 왜 그렇게나 강렬한 존재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 …… 글쎄요. 미카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어요. 죄송해지네요, 미카 씨는 늘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는데……
- …….
-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요.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셨다는 사실이요.

#6

- 제가 다시 당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아야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긴 적막이 흘렀습니다. 혹은 그저 찰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 후에 아야가 입을 열었다는 겁니다.

- 음, 모든 걸 기억하는 미카 씨와 지금의 미카 씨는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저를 향한 마음의 형태가 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괜찮아요. 아야가 그리 말하니 미카는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어째서 편해지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 새로운 기억이 쌓인 후, 미카 씨는 저를 어떻게 여기게 될까요? 확신이 생기면 부디 말씀해 주세요!

#?

지워진 과거 속에서, 또는 가까운 미래에서 불현듯 미나세 미카는 깨달았습니다. 마루야마 아야가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가 되었음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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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책읽는 햄스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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