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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대만]熱傷

https://youtu.be/QLCpqdqeoII?si=ByxqnTXcx0N6uxFV

*타 사이트에서 썼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熱傷

초여름은 어쩌면 사랑을 숱하게 읊는 봄보다도 위험할 지도 모르겠다. 운동하는 놈들이 얼마나 로맨틱한 말을 알겠냐마는. 정대만은 진심이었다. 그 언젠가 봤던 연애 소설의 시작은 벚꽃이 휘날리는 봄이던데. 그건 순 거짓말일 지도 모르겠다고.

"좋아해요."

그러니까 정말 이건 위험했다. 쨍한 햇빛이 체육관 창문을 꽉 채워 쏟아졌다. 더위가 기승을 채 부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아니, 이건 더위 때문이 아닌가? 방금까지 죽어라 뛰었으니 그럴만도. 아니 어쩌면, 제 앞에 햇빛을 등진 채로 빤히 쳐다보면서 일언반구도 없이 고백부터 내지르는 발칙한 후배 탓인지도. 정대만은 이 모든 게 이제는 더위에 녹아내린 건지, 과한 심장 고동의 소리 탓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나를?"

"네, 선배님을요."

바보같은 물음에도 그는 흔들림이 없다. 내도록 서 있던 발칙한 후배는 식어빠지기 시작하는 포카리 스웨트 캔을 까, 건네주며 시선을 맞춰 느릿하게 앉았다. 그때까지도 그가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느라, 정작 정대만에게는 뜨거운 초여름의 햇빛 따위는 닿지 않는다는 걸, 그만 모르고 있었다.

"그래, 나도 너 좋아하지."

"그런 의미 아닌데요."

깍뜻한 거절에 정대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좀 드세요. 더우시잖아요. 답지 않게 말이 긴 후배는 여전히 햇빛을 등진 채였다. 그제야 정대만은 체육관을 꽉 채운 여름의 햇빛을 바라보았다. 저만 그늘 속이었다. 그늘은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서.

야, 까지 말을 내뱉은 정대만은 반쯤 기울인 몸을 급히 일으켜, 옷자락을 거둬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닿은 곳이 벌겋게 익었다. 너는 진짜……! 날카로운 말에도 그는 무던한 얼굴이었다. 체육관 계단에 앉아 바라보니 아무래도 치료가 필요할 듯 싶었다.

"너는 미련하게……!"

걱정 되세요? 그런 말을 하는 대신에 끌어올린 옷을 내리고 방황하는 손에 포카리 스웨트 캔을 쥐여주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았다. 중요한 건 등이 아니었다. 제 고백에 대한 답을 듣지도 못하고 헤어질까, 그게 문제인 거지. 온통 검기만 한, 서태웅은 다급했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음을 접으라면, 접을 생각이었다. 뭐, 몇 번 더 해보고.

"치료해야지. 가자."

"답, 안 해주셨는데요."

미련하다. 정말 미련하다. 얘는 왜 미련하지? 정대만은 이제 짜증스러웠다. 당장 급한 게 등이지, 망할 고백에 대한 답이 문제인 건가. 우선 순위를 왜 모르지? 정대만은 사실 안다. 그가 설마 우선 순위도 모르겠는가. 정말 초여름은 위험한 날씨다. 천하의 서태웅도 헤롱거리는 날씨니까.

"당장은 답 못 준다."

"네."

"접으라고 하면 접어."

"네."

단촐한 대답. 정대만은 이게 금방 사라질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여름 날의 장난. 선후배 간의 감정. 금방 사라질 애정. 금방 돌아올 아주 잠깐의 이벤트. 그러니 텅, 텅, 뛰는 심장은 고백에 대한 놀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보건실 갈 거냐?"

"제가 다치니까, 마음이 안 좋으세요?"

서태웅은 말이 긴 편이 아니다. 문장은 짧고, 대답은 더 짧았다. 충동적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말도 길고, 충동적이었다. 정대만은 몸을 일으키며, 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후배가 미련하게 굴어서 다친 것 같은데. 걱정 안 하는 선배가 어딨냐.

아, 아프다.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했다. 긋는 선이 농구 코트에 그어진 선보다 진했다. 그제야 벌겋게 달아오른 등이 아파왔다. 등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렁이는 마음을 잡으려 애썼다.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던데. 그 어느 날 드라마를 보며 내뱉던 누나의 말이 왕왕, 울렸다.

"서태웅?"

"아파요."

"어?"

선배, 아파요. 아픕니다. 이게 원래 아픈가요? 입안을 굴러다니는 문장 대신, 아프다는 말만 튀었다. 아파? 어디 가. 어디 봐봐. 정대만은 다정하다. 하지만 서태웅은 그런 그가 미웠다. 아프다는 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손을 내쳐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해 짜증이 났다. 왜, 왜 다정하게 굴어요?

"태웅아. 서태웅."

"……이제 괜찮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미적지근해진 포카리는 이제 계단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게 꼭 제 마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태웅. 정대만은 우뚝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며 아프다고 하던 그는 거짓인듯 멀쩡해진 낯이었다. 붉어진 눈가만이 아까 있었던 일이 실제라는 걸 알려줄 뿐.

"네."

"……가자, 보건실."

네. 이제는 순순하게 뒤를 따랐다. 복도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 뿐이었다. 보건실에 도착한 서태웅은 망설임도 없이 윗옷을 벗었다. 한참 실랑이를 벌여서 그런지. 등은 확인했을 때보다 더 벌건 채였다. 병원 가 봐요. 보건 선생님은 등 언저리에 연고와 거즈를 대어주며 그렇게 말했다. 네. 언제나 그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그냥 정대만만 전전긍긍이었다.

"괜찮냐?"

서태웅은 다정한 정대만이 싫었다. 그리고 동시에 좋았다. 정대만. 석 자가 언제부터 그렇게 특별해졌는지. 서태웅은 이상하게 알 방도가 없었다. 그냥 그는 그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선배? 안녕. 여기서 뭐하세요? 글쎄. 마음 속 안의 서태웅과 정대만이 대화를 한다. 사실과 다른. 그저 서태웅의 마음 속.

고개를 끄덕인 그는 거즈가 불편할 텐데도 가방을 가볍게 들었다. 병원에 같이 가줘야 하나. 정대만은 등이 신경이 쓰였다. 아프다고 울던 낯이 낯설어서 그런가.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자니 막상 할말이 없었다. 초여름의 햇빛처럼. 고백이 자꾸만 정대만을 뒤흔들었다. 원 온 원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방 주세요."

"어?"

가방이요. 오늘의 서태웅은 말이 참 많았다. 전에는 가방을 달라며, 손을 내밀고 가만히 있었을 놈이. 그게 참 낯설었다. 이상하고. 정대만은 순순히 가방을 넘겨주었다. 자전거 앞바구니에 가방이 담겼다. 서태웅의 자전거에는 앞바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원 온 원을 하고 같이 하교를 하며 생겼다. 그건 정대만의 특권이었다.

찌릉찌릉.

자전거를 끌고 가는대도 찌릉찌릉 울리는 소리가 났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그는 잘만 움직였다. 유독 고요한 하교길에 숨이 턱, 막혔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건지. 들이키는 공기가 끈적했다. 한참 그러고 갔을까, 정대만의 집은 금방이었다. 그는 바구니 앞에 담긴 가방을 끌어 내리며 입을 열었다. 병원 꼭 가라. 정대만의 다정은 서태웅을 자꾸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 말 밖에 할말이 없어요?"

"야."

"아프다고 했는데."

검은 고양이가 저를 빤히 바라본다. 정대만은 깊은 그 눈동자에 담긴 애정을 본다. 맙소사.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가벼워야 할 이벤트는 생각 외로 커다란 이벤트인 듯했다. 금방 접힐 마음이라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 그는 그 까만 눈동자에 깊은 애정을 담고 있었다.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입을 달싹여봐도 나오는 말은 없었다. 선배. 나긋한 단어가 귓가에 들러붙었다.

"저 아파요."

그만. 그만해. 정대만은 손을 내저으며 그만 두라고 항의했다. 너무 많은 값을 입력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엉망이었다. 서태웅은 그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얼굴이 보고 싶었으니까. 그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미련한 사람처럼 굴었다. 사랑에 빠진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너, 가라."

"……."

도망치시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지친 얼굴이라서. 진이 다 빠진 얼굴이라 서태웅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접으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저 짧은 선만 그은 거니까. 농구는 선을 밟으면 안 됐지만, 마음은 밟아도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누나가 그러했고, 부모님이 그러했으니까. 아무리 둔하고 감정에 대해 어렵다고 한들, 알 건 알았다.

"병원 갈게요."

"그래."

그러니까 내일도 원 온 원 해요. 뻔뻔하게 덧붙여지는 말에 피실피실 웃음이 새었다. 싫다, 새끼야. 걸쭉한 말에 미간을 찌푸린 그는 자전거를 세우고 정대만의 앞에 가까이 와 입을 열었다. 선배. 느릿하게 고개를 올린 정대만 얼굴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야, 야. 서태웅!

"생각해보니 억울해서요."

"도대체 뭐가."

마음 접는 거요. 이건 제 마음인데. 태도가 돌변한 것도 우스운데, 말도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오늘따라 말도 많고, 문장도 긴 서태웅이 낯설었지만. 그 모습은 오직 저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하지 마세요. 뭐? 티 안 낼게요.

"……."

접으라고만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서태웅은 다시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정대만의 앞에서 사라졌다. 정대만은 점처럼 멀어지고 나서야 벌렁거리는 가슴을 쥐고 눈만 깜빡였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수 있는 거리만큼 딱 멀어진 서태웅은 제가 그의 등을 채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허공에 휘저은 거리와 같았다. 미친새끼. 당돌한 새끼.

정대만이 그러고 있을 때. 서태웅은 집에 가서. 아프다는 이유로 또 울었다. 자꾸만 선을 그었던 그가 생각이 났고, 다정한 그가 맴돌았기 때문에. 누나와 부모님은 부산을 떨었다. 그런데도 그는 등 위에 아이스팩을 얹어둔 채로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등 언저리에 열상熱傷이 피었다.

꼭 서태웅의 짝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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