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밍 피버 나이트
커미션
[열이 완전 심하게 나요]
[며칠은 꼼짝 못 할 것 같은데ㅜㅜ]
뭐... 키보드를 두드리던 B는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메시지 화면을 응시했다. 답지 않은 연락이었다. 아프니까 뭘 가져다 달라, 약속에는 못 나갈 것 같다는 말이면 또 몰라. 앞뒤 맥락 없이 전해진 문자는 황당함만을 안겨주었다. 최근에 A씨가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나? 아닐텐데... 잠시 고민하던 B는 시간을 확인했다. 귀찮기야 하겠지만 퇴근까지 기껏해야 한 시간. 차를 몰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열이 오른 얼굴을 미적지근한 시트에 부볐다. 본가였다면 머리에 물수건이라도 하나 얹혀있었을 텐데. 괜한 향수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푸념처럼 아프다는 말을 남기기는 했지만 누군가 올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본가와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니고.
아플 때 걱정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다던데... A는 멍한 머리로 어둑한 저녁놀이 비추는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절대 울릴 일 없다고 생각했던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잘못 들은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척비척 인터폰 앞에 서자 화면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B님?
한참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던 A는 채근하는 초인종 소리에 뒤늦게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한 손에 종이봉투를 든 채 문 앞에서 기다리던 B가 반쯤 기울어진 A의 상체를 다시 집 안으로 밀어넣었다. 저녁이라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해요. 이렇게 뛰쳐나오는 걸 보니 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네. 밤 늦게 타인의 집을 밟은 사람치고는 대단히 무심한 태도였다. 불 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집 안을 둘러본 B는 이내 스위치를 찾아 거실 불을 켰다. 갑작스래 밝아진 집 안에 눈을 깜박이던 A는 B의 손에 이끌려 식탁 앞에 앉혀졌다. 종이봉투 위로 친숙한 죽 브랜드의 상표가 보였다.
오늘 뭘 먹긴 했어요? 상태를 보니 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은데. A씨 입맛은 잘 모르니까 그냥 환자한테 먹일만한 걸로 달라고 부탁했어요.
저어... B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A씨가 먼저 문자를 남겼잖아요.
제가 이렇게 매번 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몸 관리 정도는 해두는게 좋아요. 열에 몽롱한 머리로 B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A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문자... 내가 B님한테 문자를 보냈던가? 아닌데... 엄마한테 보낸 것 같은데. 생각이 많아지니 자꾸만 눈이 감겼다.
몸이 아프면 사람의 온기를 찾게 된다. 그러나 치미는 열감은 온기보다 냉기를 요구해왔다. 끙끙대던 A는 식탁에 머리를 박기 직전 B에게 손을 뻗었다. 반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걷힌 소매 아래 손목을 붙잡자 소름끼칠 만큼 따뜻한 감각과 시원한 온도가 함께 전해졌다. 그 감각에 붙잡은 손목이 팔로, 팔이 어깨로, 어깨가 상체로 바뀌기는 순식간이었다.
...A씨?
전에도 생각했지마안... B님은 정말 체온이 낮은 편이신 것 같아요.
으음... 애매한 표정으로 A를 살피던 B는 한숨을 내쉬며 힘을 뺐다. 특별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애초에 환자를 몰아붙이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되었다 싶었다. 대신 B는 A의 손에 플라스틱 수저를 쥐여주었다.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을거 아니에요. 이대로 늘어져 있기만 하면 내일 수업은 어떻게 나가려고?
예에...
그럼 한 숟가락만 먹여주세요. 한번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하니 그 뒤는 쉬웠다.
한숨을 내쉬며 플라스틱 용기를 연 B가 대강 휘저은 죽을 입에 물려주었다. 입안이 온통 아릿했다. 뜨거운 죽을 식히지 않고 집어넣어서인지, 열이 올라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멍하게 한 술을 씹어삼킨 A는 이내 B의 손에서 숟가락을 넘겨받아 기계적으로 죽을 떴다.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 죽이었지만 따뜻하기는 했다.
집에 약은 있어요? 사오길 잘했네. 어떻게 혼자 사는 집에 감기약도 없어... 귓가로 문득 그런 말이 들렸던 것도 같다. 숟가락을 몇번 움직이자 납작한 플라스틱 용기는 금방 바닥을 보였다. 식탁 위 감기약을 뜯어 물과 함께 삼키고 나니 그제야 시야가 조금 트였다. 그릇이 빈 것을 눈치챘는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B가 A와 눈을 마주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A가 허둥지둥 B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좀 나아졌나? 가서 한숨 자요. 하루종일 침대에 있었을 것 같긴 하지만.
그, 저... 죄송해요.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머리가 멋대로 사과의 말을 출력했다. 어쩐지 매번 죄송하다고만 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도 죄송한게 맞긴 해서 별 방도가 없었다.
아픈 사람 상대로 이 정도 해주는게 뭐 대수라고.
아, 그래도 몸 관리 정도는 알아서 잘 해요. 다음에는 이럴 일 없을 테니까. 서늘한 손가락으로 A의 이마를 쓸어내린 B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 잘 챙기고. 전 이제 가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현관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여전히 무거움이 남아있는 머리를 이끌고 침대에 몸을 뉘인 A는 더운 머리를 다시금 시트에 문질렀다. B의 낮은 체온과 특유의 안정감 있는 목소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단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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