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균형의 균형론
커미션
B는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인간성이 부족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선을 긋고 살았을 뿐. 이 사람에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저 사람에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저기까지.
종종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B씨는 다 좋은데... 너무 정 없는 느낌? 태도가 딱딱한 건 아닌데 왠지 거리를 두는 것 같단 말이에요.
A의 경우도 그랬다. 발단은 여느 때와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밤, A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속내로부터. 평소였다면 술 한잔 걸치지 않는 B를 보며 음료수라도 시킬까요? 물었을 A는 이미 손 쓸 도리 없이 취한 상태였다.
B니임, 저는... B님이랑 좀 더 친해지고 싶어요.
저랑요? 저는 이미 A씨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으, 러니까요.
B님은 저랑 다르잖아요. 저는 대학생이고, B님은 벌써 사회인이고. 저는 사실 B님이 저랑 같은 대학생이었을 때가 있었다는 것조차 안 믿긴단 말이에요... 자꾸 B님이랑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가끔 직장 동료분이랑 통화하실 때마다 저만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속상해요... B님은 이런 생각, 해본 적 없으시겠지만... 술기운에 붉어진 눈가에서 간헐적으로 눈물 몇 방울이 흘러내린다. 두서없는 진심이 쏟아졌다.
B는 무표정한 낯으로 A를 응시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네가 뭔데? 정도. B는 A를 나름대로 귀여워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밤의 술자리에 어울려 주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B 나름의 애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가 정도 이상의 특별함을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B의 모든 인간관계는 B이 그어둔 선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했으니까.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무거웠다. 무의식적으로 냅킨을 구겨 뭉치던 B은 뒤늦게 A의 입이 다물렸음을 깨달았다.
A씨.
...
A씨. 집에 안 갈 거예요? 일어나요.
...B니임...
답답함인지 짜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엉망으로 흐무러진다.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 B는 콜택시를 불러 A를 태워 보냈다. 멀어지는 택시 뒤로 후미등의 빨간 잔영이 길게 늘어지는 모습이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B는 그날 일이 그렇게 끝날 줄로만 알았다.
술자리에서의 말실수는 취기에 묻어가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러나 필름이 끊긴 A는 자신이 토해낸 이야기를 고스란히 기억했다. 죄송해요 B님. 제가 주량 조절을 못 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낯으로 연신 사과를 늘어놓는 모습이 제법 안쓰러워 B는 손을 내저었다. 신경쓸 거 없어요. 취해서 무슨 말을 못 할까.
그래도 폐를 끼쳐 버렸는걸요...
반 뼘 조금 안 되게 큰 키가 무색하게 올려다보는 시선이 퍽 애처로웠다. B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A를 응시했다.
B가 기억하는 A는 늘 무언가를 양보하고 굽히는 입장이었다. 비단 B와의 관계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논하는 A는 언제나 자신의 배려를 전제하고 있었으니까. B니임, 교수님이 이번에도 조별과제를 내주셨는데 제가 또 독박을 썼지 뭐예요. 어떻게, 채근을 하려고 해도 다들 사정이 있다고 하시니까...
어떨 때는 아직 덜 상처 입은 어린애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사회생활이 몸에 배어버린 성인 같기도 하고. 분명 한창 자존심을 세워댈 나이일 텐데도 고작 술에 취해 늘어놓은 어리광 몇 마디를 이리 절절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A씨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굴어요? 매번 이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나?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유치한 생각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미소를 표방한 무표정이 B의 얼굴 위로 아슬아슬하게 덧씌워졌다.
실상 B는 A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적당히 귀여운 지인. 약간의 귀찮은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만한 사람. 속내를 낱낱이 털어놓을 정도는 되지 않아도 안줏거리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는 편하게 늘어놓을 수 있다 생각되는 이가 바로 A였다. 본래 인간관계는 저울과 같아서, 한쪽이 가벼운 추를 실었다면 반대쪽도 그만큼 가벼운 추를 싣는 것이 원칙이다. B의 저울에는 사람이 올라가는 일이 없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모자란 것 없는 삶을 살아온 만큼 무언가를 지독하게 염원해본 적이 없던 탓이다. 대신 B는 마음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이 사람에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저 사람에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저기까지.
B가 올려놓는 추는 늘 같았다. 적당히 의지하게 할 수는 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끊어낼 수도 있는 만큼. 대부분의 사람은 B가 먼저 쌓아둔 무게 이상을 올리지 않았다. 섣불리 마음을 주었다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A는 달랐다. B가 아무리 가벼운 추를 올려도 A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추를 쌓아 올렸다.
B는 때로 A의 그런 점을 기껍게 여겼고, 때로는 지겹게 여겼다. 두 손으로 양껏 안아도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의 무게는 B에게 있어 단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의 일부에 불과했던 탓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선에 멈춰두고자 한 것은 분명한 오만이다. 세상에는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도 있었다. 이를테면 인륜. 이를테면 연정. 그러나 B는 어쩔 수 없는 통제광이었고, 이제껏 수없는 선을 그으며 적절한 크기의 감정을 분배해온 것 역시 그러한 성향의 연장이었다. 손안에 둘 수 없는, 그리고 기어코 손안에 붙들어 둘 가치가 없는 존재라면 차라리 손 밖으로 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아. 그제야 B는 자신의 사고를 오롯이 이해한다. 어쩌면 B는... A의 기댐을 단지 귀찮게 여겼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A가 좁혀온 거리만큼 자신의 선을 하나하나 물러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무너진 균형은 한쪽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A가 천천히 망가트린 균형은 어느덧 B에게까지 닿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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