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전산크] 자각
산크레드가 뭔가 깨닫는 글
“하여튼 편하게 돌아가는 날이 없군.”
산크레드가 머리와 어깨에 잔뜩 쌓인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영웅 역시 별반 다른 꼴은 아니었다. 간만에 둘이 임무에 나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묵을만한 여관도 없는 노지에 갑자기 들이닥친 눈보라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거센 눈발이 몸 위로도 쌓이기 시작해 온몸이 얼어버릴 지경이었다. 간신히 눈보라를 피할 수 있을만한 작은 굴을 발견해 들어왔으나,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계획에 없던 야영을 하게 되었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랑 있어서 좋지?”
굴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영웅이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농담이었겠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텔레포를 써서 돌아가라고 말했는데도 ‘산크레드를 혼자 둘 수는 없잖아.’라며 기어코 함께하기를 선택한 사람의 행동 치고는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산크레드는 그런 영웅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굴 밖에 장작으로 쓸만한 죽은 나무가 없는지 둘러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쓸데없는 소리라도 해야 덜 심심하지.”
“놀러 온 것처럼 말하지도 마.”
“임무는 벌써 끝냈잖아~”
영웅은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저 입만 다물어도 보존할 수 있는 체력이 꽤 될 것이라 생각하며 산크레드는 다시 굴 밖으로 나갔다. 영웅은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말했지만, 산크레드의 입장에서는 야영 준비를 위해 할 일이 태산이었다. 돌아올 거점이 생겼으니 장작을 모아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웅은 또 어딜 가냐며 답잖게 응석을 부렸지만, 산크레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며 불 피울 준비나 해두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맛 없어.”
“안 먹을 거면 나 줘.”
“아니, 누가 안 먹는대?”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아 형편없는 식사를 하던 두 사람이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였다. 생존에 조예가 깊은 첩보원은 장작을 주우면서 식량으로 쓸 수 있을만한 작은 동물까지 사냥해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요리실력은 형편없었다. 애초에 향신료나 조미료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훌륭한 요리를 먹을 수 있을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모닥불 위 작은 냄비에서 끓고 있는 고깃국은 훌륭하고 자시고를 떠나 요리의 범주에 넣기조차 힘든 무언가였다. 영웅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작은 고깃덩어리를 입에 넣고 한참을 씹어댔다. 배는 고팠으니까. 반면 산크레드는 이런 상황엔 익숙하다는 듯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제 몫의 음식을 천천히 비워나갔다.
“산크레드는 이런 걸 자주 먹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순수한 의문이 가득 담긴 영웅의 질문에, 쓰고 비린 맛이 나는 국물까지 전부 마신 산크레드가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마치 맛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같아. 영웅은 가늘게 뜬 눈으로 산크레드를 보며 생각했다. 산크레드는 그 표정을 보고는 괜히 제 뒷목을 쓸었다.
“어쩔 수 없을 때만 먹는다니까. 나도 맛 없는걸 좋아하진 않아.”
왜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산크레드는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눈이 내리고 있는 굴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조금 약해진 것을 보아하니 동이 트는 새벽이나 아침쯤에는 눈이 그칠 것 같았다. 영웅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 산크레드의 옆얼굴을 보며 가볍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영웅님에게 끔찍한 식사를 두 번 대접하진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
“...가만 보면 산크레드도 참 내 생각 많이 한단 말이야.”
뜬금없는 영웅의 말에 산크레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영웅은 쉽게 볼 수 없는 산크레드의 놀란 얼굴을 보고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한 끼 정돈 굶어도 괜찮은데 굳이 식사까지 챙겨주고, 내일을 생각할 때도 자연스럽게 날 떠올려주잖아.”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산크레드는 괜히 영웅의 말을 부정하려 들었다. 정작 영웅은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산크레드는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반응한 제 모습이 한심해 바위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휘말리게 한다니까, 저 녀석. 괜히 영웅을 속으로 탓하며.
“뭐,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지?”
꾸역꾸역 식사를 끝낸 영웅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산크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이 그치는 건 빨라도 새벽 정도일 것 같으니까. 잠깐 눈을 붙여도 될 거야.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마물 같은 것도 없는 것 같...”
눈이 내리는 밖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상황을 읊던 산크레드의 말문이 막혔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영웅 때문이었다.
“뭐야, 갑자기?”
“추워서. 같이 붙어있으면 좀 덜 춥지 않겠어?”
영웅은 태연하게 말하며 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산크레드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뻔뻔한 태도였으나, 체온을 보존하려면 타인과 붙어있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산크레드도 딱히 그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있었는지, 영웅은 눈을 감더니 금세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신생아도 아니고, 밥 먹고 바로 자는 거냐. 산크레드는 황당하다는 듯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영웅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여 가방에서 얇은 모포를 하나 꺼냈다. 보온 성능이 썩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는 물건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산크레드는 모포를 펼쳐 영웅과 제 몸 위로 덮었다. 두 사람을 덮을 정도의 크기는 돼서 다행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산크레드도 영웅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기댔다.
작게 타오르는 모닥불 덕에 주홍빛으로 물든 공간이, 영웅의 체온이 느껴지는 이 상황과 분위기가, 조금은 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느껴진 한기에, 산크레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불씨가 꺼져 싸늘하게 식어있는 모닥불의 잔해였다. 연기도 올라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니 불이 꺼진지 꽤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그 다음으로 보인 것은 굴 끝에서부터 들어오고 있는 빛이었다. 아침이 가까워진, 늦은 새벽의 차가운 햇볕이었다. 산크레드는 눈을 찌푸리며 굴 밖의 풍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눈은 그쳐있었다. 그리고 밤새 내린 눈 덕에 사람은 물론 짐승의 발자국 하나 찍혀있지 않은, 마치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하얀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
그 눈부시게 고요한 풍경을, 산크레드는 한참이나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흰 눈밭은 어떤 아름다운 감상을 주는 경관이 아니었다. 지우기 힘든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는, 밀정에게 있어선 귀찮거나 치명적인 환경일 뿐. 머리카락도 외투도 온통 흰 것을 걸친 주제에, 산크레드는 자신이 눈과 어울리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깨끗한 눈 위에 자신의 이질적인 흔적을 남기는 존재이기 보다는 자신의 자취를 눈 아래에 파묻어 지우는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아, 눈 그쳤네...”
깨어난 산크레드의 기척을 느꼈는지 막 눈을 뜬 영웅이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듯한 그의 모습을 본 산크레드는 좀 더 자도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지만, 흰 설원을 본 영웅의 눈에는 빠르게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산크레드는 그런 영웅의 모습이 퍽 아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나갔다 와도 되지?”
“갑자기? 왜?”
영웅은 대답 대신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산크레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위로 향했다. 영웅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해가 났다고는 해도 아직 추위가 매서운데, 영웅은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눈치였다. 산크레드는 밖으로 나가는 영웅을 붙잡는 대신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밖으로 나간 영웅은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흰 눈밭을 걸을 뿐이었다. 때때로 즐거운 표정으로 제 뒤로 찍힌 발자국을 돌아보고는 했다. 영웅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이 점점 길어지고, 이윽고 그의 형체가 엄지손가락만한 크기가 되었을 때, 산크레드는 그가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문득 실감했다. 그는 새하얀 눈밭에 첫 발자국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질적인 발자국을 남기길 꺼리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당당히 설원 속의 풍경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작은 영웅은 뒤를 돌아 산크레드에게 크게 양 팔을 흔들었다. 마치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처럼. 손톱만한 얼굴에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시린 빛으로 가득한 설원 속에서, 그 미소는 주홍색의 불빛같았다. 아주 작아도 보일 수밖에 없는, 모닥불 같은 따스함. 언 몸을 녹이기에 충분한 온기.
"...바보같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 영웅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산크레드는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눈에 담기도 벅찬 설원의 풍경을 제 손에 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의 온기를 온전히 제 품에 안고 싶었다. 감히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주제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에도 결국 봄은 찾아온다. 두텁게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면 그 아래에 묻어두었던 자취가 드러날지도 모르지. 산크레드는 팔을 흔드는 영웅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돌아가면 요리를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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