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키타] 눈이 녹은 자리에
22.01.15 아츠키타 겨울합작 공개
봄고가 끝나고 새 주장과 인수인계가 결정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합이 끝난 후 짧은 휴일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체육관에 모여 연습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뽑혔던 강호교가 출전 첫 시합에서 패배했다는 이변은 잠시 동안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나, 정작 그 시합에 있던 이들에게는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으므로. 다음 경기를 대비해 연습하고, 새로운 배구를 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보다 체육관의 열기가 더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과 함께하던 3학년들이 은퇴하면서 비어버린 자리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이었다.
쿠로스 감독은 다음 주장으로 아츠무를 뽑았고, 아츠무는 1번 유니폼을 받으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1학년 때의 자신이라면 가장 실력 있고 열정적인 사람이 주장을 맡는 게 당연하다며 본인이 주장이 되는 미래를 낯설어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아츠무는 이 숫자가 적힌 유니폼이 가장 잘 어울렸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는 정반대인 사람임을 알았다.
그사이 센터시험과 대학 입시가 끝난 3학년들은 가끔 연습을 도와주거나 간식을 사 들고 체육관을 찾았다. 프로팀 제안을 받고 입단 준비로 바빠진 아란이나 다른 삼학년들의 합격 소식 등 들려오는 근황들은 얼마 전까지 함께 코트 안에 있던 이들이 코트 밖에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3학년들의 마지막 방문은 아츠무와 키타만 따로 남아 진행된 인수인계였다. 인수인계라고 해봤자 늘 곁에서 지켜봤던 것들을 공식적으로 설명받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허투루 하는 일 없는 성격답게 키타는 아츠무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이 정도면 다 설명한 것 같은데, 혹시 또 궁금한 거 없나?”
“...감독님께 차기 주장으로 저를 추천하신 이유가 뭐예요?”
배구부 운영에 대한 질문이 아닌 예상외의 물음에 키타는 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주장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쿠로스 감독의 결정이었지만 감독님은 삼학년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다. 워낙 사고 치는 이미지가 강한 이학년들이었으니,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그 자리에서 키타는 아츠무를 추천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츠무의 머릿속에는 그 키타상이, 왜 나를? 이라는 물음이 가득했고 그 후 키타를 처음 마주한 날이 오늘이었으므로. 아직도 어렵기만 한 선배에게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던 질문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잘할 거라고 생각해서. 키타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간결했다. 거짓말이나 농담은 절대 안 할 것 같은 사람. 아츠무는 항상 그런 키타의 말투와 눈빛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라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하는 말에는 어쩐지 신뢰하게 되는 힘이 있었다.
정리를 끝내고 체육관을 나서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는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미 부활동이 끝나고도 시간이 더 흐른 뒤였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이라 걸어가는 내내 주변은 조용했다. 지금까지 단둘이 대화를 나눈 적은 주로 아츠무가 키타에게 혼났을 때를 제외하면 드물었고, 게다가 대부분의 대화 주제는 배구와 관련된 것이었다. 부활동이라는 공통 주제가 사라진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거기다 상대는 표정 변화나 생각을 읽기 어려운 키타 신스케였다.
“키타상, 교토에 있는 대학으로 가신다면서요?”
적막감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츠무였다. 부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키타는 모두가 들어본 적 있는 교토의 명문대 농학부에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다. 강호교의 주전이었던 만큼 스포츠 추천 전형으로 체육교육학과에 합격한 아카기는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음에도 전혀 상관없는 학부에 일반 입시로, 그것도 명문대에 장학금을 받고 합격한 키타를 언급하며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더 입결이 높은 학과나 대학도 도전해볼 만한 성적이었으면서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곳들만 넣겠다며, 상담할 때 교무실을 발칵 뒤집었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 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보기 힘들어지겠네요.”
“응. 통학하기엔 힘들 것 같아서, 학교 앞에서 자취할 것 같아.”
그래도 방학에는 본가로 돌아올 거니까. 다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게 되었으니 종종 모일 것 같고. 아란이 입단 제의를 받은 프로팀의 연고지는 같은 관서 내였고 아카기와 오미미가 진학한 대학은 오사카 쪽에 있었다. 아마가사키시는 효고현의 끝, 오사카와 맞닿은 곳에 있었으니 사실상 본가에서 통학도 가능한 위치였다. 교토로 가게 된 키타는 집에서 통학하기에는 교통편이 애매한 위치였을 뿐 교토에서 오사카와 효고를 오가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만날 수 있는 거리였다.
“배구는 이제 취미로도 안 하시는 거예요?”
“앞으로는 코트 밖에서 지켜보는 일만 있겠지.”
아쉽기보다는 홀가분한, 오랫동안 해온 일을 잘 마무리한 듯한 목소리. 배구를 그만두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츠무에게 배구를 떠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낯설었다. 저렇게 좋아하던 것을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게, 어제까지 코트 안에 있던 사람이 오늘부터는 코트 밖의 사람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정류장에 도착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춥고 흐린 날씨였다. 곧 무언가를 쏟아낼 것만 같던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네, 담담한 목소리로 반응하는 키타를 무심코 쳐다본 아츠무는 키타의 눈꼬리가 살짝 접혀있는 것을 보았다.
“아츠무.”
내는 코트 밖에 있을 때가 더 많았으니까, 코트 안에서도 항상 너네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잘 보인다. 아츠무 니가 배구에 얼마나 진심인지.
주장이 된 후에는 말을 좀 더 예쁘게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지만... 지금 이학년들이 니 말에 주눅들 아들도 아니고 잘하겠지. 그래도 후배들 앞에서 오사무랑은 적당히 싸우고, 알았제?
“......”
제멋대로 날뛸 때도 많았지만, 네가 보여주는 배구는 늘 재밌었다. 내년에도 그 후에도 항상 응원할게. 프로 선수가 되어서 오랫동안 배구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몸 관리도 잘하고.
“...네.”
저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키타는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아츠무의 손에 쥐여주었다. 감기 걸릴라, 얼떨결에 핫팩을 받아든 아츠무는 손안에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핫팩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키타의 얼굴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자 대까지 자랑할 수 있는 후배가 되겠다고 했제? 기대할게.”
어느새 사방에 흩날리듯 떨어지는 눈송이 사이로, 추위에 뺨과 코끝을 붉게 물들인 키타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와 상냥한 목소리. 키타가 탄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 장면은 어쩐지 잔상처럼 남아 잊을 수가 없었다.
<눈이 녹은 자리에>
서리가 낀 유리창 위로 자동차의 와이퍼가 왕복한다. 뿌옇게 흐려진 창문 너머로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점점 한산해져 갔다. 어디론가 운전 중인 아츠무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아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에 짜증이 쌓여갈 즈음,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할 때 확인한 휴대폰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를 포함한 부재중 전화와 터져나갈 것 같은 라인 알림창이 보였다.
[너 또 사고 쳤냐ㅋㅋㅋㅋ]
[이거 진짜임? (링크)]
[너도 참 조용한 날이 없다~]
대부분 답할 필요 없는 연락들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온 연락 중 일부는 냄새를 맡고 몰려든 기자가 분명했다. 조만간 전화번호를 바꾸고 연락처도 정리하겠다고 다짐하며 화면을 내리던 아츠무의 손가락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래. 어두우니까 운전 조심해서 오고.]
키타 신스케. 상단에 뜬 이름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아츠무는 키타의 연락에만 답장을 남긴 뒤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 운전대를 잡은 아츠무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여유로워졌다.
“들어 와.”
피신하듯 향한 곳은 키타의 집이었다. 꽤 늦은 시간, 갑작스러운 연락과 함께 방문한 아츠무를 키타는 익숙하다는 듯 맞이했다. 온통 논밭인 주변과 비교해 눈에 띄는 화려한 외제차는 요란한 손님의 방문을 보여주는 듯했다. 키타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마당은 소복하게 쌓인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가는 길목이 빗자루로 쓸어 정돈되어 있었고, 길 앞도 얼지 않게 잘 치워둔 상태라 들어오기 수월했다. 그러나 찾아올 손님이 없었어도 지금 풍경 그대로였을 것이다. 일상에 성실함이 베어 있는 사람이었으니.
전통가옥인 키타의 집은 혼자 사는 집치고는 큰 집으로 늘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선 아츠무는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네.. 곧이어 아츠무의 앞에 간단한 밥상이 차려졌다. 키타는 사케 한 병을 함께 꺼내왔다.
“술은 안마실 거제?”
“일단... 시즌 중이니까요.”
원래도 관리를 위해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아츠무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두 가지 상황이 있었다. 하나는 시합이 없더라도 시즌 중일 때, 다른 하나는 키타 신스케와 둘 뿐인 상황일 때. 키타는 술에 취한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로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아츠무는 아니었다. 술기운에 주절주절 본심을 말해버린 그 날 이후로 아츠무는 키타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키타도 분명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키타는 맞은 편에 앉아 자기 잔에만 술을 따랐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키타는 아츠무의 방문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늘 이실직고하게 되는 건 아츠무였으므로, 키타가 물어보기 전에 입을 여는 것은 아츠무였다.
“이번에 뜬 뉴스... 사실 아니에요.”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미야 아츠무는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고교넘버원 세터로 이름을 알리고 졸업하자마자 화려한 프로 데뷔. 신인상도 받고 한참 이름을 날리는 중인 제 후배는 데뷔한 후에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며 인기도 계속 오르고 있었다. 그만큼 학생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쉽게 평가했다. 원래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던 아츠무도 팬들의 반응에는 조심스러워졌을 만큼 과거보다는 행동이 신중해진 듯했으나, 여전히 잦은 말실수와 가벼워 보이는 인상 탓에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원래도 구설수에 쉽게 오르는 편이니 크고 작은 찌라시와 스캔들이 따라붙자 진실이 아닌 사실마저도 진짜처럼 받아들여지는 일이 빈번했다.
아츠무는 예민한 편이었다. 경기 외의 일이 경기장 안까지 밀려 들어와 잡음을 내는 것을 싫어했다. 슬럼프가 찾아오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주로 제 형제를 찾았으나, 오사무의 가게가 바쁠 때나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으면 키타를 찾았다. 특히 오늘처럼 양다리를 걸쳤느니, 아이돌과의 열애설 같은 말도 안 되는 찌라시가 터진 날은 예외였다. 분명 오사무를 찾아갔다면 놀림 받거나 흐린 눈으로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라는 말을 듣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론 키타 역시 듣기 좋은 말을 골라 해주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뼈를 때리는 듯한 정론 펀치를 맞는 경우가 많았지만, 적어도 놀리거나 아츠무의 탓일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코트 안에서의 키타는 엄격하고 무서운 선배였으나 졸업한 후에는 좀 더 여유롭고 부드러워진 면이 있었고, 아츠무는 키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담백한 표정으로 끝까지 들어주는 모습이, 가식적인 위로가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말들이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아츠무는 답답한 일이 있으면 키타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츠무는 키타의 집을 나섰다. 훈련이 없는 쉬는 날이기도 했고 미리 외박 신청은 해두었지만 저녁에는 다시 구단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꺼두었던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자 역시나 한가득 쌓인 연락들이 보였다. 아예 읽지도 않고 지워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아츠무가 부재중 연락을 확인했을 때 가장 많이 보이는 이름은 오사무와 구단 매니저였다. 어제 구단 측에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만 밝히고 바로 나왔더니 반박 기사를 냈다는 등 일 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남겨져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다시 하자는 말에 답장한 뒤 오사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츠무. 니 어딨는데.”
“지금 숙소 가고 있다.”
“니 설마... 또 키타상 집 간 거가?”
“....뭐.”
“니도 참 징하다고.”
전화 너머로 오사무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고백했다 차여놓고 계속 찾아오는 녀석을 상대하는 키타상 생각은 안 하나?
오랜만에 전원이 참석한 동창회였다. 프로 배구팀에 뛰고 있는 아란, 아츠무, 스나의 쉬는 날이 겹친 덕분이었다. 연말을 맞은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어딘가 들떠 있는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겹쳐 울리고, 반짝거리는 조명 장식이 거리를 채웠다. 오사카 시내에 있는 이자카야는 만석이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넓은 방을 예약했음에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프로 선수와 운동부 출신의 건장한 성인 남성들이었기에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최근 있었던 경기에서의 활약이 나오고 서로의 근황이 오갔다. 대학교 삼학년이 끝나가는 이들은 슬슬 취업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시기였고 조리전문대학교로 진학했던 오사무 역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방학 때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오사무는 졸업 후에 일식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나중에 가게를 차릴 돈을 모을 거라고 말했다. 긴도 아는 형이 개업한 헬스장 일을 돕게 될 것 같다고 근황을 밝혔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오미미와, 아카기는 이번 학기에 이나리자키고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던 이야기를 풀었다. 감독님 이야기,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도 별명을 말하면 기억나는 선생님들의 근황, 조금은 달라진 학교 풍경이라던가. 그리운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잔이 비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마 갓 성인이 되었을 때 이후로 이렇게 잔뜩 풀어진 술자리는 오랜만이었다. 취기가 오르고, 하나둘 뻗는 사람들이 나오고, 먼저 돌아가는 사람이 나오면서 모임은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아츠무는 나른하게 감기는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더니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바람을 쐬러 나온 키타가 먼저 와있었다. 가게 뒤편이라 소란스러움이 덜한, 어두운 거리를 가로등 하나가 밝히고 있었다.
“...아.”
키타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에 문 담배에 능숙하게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져 빤히 쳐다보고 있자 아츠무를 발견한 키타는 방금 불을 붙인 담배를 빠르게 껐다.
“...담배 피우시는 줄 몰랐어요.”
“운동하는 아들이 많으니까 니네 만날 땐 안 피는데.. 취했는갑다.”
미안타, 내도 모르게 피고 있었네. 키타는 멋쩍게 웃었다. 성인이 담배 피우는 게 뭔 대수라고,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바른 생활의 표본인 키타 신스케의 그런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건강에 나쁜 것은 절대 입에 안될 것 같은 이미지였으니까. 성인이 되고 다 함께 모인 첫 술자리에서 키타의 주량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충격과 같은, 몰랐던 면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상이었다.
아츠무의 머릿속에는 늘 고등학생 시절의 키타가 있었다. 프로팀으로 뛰고 있는 지금도 ‘주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키타였다. 정작 그와 함께 경기를 뛰었던 기간은 고작 고등학교 시절 1년에 불과했지만, 어쩐지 아츠무는 삼학년이 되어 자신이 주장이 되었을 때도, 프로팀에 입단해 다른 주장들을 만났을 때도 ‘키타 신스케’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새로운 키타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이유 모를 조급함을 느꼈다. 원래도 속을 모르겠는 사람이었지만, 따라잡기 힘들 만큼 더 멀리 가버릴 것만 같아서.
고등학교 시절 인수인계를 받았던 그 날, 흩날리는 눈 사이로 처음 보는 키타의 표정을 본 뒤로 아츠무는 키타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활동이라는 접점이 없어져 따로 연락하지 않으면 만날 일 없는 사람에게. 졸업식이 끝나고 벚꽃이 피는 신학기가 되어서야 아츠무는 상담을 핑계로 키타와의 연락을 이어갔다. 눈이 녹은 자리에 남은 것은 호기심이었을까, 뒤늦은 자각이었을까.
“키타상은 효고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죠?”
“응. 졸업하면 바로.”
키타는 농사를 짓기로 했다. 농학부에 진학했을 때도 특별히 진로를 정한 상태는 아니었고, 보통 연구원 쪽을 지망하는 동기들과 다르게 방학 때마다 지역 일손을 돕던 봉사 활동에서 적성을 찾았다. 결심이 확실해지기까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오늘 처음 키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조금 놀랐지만 곧 키타와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납득했다. 반복과 정성이 계속되는 일이니까.
“가족들이 있는 본가로 다시 들어가시는 거예요?”
“본가에 살던 가족들은 내년에 이사 가기로 해서, 혼자 지내지 싶은데.”
아츠무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키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인터하이를 앞둔 여름 합숙 전, 주장이면서 낙제 위기에 처한 아츠무를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같은 동급생 배구부원 중에서는 없었기에 이 소식을 접한 키타에게 단기간 과외를 받았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집이니까, 종종 놀러 와도 된다.”
키타의 말에 아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찬바람을 맞았는데도 아직 취기가 다 가라앉지 않아서, 흘러가는 말들이 다시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들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네.
키타의 목소리에 기억 속의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아츠무가 고개를 돌려 키타를 바라보자, 키타는 그때처럼 떨어지는 눈을 보며 웃었다. 그날과 같은 눈 내리는 풍경. 고등학생 때보다 조금 짧아진 머리카락이 보이고, 살짝 붉어진 뺨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보인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잔상처럼 남아있던 장면이 지금 보고 있는 장면과 겹쳐져 선명해진다.
그래, 저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환하게 웃는 얼굴. 예전보다는 잘 웃게 된 키타였지만 여전히 표정 변화가 드문 편이라 옅은 미소 정도가 다였는데,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다시 열기가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몽롱하게 들뜬 기분에 아츠무는 입을 열었다.
“키타상, 좋아해요.”
분위기에 취해 던진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방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곱씹기도 전에 급속도로 굳어버린 상대의 표정이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다. 차라리 계속 취해 있었다면, 꿈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갑자기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느낌과 함께 차가운 밤공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안.”
돌아오는 답변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난...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
필름이 끊긴 것처럼 새하얗게 날아간 기억 속에서 단 하나 떠오르는 것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키타의 표정과 약지에 선명하게 남은 반지 자국이었다.
그 뒤로의 기억은 정확하게 나지 않았다. 못 들은 걸로 해달라는 형편없는 변명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안으로 돌아오니 계산을 끝내고 정리 중인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헤어졌던 것 같다. 눈을 뜨니 집이었다. 그 후 아츠무는 흑역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키타와의 만남을 피했다. 거의 1년 동안 키타가 오는 모임에는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고, 어쩌다 오사무와 스나, 긴과 넷이서 만났을 때 키타의 이름이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본가에 와있을 때도 약속을 피하는 아츠무를 본 오사무가 이상함을 느껴 캐물었을 때, 결국 아츠무는 오사무한테만 키타에게 고백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던 오사무의 표정이 생생했다. 그렇게 갑자기 고백했다고?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오사무가 키타를 만났던 자리에서 키타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아츠무는 조금 안심했지만, 키타와 다시 대화를 나눌 자신은 없었다. 만나면 분명 고백했을 때의 일을 떠올려야 할 테니까. 뭐든 확실한 키타의 성격이라면 분명 여지를 주지 않는 게 상대를 위한 일이라며 앞으로 만나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덮어두고 미루던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슬럼프가 찾아온 아츠무에게 헛소문으로 가득한 스캔들까지 터졌다. 하필 찍어둔 광고들이 풀리면서 세간에는 천재라고 띄워주니 노력을 안 하는 게 아니냐는 말부터, 배구에나 집중하라는 말, 이때다 싶어 헐뜯는 악플들이 가득했다. 프로 선수인 만큼 실적의 부진에 대한 질책은 감당할 수 있었으나 제멋대로 자신을 판단하는 말들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적어도 배구가 1순위가 아니었던 날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누구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었지만 본가에 가기엔 괜히 부모님을 걱정시킬 것 같고 오사무는 식당 일로 바빠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연락처를 쭉 내리다가 발견한 이름은 키타 신스케였다. 아츠무는 홀린 듯 키타의 집을 찾아갔다.
“...아츠무?”
차였던 날 후로 처음 만나는 키타였다. 표정에서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키타도 적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언제든 놀러 오라고 하셨잖아요.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키타는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건 아니지만. 눈도 많이 오고 추운 날씨에 사람을 계속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들어와.”
거의 일 년을 피해 다녔으면서 이렇게 불쑥 찾아온 아츠무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키타는 아츠무의 표정을 보고 말을 아꼈다. 최근 경기 실적이나 여론이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기도 했고. 키타가 준 찻잔을 건네받은 아츠무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입술이 들썩이며 눈을 굴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때 갑자기 고백해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놀라긴 했어도.”
그리고 못 들은 걸로 해달라며? 키타의 말에 아츠무는 그날에 대한 변명을 시작했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고등학생 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불편하실까 봐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분위기를 타서 실수한 것 같다며.
“선후배로는 계속... 만나 주실 거죠?”
“...당연하지.”
아츠무는 표정을 숨길 줄 모른다.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티가 이렇게 나는데. 키타는 늘 이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처했고 그게 상대에게도 예의라고 생각했으나, 유독 제 후배 앞에서는 그 단호함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츠무는 아끼는 후배였고, 적어도 고민이 있을 때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자리에 남아 있고 싶었다. 그때의 고백도 분명 분위기를 타서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정리될 마음일 거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마음도 정리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건, 사실 저라는 걸 모르고.
키타의 첫 연애 상대는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 받은 고백은 늘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었고, 막연하게 연애를 하게 된다면 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상대는 저와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늘 웃는 얼굴에 친화력이 좋고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가벼워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꽤 성실한 면이 좋았고, 학과는 달라도 동갑이라 빠르게 친해졌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학기가 끝날 즈음 받은 고백에 키타는 좋다고 답했다. 그러나 연애를 한다고 지금까지의 일상이 전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 시절의 키타는 생각했다.
무난하게 이어진 연애였다. 크게 싸울 일 없이, 헤어질 때조차 큰 다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삼 년간의 연애가 끝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저 겨울에 내렸던 눈이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였다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키타는 시간이 흐르면 정리될 마음이라고 믿었다. 그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미 상대가 그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이별 후에 깨달았다. 가장 가까웠던 이가 가장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 빈자리가 만들어낸 작은 균열이 일상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한평생을 살아오며 익숙했던 제 모습이 제가 아니게 되는 그 감각을. 키타 신스케는 다시 알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모인 그 동창회의 밤, 술기운에 긴장이 느슨해져 불쑥 그 사람의 생각이 났을 때. 마음을 가라앉히려 서늘한 밤공기를 마셨다.
눈이네
그 겨울에 처음 보는 눈이었다. 흩날리는 눈은 언제나 아름다워서 기분이 좋아지므로. 키타는 간만에 웃었고, 그 와중에 언젠가 들은 스네그로치카 이야기를 떠올렸다. 전 연인을 만난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러시아 설화, 서리와 봄의 딸로 태어난 눈의 요정 스네그로치카가 사랑을 알게 된 순간 몸이 녹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신스케, 스네그로치카는 자신의 결말을 미리 알았어도 사랑을 선택했을까? 어느 날의 다정했던 목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그때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이라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키타상, 좋아해요.
불쑥 치고 들어오는 아츠무의 말에 키타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후배의 얼굴에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크기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미안.
그 감정의 열기를 삼키면 나는 분명 녹아 없어질 것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뭐를.”
“시치미 떼지 말고, 확실히 해라.”
후배로 계속 만나 달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여태껏 마음 정리 하나 못하고 있다 아이가. 결국 입을 꾹 다물어버린 아츠무의 표정을 보면서 오사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업시간이 끝난 가게에는 오사무와 아츠무 둘뿐이었다.
“....지금 딱히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문제 될 것도 없지 않나. 투덜대는 아츠무의 눈동자가 도르륵 옆으로 구른다. 오사무는 한 마디 더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평소라면 제 형제의 연애사 따위 알고 싶지도 않고 간섭할 생각도 없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상대는 키타 신스케였고 오사무 역시 관련이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사무에게도 키타는 좋은 선배였고 현재는 가게에 쌀을 납품해 주는 동업자였다. 오사무가 자신의 가게를 오픈했을 때 키타는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었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사무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키타를 무서워했으나 지금은 상담할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주에 한 번은 보니 동창 중에서도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도 키타는 오사무가 키타와 아츠무가 유지하고 있는 미묘한 관계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불편한 기색 없이 오사무를 대했다. 그 말인즉슨, 여러 해 동안 이어져 온 이 답답한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또 모르제.”
키타상 인기 많다. 동네 어르신들한테 선 자리도 억수로 많이 들어온다. 니가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구는 동안 키타상한테 중요한 사람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 계속 그런 마음으로 곁을 맴돌면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아니면, 이미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니가 모르는 걸 수도 있고.
쉬는 날 아침부터 아츠무는 키타의 동네를 찾았다. 키타가 좋아하는 오사카에만 있는 브랜드의 버블티도 사들고 가는 길이었다. 키타에게는 주변에 일이 있어 지나가는 김에 들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 여러 핑계 중 하나에 불과했다. 얼마 전 오사무의 가게에서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탓에 키타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키타의 집 근처에 도착한 아츠무는 누군가 키타와 함께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일 때문에 찾아온 사람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농한기의 키타를 일 때문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고 옷차림과 표정도 편해 보였다. 오래 알던 사이처럼 자연스러운 대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키타의 표정. 집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고 아츠무는 본능적으로 숨었다.
아니면, 이미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니가 모르는 걸 수도 있고.
하필 오사무가 했던 말이 떠올라 주르륵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키타의 손가락에 남아있던 반지 자국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처럼. 시끄러운 연애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헤어지는 순간까지 티가 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키타에게 차인 후로 거의 일 년을 피해 다녔던 아츠무는 가장 늦게 그 소식을 접했고, 갑작스러운 고백 타이밍도 부끄러운 흑역사로 남았는데 그 타이밍이 키타가 이별한 직후였음을 알게 된 후에는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요, 어느 날 최대한 사심을 덜어내고 건넨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웃던 키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키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이 키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거듭 상기시켰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오랜 시간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다시금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여서 뭐 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키타의 목소리에 아츠무는 움찔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덩치도 크면서 벽 옆에 몸을 잔뜩 구기고 쭈그려 앉은 아츠무를 발견한 키타의 눈이 커졌다.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연락을 하지.”
잠깐 손님 왔다 가서. 저 앞까지 데려다주고 왔다. 키타의 말이 고개를 든 아츠무의 표정을 발견하고 끊겼다. 굳어 있는 아츠무의 얼굴 위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스쳤다.
“키타상,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고.”
“아까 그 사람이라던가.”
키타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가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아츠무의 평정심을 뒤집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갸는 옛날에 사귀었던 사람인데.”
“......”
키타의 전 연인. 첫 연애 상대이자 마지막 연애로 선언했던 그 사람. 아츠무는 키타의 옆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을 떠올렸다. 목이 메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하려는 말이 그와는 다른,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고집을 피우는 어린애 같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츠무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말들을 참을 수 없었다.
키타상,
저... 더는 못하겠어요.
키타상이 절 후배로만 생각하는 것도 알고, 영영 못 보게 되는 건 더 싫어서. 저 혼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냥 곁에 있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아츠무.”
“제가 계속 키타상 좋아하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이번에는 키타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씁쓸한 표정으로 아츠무는 웃었다. 웃는데 우는 것 같기도 한, 살짝 붉어진 눈으로.
전 연인도 집에 초대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시는 분인데, 모두에게 똑같이 다정하고 사심 없이 공평한 사람인데, 저 혼자 착각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찾아오는 것도 연락하는 것도 늘 일방적으로 제가 벌인 일이었으므로.
“...그동안 죄송했어요. 이제 억지로 받아주실 필요 없어요.”
뒤돌아서서 멀어져 가는 아츠무를 키타는 잡지 않았다. 눈에 띄게 화려한 아츠무의 차가 길목을 벗어나 저 멀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키타는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키타 신스케는 줄곧 설원 같은 사람이었다. 감히 닿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사람.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순백으로만 이루어진 공간 위에는 어떤 것도 눈에 띄기 마련이라, 그의 앞에서는 거짓을 고할 수가 없었다. 깊고 아득한 설원 위에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은 금방 사라질 발자국 하나에 불과할까. 다시 그 위에 눈이 내리면 사라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저를 봐달라고, 신경 써주면 좋겠다고, 그게 후배에게 보여주는 다정함이라도 괜찮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이기적인 마음으로 붙잡아둔 관계였다.
분명 처음에는 키타 신스케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던 키타의 다정함을 알게 된, 감기에 걸렸던 날이라던가. 저 사람도 웃을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된, 봄고 시합이 끝난 후라던가. 인수인계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보여주던 그 미소까지. 몰랐던 키타의 새로운 모습들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시작은 그런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이 호감으로 바뀌었던 순간은 아마도, 키타가 졸업하고 다른 배구부원 후배로부터 뒤늦게 봄고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때.
아츠무 같은 녀석에 대해 이유 없이 처음부터 우수하다고 여기는 녀석이 가끔 있어. 하지만 내가 매일같이 1에서 10을 하는 것을 아츠무 같은 녀석들은 1에서 20을 하고 있어. 혹은 더욱 효과적인 10, 밀도 높은 10. 그리고 가끔은 1에서 10이 아니라 A에서 Z를 해보면 어떨까?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녀석들이야.
그러다 실패를 해도, 가끔 남들이 미워하고 자신을 멀리해도, 우리라면 소중히 할 무언가를 소홀히 하더라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녀석들이야.
녀석들을 처음부터 우수하다고 여기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
그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만큼 등 뒤에 걸린 번호가 무겁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처음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미움받는 것은 익숙했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쓴 적 없었는데. 항상 누군가 보고 있다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좋아서. 당신의 시선 끝에 비쳤던 내 모습이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악의적인 평가들에 지칠 때면 당신이 보고 싶어 달려가게 된 것은.
키타가 오사무의 가게에 들른 것은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어제 아침 쌀을 납품하러 왔던 키타에게 오사무는 식사를 권유했었고, 오랜만에 손님으로 오사무의 가게를 찾은 날이었다. 영업시간이 끝나가는 시간대의 가게는 한적한 편이라 키타를 제외한 손님이 모두 돌아갔을 때 오사무는 다른 직원들을 먼저 보냈다.
“밥 먹으러 오신 건 오랜만이네요.”
“요즘... 일이 좀 많았다.”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키타였지만 오사무는 그의 표정에서 평소와 다른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아츠무가 있을 거라는 확신도. 얼마 전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왔던 제 형제의 모습이 딱 저런 모습이었기에.
“얼마 전에 또 찾아간 것 같던데, 츠무 녀석이 늘 신세 지네요.”
“.....”
“이번에는 또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담아두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걔가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고 마음대로 내뱉는 게 하루 이틀인가. 오사무는 웃으면서 슬쩍 키타의 눈치를 살폈다. 아츠무한테 들었나 보구나, 키타는 그런 오사무의 반응을 보며 직감한 듯 답했고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사무는 표정에서 바로 드러나는 아츠무에 비하면 표정을 읽기 어려운 편이었고,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는 넉살 좋은 사장님으로 제법 표정 관리에 능숙해졌지만 어쨌든 같은 DNA였기에. 함께 알고 지낸 세월도 제법 길어지면서 키타는 이 형제들의 표정에 드러나는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아츠무는 잘 지내?”
“.....”
“내가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계속 신경 쓰여서.”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오사무를 보며 키타는 덧붙였다. 제집 드나들 듯이 찾아왔던 아츠무의 발길이 끊어진 지 벌써 몇 주가 흘렀다. 아직 시즌 중이니 경기와 훈련으로 바빠진 것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찾아왔던 것을 알고 있었다. 키타는 몇 년전 아츠무가 첫 고백을 거절당하고 거의 일 년을 피해 다녔던 시절을 떠올렸다. 가까운 주변인들이 대부분 아츠무의 지인이기도 한 탓에 만나지 않는다고 들려오는 소식까지 모를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경기력이나 부상 관련 소식 등 걱정할 만한 내용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 몇 주간 좀처럼 아츠무의 소식을 찾아볼 자신이 없었다. 늘 찾아보던 뉴스나 경기 영상도, 자주 갔던 경기 직관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츠무를 봤던 날 보았던 아츠무의 울 것 같은 표정이 계속 떠올라서.
“두 사람의 일에 제가 뭐라고 말을 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요, 츠무 녀석 키타상 진짜 오래 좋아했어요. 가벼운 마음은 아니에요.”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자업자득인 것도 있긴한데.. 키타상은 키타상 나름대로 배려했던 거라도,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어차피 터질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
금방 정리될 마음이라고 치부했었다. 다시 타인에 의해 일상이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멋대로 집에 쳐들어왔던 그날부터, 미야 아츠무는 제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어느 날은 지나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 또 어느 날은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어떤 날은 일손을 거들겠다는 이유로. 발걸음 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언제부터 아츠무가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그 애는 항상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다 숨기지 못한 감정을 꾸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 말과 태도 뒤에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표정으로. 거기서 나오는 호감이 아츠무가 주장하는 단순한 선후배 사이에서 말할 수 있는 호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키타 역시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런 애정을 받고 있음을 느꼈던 날들이 있었으므로.
답지 않게 그런 거짓말에 어울리게 된 이유가 뭘까. 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어서,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쉬운 길을 택했던 걸까.
“...이번에는 제대로 마주해야겠지.”
키타 신스케의 선택지에 도망은 없었다.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면 손안에서 금방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잡힐 것 같아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사람. 제게 키타 신스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뛰쳐나온 것도 분명 저였는데, 키타의 연락을 받자마자 모양 빠지게 달려온 꼴이었다.
코타츠 앞에 마주 앉은 키타의 표정은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그에 비해 아츠무는 키타의 집에 도착한 후 계속되는 정적 속에서 이미 다 마셔버린 찻잔만 매만지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키타였다.
“저번에 전 연인이 다녀갔던 건, 청첩장 주러 온 거야.”
헤어진 후 처음 연락이 닿은 거고. 나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너한테는 무심했던 것 같다, 미안.
“키타상은, 괜찮아요?”
뭐가? 청첩장이요. 그래도, 전 연인이잖아요. 아츠무의 물음에 키타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생각보다는 아무렇지 않더라.
“좋은 녀석이었지.”
“그런데, 마음은 정리했어.”
헤어진 후 꽤 오래 앓았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조용하게. 그때는 그렇게 그리워했던 사람을 오랜만에 마주하고도 태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을 정도로. 다시 일상을 헤집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겁을 먹고 피해 다녔는데, 그전의 연애에 대한 마음은 생각보다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한때는 연인이었던 이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보면서 생각에 잠길 시간보다, 그날 그렇게 돌아간 아츠무를 걱정하기 바빴다.
계속, 아츠무를 떠올리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자 눈이 내렸다. 눈이 자주 내리는 효고현의 겨울, 그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많은 눈이었다.
“연인이 되면, 처음 생각한 것과 다를 수도 있어”
눈이 내릴 때는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다음 날 눈이 녹고 난 자리는 싫어해. 온갖 불순물이 섞이고, 질척하게 녹아 더러워져서, 처음의 모습은 사라지지.
마치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은 감정들도, 이별 후 빈자리를 느끼는 순간들도.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오잖아요.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요.”
아츠무는 키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눈이 녹으면, 그 자리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그 새로운 시작에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저이기를 바랐다.
“계속, 곁에 있게 해주세요.”
좋아해요, 약간의 물기가 섞인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결국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다. 저 올곧은 눈빛을 마주하면 솔직하게 말하게 되는 것은 불가항력이었기에. 단 한 번도 제 것이 되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을 가져달라고 들이밀었다.
서늘한 새벽의 공기에 눈이 떠졌다. 차갑게 식은 방과 다르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향하면, 그곳에는 겹쳐잡은 손이 보였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단단하게 붙잡힌 제 손을 빼는 것을 포기하고 키타는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 아츠무와 늦은 밤까지 대화를 이어나갔고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아츠무가 방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키타는 옆에서 잠든 아츠무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누군가 곁에 있다는 온기를 느낀 밤이었다.
계속, 곁에 있게 해주세요.
이로써 세 번째 고백이었다.
좋아해요, 어젯밤의 고백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키타는 아츠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찌푸린 미간 사이를 손가락 끝으로 쓸면, 아츠무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졌다.
“...해볼까, 연애.”
스네그로치카는 자신의 결말을 알았어도 사랑을 택했을까. 사랑을 선택하고 겨울의 숲을 빠져나와 녹아버렸던 눈의 요정, 스네그로치카. 감당할 수 없는 열기를 머금고 제 모습을 잃게 되면서도, 그럼에도 숲을 나와 처음 마주한 태양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따뜻했을까.
결국은 녹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늘 곁에서 보여주던 애정을, 온기를, 웃는 얼굴이 계속 보고 싶어서.
그런 너에게 계속 닿아 있고 싶어서.
이른 아침,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같이 좀 걸을까, 평소처럼 돌아갈 준비를 마친 아츠무에게 키타가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들판 위로 뽀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숨을 내쉬면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츠무, 우리 사귀자.”
웃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아츠무의 말이 끊겼다. 키타를 쳐다보는 아츠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응. 믿을 수 없다는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곧 손으로 입을 가린다. 아츠무는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키타는 그런 아츠무의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덩달아 부끄러워지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니 지금 귀까지 빨갛다.”
“...추워서 그래요.”
그리고, 키타상도 마찬가지거든요. 입술을 삐죽이며 변명하는 아츠무를 보고 키타는 후후 웃었다.
“그래, 춥네.”
“...이러면 따뜻하니까.”
계속 잡고 있어요. 은근슬쩍 손을 내밀어 잡는다. 능숙하게 치고 들어오는 아츠무를 보며 키타는 웃었다. 하는 짓이 귀여워 그 꼼수에 어울려주기로 한다. 마주 잡은 손과 나란히 옆을 걷는 사람으로 전해져오는 온기가 나쁘지 않아, 그렇게 한참을 걸으면서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지독하게 길고 외로웠던 겨울의 끝이었다.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계절에 지금처럼 함께 나란히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눈이 녹은 자리에 싹트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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