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 上
월드 트리거. 토리코나
* 사망 소재
코나미 키리에는 그해 대학생이 되었다.
보더에 관한 많은 것을 잊은 뒤였다.
수도권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그가 고향인 미카도시로 돌아왔을 때는 미카도시를 떠날 적 짧게 잘랐던 머리카락이 다시 길어져 머리끈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대학 입시를 1지망 대학 합격이란 경사스러운 소식과 함께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경했던 코나미는 방학 중에도 줄곧 학교 기숙사 또는 원룸 자취방에 머무르며 대학가 인근을 떠나지 않았고, 삼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겨우 고향에 다시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쯤 되면 사연을 궁금해할 수도 있었다. 그는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온 것일까? 아무리 학교와 본가의 거리가 제법 된다 한들 입학식 전에 떠나온 고향을 졸업 학년이 되어서야 찾는다고 하면 아무래도 이유가 있지 않나 추측하는 이들도 제법 생겨나곤 했다. 하지만 코나미에겐 딱히 그런 사연이 없었음이다. 고향과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만 매해 여름과 겨울마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예를 들어 해외 연수라던가, 친구들과의 장기 여행이라던가 하는 일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타이밍 좋게. 그리고 ‘뭐 하러 여기까지 돌아와. 우리가 갈게.’하고 찾아와 주는 고향 친구들도 있었다. 따라서 코나미는 그간 고향을 가지 ‘못한’ 게 아니라 가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물론 암시의 효과도 있었다. 고향인 미카도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언제나 더 마음이 끌렸다는 사실에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다. 코나미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극도로 싫어해서, 사소한 거짓말 하나로 입학 후 제법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사이에 골이 깊이 파일 만큼 다툰 뒤 멀어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어릴 땐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거짓말을 좋아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 정도로 치가 떨릴 만큼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잊어버렸기 때문에, 코나미는 정말로 이유를 알지 못했다.
4학년, 졸업 학년의 마지막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코나미는 고향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으니 외가에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는 사촌인 아라시야마 쥰이 최근 크게 다쳐 입원하는 바람에, 예정된 가족 여행―코나미는 도쿄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그래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담고 있었다. 아니, 지금 사과가 문제야? 얼마나 크게 다쳤길래 입원까지 했냐며 곧장 병문안을 가겠다고 입을 여는 코나미를 말리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갈 수밖에 없는 게 또 사람이었다.
아라시야마는 미카도시를 떠난 적이 없고, 그를 만나려면 미카도시로 가야 한다는 사실은 전화를 끊은 뒤에야 깨달았다. 미카도시. 분명 친숙해야 마땅한 이름인데도 입에 담으면 왜 그렇게 생경하게 느껴지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암시는 여전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떤 암시도 사촌을 향한 걱정과 사랑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일 수는 없었기에 코나미는 마침내 어디서부터 밀려오는 건지 알 수 없는 거부감을 이겨내고 고향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어디로? 고향으로.
4년 전 외계인들이 쳐들어와 짓밟았던 고향으로. 미카도시로. 코나미는 돌아갔다.
여전히, 많은 것을 잊은 채로.
코나미의 기억을 조작하는 데는 많은 사람의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구 보더 시절부터 그들의 일원이었던 코나미의 ‘모든’ 기억을 잊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결론이 났을 때였다. ‘모든’ 기억을 잊게 하는 것이 힘들다면 최대한 ‘많은’ 기억을 잊게 하자고. 그리고 스스로 ‘그러려니’ 하고 덮어씌우게 하자고. 다시 말해, ‘조작’하자고. 다행인지 코나미는 보더 관계자 외 지인들에게 자신을 ‘보더의 오퍼레이터’로 속여 소개한 전적이 있었다. 그 말대로 두기로 했다. 코나미 키리에는 중학 시절까지 보더의 전투원으로 활약했으나, 이후론 오퍼레이터로 전향하여 직접적인 전투와는 거리를 두고 대부분 시간은 학업에 열중하며 지내왔다. 오퍼레이터라 해도 전투와 멀어질 수는 없건만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몸담은 타마코마 지부엔 이미 린도 유리, 우사미 시오리 등의 우수한 오퍼레이터들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일 없이 입시에 집중할 수 있었고, 머잖아 바라던 대학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게 지금.
그게 현실.
그러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한 이는 타마코마 제2부대의 대장 미쿠모 오사무였다고 한다. 신중히 내놓은 그의 의견은 상부에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으며 받아들여졌고 곧 그 뜻대로 그리되었다. 여담이지만 미쿠모는 평소 사이와 사이를 잇는 매개체인 다리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손으로 그 자신과 코나미, 그리고 코나미와 무수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에 스스로 상당한 가책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한다. 모른다, 그때는 모두가 힘들 때였으므로. 그래도 누군가 아무라도 좋으니 카라스마 쿄스케와 이어져 있는 걸 알 때마다 안도하던 때에 도리어 스스로 그 끈을 끊어버리는 짓을 했으니 그라도 충격이 작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그의 스승이었다. 때때로 그것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정말 괜찮았는데.”
그렇지만 정말 오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 딱히 마음 상하지는 않았다. 키리에가 온 덕분에 잠시 쉴 수 있겠다며 자리를 비운 쥰의 어머니 대신 과도를 집어 든 코나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여행 못 가게 되어서 미안해, 키리에. 아, 정말. 여행이 문제야? 어떻게 다들 나만 보면 그 이야기부터 해? 엄청 기대하고 있었잖아. 그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제 사촌보다 소중할 리는 없었다. 당연히! 그 말에 고맙기도 하고 조금 민망하기도 하여 웃은 쥰이었지만 코나미의 손에서 술술 깎여나가는 사과 껍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은 다시 깊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키리에.”
“쥰, 그만 사과해. 내가 못 올 곳 왔어?”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저는 적당히 성가신 척하며 입을 열었던 것인데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표정을 굳히는 쥰에 역으로 제 쪽이 조금 민망해진 기분이 들고 말았다. 그럼 됐잖아. 이미 왔는데 어떡해, 그리고. 그건 그래. 그렇다며 부스스 웃는 얼굴의 사촌은 어릴 적부터 보더의 얼굴 노릇을 해서 자주 봐온 미디어 속 웃음보다 좀 더 친근감이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그리운 기분마저 들게 하기에 툭, 하고 잘라낸 사과를 접시 위에 올려놓는 것과 동시에 코나미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쥰.
“보더, 계속할 거야?”
쥰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다음 조각을 접시 위에 올려놓으며 쥰의 얼굴을 보았을 때 코나미는 쥰 안에도 보더를 계속할지 말지 갈팡질팡하는 고민이 있어 시간을 들여 대답을 고르는 중인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코나미 자신을 보며 생각에 잠기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말았다. 날 왜 보는데. 그 말에 쥰이 얕은 잠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놀라며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코나미의 짐작은 실제로 틀리지 않았다. 보더, 계속할 거냐고 물었지? 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이미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뻔하다면 뻔한 대답.
“응.”
그럴 줄 알았어. 부러진 다리가 붙을 때까진 꼼짝 못 하겠지만. 그 말엔 웃었다.
미카도시에 있는 동안엔 아라시야마 가에 머무르기로 했다. 쥰의 어머니가 돌아와 오랜만에 시내 구경을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에 나쁠 것도 없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길로 쥰의 동생에게서 챙이 둥근 모자를 빌려 쓴 코나미는 약 3년 만에 낯설면서도 낯익은 미카도시 시내를 걸으며 오묘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3년하고도 수개월쯤 되겠지만, 대충 그만한 시간을 들이고 또 떠나온 모교에도 슬쩍 고개를 기울이기도 했다. 익숙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그사이 교복이 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여전한 도시. 4년 전 외계인들이 쳐들어와 짓밟았음에도 ‘여전함’에는 손톱만큼의 흠도 남기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기반엔 보더의 기술력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하는 코나미였다. 트리온이란 에너지원을 이용하면 물적 자원은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인명이리다. 공원에 이르렀을 때였다. 머리 위론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고, 코나미의 눈앞에는 4년 전엔 존재하지 않던 흰 비석이 조형물과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어렵지 않게 한자를 읽어내면 추모비.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자들은 인명이었다. 자신은 떠나온 땅에 떠나지 못하고 남은 이들의 줄지은 행렬에 코나미는 잠시 숨도, 말도, 모두 입 안에 가둔 채 입술을 꽉 닫았다. 이름을, 읽어내진 않았다. 부러 초점을 흐리게 두었다는 것이 맞았다.
아는 이름을 읽어내고 싶진 않았다. 모두 모르는 이름이라도 부러 알고 싶진 않았다.
아, 아까까지는 정말 괜찮았는데. 기분이 정말 괜찮았던 것도 같은데.
아니지, 그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입 밖으로 내어놓지만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짓말.
‘정말 오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던 말을 떠올린다. 기억을 회상한다. 입원실을 떠나기 전, 그 말에 몸을 돌리며, 모자를 까딱 들어 올리며, 짓궂게 물었을 때였다. ‘정말 그래?’
‘응.’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그러라고는 했지만. ‘정말 네가 오지 않았으면 했어.’ 어?
‘미안해. 하지만 그건…….’
쥰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키리에를 위해서야.’란 말도 사실일 것이다. 왜?
“저기, 모자 떨어뜨리셨어요.”
부름에 고개를 돌리면 모자를 들고 있는 소년 또는 청년, 그 경계선에 서 있는 이가 보여 코나미는 눈을 깜박였다. 아는…… 아니, 모르는……. 아니, 아는……. 고민하는 동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코나미 선배.”
“그러고 보니 오늘 카라스마라는 애랑 만났어. 내 후배라는데, 쥰. 너는 기억해?”
코나미는 고교 시절 일명 아가씨 학교라고 불리는 여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서는 그와 동향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따라서 그를 선배라고 부른다면 중학교, 어쩌면 초등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인연이겠으나 그에겐 다른 갈래가 존재했으니 보더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는 오래전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보더. 그래서, 그 역시 그런 것일까? 그에 관한 기억 역시? 모르나, 코나미에게 모자를 건네는 남자의 입가엔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반가이 여기는 미소 같은 것 하나 보이지 않고 다소 무표정하여 코나미는 그가 정말 저의 가까운―그러나 잊고 만―지인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그가 내미는 모자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조심스럽게 인사하면 왜인지 알 수 없게도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짓는 남자였다. 저를 선배라고 불렀으니 말을 놓아도 괜찮은 사이렷다. 그래서일까? 알지 못한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도…….
“잊어버렸죠, 저.”
거짓말.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그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겠지. 그래서 아니야, 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어쩐지 그 말이 기분 나빴다. 아니, 기분 나쁜 것은 그 미소, 작은 미소였다. 그래서 코나미는 손을 번쩍 뻗어 남자의 입을 막았다. 물론 직접 닿은 것은 아니고 몇 센티미터 위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손을 멈췄다.
“잠깐만! 맞출 테니까 말하지 말고 있어 봐.”
맞출 수 있어. 맞출 수 있다고.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잘하면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름이었다.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도 같다. 토…….
“네. 기다릴게요.”
“응?”
그러나 선수를 뺏겼다. 그가 먼저 말했다. 손으로 가려진, 손 뒤에 감춰진 입으로.
“그렇지만 지금은 맞추지 못했으니까, 저.”
그사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소년일까, 청년일까 싶은 그가 말했다. 다시 무표정해진 것은 그사이 어딘가 그의 기분을 어지럽힌 것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게 ‘디폴트’에 해당하는 표정이기 때문인 걸까?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코나미 선배.”
코나미가 입을 크게 벌렸다.
“허?”
코나미의 기억은 광범위하게 조작되었다. 그러나 후일, 그와 같은 부대, 타마코마 제1부대에 속했으며 대장이었던 동료 키자키 레이지는 꼭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평을 짤막하게 남겼다. ‘기억 봉인’은 그렇게 손쉽게 뜻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까다롭기도 하고, 애초에 사람의 기억을 손대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발목을 잡는 것은 언제나 ‘위화감’이었다. 그러나 코나미는, 그렇게 많은 기억이, 긴 시간의 기억이 지워지고 조작되었음에도 이러한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바뀐’ 일상에 적응하고 ‘바뀐’ 기억에 자신을 적용했다. 이에 키자키는 말했다. 이건 기억이 ‘봉인’되어서가 아니라, ‘조작’되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도록 ‘암시’에 걸려서 그렇다고 보는 쪽이 나을 거라고. ‘기억 봉인’은 이에 약간의 도움을 더해준 것뿐일 거라고. 누가 암시를 걸었냐고? 누구라고 할 게 있을까. 누구라고 할 사람이 남아있긴 하는가.
나, 좀 쉬고 싶어.
그렇게 말했던 건 코나미였다. 그러니 암시를 건 사람은 코나미 자신이다.
“어제는 잘 들어가서 쉬었어?”
“응. 덕분에.”
이튿날, 입원실에만 콕 박혀 있진 않아도 된다는 의료진의 허가에 냉큼 병원 앞에 조성된 산책로로 휠체어를 밀고 나간 것은 오전 중의 일이었다. 허락받고 빌려 온 휠체어는 생각보다 크고 무거웠고, 그래서인가 트리온체로 전환하면 이쯤이야,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트리온체로 전환하는 것이야 트리거가 있다면 어려울 일은 아니지만, 이제 와 보더 전투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일 터다. 비록 제 사촌은 아직도 이렇게 고생하며 도시를 지키고 있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전투원으로 남아있기 위해선 이전보다 배로 더 애쓰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리고…… 코나미는 노력하지 못할 것 같아서 사양하고 거절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때.
전일에 카라스마 쿄스케란 후배와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도 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 오늘도 만나?’ 그렇게 되물어볼 법도 한데, 그러면 ‘내가 걜 왜 만나?’라고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고 돌려받은 그는 멋쩍게 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또 만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저는.
“어떻게?”
“코나미 선배, 멀리서 봐도 눈에 띄거든요. 은근히, 꽤.”
공원에서 다시 만난 그 애에게 또 아이스크림을 사 주며 코나미는 지끈 울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번에도 그가 코나미에게 아이스크림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본 순간, 분명 기억했던―그래서 쥰에게도 말해주었던―이름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고 말았는데, 그러자 그가 이전처럼 입가에 미소를 올리며 ‘또 잊었죠?’라고 말한 것에 발끈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너! 나 따라와! 아이스크림 사주시게요? 그래! 자신이 졌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아 주먹이 바르르 떨리기는 했지만, 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코나미는. 그 전에 이걸 이기고 지는 그런 싸움으로 봐도 좋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스마는 얌전히 코나미를 따라갔고 얌전히 코나미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토리마루라고도 불렀어요. 한자가 이래서.”
“토리마루?”
그래서 처음에 이름을 생각했을 때 토, 로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일까.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슥슥 한자를 적는 데 가지런하니 제법 글씨를 잘 썼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목구비 모양새도 제법 나쁘지 않아 좋아하는 애들이 상당히 많을 얼굴이었지만, 코나미는 그 점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그가 지워버리는 그의 이름에 더욱 눈길을 주었다. 제 후배라고 하니 타마코마 지부에 속한 전투원이었을 텐데, 암시가 훌륭하게 먹혀든 코나미의 머릿속에는 남아있는 인상이 거의 없었다. 코나미는 머리 위로 나뭇잎들이 그늘을 만드는 공원의 길 가장자리로, 카라스마는 그보단 햇빛이 사이사이로 갈라져 들어오는 안쪽으로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너, 내 후배라고 했지?
“거짓말 아냐?”
“아니에요.”
“진짜 아냐?”
“아니에요. 기억나는 게 없어서 그래요?”
응.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나도. 하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토리마루. 이거 하나 대답해 줄 수 있어? 뭔데요? 말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게요. 선배가 저한테 이렇게 물어온 적은 굉장히 오랜만이니까요. 그래? 그럼…….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한낮의 햇빛이 나뭇잎을 투과하거나 또는 그에 가려지지 않은 조각난 틈새 사이로 비쳐 들어와 그의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너 유령이야?”
공원에 다시 와 빼곡히 적힌 이름을 살펴보았다. 어쩐지 울렁거리는 속을 견디며 첫 줄부터 찬찬히 읽어내리면 찾았지만 찾고 싶지는 않았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 조금 전 한자를 보며 확신했고, 그예 그가 대답했다.
“그럴 리 없잖아요.”
단박에 부정당할 줄은 알지 못해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지만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는 이해한다는 투라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4년 전 있었던 대침공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미카도시엔 코나미의 후배, 즉 보더의 일원인 그 역시 전투원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당시 ‘미덴’을 침공한 네이버는 ‘미덴’의 핵심 기술 중 하나인 베일 아웃을 방해하는 기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걷잡을 수 없이 큰 피해를 낳았지만 본디 위기에 빠르게 대처, 대응하는 능력만큼은 아무도 미덴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보더는 곧 이를 상쇄하는 기술을 사용하여 그들을 지키고 추가적인 피해를 막았다. 기술 개발 자체는 침공 이전부터 이뤄지고 있었기에 정확히 기일을 맞추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완성될 수는 있었다. 보더에 미래를 보는 사이드 이펙트 보유자가 있던 덕분이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비극을 목도하는 재주가 세운 공은 막대했다. 덕분에 그가 본 많은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양쪽의 기술이 동시에 맞부딪쳤을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일어나는가. 제아무리 가진 사이드 이펙트가 훌륭하여도 모든 상황, 모든 접점,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대응하는 것은 그것이 깃든 인간의 출력 한도를 벗어나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놓친 시간과 시간, 사건과 사건 사이에, 매우 낮은 확률을 뚫고 ‘사고’ 하나가 발생하고 말았다. 트리온 전투체가 한계까지 버티고 버틴 끝에 파괴된 순간이었다. 베일 아웃 되어야 할 육신의 빛줄기는 적들의 장막에 가로막혀 빠져나가지 못했고, 트리온 전투체에서 본체로 전환되어야 할 의식은 트리온을 덧입고 외부로 내팽개쳐졌다. 튕겨나갔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연유? 모른다. 이날 이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결과이니, 잠시 후 육신에서 이탈된 의식이 트리온을 입고 눈을 떴다. 육신은 잠든 채였다.
“처음부터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처음은 언제인가, 눈을 떴을 때였다. 저를 보는 이들과 저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지 않고 비켜 나가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그는 저를 ‘통과’한 동료들이 의식이 없는, 정확히는 의식이 ‘비어’ 있는 것이지만 그들로선 알 길이 없는 그의 육신을 끌어안는 모습을 육신 밖에서 지켜보았고, 다행이었던 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들과 같진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그를 정확히 가리키며 소리친 사람은 그들을 돕기 위해 가세한 아라시야마 부대의 스나이퍼, 사토리 켄이었다. 그가 무어라 외치며 팔을 휘 휘 저었는지는 생략하겠다. 다만 후일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다행히 그는 기절하지 않았다.
다행 위로 다행을 거듭 겹칠 수 있다면 그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한 명, 사토리뿐이진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추가로 몇몇이 더 그를 인식하면서 존재를 확신한 보더에서는 그를 ‘구하기’ 위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보더는 그의 의식이 ‘의식’한 육체, 즉 현재의 트리온 육체가 함유하는 트리온 농도가 기존의 트리온 전투체보다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계측하는 데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그를 인식할 수 없는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듯했으나 트리온 수치가 높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인식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정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연구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단시간에 밝혀낼 수 있는 원리가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유능한 엔지니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총력을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지지부진.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쟁은 끝났고, 미카도시는 재건을 시작했으며, 그는 여기 계속 남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 로 마치려던 순간, 코나미가 한 손으론 머리를 붙잡고 다른 손은 카라스마에게 쭉 뻗은 채로 흔들어 카라스마는 이야기를 멈추고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그를 응시해야만 했다. 잠깐, 잠깐만 있어 봐. 그럼. 코나미가 다른 손을 홱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디인지는 그다음 내뱉는 문장으로 추론 가능했다.
“그럼 추모비의 이름은!?”
이에 카라스마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저야 모르죠.”
“뭐!?”
“진짜 토리마루 씨라도 발견한 건 아닐까요?”
“진짜!?”
그렇다면 진짜 토리마루 씨에겐 이보다 더한, 굉장한 실례가 따로 없는바, 하지만 설령 그렇대도 단박에 납득하고 넘어갈 순 없어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마는 코나미였다. 내가 그런 실수를, 착각을 했다고? 그럴 수가.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추모비로 돌아가 이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옆에 세워두고 추모비를 다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건 카라스마에게 실례이지 않은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한낮의 햇빛에서 도망치지 않고 서 있는 그에게선 어쩐지 초연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기억이 없는 코나미로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믿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받은 거야? 아무래도 일정 온도 아래의 물체는 접촉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유령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먼저 아이스크림 사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야……. 그야?
“어제 아이스크림은 받는 걸 보았으니까.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주고 싶어져서.”
그러면서 모자챙을 잡아 내려 슬그머니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요? ……조용히 해. 그에 뜻대로 조용히 곁을 거니는 카라스마였다. 적당히 그가 제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인기척을 내며, 직전까지 풀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를 돌이켜 곱씹었다. 사실을 돌이켜보면 실은…….
불필요하게 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상대는 하나를 얘기했는데 열을 늘어놓았다. 하나에는 하나만 얘기하면 되는데, 둘, 셋이 이어질 것을 경계하여 대뜸 일고여덟 아홉 열을 이야기했다. 마치 ‘네가 의심할 것을 알고 있어.’라고 말하듯이. ‘처음부터 듣길 원하지?’라고 상대는 요구한 적 없는 친절을 베풀듯이. 이치에 맞지? 조리에 맞지? 이만하면 사실이지?
거짓말이 아니지?
이토록 애써서 이야기를 준비한 날이 있었나. 이토록 애써서 이야기를, 사실을, 거짓말을. 말하지 않기로 한다.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적어도 지금은 가릴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비록 그것이 햇빛 위로 한 장의 나뭇잎을 얹어 가리는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투과하여 비치는 빛으로 인해 옅은 농도의 그림자밖에 만들지 못할지라도.
따라 걸었다. 금방 들킬 얇은 거짓말을 뒤집어쓰고. 역시 맞았잖아, 같은 말은 최대한 늦게 하길 바라며. 토리마루가 아니었잖아, 같은 말은 최대한 늦게 듣길 바라며.
오실 적엔 바삐 오시고 가실 적엔 더디게 가시길 바라는 마음을 당신도 모르진 않으리다. 받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모두 받고 가고 싶은 마음에도 잘못은 없으리다.
비록 코나미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는 휴직 상태로 처리되어 있었다. 이는 보더가 그의 의사를 존중한 결과로, 잠시 쉬고 싶다고 했지 보더를 그만두고 싶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코나미의 뜻을 받아들인 그 결과였다. 또한, 퇴직과 마찬가지로 휴직 상태일 시에도 기억 봉인은 필수적인 절차가 아니었다. 바란다면 아무것도 잊지 않은 채로 보더를 쉬고, 보더가 없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보더가 없는 일상.
코나미는 그것을 기억해 내기엔 너무나 긴 시간을 보더와 함께 지내왔다. 그것이 곧 일상, 그의 생활이었고 일상을 함께하는 보더의 구성원들, 그들이 곧 코나미의 가족이었다. 하나뿐인. 둘도 없는. 다신 잃을 수 없는. 두 번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가족.
그러나 코나미는 딱 하나만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나, 좀 쉬고 싶어.”
그가 그렇게 말한 날에 그를 말리는 사람은 그 곁에 없었다. 키자키는 고개를 끄덕였고 린도 지부장에게 그의 의사와 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함께 보고했다. 린도는 본부의 사령관이 포함된 간부 회의 안건에 이를 올렸고, 키도는 늘 그랬듯 그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외의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래. 그렇군. 그렇게 하지.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끔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그 말은 곧 그 아래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 쉬는 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 역시 그들과 정이 깊은 사이였다. 코나미 또한 작은 아이였던 시절에, 그의 얼굴에 지금 같은 흉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코나미는 린도를 유난히 잘 따랐지만 지금처럼 키도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땐 키도 역시 지금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회의로 다시 돌아오면 코나미의 기억을 지우자는 결론이 그때의 그들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보더가 없는 일상. 일상을 살아가 보려는 노력. 코나미가 기울인 그것은 절대 부족하지 않았으니,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배수구를 막을 마개를 찾는 게 우선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코나미가 관련된 두 번째 안건을 올린 사람은 첫 번째 안건을 올린 린도가 아닌 시노다였다. A급 정예 부대 아라시야마 부대의 대장 아라시야마 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어두운 얼굴로 입을 뗀 그는 코나미 키리에의 사촌이었다. ‘키리에가.’
‘쉴 수가 없어.’
‘많이 힘들어합니다.’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최종적으론 본인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었다. 잠시 잊고 쉬는 거야. 푹 쉰 다음에 돌아오면 되는 거야. 엉엉 우는 사촌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자꾸 생각나.’
입원실 침대에 홀로 앉아 아라시야마 쥰은 오래전에, 어릴 적에, 키리에와 함께 보러 갔던 뮤지컬 한 편을 떠올린다. 아이들이 보기엔 조금 내용이 어려웠을까?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해에 문제가 없으니, 하나를 잊으려다 열을 잊어버리고 마는 어느 여인이 무대 중앙에 서서 노래하던 기억이 그에게는 선명했다. 아니, 아니다. 여인은 하나조차 잊으려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하나가 너무 고통스러워 이를 낫게 하려던 시도가, 하나뿐 아니라 열, 곧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와 연결된 열 중에서 오직 하나만을 잊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처음부터 그런 시도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래서…….
키토라에게 부탁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부탁이 되리란 걸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연락처에서 다른 이름을 찾았고, 망설인 끝에 그 이름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오간다. 그가 곧 전화를 받는다. 그는 제게서 전화가 걸려 올 것을 미리 알았을까?
“진.”
이어폰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제 소리로 위장하여 감추기엔 제격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 볼 것 없이 카라스마와 대화를 나누기에도 제법 용이했다. 그는 유령이 아니라고 했지만 현 상황에선 유령과 거의 다름없었기에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유령과 다름없다고?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명을 요구했던 것이 조금 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볼 수 있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흩어지는 트리온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천천히 분해되어, 흩어져서, 종내 사라지는 결말에 이르기 전에.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와 딱히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벌써 4년이나 지났으니 그럴만하지 않냐며. 물론.
“뭐가 그럴만한데?”
코나미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비록 이제야 처음 안 이야기였음에도. 어째서 그동안 자신은 같은 지부 소속의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걸 알지 못했는지 의문이 남아도.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순 있었다.
“말도 안 되잖아!”
“그런가요.”
“그래!”
“고마워요.”
“어, 어?”
“화내줘서.”
저 대신 화내줘서 고마워요. 아, 응. 그래? 하지만 이것은 반칙이다. 그렇게 말하면 어딘가 멋쩍어져 슬그머니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되지 않는가. 분명 코나미는 제 일을 말하면서도 남의 일을 말하는 양 얼굴에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카라스마 때문에 더욱 분개한 것이 맞았지만, 생각해 보면 카라스마 또한 처음부터 이리 제 죽음에 초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도 내고, 억울해했겠지. 하지만 그 말대로 4년이나 지나는 동안 모든 시도가 무용하여 무위로 돌아가고 무의미한 결과만을 확인했다면, 체념하고 우울해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우울? 물론 카라스마는 조용하고 표정으로 큰 변화를 나타내지 않을 뿐, 딱히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일까? 결과는 우울하기 그지없어도 본인이 개의치 않는다면야 다행이긴 하였다. 다행이긴 한데, 그러고 보니 전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쥰이 그런 질문을 했었다. 카라스마에 관한 이야기가 지나가고 한참 후에야 꺼낸 이야기니 둘 사이에 관련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키리에. 혹시 요즘 우울해?’
그 말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지? 뜬금없는 질문에 의도를 알 수 없어 ‘뭐?’하고 되물었다가 퍼뜩 생각이 닿는 지점이 있어 ‘쥰! 이제 그만해!’하고 짜증을 냈었다.
‘그만 신경 써! 이제 괜찮다니까? 여행 못 가서 우울한 건 오히려 쥰 아냐?’
그 말에, 미안, 미안, 하고 웃던 사촌이었다. 그리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안, 키리에.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때도 지금도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한 문장이었다. 티는 내지 않고 넘겼지만, 곱씹어보면 뒷맛이 그리 좋진 않았다. 쥰이 요즘 우울한가? 그렇지만 여행을 못 가서, 다시 말해 휴가가 공중분해 되어 날아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쥰이 우울하다면…… 제가 미카도시로 돌아온 이후부터가 아닐까. 어, 왜?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돌아가야 할 때 아니에요?”
돌아보면 노을로 붉어진 얼굴이 코나미를 응시하고 있어 코나미는 잠시 침을 삼키고 말을 삼켰다. 내가 돌아가면 너…… 계속 혼자 있는 거 아냐? 그 말에 그야 그렇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하고 말을 받는 카라스마였다.
“유령 팔자가 그렇죠, 뭐.”
“부정 타게 그런 소리 하지 마!”
물론 그렇게 치면 유령 소리를 처음 꺼낸 건 코나미였다. 코나미도 그 사실을 알아 괜스레 콧방귀를 더 힘차게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여기 있을 거지? 내일도 오게요? 그 말에 말 같지도 않은 걸 묻는다는 식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당연하지.
“네가 여기 있잖아.”
“그 말, 조금 기쁘네요.”
“그렇지? 고맙게 여겨.”
“네, 고마워요.”
그렇지만 그 말엔 표정을 지우고 카라스마를 빤히 바라보는 코나미였다. 왜요? 물으면, 솔직하게, 거짓 없이 말하는 그였다.
“너 말야, 원래 이렇게 솔직한 성격은 아니지 않았어?”
아…….
무언가 기억해 낸 걸까? 그렇게 물으면 코나미 자신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입 안의 혀처럼 굴어주는 녀석은 아니지 않았나? 분명,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러다가도 ‘거짓말이에요.’하고 아무렇지 않게 저를 속이고, 속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저는 화내고, 저는 그랬던 것, 같은데…….
“그치만 거짓말하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그렇다고 저에게 이렇게 맞춰줄 사람이었던가? 그런 후배가 있었던가? 그런 후배인가? 너는?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또 봐!”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더는 저를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코나미를 향하던 몸을 반대로 돌렸다. 훔쳐보는 건 안 좋아요. 말은 그리하지만 암약은 그의 특기라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래도 따끔히 충고할 순 있으니까, 그렇죠?
“진 씨.”
바라건대 당신도 이젠 편해지면 좋으련만, 오늘의 표정도 그리 좋진 못했다. 오늘의 당신도. 내일의 표정도 그렇던가요? 내일의 당신도?
알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지 않나. 언제나 그게 문제였지만. 언제나, 늘.
코나미가 지킬 수 있었던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딱 하나.
“나, 좀 쉬고 싶어.”
“쉬어도 돼. 계속 쉬어도 돼. 응…….”
끌어안은 사람은 누구였지? 유리? 시오리? 누가 뒤에 있었지? 레이지? 유이치? 누가 훌쩍이는 소리를 내었지? 요타로? 누가…….
떠났지?
시선을 내린다. 비어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잡고 있던 손은 텅 비고, 텅 비어서, 이제 아무것도……. 아니…….
나는 무엇을 지켰지?
무엇을, 지켰더라…….
…….
열 중 하나를 지울 수 있다면 당시의 코나미 키리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요. 그날? 되물으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날이요.
왜 나는 너를 지키지 못하고 네 임종만을 지킬 수 있었던 거지?
그것이 코나미 키리에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하나다.
진실 하나. 카라스마 쿄스케는 유령이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