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델포이의 신탁

월드 트리거. IF 타치카와가 블랙트리거가 된다면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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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카와 씨가 블랙 트리거가 되는 건 싫어.”

옥상 바닥에 벌렁 등을 대고 누워 있던 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를 돌아본 타치카와도 덩달아 바닥에 함께 누워버렸다. 그렇게 누워 버리면 코트에 온갖 먼지가 다 달라붙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말지만, 그러는 진 역시 제 재킷이나 머리칼 사이로 모래가 들어가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누워 버린 터였다. 제 신세야 아무렇게나 손 닿는 곳에 내버려둘지라도 제가 아닌 남을 보면 역시 조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옥상이라 천장이 없어 대신 천구의 뚜껑 아래를 올려다보면, 점점이 박힌 인공위성들이 별인 양 까만 밤하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진짜 별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주변에 민간인 거주 구역을 두지 않고 고도 제한을 걸어두었어도 도시에서 별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미카도시, 경계구역, 보더 본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네이버후드에선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진이 마지막으로 가보았을 때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오래전 구 보더가 무너지고 지금의 보더로 재편된 이후로 진은 줄곧 미카도시에 머물며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저 아닌 저이의 기억 속 밤하늘이 가장 지금과 가까운 밤하늘일 터였다. 어땠어, 그곳의 밤하늘은? 하지만 그런 건 너무 낭만적이고 간지러운 질문이지. 여전히 별이 쏟아질 듯한 기세로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어? 그런 건 너무나 가식적이지.

차라리.

오래전 그의 손에 처음 모가미가 들렸던 그때처럼. 밤보다 더 검은 연기가 치솟고 져버린 노을 대신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불길이 있으며, 트리온 대신 피 흘리는 자가 사방에 널렸던 그날처럼. 그날 같은 광경을 당신도 보았어? 당신도 행했어? 그렇지만 그런 건 물을 수 없지. 그런 건 결코 물을 수 없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그리 되물으면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거야,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화를 시작할 수는 없지.

“진.”

“응.”

“네 예지를 듣고 내가 취할 행동은 두 가지밖에 없어. 뒤집어엎거나, 이용하거나.”

백 퍼센트냐고 묻는다든가, 얼마나 가능성 큰 미래냐고 묻는다든가 하지 않았다. 그는. 원정 출정 전야에 하필 그런 불길한 말을 꺼내는 거냐고 툴툴거린다던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이냐고 묻는다던가 하지 않았다. 타치카와는. 그래서 진도, 그렇구나, 하고 이미 보아 아는 대답에 반응을 건넸다. 그리고 예지로 이미 보았지만 피하지 않고, 카자마가 휘두른 비닐봉지에 타치카와와 나란히 머리를 맞는다. 아얏. 아야. 꿀밤 세기로 딱딱 건드린 것에 불과했지만 부러 과하게 반응한다. 아프잖아.

“카자마 씨.”

물론 그런다고 봐줄 어른이 아니다, 그는. 그 말에 가져온 비닐봉지를 열어 음료수를 꺼내던 그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트리온체잖아. 맞아! 트리온체니까 옷 더럽힐 일도 없는데 왜 혼낸 거야? 호오, 혼내고 있다는 건 알아차렸군. 하지만 그렇다고 상점을 줄 어른도 아니다, 카자마는. 당연히 받을 줄 알기에 아무렇게나, 그러나 정확한 방향으로 타치카와를 향해 음료수를 꺼내 던지는 카자마는 이제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 진짜 화났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평소 같이 곧 냉담하게 입을 열고 이내 닫는다.

“괘씸해서.”

그는 조금 전 음료수 내기로 벌어진 가위바위보에서 진이 사이드 이펙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음을 알아차렸다. 절대 쓰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처음부터 새빨간 거짓말이란 사실을 눈치채고 화가 났다. 사실 그 정도로 화가 나고 화를 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타치카와와 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자신을 보내버렸다는 사실에, 그의 말 그대로 괘씸한 녀석들에 짜증을 내고 있을 뿐이다.

“카자마 씨 뒷담 안 깠어, 우리.”

“진짜야.”

“진이 나한테 블랙 트리거 되지 말라고 말했을 뿐이야.”

“진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괜히 맞았어.”

그걸 홀랑 말해버리냐고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키면 그는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로 킥킥대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쉰 카자마가 진에게 음료수를 꺼내 건넸다. 쟤한텐 왜 순순히 건네줘!? 넌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칼같이 잘라 말하면 더 대들 말도 없다.

“별일 없을 거다, 라곤 말 안 해주네. 카자마 씨.”

“모르니까.”

“칼 같네에.”

“시끄러워.”

그는 제 음료수 캔으로 슬그머니 일어나는 타치카와의 이마를 가차 없이 밀어버리며 말을 덧붙인다. 이번엔 저번과 달리 변수가 많다는 말을. 사실이었다. 그래서 진도 미카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서도 할 일은 많았다. 어떤 일은 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떠나는 것은 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이 하게 해라. 친구의 조언이었다. 그예 진도 결국 입을 열었다.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잘 다녀와, 다들.”

.

.

사이드 이펙트로 볼 수 있는 것은 현재가 아닌 미래. 그러나 어떤 미래는 걷잡을 수 없이 다음 미래를 낳고 또 다음 미래를 낳고, 그것은 어떤 현실 하나를 통해서만 비롯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모두가 추모비 앞에 서 있는 미래가 있다. 뒤로 돌리면, 모두가 울고 있는 미래가 있다. 뒤로 돌리면, 누군가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장례식은 누군가 죽어야지 열린다. 그러니까 장례식이 열리는 미래 전에는 누군가가 죽은 현실이 있고,

관. 사람이 빈 관이 있다. 빈 관은 아니다. 대신 평소 즐겨 입던 옷가지들을 비롯하여―….

손, 이 제 앞으로 내밀어졌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선 사람을 보았다. 현실을 보았다. 싫어. 보기 싫어. 안 돼. 봐야만 해. 그래야 어떤 미래가 정답인지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현실이, 사람이, 카자마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손으로 떨어지는 검은 조각과 함께 떨어지는 이야기.

델포이에서 태양과 음악과 예술과 의학과 그리고 예언의 신에게 예언을 들은 이는 예언을 피하려 저지른 모든 행동을 통해 자신을 직접 예언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 진은 카자마가 입을 열기도 전에 카자마가 입을 연 이후의 미래를 통해 그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서, 미래에서, 다시 말해 그에게서 직접 듣는다. 타치카와는. 그 녀석은.

“자신이 실패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어.”

그 이유를 자신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아, 왜냐하면.

“내가, 말해줬으니까.”

“……그래.”

내가, 말해줬어. 내가. 그래. 그래……. 성정이 성정이라 자상한 말은 하지 않더라도 무너지는 이를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일은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게끔 하는 방법은 그도 알지 못했다. 쓰러지지는 않게끔 해도, 무너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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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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