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아스타브]영원한 사랑

※승천아스타리온x타브(체형1 시스젠더 여성)/발더스 게이트3 엔딩 이후 수백 년(19세기 말~20세기 초 상정) 뒤의 시점

발더스 게이트 3 by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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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끝내 모조리 마모되어 영영 사라지고 만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편지는 손안에서 바스러졌고, 한때 남편이 극찬했던 포도주는 명맥이 끊긴 지 오래였다. 검의 해안을 따라 굽이치는 파도를 무궁히 내려다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웅장한 궁전조차도 어느새 허물어져 폐허가 된 채 빈터로 남아있을 뿐이다.

 

프레데리카는 느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도 몇 세기에 걸쳐 복원되는 온실을 둘러보았다. 아내가 침실을 제외한다면 가장 오래 머문다는 이유로 아스타리온은 자르 궁전을 떠나 처음 거처를 옮긴 직후부터 어디서 정착하든 똑같이 복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더는 같은 품종의 식물을 구하지 못하거나―아스타리온은 정원사와 화훼 상인을 끊임없이 닦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설령 구한다고 한들 토양의 문제인지 아니면 유리벽으로도 막지 못한 미세한 기후 차이 때문인지 매번 비슷하기는 하나 명백하게 다른 꽃이 봉우리를 맺었고, 나뭇잎이 늘어졌고, 낯선 과일이 영글기를 반복하였다.

 

아스타리온은 몇십 년간 수많은 상인과 정원사의 무능을 꾸짖고 마뜩잖아했으나, 자신을 어르고 애원하는 아내만큼은 당신 곁에서 완벽하게 박제되었기에 종내에는 변화를 즐기게 되었다. 더하여 그녀가 당신과 함께 여행했던 먼 과거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을 순수하게 믿고 따랐던 존재였음을 상기시키며 뒤늦게 흡족해하였다.

 

온실은 그야말로 프레데리카가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삶을 일체 부정하는 산물이었다. 아스타리온 또한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은 이후로도 결코 이지러지지도 사그라지지 않으리라 화답하며 어디서든 몇 번이고 온실을 세웠다. 그야말로 사랑의 증명이었다.

 

프레데리카는 문득 자신이 현재 머무는 온실이 몇 번째로 지어졌는지 곱씹다가 곧 머릿속에서 얕은 의문을 지웠다. 그러고는 주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자 물러난 시녀가 조금 전 내려놓은 백자 그릇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납작하게 팬 그릇에는 검붉고 두툼한 공단이 깔렸고, 그 위로 에메랄드 컷으로 가공해 주위를 영롱한 다이아몬드로 알알이 둘러싼 루비 반지와 그보다 족히 세 배는 되었을 루비 펜던트를 장식한 진주 목걸이가 윤슬처럼 찬란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 서재에서 시가를 피우며, 투자를 요청하고자 방문한 손님과 맞대하고 있을 남편의 선물이었다. 공단에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달큼하고 원숙하게 묻어나는 익숙한 향이 풍기며 후각을 은밀히 자극하였다. 그녀는 접시 끄트머리로 빠져나온 공단을 쥐어 느릿하게 당겼다. 공단이 미끄러질 때마다 보석이 매끄러운 사기 표면과 부딪쳐 산뜻한 경탄을 터트렸다.

 

그릇에서 온전히 빠져나온 공단을 거머쥐며 뺨에 비비던 프레데리카는 문득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던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녀는 공단을 가지런히 접어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스스러운 웃음을 나지막이 터트렸다. 그러고는 진주 목걸이를 손등으로 부드럽게 밀어낸 뒤 찢어진 수첩을 기꺼이 집었다.

 

봉투에 따로 담기지 않은 채 단 세 줄만이 적힌 종잇조각은 루비 반지, 진주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남편이 보낸 선물이었다. 그녀는 날렵하고도 유려한 필체로 흘려 쓴 문장을 손가락으로 물결치듯 쓰다듬으며 읽어 내려갔다.

 

공사다망하여 반나절이 지나도록 어여쁜 부인을 보지 못해 애간장이 타네. 부인의 사랑과 다정한 손길이 닿은 연서 한 통만 있다면 기나긴 낯을 버틸 수 있을 듯하군.

 

추신. 6월의 햇살처럼 감미로운 당신의 향기 또한 함께 동봉해주오.

 

협상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듯 마침표에서 얕은 신경질이 묻어나 있었다. 어지간히 당신에게 환심을 사고자 아첨을 늘어놓는 멍청이들에게 환멸이 난 성싶었다. 프레데리카는 아스타리온이 제 곁에 없음에도 제게 편지가 당도할 때까지 일련의 상황이 상상되어 눈썹을 엷없이 찡그렸다. 길고도 커다란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혀를 찼을 남편이 눈앞에 그려지다가 사라졌다.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들어 저택으로 시선을 옮겼다. 온실과 마주하는 2층 서재 창가에 인영이 어슬렁거렸다. 첫 손님은 그새 떠난 듯했으나―어쩌면 남편이 멍청한 헛소리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쫓아냈을지도 모른다―아마 숨 돌릴 새도 없이 새로운 이가 알현을 청할 터였다. 그러니 평소처럼 일부러 온실을 찾아 그녀의 이마와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는 잠시간조차 즐길 수 없으리라.

 

가엽고도 사랑스러운 남편에게 연서로 화답하고자 그녀는 테이블에 놓였던 호출 종을 울렸다. 온실 입구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방금과 마찬가지로 만년필과 편지지 서너 장이 놓인 사기그릇을 내려놓으며 절했다. 따로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건만 제 의중을 읽고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는 시녀를 보고도 프레데리카는 놀라지 않았다. 이조차도 아스타리온이 모두 명령한 바이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잠시 기다려주렴. 금방 쓸 테니 곧장 주인님께 드리려무나.”

 

프레데리카가 사기그릇을 제게로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수첩을 찢어 쓴 애끓은 연서와 다르게, 그녀에게 주어진 편지지는 흡사 귀한 비단처럼 보드라웠다. 하물며 아스타리온이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손수 조향한 그녀만의 향수가 뿌려져 있었다.

 

추신까지 적은 뒤 프레데리카가 지금쯤 온실에서 머무르고 있음을 곱씹곤, 굳이 저택과 온실을 오가지 않도록 배려한 듯했다. 아스타리온의 서재 책상에는 늘 언제나 부부의 향수가 정답고도 나란히 놓여 있었으므로, 그녀는 편지를 모두 쓰거들랑 온실에서 자신을 떠올릴 법한 식물을 함께 건네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곧 만년필을 들었다.

 

***

 

나의 가장 거룩하고 광막한 밤, 만고불멸한 단 하나뿐인 사랑에게.

 

다망하신 와중에도 아내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시니 어찌나 환희가 무량하지 않을까요. 나의 고결한 부군께서 번극하여 저 또한 여름이 지난 지 오래걸랑 하지와 같이 낮이 무궁하여 그리움이 첩첩하게 쌓일 뿐입니다.

 

한 시라도 빠르게 제 곁으로 돌아와, 저를 영원히 당신의 것으로 종속시키셨을 때 해주셨던 말씀처럼 서로의 품에서 시간을 보내시면 좋으련만. 마냥 생떼를 쓸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제 사랑을 글줄에 담아 보내드립니다.

 

우리가 함께한 밤은 더는 세지 못할 만큼 아득하기에 잠시 무슨 이야기를 속닥여드릴까 잠시 고민하였답니다. 처음 만나 함께 여행을 떠났던 기억은 아득하고, 당시의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서글프게도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군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끝내 모조리 마모되어 영영 사라지고 마므로, 더는 서글프지조차 않습니다. 잠시 눈을 감을 때마다 그리움이 서슴없이 밀려오나, 종내에는 내가 당신에게 영혼마저 얽매이지 않았더라면 홀로 견뎌야 한다는 공포가 들이닥칩니다.

 

당신에게 낯부끄러워 단 한 번도 말씀드리지 못했으나, 이제야 수백 년이 지나고 고백해요. 그렇기에 부디 다음에 이어질 문장을 읽고 통탄하지 말길 바라요. 오로지 기뻐해 주세요.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더없이 죽음을 열망했던 저였던 만큼 당신이 홀로 남을 미래가 끔찍하게도 두려웠습니다. 제 삶에 대한 무력감을 어쩌면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서 이제껏 외면했어요. 그러나 당신께서 제 사랑을 바라오니 흡족게 하는데 이만한 비밀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족이 길어졌네요.

 

내 부모는 더는 어디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깊은 숲속의 드루이드였어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였고, 당신의 하나뿐인 딸을 구한다는 명목 아래에 저만을 도망치게 한 뒤 한날, 한 시에 숨을 거두셨어요. 오랜 시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저를 거두어 키우신 의모께서는 늘 언제나 부모를 아둔하고 섭리에 어긋나는 관계였다고 저주하고 훼욕하셨지요.

 

난데없이 나동그라져 의지할 곳 없이 부모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는 의모의 섬뜩한 원망을 들으며 간절히 기도하였어요. 애처로운 고독이 온몸에 살을 엘 때마다 모순되게도 부모가 미우면서도 부러워……죽음을 불사하더라도 함께 불길에 뛰어들어 고통받을 단 한 명이 찾아와주기를 늘 바랐어요.

 

그러나 숲은 제 욕망을 욕보였고 부정하였으며 조롱하였기에, 성인이 되자마자 도망쳤어요. 죽기 위해서. 간절히 죽기를 바라며.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고 머리칼이 문드러지며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뒤엉킬지언정 저와 함께 부둥켜안아 관에 묻힐 단 한 사람을 찾아서. 그러나 누구도 저를 이해하지 못했고……그리하여 일리시드에게 납치당했을 때, 나는 텅 비어 있었어요. 송두리째.

 

당시 저는 살았으되 죽었으나, 반대로 당신께서는 죽었으되 간절히 살기를 바랐죠. 모순되게도, 내 사랑. 문득 당신에게 제 마음을 적어내려 보내자니 문득 의문이 듭니다. 아스타리온, 내 부군. 당신께서는 나를 어떻게 보셨을까요?

 

편지로는 일방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으니 문득 아쉬울 따름입니다. 당신께서 제 앞에 계신다면, 무릎에 앉아 불경하게도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추며 말씀해달라 조를 터인데 말이어요. 제 연서가 당신에게 당도한 뒤 어느덧 밤이 무르익어 제 곁으로 돌아오시거들랑 말씀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러니 감히 나의 고귀한 주인님께 고합니다. 노틸로이드가 추락해 피가 낭자하게 흩뿌려지고 흙먼지가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떠밀려 따사로운 햇볕만이 남은 언덕에서 당신을 발견한 순간……, 저를 독수리에 태워 날려 보낸 뒤 고블린 무리에게 둘러싸여 난자당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놓지 않은 부모님을 보았을 때처럼 심장이 가쁘게 뛰었어요.

 

이대로 당장 온몸이 피가 역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온몸을 싸늘하게 식게 했죠. 후덥지근한 바람이 그 순간만큼은 찼어요. 그러나 동시에 의모에게 맡겨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평화를 물밀듯이 발밑에서부터 저를 적시고 또 결국 저를 침잠시켰다면 믿으시겠어요?

 

제가 굳이 이렇게 묻지 않아도 이 편지를 읽으실 즈음 당신께서는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렇노라고 대답해주시겠지요. 또 어떻게 말씀해 주실지 저 또한 알고 있어요.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요? 나는 당신께 종속되었고, 당신께서는 나를 사랑해 주시는데.

 

깊은 숲속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 호수에 동이 텄을 때 반사되는 빛은 계절이 시시각각 바뀌는 데도 여전히 당신의 은발에 머물러 있고, 짙게 팬 눈동자에는 당신이 영원토록 살아있노라 증명하듯 고귀하고 순란한 선혈이 맺혀 있어요. 짙은 눈썹은 당당하고 굵고 날렵한 콧대와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은 어느 순간에도 굽히지 않을 의지가 역력했어요.

 

아, 당신께서 이토록 늠름하고 아름답지 않을지언정 누구든 눈을 마주하면 숨통을 조이며 스며들어도 모를 만큼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겠지요. 당신께서는 언제나 늘 제게서 몇 번이고 들으셨음에도 재차 반복하길 원하시죠. 저는 당신의 순종적인 아내이니 질리실 때까지 계속 속삭이고 써드릴 수 있어요.

 

프레데리카는 당신께 첫눈에 반하고 말았어요. 제 감정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그토록 죽음을 바랐기에 어쩌면 가장 죽음에 밀접한 당신에게 끌린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침몰하였지요.

 

이제 더는 누구도 세상에 존재치 않은 동료와 함께하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아스타리온, 당신께서는 늘 저를 못마땅해하셨지요. 어떤 보답조차 바라지 않고 때때로 저 스스로를 사지로 떠밀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였으니 어찌 답답하고 불쾌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는 감히 알고 있어요. 모든 신이 당신이 무력하게 견뎌야 할 참극을 외면하였는데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낯이 파리한 여자가 마치 세상의 시름과 슬픔을 짊어지고 속죄하려고 구니 속된 말을 쓰다면 얼마나 재수 없으셨을까요. 부디 당신이 아끼는 부인이 아랫것이나 쓰는 상스러운 말을 연서에 적었다고 불쾌해하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사랑하는 부군께 수줍게 변명하자면 제가 죽었을 때 저를 기억해주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아무리 간절히 독려하고 기도하여도 싹 트지 않은 발더스 게이트의 어린나무처럼 내 삶은 당신을 사랑했노라 자각하기 전까지 황폐하고 암담했으므로…….

 

제가 타인에게 가치 있는 어떤 삶을 구하다 명을 달리하더라도 명복을 빌어주길 바라며. 그렇다면 다시 생을 허락받았을 때 행복하리라고 저 자신을 계속해서 부추겼어요. 목숨을 스스로 끊을 아집이 없기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되다 못해 아물지 않은 상처가 썩을 때까지.

 

제가 저를 옭아매고 갉아먹는 순간에도 아스타리온, 당신께서는 더욱더 빛났어요. 태양에 반사된 빛으로 찬란하게 어둠을 투사하는 별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당신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못하는 추잡한 망자를 과거의 당신께서는 두려워하였고, 이길 수 없노라고 단언하면서도 결코 현실에 순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지요. 어떻게든 당신이 강제로 거머쥔 기회를 이용해 진정한 의미의 완벽한 자유를 위해서 끊임없이, 끈질기게.

 

그런 당신께서는 제게 영구히 저물지 않은 태양 그 자체였어요. 때때로 눈이 부시다 못해 마주보기가 어려워 온몸이 열로 달아올랐고 눈시울이 뜨거웠어요. 당장에라도 당신을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제치고 아스타리온, 당신을 위해 제 목숨을 모조리 바치고 싶었어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따위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지요. 숲에서 도망쳐 일리시드에게 납치당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수많은 거절을 배웠으니까요. 그럼에도 나를 이용하려는 당신께 기꺼이 응했어요. 누구도 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다 매도하고 진저리 쳤고, 아무리 사랑을 쏟아부어도 당신께서는 응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데 제가 뿌리를 안전히 내릴 수 있는 풍요로운 대지가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기쁘리라고 생각하며, 그저 서로를 부둥켜안고 망아(忘我)에 잠길 수 있다면야 더 이상 감히 바랄 수 없이 충분하다고 만족하였어요.

 

그런데 당신이 제게 멋지고 간단했던 계획이 실패했다고 스스로를 조롱하고 비웃었을 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역겹다며 진저리 치는 순간……, 초라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소란스럽게 시선을 피하면서도, 길 잃은 어린아이가―이런 표현은 싫으실까요?―절실히 다정하고 평온한 어머니 품을 찾아 헤매듯 절박하게 제게 어떤 답을 원할 때 그제야 알았어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우리가 서툴게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고 손을 맞잡은 과거는 어디서도 더는 추억하고 곱씹지 못할 만큼 오래전이지만, 애써 제 환희를 내색하지 않고 당신을 끌어안던 순간을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제게 맞닿아 허물어질 때가 늘 선명해요. 당신의 서늘한 체온까지도.

 

아스타리온,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고 애처로이 털어놓았던 순간 당신께서는 저의 유일한 종교이자 모든 것이었어요. 제 인생을 당신에게 모조리 바치겠노라고 다시 한번 맹세했어요. 저를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처음으로 나약하고 애달픈 생명을 양손에 거머쥐듯이 손끝이 떨린 채로 끌어안았을 때, 몇 번이고 반복하여 내 영혼에 깊게 새겨지도록…….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이제 제 신으로 군림하시는군요. 저는 당신의 사랑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여 끝없는 사랑에 포개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요. 아, 아스타리온. 내 저물지 않을 태양. 나의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흰 박쥐. 나의 오만하신 군주여. 사랑해요. 당신께서 숨결을 앗아가 더는 박동하지 않는 심장이 여전히 뛰는 듯한 착각에 침잠할 만큼, 두근거리는 환청이 영영 가시지 않을 만큼 끝없이…….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어요.

 

***

 

프레데리카가 이윽고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남편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짧게 쓰고자 했건만, 가득 차다 못해 범람하는 마음은 마지막 남은 한 장까지 빼곡히 채워서야 겨우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편지지 귀퉁이에 입술을 살며시 맞대었다 떼고는 사기그릇에 얹었다.

 

“잠시만 기다려주렴. 주인님께 함께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으니.”

 

자리에서 곧장 일어난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전지가위를 들며, 마주 보는 지척에 심어진 석류나무로 걸어갔다. 아스타리온과 현재 머무는 지역에 정착하며 새롭게 심은 과수였다. 온실이 아닐지라도 한창 수확 철인 만큼 몽우리가 진 양 불그스름하게 부푼 과실이 주렁주렁했다. 프레데리카는 탐스럽게 영근 석류를 유심히 응시하다가 그중 하나를 비틀어 땄다.

 

잠자코 뒤를 따르던 시녀가 프레데리카의 의중을 이해하였는지 서둘러 명주로 감싼 과도를 테이블에서 가져와 건네었다. 그녀는 과도를 슬그머니 꺼내어 손아귀에 쥔 석류를 반으로 갈랐다. 칼날을 타고 흘러내린 과즙이 창백한 살결을 적시며 소매를 적셨다. 프레데리카는 그대로 석류를 한입 가득 깨물었다.

 

그녀는 제 박제된 온실에서 새롭게 움튼 과수가 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은 비록 기억하지 못하나 아스타리온이 처음 허락한 피 한 방울이 알알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감사의 의미로 매해 첫 과실은 온전히 아스타리온에게 바쳤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사소하고도 엄중한 약속이 석류와 같이 무르녹다가 어느 순간 역부득이 사라질 터였다. 그러나 기저의 사랑만큼은 거처를 어디로 옮기든지 아스타리온이 오로지 배우자만을 위해 잊지 않고 세우는 온실처럼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터였다. 프레데리카는 반으로 가른 석류를 사기그릇에 올려놓으며 시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떠나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프레데리카, 나의 아름다운 달. 네가 직접 내 곁으로 내리쬐면 좋으련만 매정하기 짝이 없어. 얼른 내게로 돌아와. 너를 위해 내 오늘 모든 일정을 미뤘으니.”

 

돌연 뇌리에 오로지 그녀에게만 허락된 귓속말이 파고들었다. 거역할 수 없는 강핍이었다. 프레데리카는 눈꺼풀을 미약하게 떨며 양손으로 가슴을 내리눌렀다. 다시 한번 말라 비튼 심장이 뛰었다.

 

프레데리카는 입술에 묻은 달큼한 과즙을 훔치며 온실을 떠났다. 남편의 서재에 당도하거들랑 곧 제 입술에서 다시 한번 꽃이 흐드러지고 핏방울 같은 선홍색 씨가 알알이 쏟아질 터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끝내 모조리 마모되어 영영 사라질지언정 사랑만큼은 불멸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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