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타브] Have a good journey, Little Ravengard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는 어느 날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공백포함 14819자

*가내 타브(히아신스 /1체형/여성/티플링)가 등장합니다.

*윌 대공 루트에 언급되는 수양 딸,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가 주인공입니다.

*타브와 윌이 별로 안 나옵니다.

*등장하는 여러 npc들의 말투, 행동에 개인 해석이 쎄게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곧잘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는 한다. 대부분의 고집은 얼마 안 가 흥미를 잃고 사그라들지만, 끝까지 남아 주변인이 골머리를 앓게 하는 고집 또한 존재했다.

얼마 전 10살이 된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의 경우 ‘뿔’이 그 고집의 대상이었다. 소녀가 뿔에 사로잡힌 건 며칠 전 쟈니스의 부인의 어린 아들과 같이 놀고 난 이후부터였다.

 

“제 머리색은 엄마를 닮은 거래요.”

 

“거짓말! 넌 금발이고 쟈니스 이모는 아닌걸?”

 

“저희 엄마도 어릴 때는 금발이었대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어두워졌다고 했어요.”

 

소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집어 릴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봐요! 벌써 조금 어두워진 거 같지 않아요?”

 

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의 머리카락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쵸?”

 

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릴리는요. 부모님께 뭘 물려받았어요?”

 

소년의 질문에 릴리는 한참을 고민했다.

 

“잘 모르겠는데...눈 색?”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조금 다른 거 같던데...맞다! 두 분 다 뿔이 있으셨죠? 그러면 릴리도 뿔이 생길까요?”

 

뿔이 생길까요?

 

그 순수하고 악의 없는 질문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쭉 뺀 채, 릴리는 방 안을 바쁘게 오가는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릴리의 시선은 한참 전부터 자신의 부모님, 정확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뿔들에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의 뿔은 위로 말려 올라간 모양이라 아이가 장신구나 깃발 같은 걸 달며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반대로 어머니의 뿔은 아래쪽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끝부분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릴리는 아주 가끔 그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중심을 잡는 놀이를 하고는 했다.

릴리의 부모님은 엄하지 않은 편이라, 소녀가 자신들의 뿔을 가지고 논다고 혼을 내지는 않았다. 가끔 어머니의 뿔에 올린 물건이 떨어질 때면, 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다칠 뻔했다며 주의를 주기는 했다. 하지만 이 영악한 소녀는 그럴 때마다 부러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니를 올려다보고는 했다.

 

난 괜찮아, 윌. 그냥 장난이잖아.

 

어머니가 상냥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타이르기까지는 일 분, 아니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릴리는 언제든 부모님의 뿔로 장난을 칠 수 있었고 ‘자신의’ 뿔을 원할 이유도 없었다.

 

뿔이 생길까요?

 

그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릴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작은 발로 복도를 뜀박질하여 자신의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열심히 달려오는 릴리를 발견한 얼더 레이븐가드는 양팔을 벌려, 소녀를 안아 들 준비를 했다.

릴리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할아버지의 품 안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의 두 팔이 자신을 꽉 끌어안고 두 발이 붕 떠올라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자, 릴리는 자신이 할아버지를 찾아온 이유도 잊고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소녀의 웃음소리에 얼더의 근엄한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먼 옛날 소녀의 아버지가 했던 말처럼, 릴리는 늙은 위더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게 할 법한 소녀였다.

두 발이 땅에 닿자 소녀는 어지러움에 살짝 휘청거렸다. 그런 소녀의 등을 받쳐주며, 얼더가 물었다.

 

“그래, 어쩐 일로 그렇게 급하게 달려왔느냐?”

 

그제야 목적을 떠올린 릴리는 얼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완전히 닮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아버지가 보였다. 릴리는 발끝을 들어 조금 더 위, 얼더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그 위에 뿔이 없었다.

 

“할머니는 뿔이 있었어요? 아빠처럼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얼더는 릴 리가 본 적 없는 할머니를 궁금해할 뿐이라 여겨, 소녀의 호기심에 답을 내려주었다.

 

“아니. 윌의 뿔은...나중에 생긴 뿔이다.”

 

얼더는 뭉뚱그려 그렇게 대답했다. 윌에게 뿔이 생기게 된 과정은 어린 소녀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중에요?”

 

“그래, 나중에.”

 

“그럼 저도 나중에 뿔이 생겨요?”

 

그제야 소녀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게 된 얼더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뿔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너의 부모와 내가, 그리고 이 발더스 게이트가 널 사랑한다는 거지.”

 

얼더의 말은 제법 교훈적이고 또 감동적이었지만, 릴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애초에 ‘나중에’라는 단어에 사로잡힌 상태인 소녀에게는 그 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소녀는 그날 온종일 언제쯤 자신에게도 뿔이 생길지에 대해 고민했다. 식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하다못해, 침대에 누워 부모님이 해주는 모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뿔을 생각했다.

릴리는 눈동자를 굴려, 침대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딸을 재우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어느새 추억에 빠져들어 함께 여행하던 시절의 추억을 나누고 있었다.

게일, 섀도하트, 민타라. 뜨문뜨문 익숙한 이름들이 들렸다. 릴리도 들어 본 적 있고 몇 명은 만나 본 적도 있는 부모님의 옛길동물들의 이름이었다. 그 뒤로도 아는 이름들이 이어졌다.

레이젤, 아스타리온, 할신, 자헤이라. 마지막 두 사람의 이름에 릴리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할신 삼촌과 자헤이라 이모는 드루이드였다. 그리고 릴리가 알기로 드루이드는 아주아주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뿔이 언제 생기는지도 알고 있지 않을까?

릴리는 두 사람에 대해 아는 사실을 머릿속에 나열해봤다. 할신 삼촌은 저 멀리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먼 곳은 아니었지만, 발더스 게이트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릴리에게는 다른 세계나 다름없었다. 자헤이라 이모는 발더스 게이트 아랫도시에 살고 있다. 아랫도시 역시 부모님의 손을 잡고 두어 번 가 본 게 다였지만, 다른 곳보다는 훨씬 가까웠다. 그러니까 할신 삼촌이 있는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똑똑하지만 워터딥이라는 멀고 먼 도시에 있는 게일 삼촌을 찾아가는 것과 비교하면 말이다.

점심이 지나면, 부모님은 또 바빠질 것이다. 할아버지 역시 불주먹 용병대의 훈련 때문에 보이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때 몰래 빠져나가 아랫도시에 자헤이라 이모의 집에 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면.....

머릿속으로 작은 모험을 계획하는 사이, 릴리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둘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윌과 히아신스는 어느새 잠든 딸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소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피해, 관문 앞에 도착한 릴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 문만 지나면, 아랫도시였다. 릴리는 미리 생각해 둔 변명거리를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자신은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가 아니라, 그냥 오로라. 아버지 역시 윌 레이븐가드 대공이 아닌, 장사꾼 윌리엄이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윗도시의 귀족에게 편지를 전하고 오는 길이다.

 

“거기, 어린 아이 혼자서 뭐하는 거죠?”

 

하지만 애써 생각해 온 변명을 써먹기도, 불주먹 용병대 대원이 릴리를 불렀다. 소녀는 잔뜩 경직된 채로 자신을 부른 불주먹 용병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릴리보다 조금 더 큰 키의 굵은 곱슬머리를 가진 노움 여인이었다.

 

“어. 저는 릴... 오로라구요. 저희 아버지는 상인인 윌리엄인데요.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어요. 그래서 여기는 잠깐 온 거구 이제 아랫도시로 가야 해요. 저는 원래 아랫도시에 살아요!”

 

눈에 띄게 긴장한 릴리가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릴리의 말을 듣고 있던 여인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마침 저도 아랫도시에 볼 일이 있는데. 가는 곳까지 데려다줄까요?”

 

릴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불주먹 용병대와 함께 라면 아주 쉽게 아랫도시로 갈 수 있었고 길을 잃을 걱정도 없었다.

 

“네! 데려다주세요!”

 

릴 리가 힘차게 말하자 여인은 손을 내밀었다. 릴리는 그 손을 잡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자헤이라 이모네 집이요!”

 

여인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엘레라신의 집 말이죠? 알겠어요.”

 

여인의 손을 잡고 걸으니, 금방 아랫도시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엘레라신의 집은 관문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집 앞 계단에 도착하자, 여인은 릴리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자, 도착했어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는 목을 숙이며 우렁차게 감사 인사를 했다.

 

“천만에요. 즐거운 모험이 되기를 바랄게요.”

 

여인의 말에 릴리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모험 중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그 나이대에는 작은 모험을 하니까요.”

 

여인은 릴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발길을 돌렸다. 두어 걸음 정도를 내디딘 여인은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부모님께 데벨라가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전해줘요. 십 년 전 일은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도요.”

 

데벨라는 릴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데벨라가 처음부터 릴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뿔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힌 릴리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녀는 자신을 도와준 이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데벨라’라는 이름을 두어 번 발음해본 뒤, 엘레라신의 집의 문을 두드렸다.

 

“자헤이라 이모!”

 

릴리는 자헤이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발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하며 바닥을 두드렸다. 소녀가 다섯 번째로 발꿈치를 내렸을 때, 붉은 머리에 뾰족한 귀를 가진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조르드 오빠!”

 

그가 자헤이라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릴리가 외쳤다. 조르드는 릴리를 알아보지 못한 듯 소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릴리는 그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머리카락을 뒤로 바짝 넘기고 자신의 두 눈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조르드는 각자 갈색과 회색인 릴리의 양쪽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릴리...레이븐가드?”

 

처음 ‘릴리’라는 이름은 발음할 때 불확실함이 묻어났던 조르드의 목소리는 ‘가드’라는 단어를 이야기할 때는 놀라움을 담아내고 있었다.

 

“어쩐 일로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너 혼자야?”

 

“혼자 왔으니까요! 자헤이라 이모를 만나러 왔어요. 아, 맞다. 엄마랑 아빠한테는 비밀이에요!”

 

릴리의 말이 길어질수록 조르드의 눈빛에 경악이 차 올라갔다.

 

“그러니까 윗도시부터 여기까지 혼자 왔다고?”

 

“사실 완전 혼자는 아니었어요. 데발라씨라는 불주먹 용병대 대원 분이 데려다주셨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네..”

 

조르드는 가만히 릴리를 내려보았다. 잠시 고민하듯 말이 없던 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릴리가 들어 올 수 있게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들어와, 어머니는 안에 계셔.”

 

조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릴리는 단숨에 자헤이라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거실에서 대화 중인 제셈과 테이트를 거쳐, 도착한 주방에는 자헤이라와 피그가 있었다. 릴리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온은 불주먹 용병대 일로 바쁜지 보이지 않았다.

 

“자헤이라 이모!”

 

릴리의 외침에 피그와 이야기 중이던 자헤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자헤이라의 시선은 릴리와 같이 왔어야 할 보호자들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끝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자헤이라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윌과 히아신스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있는 거지?”

 

“엄마랑 아빠는 안 왔어요!”

 

“그러니까. 몰래 나왔다는 말이군.”

 

소녀는 대답 대신 해실 웃었다. 긍정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자헤이라가 화를 내기 전에 애교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약삭빠른 행동이기도 했다.

이 작전은 상대가 누구든 대부분 잘 통하는 편이었다. 설령 그 자헤이라라고 해도 말이다. 그녀는 릴리를 꾸짖는 대신 크게 한숨을 쉬며, 자신 옆에 있는 의자를 빼 주었다. 소녀는 자헤이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옆으로 가 앉았다.

 

“그래, 꼬마 레이븐가드. 뭣 때문에 이 늙은 하퍼를 찾아온 거지?”

 

“이모! 이모는 드루이드죠?”

 

자헤이라가 살짝 몸을 숙여, 릴리와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래, 맞아. 난 드루이드야.”

 

“드루이드는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 맞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 드루이드들이 남들보다 지혜로운 건 맞지만, 모든 드루이드가 그런 건 아니거든.”

 

자헤이라의 말에 릴리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내가 똑똑한 드루이드인지 묻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뭔지 말하는 건 어때? 분명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날 찾아온 거겠지, 꼬맹이?”

 

“음. 맞아요.”

 

자헤이라는 팔짱을 낀 채 릴리를 바라봤다.

 

“말해봐.”

 

“저는 뿔이 가지고 싶어요! 언제쯤 뿔이 날까요?”

 

“뿔? 그러니까 네 말은...머리에 나는 그 뿔 말이야?”

 

릴리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크게 움직였는지 하마터면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해, 자헤이라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릴리를 잡아줘야 했다.

 

“갑자기 왜 뿔이 가지고 싶어진 거지?”

 

릴리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기 시작했다. 사실 왜 가지고 싶은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부모님께 뿔이 있으니 자신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그 말을 그대로 하기로 했다.

 

“엄마도 뿔이 있고 아빠도 뿔이 있잖아요? 그럼 저도 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자헤이라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줘야 이 어린아이가 납득하고 집으로 돌아갈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만큼 나이를 먹고 이렇게 많은 자식이 있는데도, 어린아이를 냡득시키는 일은 자헤이라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꼬마 레이븐가드. 너는 무슨 종족이지?”

 

“하프 엘프라고 했어요!”

 

“그럼 히아신스, 너희 엄마는?”

 

“티플링이요!”

 

자헤이라가 릴리를 빤히 바라봤다. 이렇게 말하면, 소녀가 깨달음을 얻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릴리 역시 자헤이라를 마주 봤지만, 그 시선에 묻어나는 건 어떠한 깨우침이 아닌, 호기심이었다.

 

“애들은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죠.”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피그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릴리. 티플링은 원래 대부분 뿔을 가지고 있어.”

 

“정말요?”

 

릴리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티플링이라고는 어머니와 대모 뿐인 릴리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래. 그리고... 혹시 뿔이 있는 하프 엘프를 본 적 있니?”

 

“음- 아뇨? 그럼 제가 뿔이 없는 이유는 하프 엘프라서예요?”

 

“바로 그거지.”

 

피그는 자헤이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자, 애들이랑은 이렇게 대화하는 거예요. 아셨죠, 사령관님?”

 

“그래그래. 적어도 넌 나보다 좋은 어머니가 되겠네.”

 

“지금 비꼬시는 거예요?”

 

“내가? 흠, 그럴지도 모르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하던 릴리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빠는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뿔이 안 나지만 아빠는 뿔이 있는걸요?”

 

“네 아빠의 뿔은 특이 케이스야. 내가 윌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뿔이 있는 상태였지만, 적어도 네 아빠의 뿔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긴 뿔이 아니라는 건 알지.”

 

 

의자 다리 사이로 삐죽 나온 릴리의 다리가 앞뒤로 흔들렸다.

 

“그럼 아빠처럼 뿔이 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말했잖아? 난 너희 아빠가 뿔이 생기는 걸 직접 보지 못했어. 그리고 만일 직접 봤다고 해도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을 거다.”

 

무언가 반박의 말을 뱉으려는 듯 릴리의 입이 열렸지만, 자헤이라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소녀의 말을 멈춘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가 어떠한 경로로든 그 방법을 알아내 시도하려고 하면, 너희 부모가 화를 내는 건 둘째치고 내가 먼저 널 혼낼 거야. 날 ’이모‘라고 부르는 아이가 잘못된 길을 걷게 할 수는 없거든.”

 

“좋아요....”

 

릴리는 마지못해 대답하는 티가 역력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럼 이모한테 물어보는 건 포기하고 엄마랑 같은 티플링들한테 물어볼래요! 어떻게 하면 뿔이 생길 수 있는지요!”

 

어떠한 말을 하든 릴리는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헤이라가 한숨을 쉬었다. 소녀는 순순히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내가 티플링을 하나 소개해주지. 엄한 사람을 귀찮게 하는 대신 그녀에게 물어봐.”

 

자헤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잠시 뒤 돌아온 자헤이라의 손에는 약도가 그려진 종이가 들려 있었다. 종이를 받아든 릴리는 엘라라신의 집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한 번씩 작별 인사를 건넨 뒤에야 그곳을 나왔다.

자헤이라의 약도는 소녀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그려져 있었다. 주변의 간판을 열심히 읽고 가끔 길이 헷갈릴 때면,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도움을 청한 끝에 릴리는 한 음악 학교 앞에 도착했다.

입구를 서성거리는 릴리를 발견한 직원이 소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금은 학생을 모집하는 기간이 아닌데.”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인물에 화들짝 놀란 소녀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릴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한 차례 심호흡하고 해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 한 뒤 부러 큰 소리로 뱉어냈다.

 

“저는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고요. 알피라 씨를 만나러 왔어요!”

 

“레이븐가드?”

 

“네!”

 

직원은 한 차례 릴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입고 있는 옷이 고급스러워 보이니 부랑아의 허황된 거짓말을 아니리라 판단되었다.

 

“나를 따라오렴.”

 

직원의 손길에 학교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릴리는 직원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맞지 않는 보폭 탓에 소녀의 숨이 가빠질 때쯤 직원이 한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직원이 노크를 하고 안에서 들어오라 대답하는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녀는 그 상황이 어쩐지 긴장돼, 괜히 머리를 매만졌다.

 

“이 아이가 이사장님은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본인이 레이븐가드라고 하던대요?”

 

직원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탓에 알피라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릴리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소녀를 보기 위해 근처로 다가오던 알피라가 보였다. 보라색과 검은색이 섞인 머리카락을 가진 푸른 피부의 여성. 엄마의 한쪽 눈이 그렇듯 눈동자 밖이 검은색이었고 무엇보다 아주 멋있는 뿔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의 뺨이 기대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너구나? 릴리! 맞지?”

 

알피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를 아세요?”

 

“그럼! 네가 아주 어릴 때, 한 번 본 적 있는걸? 윌이 너를 안고 있었고 히아신스가 그 옆에 서 있었어.”

 

알피라는 몇 발자국 더 다가와 몸을 숙이고 릴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내가 네 대모가 될 뻔했거든.”

 

“네?!”

 

자신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에 릴리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손을 살짝 내린 소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엄청 고민했던 모양이야. 그러다가 히아신스가 대모는 티플링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대. 윗도시에 사는 너는 어쩌면 티플링을 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말을 이어가는 알피라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릴리는 알피라가 좋아졌다.

 

“두 사람 다 티플링, 정확히는 엘터렐에서 온 티플링들이랑 연이 깊어서 처음에는 후보가 많았어. 그러다 이야기가 나온 게 나랑...”

 

“카를라크 이모요?”

 

카를라크의 이름을 발음 할 때면, 릴리는 언제나 기분이 좋아졌다. 카를라크는 릴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어른이었다. 물론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알피라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 릴리는 카를라크가 대모라 좋았다.

유독 추웠던 어느 날. 정원에서 눈사람을 만들다 온몸이 꽁꽁 얼었던 적이 있었다. 부모님을 만나러 왔던 카를라크는 그런 릴리를 발견하고는 소녀를 꽉 안아주었다. 남들보다 높은 카를라크의 체온이 소녀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자, 훨씬 더 차가운 눈보라가 내리치더라도 자신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카를라크가 소녀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거운 비명이 들릴 때까지 달리거나, 부모님 몰래 조그마한 도끼를 선물해줬을 때도 좋았지만, 그 겨울날의 기억은 소녀가 카를라크를 아주아주 좋아하게 만들었다.

 

“정답이야.”

 

알피라의 목소리에 릴리는 기억에서 헤어나왔다. 기분 좋은 날의 기억이었던 탓에 어느새 릴리의 입가에는 미소기 배어 나오고 있었다.

 

“카를라크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네! 정말 좋아해요! 카를라크 이모가 더 자주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것이 소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정을 담은 말이었음을 눈치챈 알피라가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그럼, 옛날이야기는 이쯤 하고. 무슨 일로 날 찾아왔니?”

 

“맞다! 뿔! 저는 뿔이 가지고 싶어요! 언제쯤 뿔이 자랄까요?”

 

자헤이라가 그랬던 것처럼 알피라 역시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얼더가 그랬던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조금 더 크면 자라지 않을까?”

 

“이사장님? 그 말은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직원의 말에 알피라와 릴리가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 다 그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아이에게는 진실을 말해줘야죠. 이 아이는 하프 엘프니 뿔이 자랄 리 없습니다.”

 

“자헤이라 이모도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뿔이 있는걸요? 그러니까 저한테도 뿔이 있어야죠.”

 

조금 전 자헤이라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릴리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방법은 모르지만, 저희 아빠는 인간이고 나중에 뿔이 생겼으니 저한테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직원은 거만한 얼굴로 혀를 찼다.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공 부부에게 뿔이 있다고 너한테 뿔이 자라는 건 아니지. 입양된 아이잖아? 피가 안 섞였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어?”

 

알피라는 다급하게 직원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럼...저는 뿔이 안 자라요? 피가 안 섞여서?”

 

알피라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릴리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었다. 그녀가 ‘아니’라고 대답해주기를 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알피라는 소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이는 대답이나 마찬가지였고 소녀는 축 처진 어깨로 방을 나갔다.

 

“세상에! 그걸 말하면 어떡해!”

 

“네? 하지만 이 도시에 대공 부부의 딸이 수양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본인은 모를 수도 있지! 아이한테 이런 건 아주 예민한 문제라고!”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릴리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릴리는 가야 할 곳의 반대쪽, 윗 도시에서 먼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다.

빨랐던 릴리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릴리는 어느새 그 자리에 멈춰 서 발끝으로 돌을 차고 있었다. 걷다보면 괜찮아 질 줄 알았는데, 걸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곳을 다녔더니 다리가 아팠다.

땅을 바라보며,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지 고민하는 릴리를 누군가가 밀치고 갔다. 잠시 휘청이던 릴리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손에 익숙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릴리의 주머니였다.

그동안 모은 용돈도 아랫도시의 지도도 모두 저기에 들어 있었다.

 

“소매치기...소매치기야!”

 

소녀는 새된 소리로 외치며 그를 따라 뛰기 시작했지만, 갑작스럽게 움직인 탓에 발이 꼬여 넘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부딪힌 소녀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무릎이 아파왔지만, 릴리는 눈물을 꾹 참았다. 울면 안 됐다.

 

‘울면 안 돼. 나는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야. 우리 부모님은 발더스 게이트를 구한 영웅이고. 나는 두 분의 자랑스럽고 용감한 딸인 걸? 또 할아버지는 불주먹 용병대의 원수고. 또 또....’

 

울면 안 되는 이유를 열심히 나열해봤지만,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부! 저기 울고 있는 건 릴리 아닌가?”

 

갑작스럽게 눈물이 뚝 그쳤다.

 

“아무래도 우리가 잡은 도둑이 릴리를 울린 모양이다!”

 

들어 본 적 있는 말투였다.

 

“민스크 삼촌?”

 

갑작스럽게 눈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자 한쪽 손에 소매치기를 들고 있는 민스크가 보였다.

 

“네 말대로 릴리가 맞았다 부! 잠깐, 민스크가 알기로 릴리는 윗도시에 있어야 하는데?”

 

부가 당황함이 묻어나는 태도로 찍찍거렸다.

 

“그래 부! 네 말대로 릴리가 길을 잃은 것 같다. 민스크와 부가 릴리를 데려다주는 게 어떨까?”

 

쾌활한 태도로 대화하는 부와 민스크를 보자 갑작스럽게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동안 참고 있던 울음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민스크, 삼촌...”

 

“이런! 민스크가 릴리를 울린 건가?”

 

소녀는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상황 설명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말은 쏟아내며 한참을 울었다. 민스크와 부는 릴리는 달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잠시 후 소녀는 민스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부를 올려놓은 채, 바실리시크 게이트 근처를 걷고 있었다.

 

“부가 불주먹 용병대 막사로 가는 길을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릴리는 너무 까마득하게 높아 잘 보이지 않는 민스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보통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아요?”

 

어찌나 울어댄 건 지 소녀는 눈가가 짓물러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는 상태였다.

 

“자헤이라가 그랬다. 히아신스와 윌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다.”

 

릴리가 우뚝 걸음을 멈췄고 릴리와 손을 잡고 있던 민스크는 두어 걸음을 더 가다, 소녀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릴리? 왜 그러나?”

 

“엄마랑 아빠가 절 기다린다고요?”

 

민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제가 아랫도시에 있는 걸 두 분이 아세요?”

 

“오, 민스크는 자세한 건 모른다. 잠깐. 뭐라고 부?”

 

민스크가 릴리의 손바닥 위에서 찍찍거리는 부를 받아 들고 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가 말하길. 자헤이라가 이렇게 전해 달라도 했다는군. 꼬맹이, 내가 네 부모님한테 이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제가 만일 여기서 도망치려고 하면....잡으러 오실 거예요?”

 

“물론 잡으러 갈 거다. 릴리는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어리다.”

 

릴리는 민스크를 한참이나 바라본 뒤에야, 그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쯤은 억지로 끌려 들어가게 된 불주먹 용병대 막사에는 민스크가 말한 대로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모험은 즐거웠니?”

 

팔짱을 낀 채 묻는 히아신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릴리는 차라리 어머니가 화를 내는 편이 덜 무서웠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히아신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윌이 말했다.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 오늘은 정말 혼나야 할 거야.”

 

릴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님을 번갈아 보았다. 곧바로 몸을 돌려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바로 옆에 있던 민스크에 의해 저지당했다. 민스크가 붙잡고 있던 릴리의 팔은 곧바로 윌에게 인계되었다.

 

“자, 왜 갑자기 가출한 건지 말할 준비는 됐어?”

 

“가출 아니에요! 전 그냥...알고 싶은게 있어서 돌아다녔던 거예요.”

 

“뭘 알고 싶었는데?”

 

“저는...언제쯤 뿔이 날지 알고 싶었어요.”

 

“그건...”

 

윌이 히아신스 쪽을 힐끔거렸다. 그 사이 릴리가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다들 저는 뿔이 안 날 거래요! 하프 엘프는 뿔이 안 난다나요? 그런데 아빠는 인간인데 뿔이 났잖아요! 그런데 글쎄 뭐라는 줄 알아요? 전 엄마 아빠랑 피가 안 섞여서 뿔이 안 날 거라는 거 있죠?”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부 쏟아낸 릴리가 숨을 몰아쉬었다. 전부 토해내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릴리...그러니까 말이야.”

 

윌은 침착하려는 듯 심호흡을 하며,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뒤쪽에 서 있던 히아신스는 희게 질린 표정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윌이 할 말을 찾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그래, 사실 우린 널 입양했어. 미안, 윌. 하지만 빨리 말해줘야 할 거 같아서.”

 

윌은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딸의 손을 꼭 붙잡고 말을 이어갔다.

 

“잘 들어 릴리.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잠깐만. 설마 제가 그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릴리의 외침에 막사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정말이지, 두 분은 너무 순수해서 걱정이라니까요? 인간이랑 티플링 사이에서 어떻게 하프 엘프가 나와요? 저는 ‘하프’, ‘엘프’라고요!”

 

그 말이 조금 아득했는지, 히아신스가 손끝으로 미간을 눌렀다.

 

“넌…조금 전까지 피가 안 섞여서 뿔이 안 난나다고 슬퍼하지 않았어?”

 

“네! 그러니까 피가 안 섞인 게 아니라 뿔이 안 난다는 점이 슬펐던 거죠!”

 

아이들은 가끔씩 어른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지점에 집착하고는 한다. 그러니 이 경우는 머릿속이 오로지 뿔로 가득차, 피가 안 섞였다는 점과 뿔이 안 난다는 점을 연결 시킬 수 없었던 릴리를 이해하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히아신스와 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히아신스는 윌과 릴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좋아. 가는 길에 머리 장식을 하나 주문하는 걸로 하자. 네가 원하는 뿔 모양으로.”

 

“다몬한테 부탁하면 잘 만들어 줄 거야.”

 

“정말요? 그럼 저도 뿔이 생기는 거죠?”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다, 부!”

 

홀로 아랫도시로 왔던 소녀는 이번에는 부모님의 손을 잡은 채 집으로 돌아갔고 소녀의 모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아이들은 곧잘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는 한다. 대부분의 고집은 얼마 안 가 흥미를 잃고 사그라들지만, 끝까지 남아 주변인이 골머리를 앓게 하는 고집 또한 존재했다.

얼마 전 10살이 된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는 뿔 모양 머리띠를 쓴 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소녀는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이내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가 남기고 간 종이에는 엉성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 아빠께. 제 생각에 저는 이제 다 큰 거 같아요. 그리고 어른은 직업을 가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바드가 되기로 했어요! 아랫도시로 가서 알피라 이모의 음악 학교에 입학할게요!

두 분의 귀여운 딸 릴리 오로라 레이븐가드.

*추신. 레이젤 이모가 페이룬에 오는 날에는 꼭 불러주셔야 해요.]

“윌? 혹시 내 눈에만 릴 리가 안 보이는 건 아니지?”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더니, 아무래도 그 말은 이 발더스 게이트에도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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