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게3/승천아스타브]착각

승천아스타리온x체형1(시스젠더 여성)/ 타브 사망 직후 과거로 회귀한 승천 아스타리온 시점

발더스 게이트 3 by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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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리온의 눈앞에서 그 자신을 막아선 아내는 이윽고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가 수많은 아침마다 직접 빗겼던 금발과 가느다랗고 끝이 불그스름했던 손가락, 시선이 마주치거들랑 다소곳이 휘며 웃음 짓던 은회색 눈동자가 한순간에 산산이 조각났다. 가혹하게도 모조리.

 

차라리 시신이라도 남아있더라면 허무한 희망이라도 붙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프레데리카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을 영원히 굴러떨어져야 할 무저갱으로 밀어젖혔을 뿐.

 

***

 

머리가 욱신거렸다. 목구멍을 옥죄며 오랜 시간 잊었던 갈등이 들끓었다. 동시에 이제는 생소하기까지 한 끔찍했던 감각이 아스타리온을 뒤흔들었다. 그는 오랜 악몽을 가까스로 떨친 사람인 양 소스라치며 몸을 다급히 일으켜 세웠다.

 

“허억……!”

 

아스타리온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른 채 사위에 자욱하게 가라앉은 안개를 망연히 응시했다. 눈이 매캐하다 못해 따가워 연신 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시신이 뒤엉켜 타는 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는 결국 코를 찌르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옹송그린 채 재차 구토했다. 그러나 아무리 속을 게워도 위액은커녕 그가 조금 전까지 닥치는 대로 들이켰던 피조차 역류하지 않았다.

 

이윽고 비릿한 누린내가 더는 후각을 자극하지 못해 뉘엿거리던 속이 가라앉아서야,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손톱을 세운 채 필사적으로 목을 긁고 있음을 눈치챘다. 손톱 사이로 싸늘하게 피가 맺혔다가 목젖을 타고 흘렀다. 그는 그대로 주먹을 느릿하게 쥐며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아내를 살해한 대역죄인을 모조리 말살하던 도중이었다. 개중에 이대로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자며 폭탄에 마법을 불어넣던 치가 있었던 것 같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파편이 피부에 눌어붙어 근육을 파고들었다. 스폰일 적 햇볕에 닿았을 때와 같은 작열통이 우글거리며 그를 집어삼켰다. 빠르게 점멸하는 시야에서 홍옥과 같은 돌벽이 무너져 내렸다.

 

아스타리온은 제 발치의 먼지를 끌어모으고 눈을 감았다. 제 손을 잡아 환생의 굴레에서도 벗어난 아내였다. 내겐 힘이 있지만, 네가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녀와 재회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아니, 재회가 가당키나 할까.

 

그는 기둥이 무너지고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빠르게 붕괴하는 자르 궁전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이자 동시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덮어씌운 터전이었다. 그러나 늘 집 안을 환히 밝히던 빛이 사라진 지금, 궁전에는 망령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아내의 허락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고로 죽음조차도 그녀가 거둬야 옳았다. 아스타리온은 자르 궁전의 잔해에 생매장되고자 눈을 감았다.

 

분명 그대로 권태로운 영생을 끊고 지옥으로 추락한 줄만 알았는데.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들어 벌겋게 충혈된 눈을 재차 찡그렸다. 가까스로 초점을 맞추며 흐릿하던 시야가 트이자 노틸로이드의 잔해가 보였다.

 

“여기는…….”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자신이 등지고 있던 마인드 플레이어 포획낭 너머를 주시했다. 짭조름한 바람이 연기를 내몰자, 절벽 아래로 광막한 바다가 넘실거렸다. 따사로운 늦여름의 햇볕을 받아 윤슬이 퍼질 때마다 눈이 부셨다. 격노에 물든 한탄이 실소와 함께 흘렸다. 아스타리온은 제 옷차림 따위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양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단검을 붙들고 일어섰다.

 

“신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잔인한데, 반대로 눈물겹도록 감사하군.”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한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잇새에서 허탈한 웃음이 연신 터졌다. 제 손으로 손수 문신을 새긴 뒤 제물로 폭살시켰던 카사도어의 노예로 돌아왔다. 추잡한 야욕 따위는 알지 못한 채 목숨을 부지하고자 수많은 사람을 유혹했던 과거로. 동시에 수백 년간 누렸던 힘이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흩어진 모래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절망하거나 분개하지 않았다. 힘이야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었다. 과거와 다르게 자신의 등에 새겨진 ‘시’가 메피스토펠레스와 치른 계약서임도 알았다. 이미 한 번 카사도어에게 굴욕을 주었는데 두 번이라고 불가능할까.

 

‘힘 따위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내가 정말로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의 영원불멸한 사랑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눈두덩에서 열이 오르고 눈물이 뺨을 적셔야 했으나 모든 게 섬뜩할 만큼 차갑게 말라 있었다. 그럼에도 더는 뛰지 않은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아스타리온은 초조하게 쥐고 있던 단검을 퉁기듯 고쳐잡으며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감고 청각을 곤두세우자 노곤한 음성이 들렸다. 환청처럼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목소리에 아내의 유언이 스며들었다.

 

“……사랑해, 아스타리온.”

 

그는 칼자루를 다시 한번 강하게 쥐었다가 허리춤에 고정한 칼집에 꽂았다. 드루이드 마을을 찾아 헤매는 두 사람이 마인드 플레이어와 한패는커녕 제 목숨을 위협할 적도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지나치도록 둘 수도 없다. 아스타리온은 숨을 들이켜며 매캐한 먼지와 연기를 들이마셔 잔뜩 쉰 목청을 다듬고는 입을 벌렸다.

 

“누가 여기 좀 도와줘!”

 

이윽고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흙먼지가 나직이 소용돌이치다가 가라앉았다. 등 뒤로 온통 예민하게 곤두세운 감각이 선득했다. 아스타리온은 눈을 질끈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마도 두어 걸음 정도의 지척에서 그의 아내가 서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존자인가 봐요! 괜찮으신가요?”

 

피로에 젖은 물음에는 낯선 타인을 향한 경계와 그럼에도 외면치 못하는 연민이 묻어나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건만 잔인하게도 다른 음성이었다. 잠시간만 떨어져 있어도 애틋하게 무르익는 그리움과 화사한 봄볕과 같은 환희, 그리고 영혼 깊숙이 사무치는 사랑까지도 온데간데없어 소스라치도록 낯설었다.

 

“서둘…….”

 

아스타리온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주먹을 쥐었다.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과장되게 눈썹을 우그러뜨린,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뇌 괴물을 몰아세웠다고 연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본 순간 기껏 암기한 한두 줄의 대사를 모조리 잊은 풋내가 배우처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걷잡을 수 없이 목구멍으로 치솟는 고해를 삼키고자 턱 근육이 뻣뻣하게 수축하였다.

 

“하…….”

 

분명 프레데리카였다. 제 허락도 없이 맹랑하게 산화한 배신자가 아니라 온전히 살아있는 단 하나뿐인 사랑이었다. 먼지와 재가 묻은 푸석푸석한 금발과 피에 젖고 화상을 입어 끝이 불그스름한 손가락, 시선이 마주하거들랑 돌연 말문이 막힌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까지도. 가혹하게도 모두 다.

 

“아스타리온, 내가 당신에게 말했을까?”

 

끝이 헤지고 얼룩진 갑주 위로 얇은 리넨 드레스가 넘실거리며 덧씌워졌다. 이윽고 길게 소매를 늘어뜨리며 금사로 박쥐를 수놓은 붉은 비단 허리띠를 동여맨 아내가 아스타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멀리서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다. 조금 전과 다르게 비린내 따위는 나지 않았다. 새벽마다 절벽 위에 드높게 세워진 궁전의 발코니에서 맡던 어렴풋한 냄새였다. 그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환상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돌연 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웃음 섞인 콧노래가 흥얼거려 게슴츠레 눈꺼풀을 꿈쩍거리자 비로소 그가 아는 프레데리카가 보였다.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돌려 자신과 아내를 에워싼 풍경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자르 궁전의 여름이었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장벽을 세운 궁전 남쪽에는 그가 아내를 위해 새로이 조성한 정원이 있었다. 싹이 움트는 초봄부터 가을이 무르익을 때까지 프레데리카는 종종 정원에서 머물곤 했다. 아내는 그에게 종속하여 견고하게 뿌리내렸던 자연과의 교류를 저버렸다. 그럼에도 아스타리온이 그녀의 근본만은 바꿀 수 없었듯 아내는 늘 그러하듯 꽃에 파묻혀 살기를 기꺼워했다.

 

고작해야 며칠만을 허무하게 흐드러질 뿐이건만, 그럼에도 찰나의 순란한 섬광 사이에서 서 있는 프레데리카를 보거들랑 그는 꽃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조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매해 여름마다 늘 그랬듯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정자 한가운데서 융단을 깔고, 프레데리카의 무릎베개를 베고 있었다. 정자 옆에 심은 아카시아가 새하얀 꽃다발이 늘어뜨리며 산들거렸다. 달큼한 향기가 정자를 가득 메우는 가운데 끝이 불그스름한 손가락이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나릿하게 떨어져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어여쁜 부인, 부인께서 베갯머리에서 종달새처럼 자주 조잘거리는 터라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구려.”

 

그대로 고개를 뒤젖힌 아스타리온이 길게 늘어뜨려져 이마를 간지럽히는 금발을 손가락에 감았다. 프레데리카가 수줍은 미소를 만개하며 제 머리카락을 붙든 손길을 나긋하게 저지했다. 아스타리온은 곧장 몇백 년 사이 무기 따위 들지 않아 살결이 보드라워진 작은 손을 거머쥐며 여린 피부에 입술을 비볐다. 송곳니를 세워 얕은 교상(咬傷)을 내고 싶은 충동이 잠시 일었으나 무시했다.

 

“그래도 넌 내게 숨기는 게 없어야 해, 그 무엇이든. 그러니……, 자, 말해봐.”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숙여 아스타리온과 눈을 마주쳤다. 언뜻 푸르른 은회색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거들랑 때때로 호수에 비친 제 그림자와 마주하는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어슴푸레 괴어 흔들리는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아내의 시선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닿는다는 사실이 아스타리온을 흡족게 했다.

 

“아스타리온. 당신을 처음 만났던 순간, 난 이미 사랑에 빠진 뒤였어.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던 거야…….”

 

환희가 폐부에 가득 차며 이미 포만감을 느낀 지 오래인 정복욕이 다시 들끓었다. 사랑을 노래하는 어떤 미사여구도 감히 프레데리카의 진솔한 고백에 비할 수가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몸을 돌려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뺨을 감쌌다. 콧잔등이 맞닿자 눈꺼풀이 잔약하게 떨리며 껌벅였다.

 

“당신은 아니겠…….”

 

프레데리카가 짐짓 짓궂은 어조로 스스러운 심상을 숨기고자 덧붙였으나 이내 아스타리온에게 함몰당해 삼켜야만 했다. 그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맞물리는 입술을 집어삼키며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받쳤다. 그러자 순종적인 아내는 그에게 고스란히 제 몸을 맡겼다. 그는 잠시 입술을 떼며 그녀를 융단에 눕힌 뒤 조금 전 아내가 그러하였듯 귓불을 매만졌다. 자글자글한 무더위에 드물게 열이 오른 피부는 고블린을 모두 소탕하고 티플링을 모두 구했던 밤, 삿된 마음으로 유혹했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카사도어에게 바칠 제물을 꼬드길 때와 하등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음을 두 사람 모두 잘 알았다.

 

그는 제 고해를 후회하지 않았다. 추잡하고 무참한 심연을 헤집어 진심을 속삭였기에 아내를 가질 수 있었다. 옛 동료 중 혹자는 그녀를 두고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탄식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꼬리가 엉키는 줄도 모르고 기어 다니는 시궁창 쥐새끼 같은 삶을 사느니, 수많은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다정한 여자의 유일한 오점이 되는 편이 옳았다.

 

부와 권력, 힘, 그리고 영원을 함께하는 가장 완벽한 삶까지……. 프레데리카는 아스타리온이 모두 장악하도록 묵인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노틸로이드의 잔해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마저 자신을 사랑했다는 한마디에 일순 숨이 막혔다.

 

모순되게도 그는 숨을 쉬지 않아도 되건만 살아있을 적처럼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배 속에 나비가 가득 채워 팔랑팔랑 날갯짓하듯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 순간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는 재차 집요하게 부정하고, 또 외면했다.

 

돌연 두개골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이 강타했다. 이윽고 뇌리에 울창하게 우거진 낯선 숲과 그림자조차 집어삼킨 어둑한 발더스 게이트의 골목이 뒤엉켜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아스타리온은 몸서리치듯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눈을 떴다.

 

프레데리카는 어느새 그가 손수 재봉사를 불러 맞춘 여름 드레스를 벗고, 부르튼 손으로 오래된 나무 지팡이를 쥔 채 얼떨떨한 눈으로 서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제야 제 머릿속에 지긋지긋한 올챙이가 심겨 있었음을 되새겼다. 다행히 그녀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미래는 보여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스폰의 약점을 모두 묵살하는 대단하신 올챙이일지언정 존재치 않은 시간을 퍼트릴 수 없는 듯했다.

 

‘아무렴, 온전히 나만의 기억이어야 해. 누구도 감히 들출 수도, 훔쳐볼 수도 없어.’

 

설령 더는 그의 신부가 아닌 프레데리카조차도. 그러나 동시에 아스타리온은 모순되게도 그녀가 제 머릿속을 들쑤실 수 없다는 사실에 통탄했다. 우습게도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릇되고 오만한 착각에 도취하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프레데리카.’

 

아스타리온은 더는 부정하거니와 외면하지 않아도 되었다. 굳이 손목을 붙들고 품으로 끌어안기며 일말의 죄책감을 숨기고자 이악스럽게 맞붙지 않아도 괜찮았다. 처참한 민낯을 다시 한번 드러내며 자신이 이제껏 오인했다고 속삭일 수만 있다면, 그는 완벽한 가운데 프레데리카에게 알량한 부채에 시달리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지금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니 매여있지 않아도 된다며 달래겠으나…….

 

고해에 귀를 기울이고 용서할 사람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아스타리온만 기억하는 허상이었다. 목이 탔다. 눈앞의 프레데리카는 제 기억의 잔상과 다르게 볼품없었다. 카사도어에게 바칠 요량으로 원치 않은 쾌락을 즐겨야 했던 과거에 마주쳤다면 일말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야말로 그가 가장 얕잡아보고 혐오했을 표본이었다. 아름답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자신이 걱정되는 양 섀도하트의 만류에도 다가서는 멍청한 판단도, 생채기로 울긋불긋한 얼굴도, 햇볕에 물든 싱그러운 체취조차도 모두 거슬렀다.

 

‘감히 샐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우리의 첫 만남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이제야 너를…….’

 

그럼에도 곱슬곱슬한 은발을 헝클이는 손길이 환상통처럼 이글거릴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메마른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미처 자각하지 못할 만큼 마주한 순간 아스타리온은 그녀에게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기고 만 뒤였다. 왜 이제야 자각했는지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로, 이유도 모른 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 당신, 당신도 납치당한 사람이었나요? 마인드 플레이어 벌레 때문에 정신이 연결된 듯한데.”

“아냐, 아니야. 마인드 플레이어라……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가.”

 

그는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으며 숨죽여 대답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혼란스러운 사람인 양 연기해 이 미련할 정도로 친절한 여자에게 이대로 환심을 살 요량이었다. 아스타리온이 바라는 대로 프레데리카는 이제 완벽하게 의심을 누그러뜨린 듯했다.

 

“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잠시, 놀랐을 뿐이야. 내 이름은 아스타리온. 발더스 게이트에서 놈들한테 납치당했지.”

“저는……, 프레데리카. 프레데리카예요. 괜찮다면 당신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어요?”

“굳이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 프레데리카. 실은 혼자서 움직일까 했는데. 그래……, 일행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아스타리온이 짐짓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데리카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신도 모르게 비집고 나온 버릇이었다. 그는 늘 언제나 아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여러 갈래로 땋아내려 쪽진 금발이 흐트러지고 흩날리도록 그녀가 홍옥의 새장에서 도망친 적은 없었으나, 일방적인 만족에서 비롯된 에스코트였다. 자신으로 인해 사시사철 서늘한 손과 맞닿거들랑 살아생전 한 번도 경험치 못한 평온이 물밀듯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아스타리온이 제 실책에 혀를 차며 다급히 손을 거두려고 했으나 프레데리카가 힘주듯 거머쥐었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멋쩍으면서도 해사한 웃음을 머금으며 묵례했다. 따스한 손이 낯설었으나, 동시에 그에게 비소로 자신과 마주 보고 서 있는 프레데리카가 백일몽이 아님을 자각게 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러면 함께 갈까.”

 

아스타리온은 이 순간 끔찍하게도 비참했고, 무진히도 기뻤다. 그러나 프레데리카는 영영 모를 터였다. 그가 먼저 흉금을 토로하지 않는 이상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런고로 아스타리온은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끝내 침묵할 작정이었다.

 

‘내 사랑……, 이번에는 기필코 너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해. 이전과 같은 비극은 맞이하지 않을 거야. 오로지 너만을 위해 성벽을 더욱더 견고하게 다지고 수많은 병사를 앞세워 감히 누구도 맞서지 못하도록 참살하겠어.’

 

그리하여 프레데리카는 다시금 몇 번이고 맞이할 자르 궁전의 찬연한 여름에서,

“프레데리카, 내 어여쁜 부인.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너를 내 계획에 이용하겠다고 오판했지만, 나 또한 결국 너와 똑같지. 그래, 네게 첫눈에 반했어. 네가 노틸로이드 잔해 주변에서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던 순간부터 속절없이, 무력하게도…….”

라고 자신이 속삭일 숫접은 고백만을 들으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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