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2024년 8월 10일 드림 60분 합작 제출본 ― 페이트 그랜드 오더 레이디 아발론
“꽃의 마술사라면, 꽃의 이름을 다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남자는 너그러운 투로 불평하고 있었다. 여자도 아무래도 좋다는 투였다. 설령 그가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는 조금도 진지하게 받지 않았을 것이다. 레이디 아발론에겐 더 이상 그럴 만큼의 현실감각이 없었다.
“누나가 꽃에 관련된 일을 해서 꽃의 마술사가 아니라서 말이지. 결국은 너와 다를 바 없이, 알아본 적 없는 것에 대해선 알 수 없단다.”
보랏빛 눈의 남자는 그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논리나 호소가 필요한 건 아니었고,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 하나 있기만 하면 되었다. 설령 농담이라도 사실 상관 없었다. 꿈에서만 만나는 상대에게 그런 걸 요구할 만큼 무지하진 않았다.
“흠, 그게 당연하겠지⋯⋯. 그래도 큰 화분도 아니고, 이만한 작은 화분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녀가 스스로 정리하지 않아서, 소년이 다가가 옆으로 넘겨주었다. 둘 다 그것에 큰 의미 부여하지 않았다.
“내가 확답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적어도 선인장은 아니라는 것 뿐이야. 널 만족시켜줄 수 있는 답은 전혀 아니지, 그치?”
“당연히 아니야.”
그렇게 말한 후, 소년은 여느 때와 다른 시선으로 턱을 괸 채 여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흥미롭게 보인 듯 했다. 레이디 아발론은 눈 앞의 남자를 따라 턱을 괴었다. 둘은 각도까지 똑같이 취했다. 하지만 소년의 포즈에 나른함이 있다면 여성의 포즈에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어라아. 이 레이디 아발론, 아무래도 궁정마술사로서 널 실망시켜버린 거려나? 그러면, 몽마의 삶에 대해서 불평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
“말해줘. 궁금해졌으니까.”
“도서관을 상상해 보겠니? 좀 큰 규모여야 해. 시립, 국립보다 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 거대한 걸로. 수십억 개의 책을 꽂을 수 있을 만큼.”
잠시 소년은 눈을 감았다. 여성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몇 번째인지 그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사실 세지 않았다. 특별한 것도 아니니까.
“그 다음에는?”
“내용물을 채워 넣어야지. 개중에는 유명한 것도 있겠지.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라던가, ‘돈 키호테’라던가, ‘길가메쉬 서사시’라던가. 요점은 모든 책의 표지를 똑같이 맞춰야 한다는 거야. 완벽히 똑같아야 한다? 재밌어 보이는 거에 책갈피 꽂지 말고.”
스스로 딱히 책갈피를 즐겨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착실히 요구사항을 반영해 머릿 속의 도서관의 이미지를 다듬었다. 완성된 이미지에는 어울리는 형용사가 몇 개 없었다. 순수하게 긍정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아예 없었다. 지나친 건 모자란 것보다 나쁘다더니, 지금의 이미지가 정확히 그랬다.
어쩐지 불평을 제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자기 상상에 먹히지 않는 법을 잘 알았다. 그는 정성껏 만든 이미지를 마음 한 켠에 사진마냥 남겨둔 채로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새하얀 원피스와(노출도를 감안하면 해당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진 의문이지만) 그만큼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꽃의 마술사가 입가 올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혀라도 내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더 신나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포기했다.
“내가 뭐하러 그러겠어. 이 많은 책을 그렇게 단장해서 뭘 하려고?”
“그 모든 책은 고유해. 서로 저마다 다른 줄거리와 매력, 주제로 차 있지. 그 중에는 분명 사흘 밤낮을 다 투자해도 질리지 않는 게 있을 거고, 반면 어쩐지 오래 읽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을 거야. 하지만 책의 내용은 책을 집어 읽기 전까진 알 수 없어.”
“그리고 작은 화분 안의 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그 꽃에 대해 알아봐야 하는 법이겠지⋯⋯.”
레이디 아발론의 눈매가 미려하게 휘었다. 기뻐하는 게 분명했다. 소년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어쩐지 잘 알 것 같았다. 지나칠 정도로 잘.
“사전을 들어야지. 엄청 예의주시해야 할 거야. 우리는 그 꽃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피는지 언제 피는지는 더더욱 모르니까. 우리가 아는 건 그 사전 안에 꽃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 것뿐이야. 하나 하나의 책을 전부 읽어 판단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책을 읽는 게 재미없어지는 거 아냐? 결국에는.”
소년은 - 사실 그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 이 꿈 속의 방문객 외엔 아무도 없었다 - 어릴 적부터 그녀를 꿈 속에서 만났고 오래도록 봐 왔다. 그 무엇보다 친숙하고 가깝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를 이해하되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반대로 공감하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앞쪽 케이스였다. 적어도 그 동기만큼은. 그런 설명을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는 것에 대해선 그 반대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길 따름이었다. 이 익숙한 경험이 얼마나 비일상적인 것인지도 포함해서.
“내게 할 일이 달리 있었다면 그럴 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우리 동생이 잘 아시다시피⋯⋯ 이 누나에게는 이제 남는 게 시간밖에 없어서 말이지. 다음 영원이 올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씩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걸 기록하는 것 정도밖에 없단다!”
하지만 정말로 신기한 것은, 그런 말을 그녀가 진심을 가득 담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구조가 신기했다. 그걸 닮고 싶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동경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그는 스스로 답을 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도서관에 정이라도 붙이게 된 거야? 내가 듣기로, 당신은 그 ‘도서관’에 자의로 발을 들인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영구히 머무르게 된 게 자의는 아니었을 거 아냐.”
“물론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정을 들였다기보다는⋯⋯. 뭐든 간에 하나의 작업에 푹 빠져있다 보면 통찰을 갖기 마련이란다. 너도 알게 될 거야.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게 에피파니의 고된 점이거든. 힘든 점이고.”
상대는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서큐버스 중 하나지만, 그가 스스로의 마음이 덜컹이는 걸 느낄 때는 오로지 지금처럼, 수려함과 우아함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는 수수께끼 같은 쓴웃음을 볼 때 뿐이었다. 그녀에게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을 테지만, 그는 그것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열심일 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일생일대의 수수께끼는 갖는 것 자체로 행운인 법이다. 일생을 같이 하는 파트너라면 말할 나위 없는 것이고. 그는 이제 그녀와 얼마나 알아왔는지도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꽤 어릴 적부터 안면을 텄다는 것 정도만 기억했다.
“당신에게도 통찰이 있었어?”
“있었다 마다. 이 누나는 똑똑하잖니? 꽤 일찍 알았지. 내 이야기는 여기 없다는 것⋯⋯. 나아가 내 일은 이야기로서 서가를 채우는 게 아니라, 혼자서 계속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거라는 것. 도서관이 문닫지 않길 바라는 것이, 결국은 내 몇 안 되는 진실된 희망사항 중 하나가 되었지.”
“그닥 기쁘게 들리진 않는데.”
레이디 아발론 - 분명 스스로도 멀린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멀린이라고 불리고 싶어하진 않는 여성 - 은 이내 평소대로의 웃음을 머금으며 아까의 것을 감추었다. 그는 아쉬워했지만, 동시에 다시 보고 싶진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녀에겐 언제나처럼 제 멋대로, 내키는 대로 하는 게 어울린다. 번민하는 것은 삶을 직접 살아가는 사람의 몫으로 충분했다.
뭣보다 그런 웃음을 보고 있자면⋯⋯ 자기도 모르게, 그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레이디 아발론이 그가 바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평소대로 있길 바랐다. 이제 와 그런 것에 의미가 있을 리 없으니까.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어야 했다. 그에겐 그 편이 더 나았다. 그녀도 그걸 알기 때문에 질리지도 않고 와 주는 것일 테고.
“후후, 글쎄. 언제나 그렇듯 노 코멘트야. 다만⋯⋯.”
“다만?”
“가끔은 하나 있단 말이지? 정말로 재미있는 책. 하나쯤 발견하면, 70억 개 정도는 재미없어도 흘려보낼 정도론 익숙해졌어.”
그는 잠시 대화를 잇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꿈 속에서는 하늘이 보일 리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도서관의 천장 뿐이었다. 이 도서관은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띄었다. 그곳은 이번 영원이 다할 때까지 그녀를 가둘 장소였다. 그녀가 이번 영원이 다할 때까지 나가지 않기로 맹세한 장소이기도 했다.
강제로 갇혔다면 구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결정했다. 그에겐 그녀를 꺼낸다는 선택지는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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